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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1 <예썰의 전당> [10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계” – 사계. 2022년 7월 10일 방송 다시보기
✵ ‘예썰의 전당’ 열 번째 주제는, 사계절을 담아낸 예술 작품들.
오이, 포도, 레몬 등 각 계절에 걸맞은 식물들을 조합해 독특한 인물화를 그린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1527~1593)의 〈사계(四季)〉 연작부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클래식’으로 알려진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의 〈사계〉까지! 계절과 날씨를 표현한 예술 작품들 안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녹아있다. 사계절을 담아낸 작품들 속에는 과연 어떤 ‘예썰’이 숨어있을까.
✵ 예썰 하나, 황제를 웃게 한 〈사계〉의 비밀? 궁중화가 아르침볼도의 묘수
1573년, 신성 로마 제국의 궁중화가였던 아르침볼도는 황제 막시밀리안 2세를 위해 기상천외한 〈사계〉 연작을 그려냈다.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계〉 연작은 계절에 맞는 식물들을 조합해 황제를 표현한 독특한 인물화였다. 당시 신하들은 작품의 기괴한 모습에 깜짝 놀라 호통을 쳤다고 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림을 본 막시밀리안 2세는 흡족함을 감추지 못했다는데?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1527~1593)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화가.
밀라노에서 비아지오라는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아지오는 밀라노 대성당의 내부 장식을 수주할 정도로 유명했었고 주세페는 그런 아버지의 밑에서 조수로 일했다.
1562년 합스부르크 왕조(Haus Habsburg) 시절 보헤미아 왕국(Regnum Bohemiae)에서 왕실 화가로 중용했다.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의 침략으로 인해 헝가리를 빼앗기게 되자 왕의 권위가 떨어졌는데, 막시밀리안 2세(Maximilian II)가 떨어진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했다.
막시밀리안 2세(Maximilian II)
당연히 기괴한 모습을 본 신하들은 크게 놀랐으나, 막시밀리안 2세는 오히려 궁정이 떠나갈 정도로 폭소를 했다. 그리고 궁정 연회에서 초상화처럼 꾸미고 나왔다고 한다. 링크 이 부분은 2015년 7월 5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Surprise Secret에서 다뤘다.
그 후 주세페는 루돌프 2세(Rudolf II) 황제 시기까지 일했다. 그가 그린 루돌프 2세의 초상화 중 과일과 채소로 꾸민 초상화가 잘 알려져있다. 이 초상화는 루돌프 2세를 로마 시대 계절의 신 베르툼누스처럼 그린 것이라고 한다. 채소기르는 사람과 요리사처럼 위아래를 뒤집으면 새로운 의미가 나타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초상화가 모두 동식물 등 자연으로 이루어져 착시가 일어나게 하는 걸로 유명하다. 이런 부분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스케치 노트를 보고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 초현실주의가 등장하면서 그의 그림이 새롭게 조명되었고, 피카소, 달리, 뒤샹, 마그리트 같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중그림(게슈탈트(Gestalt) 전환)의 대표적인 화가로 평가받는다.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1527~1593)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신비로운 그림 앞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인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계절의 이치에 걸맞은 나무와 꽃과 열매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2세 황제이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처음엔 스위스 인근 지역의 소영주 집안이었으나 훗날 오스트리아로 거점을 넓히면서 지속적으로 정략결혼을 감행, 스페인 지역까지 통치하는 명실공히 유럽 최강의 가문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 왕가는 세력 확장과 유지에 너무나 골몰한 나머지 근친혼도 마다하지 않아 선천적인 기형이나 단명하는 후손도 많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 가문의 출신으로 흔히 카를로스(Carlos) 대제라고 불리는 카를 5세(Karl V, 1500-1558)가 있다.
카를 5세(Karl V, 1500-1558)
막시밀리안 2세(Maximilian II)는 그다지 출중한 왕은 아니어서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해 꽤나 안팎으로 시달렸던 모양이다. 늘 술에 취해 하는 일마다 실수투성이로 살았던 그는 하마터면 역사에 묻힐 그저 그렇고 그런 존재에 불과했지만,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7~1593)의 이 기발한 그림 덕분에 후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여전히 받고 있다.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루돌프 2세도 아르침볼도를 궁정화가로 연임시켜 자신의 초상화 역시 이런 식으로 제작하도록 지시했다.
그림을 퍼즐처럼 조각내어도 하나하나가 완벽한 정물화가 될 정도로 화가의 뛰어난 기교가 놀랍다. 대체로 알프스 남쪽 화가들보다는 북쪽 지역 화가들이 이와 같은 세밀한 정물화에 능통했다.
