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서부 영화에 보면 가슴에 보안관 배지를 달고 혼자서 말을 타고 현상범을 좇으며 총을 잘 쏘는 보안관이 있다. 어느 도시를 지키는 보안관도 있지만, 이 보안관은 법원의 명령을 직접 받아 현상범을 잡으러 어디든지 가 악당들을 물리치는 정의로운 주인공으로 나타난다.
1대 몇으로라도 재빠르게 허리춤의 총을 뽑아 순식간에 악당들을 죽이고, 아직 남아 있는 화약 연기를 입으로 불며 한 손가락으로 총을 여러 바퀴 돌리다가 보지도 않고 총집에 넣는 모습은 남자들이 보기에도 멋있는 모습으로 나이든 사람들은 한번씩 흉내를 내 보지 않은 남자들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의롭지만 외롭다. 혼자 다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L.A에서 40분 정도 남쪽에 위치한 오렌지 카운티의 한 교회에서 집회를 마치고 기도하는 중에 조용히 다가와 기도를 부탁하는 한 40대 후반의 목사님을 기도하였을 때, 이 외로운 보안관이 보이면서 갑자기 밤에 고개를 하늘로 향해 치켜 들고 ‘우—“하며 소리치는 늑대의 모습이 보였다. 이 목사님의 모습이 보안관이면서, 한편으로는 늑대인 것이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지만, 아직 육체적 본성을 제어하지 못해서 힘들어 하는 것같아요”라고 하였더니, 자기가 L.A에서도 교회를 여러 차례 개척하고 지금은 여기서 교회를 하고 있는데 교인들이 거의 없고, 지난 20년간 15번이나 교회를 시작하였다가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15번 정도는 아니더라도 몇 번씩 교회를 시작했다가 문을 닫았다가 한 경험을 가진 목회자들이 부지기수이다. 지금은 더하겠지만, 20년 전에 풀러신학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할 때만 해도, L.A 지역의 목사 중 풀타임은 1/3이고, 파트타임(이중 직업)이 1/3, 나머지 1/3은 목회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였다.
풀타임과 파트타임이라고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이 개척교회이고, 작은 교회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역을 하려고 해도 부르는 데가 없어 사역을 하지 못하고 있는 목사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나라의 사명을 위해 택하심을 받았다면, 다 훌륭히 쓰임을 받아야 할텐데, 왜 그러지 못할까? 사역지가 없어서 그런가? 주님은 오히려 추수할 곳은 많되 추수할 사람은 적다고 하시지 않으셨는가?
지금의 목사는 성경적으로 구약에서는 제사장 역할이다.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그들을 위하여 제사를 거행하는 하나님과 백성의 중재자이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다같이 제사장 백성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제사장 언약의 앞장을 서고 지도자로서 거룩한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책임을 가졌다.
레위기 1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그리고 목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종이다. 종은 주인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전적으로 주인의 소유이다. 그러면 왜 오늘날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향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쓰지도 않으실까? 그리고 교회를 개척하면 주의 일이니 잘되어야 할텐데, 잘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왜 얼마 못가서 문을 닫을까? 그리고 발버둥을 치며 기도하고 해도 그토록 가난하고 힘들까?
자격미달이라서 그런가? 수가 너무 많아서 그런가?
그것은 처음부터도 그러했고, 특별히 지금 온 세상이 죄악으로 관영하고 세속화된 시대에,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도록 자신을 구별시키고 정결한 자가 드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정결하고 거룩한 자들을 쓰신다. 이를 위해 준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학교는 많고 목사들은 많아도 진정으로 자신을 구별시켜 하나님이 쓰시도록 준비되는 자가 적기 때문이다.
디모데후서 2:20-21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20년 동안 15번이나 교회를 시작했다가 그만 두고 하면서 외로운 보안관과 같이 정의를 지키고 사명을 감당하고저 한 목사님을 기도하였을 때, 왜 늑대의 모습이 보였을까?
낮과 밤이 다르기 때문이다. 주님을 위해 살려고 힘쓰고 정결하고 거룩해야됨을 앎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부흥이 안되고, 찾아오는 교인도 없고 하여 심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힘드니 그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오히려 거룩과의 반대방향으로 채우기 때문인 경우인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자기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술이나 담배나, 마약이나 놀음, 그리고 여자를 사는 것으로 그 공백을 메꾸듯이, 목사이지만 다른 사람이 모르는 정결함이나 거룩함과 반대되는 것으로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경우에 포르노일 수 있다.
대놓고 바람을 피우거나 술집에 갈 수는 없지만, 가장 손쉽게 그리고 다른 사람이 모르게 은밀하게 기대는 것이 정결함과 거룩함을 추구해야 할 제사장, 목사에게 그것의 반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비극이다.
그것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육체적 본성이요, 그것을 발목 잡아 마귀는 “너는 자격이 없어”라고 비방하고, 하나님은 깨끗하지 못하니까 쓰시지 않으시는 전철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되풀이 될 수도 있는 현실인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아들의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고백을 가장 좋아한다는 미국 목사들의 25%가 포르노 중독이요, 다음 25%가 종종, 다음 25%는 가끔씩이라고 설문에 응답했다면, 답을 표하지 않은 나머지를 감안하면 90% 정도가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는 현실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인터넷이 발달하고 국민 1인당 포르노 매출이 1위라는 한국의 경우는 더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영적으로 거룩하고 천사도 흠모할만한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나고 변화되어 정결하고 거룩한 주의 성품을 입기 전에, 자신에 대해 철저히 죽어지지 못한 자아와 육신의 소욕을 따라 힘들 때마다 오히려 거룩과 반대되는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볼 수 있다.
셋째 하늘을 경험했던 바울사도 조차도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한다고 고백하였으며(롬 7:19),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에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절규하였다면, 그렇지 못한 대부분에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다. 광야를 벗어나기 위해서 한번은 자아(혼)의 죽음이라는 요단강을 건너야 한다.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갈 5:24).
매일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아나야 한다(벧전 2:24).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시도록 해야만 한다(롬 8:2).
내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롬 12: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었기에 사단에게 고소를 당했다. 여호와께서 천사들에게 명하여 그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깨끗한 옷을 입혀 주시고 정한 관을 씌워 주셨다(슥 3:4-5). 그리고 그에게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슥 3:7) 약속하셨다.
스가랴서 전체는 마지막 때의 제사장 사명을 가리킨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나와 함께 서리라”(슥 14:5).
그렇다면 문제는 사역지가 없다든지, 목사가 너무 많다거나 이전보다 전도가 안된다하는 상황이 아니다. 주님이 부르셨다면, 주님이 보내시고, 주님이 사용하신다.
이미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 부르신 이의 마음에 들고 그를 기쁘시게 함으로 쓰임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부르신 이를 쓰신다고 약속하셨다. 부르신 이를 통해 그의 뜻을 이루실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그러하다면 시간이 다 가고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제대로 쓰임 받지도 못하고 늙어 후회하기 전에 지금의 의를 행하기 원하면서도 육신이 약해 악을 행하는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
아직 좌절하거나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히 12:4).죽도록 충성하라(계 2:10) 하였고, 주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8)고 했는데, 아직 죽기까지는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거듭나야 한다(롬 8:2).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을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할 수 있게 하도록(슥 4:6), 이제 주님께 자신을 맡겨야 한다. 그래야만 의의 병기로 쓰임 받게 될 것이다.
로마서 6: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나아가서 불세례를 받아 정결케 되고(마 3:11-12), 하나님의 영광이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움(사 35:2)이라는 것을 체험해야만, 의로운 일을 하길 원하면서도 힘들어 울부짖는 늑대의 울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의로운 보안관(제사장)으로,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킹덤 빌더즈 전두승 목사
L.A 글로리 교회
하나님의 리콜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