아르침볼도는 밀라노 태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림을 입히는 일을 했다. 알프스 남쪽에 속하면서도 정교함을 보여주는 그의 붓질은 아마도 그 일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여름〉의 목 칼라 부분에는 자신의 이름 ‘GIUSEPPE ARCIMBOLDO’를 새겨 넣었고, 어깨 부분에는 작품의 제작 연도를 감쪽같이 그려 넣었다.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1527~1593), ‘사계’ 연작(봄, 여름 가을 겨울), 1573년, 캔버스에 유채, 각 76×63.5cm, 루브르박물관 소장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1527~1593), ‘사계’ 연작(불, 공기, 물, 흙), 1573년, 캔버스에 유채,
각 76×63.5cm, 루브르박물관 소장
✵ 예썰 둘, 보육원의 ‘빨간 머리 사제’ 비발디, 베네치아의 사계를 음표로 그려 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클래식’으로 불리는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의 〈사계〉는 늘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 명곡은 TV 프로그램, 핸드폰 벨 소리 등 곳곳에서 쓰이며 사랑받아온 작품이다. 그런데, 이 명곡을 탄생시킨 비발디의 원래 직업은 작곡가가 아닌 사제(司祭)였다는데. ‘빨간 머리 사제’라 불렸던 비발디는, 보육원에서 일하며 〈사계〉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친숙한 선율에 감춰진 〈사계〉의 탄생 배경부터, 〈사계〉를 120% 즐길 수 있는 꿀팁까지! 비발디가 〈사계〉로 그려 낸 베네치아(Venice)의 계절을 들여다본다.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는 후기 바로크 시대 기악음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성직자,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가이다.
‘붉은 머리의 사제’(司祭, il Prete Rosso)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음악가로서 대중화를 시도한 인물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4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된 《사계》의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다. 붉은 머리라서 평생 붉은 머리의 신부라는 조롱과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또한 체력이 좋지 않았던 그는 미사보다는 작곡이나 성가대 업무를 주로 보았다.
베네치아(Venice) 산 마르코 대성당(Basilica San Marco)의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조반니 바티스타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에게 음악의 기초를 배웠다. 이후 레그렌치에게 작곡을 배웠다. 15세 신학교에 가 23살에 서품을 받았으나, 본디 몸이 약하여 숨이 차서 미사를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음악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그는 머리가 붉은 색이라 평생 '빨강 머리의 신부'라는 놀림을 받았다. 비발디는 1703년부터 1740년에 걸쳐 대체로 베네치아의 여자 고아원 겸 음악학교이던 피에타 고아원에 근무했으며 1716년에는 피에타 고아원 밴드부의 합주장(合奏長)이 되었다. 이 학원의 학생들의 오케스트라는 당시 유럽에서도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비발디는 음악을 마음껏 해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발디는 그 동안에도 자작한 오페라를 상연하기 위하여 이탈리아 각지를 순회하기도 하고 빈이나 암스테르담으로 가기도 하였다.
1741년에 빈으로 간 비발디는 빈궁 속에 객사(客死)하여 그 곳 빈민묘지에 안치되었다. 이 때의 빈 방문 목적은 명확하지는 않으나 황제 카를 6세의 후원을 받으러 간 것으로 추측된다. 비발디의 이름은 그 후 잊혀져 있었으나 대 바흐가 편곡한 작품이 계기가 되어 그 전모가 밝혀졌다.
◎ 헤어진 다음 날 - 이현우 (1998, 가사포함)
◎ 헤어진 다음 날(가사) - 이현우
그대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아무렇지도 않았나요
혹시 후회하고 있진 않나요
다른 만남을 준비하나요
사랑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닌가봐요
그대 떠난 오늘 하루가 견딜수 없이 길어요
어제 아침에 이렇지 않았어요
아무렇지도 않았나요
오늘 아침에 눈을 떠보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어요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가져갈수 없나요
그대 떠난 오늘 하루가 견딜수 없이 길어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올수는 없나요
(후렴)날 사랑 날 사랑 했나요 그것만이라도 말해줘요
날 떠나가나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비발디의 사계중
겨울(제2악장)의 테마를 샘플링한
바이올린 선율이 아름다운곡입니다.
그의 작품은 오페라와 여러 곡의 교회 음악과 기악곡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바이올린을 주로 한 협주곡이 유명하며, 그 때까지의 악곡에 비하여 리듬이 활발하고 노래하듯 아름다운 선율이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독일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바흐는 그의 작품을 건반악기 연주용으로 편곡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신포니아 23곡, 합주 협주곡 <조화의 영감>,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사계> 등이 있다. 특히 <사계>는 표제 음악의 표본으로 불린다. 그는 약 500곡이나 되는 기악작품, 약 40곡의 오페라 외에 모테토,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을 작곡했다.
사계(The Four Seasons, 四季): 안토니오 비발디의 바이올린과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독주협주곡 작품 8. 1~4곡으로 각기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각 곡이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전체 12곡이다.
각 곡에는 해당하는 계절과 연관된 여러 가지 소리와 사건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봄〉에는 새소리, 〈여름〉에는 산들바람 등이 묘사되어 있다. 〈사계〉의 이러한 음악 외적 묘사의 시도는 악장마다 맨 앞에 서두로 적혀 있는 소네트 시의 이미지와 생각들로도 나타나 있고, 비발디는 자신의 의도를 좀더 명확히 하기 위해 악보의 적당한 악구에 시구절을 적어놓거나 심지어 '잠자는 염소치기', '짖는 개'와 같이 묘사어들을 덧붙이기도 했다. 바로크 시대 표제음악의 좋은 예이다.
✵ 예썰 셋, 템스강이 꽁꽁 얼어붙은 이유는? 화폭에 담긴 계절의 변화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예술가들은 작품에 계절을 담아왔다.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1525-1569)의 〈눈 속의 사냥꾼〉, 아브라함 혼디우스(Abraham Hondius)의 〈얼어붙은 템스강〉 등 16-17세기의 미술 작품들에도 독특한 겨울의 풍경이 들어있다고 한다. 이 작품들 속에는 사람 키의 약 두 배 높이로 얼어붙은 템스강, 탁자를 땔감으로 태우는 사람들의 모습 등이 등장한다는데. 혹독한 추위는 과연 16-17세기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던 걸까. 예술 작품들이 담아낸 당시의 계절, 그리고 날씨에 따라 변화했던 삶의 모습을 살펴본다.
〈눈 속의 사냥꾼〉
〈아이들의 놀이〉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
〈추수하는 사람들〉
〈농부의 결혼식〉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1525-1569)의 〈사계〉연작, 〈눈 속의 사냥꾼〉, 〈아이들의 놀이〉,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 〈추수하는 사람들〉, 〈농부의 결혼식〉등이 빈 미술사 박물관에 소장 되어있다.
농민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1525-1569)은 네덜란드의 북유럽 대표적인 화가이자 판화가로 농민의 일상을 담은 풍속화를 주로 그렸으며 지역적 특색이 담긴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이룩했다.
브뤼헐은 1525년경 지금의 독일 지역인 브라반트 북부의 브레다 근처 브뤼헐에서 태어났다. 생년에 대해서는 1527년경, 혹은 1530년이라는 설도 있으며, 출생지 역시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성 브뤼헐은 출생한 곳의 지명을 딴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하던 화가 피터르 쿠케 판 알스트에게 그림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1551년, 안트베르펜의 화가 길드에 장인으로 등록한 그는 이듬해 남유럽과 알프스로 여행을 떠났다. 16세기 중반에는 젊은 화가가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고대 및 르네상스 미술의 메카로 유럽 각지에서 젊은 화가들이 몰려들었고, 대규모 공방에서는 외국 화가들을 고용하곤 했다. 브뤼헐은 여행 동안 알프스와 나폴리의 광활한 풍경에 매료되었고, 수많은 드로잉을 그렸다. 그는 또한 줄리오 클로비오라는 세밀화가의 공방에서 일했는데, 광활하고 깊이감 있는 자연 풍경 묘사 기법과 정밀한 세부 묘사 양식은 이 시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1553년, 브뤼헐은 고향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출판업자 히에로니무스 코크와 함께 일했다. 이 시기 브뤼헐은 플랑드르 지방에서 인기가 높던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환상적인 그림을 흉내낸 판화 도안을 많이 그렸다. 군소 미술가들이 보스의 작풍을 그대로 모방했다면,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구도를 취하고 거기에 보스적인 색채를 추가했다. 〈7가지 원죄〉, 〈탐욕의 우의〉와 같은 우의(allegory) 연작 등이 이에 속하며, 코크에 의해 〈죽음의 승리〉, 〈미치광이 그리트〉 등은 보스의 작품으로 팔려 나갈 뻔했다.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Pieter Brueghel de Oude', 1559년
브뤼헐은 보스의 작풍을 다양한 구도로 그리는 실험을 하는 한편, 1556년 무렵부터 풍자적이고 교훈적인 주제를 다룬 풍속화에 몰두했다. 그는 특히 플랑드르 지역의 속담에서 착안한 주제와 농부들, 축제 등 일상의 모습을 유쾌하게 그려 냈다. 〈농부의 결혼식〉, 〈플랑드르 지방 속담〉,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Pieter Brueghel de Oude, 1559)〉, 〈아이들의 놀이〉와 같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못 진지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익살스러운 몸짓과 표정을 하고 있어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한다. 브뤼헐의 세심한 관찰력과 유쾌한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1563년 봄, 브뤼헐은 스승 쿠케의 딸 마이켄과 결혼하여 브뤼셀에 정착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피터르와 작은아들 얀 모두 화가가 되었다. 피터르는 아버지의 작풍을 답습했으나 얀은 뛰어난 재능으로 명망을 떨쳤고, 손자들 역시 존경받는 화가가 되었다.
브뤼헐은 브뤼셀에 정착한 후 매우 다양한 방식의 그림을 그렸다. 보스의 작풍을 활용하기도 하고, 코크와 함께 판화 작업도 계속했다. 또한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 〈성모의 죽음〉, 〈동방박사의 경배〉 등 종교화도 그렸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이 된 〈눈 속의 사냥꾼〉, 〈추수하는 사람들〉 등 변화하는 자연 풍경 속에 플랑드르 지역의 풍속과 일상을 담은 〈사계〉 연작이 탄생했다.
〈사계〉 연작은 브뤼헐의 대표적 풍경화로, 후에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화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네덜란드의 풍경화 전통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작품이다. 당시 북유럽에서 풍경화는 달력용 그림 정도로 취급받았으며 독립된 장르가 아니었다. 〈사계〉 연작 역시 독립된 회화가 아니라 안트베르펜의 은행가가 주문한 달력 그림 중 하나였다. 광대한 자연 속에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브뤼헐의 풍경화들은 사실적이면서도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며, 대자연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고 나약한지 일깨운다.
말년이 되면서 브뤼헐은 다시 풍속화로 회귀하여 농부와 축제라는 소재를 즐겨 그렸다. 〈농부들의 춤〉, 〈농부의 결혼식〉, 〈농민의 축제 장터〉 등이 그런 작품이다. 민초들을 다룬 풍속화에서 그는 늘 따듯하고 정감 어린 시선을 유지했으나, 그런 한편 〈맹인의 우화〉, 〈염세주의자〉 등에서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이는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정치적 혼란에 빠진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에 따른 스페인의 정치적 억압과 종교적 박해를 지켜보면서 점점 더 비관적이 된 듯하다. 그러나 그는 드러내 놓고 반스페인적 혹은 반가톨릭적인 요소를 담은 작품을 그리지 않았고,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보편적인 우의를 표현했다.
피터르 브뤼헐 <눈 속의 사냥꾼>, 1565년, 117cm*162cm, 빈 예술사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일상의 기쁨 피터르 브뤼헐 <'눈 속의 사냥꾼'>은 수없이 언급됐지만, 또 불러내고 싶은 그림이 있다. 겨울 그림 중 왕이라 할 만하다. 브뤼헐은 앤트워프의 한 은행가로부터 여섯 점의 계절 그림을 주문받았다. 계절 그림은 중세 기도서에 들어 있던 월별 그림에서 유래한 것이다. 기도서에는 밭 갈기, 씨뿌리기, 포도 수확 등 농경 사회에서 월별로 해야 할 일을 묘사한 삽화가 들어 있었다. 브뤼헐은 한 해를 길이가 각각 다른 여섯 개의 시기, 즉 초봄, 봄, 초여름, 늦여름, 가을, 겨울로 구분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봄에 해당하는 작품은 사라졌고 나머지 다섯 점은 세계 유명 미술관으로 흩어졌다. 빈 예술사박물관이 소장한 이 겨울 그림은 가장 유명하고 또 사랑받는 작품이다.
언덕 아래 들판이 펼쳐져 있다. 눈앞에는 사냥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다. 땅을 내려다보면서 걷는 사냥꾼가 풀 죽은 개들로 보건대 수확이 변변치 않은 것 같다. 앞선 사냥꾼의 등에 죽은 여우가 한 마리 매달려 있다. 언덕 아래에는 마을과 얼어붙은 평야가 펼쳐지고, 험준한 산봉우리가 이 정경을 에워싸고 있다. 잎이 떨어진 키 큰 나무들이 근경과 원경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방금 가지에서 날아오른 새가 공간감을 확대한다. 흰색과 청록색 갈색의 대비가 차갑고 깨끗하다. 그림은 브뤼헐 시대의 플랑드르 가옥 형태와 놀이 풍속을 세세하게 보여 주지만 이런 장소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화가는 플랑드르 지방에 흔한 평지와 알프스 산악 지대의 삐죽삐죽한 산을 합쳐 배경을 구성했다.
앙상한 나무, 꽝꽝 얼어붙은 물레방아,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터벅터벅 걷는 사냥꾼 일행은 쓸쓸하고 우울하다. 하지만 아기자기한 세부가 온기와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왼쪽 여관 앞에는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솥을 거느라 부산하다. 돼지를 잡고 털을 그슬릴 준비를 하는 성싶다. 얼음판에는 썰매를 타고 팽이를 돌리는 아이들, 스케이트를 지치는 남녀, 컬링과 하키를 하는 무리가 보인다. 다리에는 땔감을 머리에 인 아낙네, 길에는 짐을 잔뜩 실은 수레가 지나간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꼬물꼬물 움직이는 사람들의 즐거운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아브라함 혼디우스(Abraham Hondius), 〈얼어붙은 런던의 템스강(The Frozen Thames)〉, 1677년
아브라함 혼디우스(Abraham Hondius)의 〈얼어붙은 런던의 템스강(The Frozen Thames)〉, 1677년은 작은 기후 변화는 지역적으로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는 소빙기 시대에 일어났다. 17세기를 전후해 300년 가량 이어진 '소빙하기'. 북반구 평균기온이 지금보다 1도 정도나 낮았고, '여름이 없는 해'가 기록되기도 했다.
1677년 아브라함 혼디우스가 그린 '얼어붙은 템스강’이란 작품을 보면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음침한 날씨 속에 사람과 동물이 사람 키를 훨씬 넘는 커다란 얼음덩이를 오르려는 모습을 그렸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런던 템스강 위에서 축제가 열렸다. 코끼리가 강을 가로질러 건너는 곡예가 펼쳐질 정도로 얼음이 두껍게 얼었다. 소빙하기의 원인이 신대륙 발견일지 모른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피에르 앙리 드 발랑시엔,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 폭발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이후 원주민들이 대거 죽는다. 100년 만에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사라진다. 이로 인해 버려진 거주지와 농지가 나무와 식물들로 뒤덮였다. 식물의 왕성한 활동으로 공기중의 이산화 탄소 농도가 떨어졌고, 결국 소빙하기가 찾아 왔다. 영국 런던 대학 과학자들의 내린 결론이다.
논문의 저자인 알렉산더 코흐 박사와 그의 동료들은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이 대거 사망한 뒤 버려진 농경지에 식물이 자라면서 이산화탄소 소비가 증가했고, 이로 인해 지구 기온이 변화했다"라고 말했다.
15세기 말에 세계 전체 인구의 약 10%인 6000만 명이 신대륙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100년 만에 500만~6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UCL그룹이 추정했다.
과학자들은 또 원주민들이 얼마나 많은 토지를 경작했는지, 또 이 땅이 숲으로 변하면 어떤 변화가 있는지에 대해 계산했다. 계산결과 숲으로 변한 경작지는 5600만 헥타로 현재 프랑스만한 크기에 달했다. 이 큰 경작지가 숲으로 변하면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7~10ppm(100만 분의 1)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공동 저자인 마크 매슬린 교수는 "우리는 현재 화석 연료를 태워서 약 3ppm의 이산화탄소를 만들고 있다. 이를 비교하면 당시 얼마나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가 공기 중에서 줄어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인구의 대량 감소로 인한 공기 중 이산화탄소 감소로 인한 지구 냉각 효과가 자연적인 영향의 두 배나 큰 효과를 나타냈다"라고 말했다.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에드 호킨스 영국 레딩대 기후학 교수는 "소 빙하기의 원인으로는 그 동안 대기 중 이산화탄소 감소, 일련의 큰 화산 폭발, 토지 이용의 변화, 일시적인 태양 활동 감소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거론됐다"면서 "이 연구는 산업혁명 훨씬 이전에 유럽인의 아메리카 신대륙 정착과 이로 인한 원주민 인구의 붕괴라는 인간의 활동이 기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피에르 앙리 드 발랑시엔,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 폭발, 1813년, 캔버스에 유채. 플리니우스의 죽음을 예고한 폼페이의 파괴에 대한 이 기발한 묘사는 베수비오 산의 분화 날짜를 따서 명명되었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 [10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계” – 사계, 루브르 박물관에서 꼭 봐야 할 그림(김영숙 휴머니스트), 발길따라 그림따라(이미혜 미술 평론가)Daum·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