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천재 '율곡(栗谷) 이이(李珥)'
1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 1.1 조선 최고의 천재 1.2 붕당 정치에 휘말리다 1.3 십만양병설에 대한 논란 1.4 성리학의 완성 1.5 트리비아 2 춘추말기의 사상가로 전해지는 노자의 본명 3 오나라의 무장으로 삼국지의 등장인물 4 Drakedog의 길드 'EE(Evil Empire)'의 구호 5 井伊, 일본의 성씨
1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 ¶
李珥 호는 율곡(栗谷) 외쳐EE!! 1536~1584.
오만원권 지폐의 주인공으로 현모양처로 유명한 신사임당의 아들이며, 그 자신이 십만양병설 주장한 걸로 유명한 양반. 본명은 이이(李珥) 호는 율곡(栗谷). 오천원권 지폐의 모델. 신사임당의 초상이 오만원권 지폐의 도안에 쓰이면서, 이 모자는 한국 최초의 모자 지폐 인물이 되었다.
오랬동안 유학자의 면모만 부각되어 왔지만 사실 조선시대 최고의 경세가라 할 수 있는 유능한 정치가였다. 생전에 그의 정책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사후 조선에서 거론된 수많은 정책과 개혁론은 그의 사상과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1.1 조선 최고의 천재 ¶
과거에서 장원만 9번을 해서 당시에는 구도장원공이라고 불렸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과거는 생원과/진사과(소과) 초시→생원과/진사과 복시→문과(대과) 초시→문과 복시→문과 전시의 5번을 거치게 되는데 율곡의 경우는 생원과와 진사과 모두 장원으로 통과, 문과 전 시험 장원으로 통과, 거기에 특별시험인 별시[1]에서도 장원, 진사과 초시에서도 장원을 한번 더 해서 총 9번의 장원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사시, 외시, 행시 고등고시의 1, 2, 3차 시험을 모두 수석으로 합격한 이상의 대업적이다.[2] 그런데 응시자인 양반들 입장에선 9번이나 열명단위로 뽑히는 커트라인이 올라간 셈이다. <del>양반들 다 죽게 생겼다 이놈아</del>
율곡이 장원을 한 시험과 시간은 다음과 같다. 생원과 초시 : 29세 생원과 복시 : 29세 진사과 초시 : 13세, 29세 진사과 복시 : 21세 (29세에도 응시했으나 장원은 못하고 합격) 대과 초시 : 29세 대과 복시 : 29세 대과 전시 : 29세 특별시 : 23세
책을 볼 때 무려 10줄을 한 번에 읽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 아명은 현룡, 혹은 '견룡. 어린시절 외가인 강릉에서 자라 강을 낀 산천을 보며 심신을 수양하였다고 한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사후, 절에서 머리 깎고 수양했던 적도 있다.[3] 그리고 이 부분은 그를 공격하는 이들에게 집중 타깃이 되었다.
화담 서경덕 등이 주창한 주기론[4]과 이황이 정립한 주리론을 조화시키려 시도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학들에 의해 크게 떠받들어졌으며 기호학파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든다. 그런데 그의 이론은 현대의 평범한 학생과 시민들에게는 대부분 무슨 소리인지 알기 힘들다. 덕분에 이황과 더불어 전국의 윤리를 택한 문과 고등학생들에게는 지탄의 대상(…). 1.2 붕당 정치에 휘말리다 ¶ 선조대에 시작된 붕당간의 싸움에서 그는 중립을 지키며[5] 양파의 화합을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극단적인 무리 가운데 끼이면 결국 중간층은 탄압을 받는 법. 당대 집권층인 동인은 이이를 맹렬히 규탄했고 이는 나중에 이이의 제자들이 성장해 서인의 주된 세력을 형성하면서 중립이었던 이이가 서인의 종주로 세워지는 아이러니를 만들기도 한다. 실제 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심의겸의 파벌을 서인이라 부르다가 어느새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을 서인이라 부른다고 나온다. 사실 심의겸은 학파를 형성하지 못했고, 이이가 보호를 해주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주도하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애초에 심의겸은 김효원에 대립되어서 동서분당의 원인으로 언급될 뿐 주도적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다. 이건 김효원 역시 마찬가지이다.
또한 서경덕, 이황, 조식 등 높은 학문적 성과를 이룬 거유들의 제자인 신진 사림인 동인들에게는 독학으로 일가를 이룬 이이가 배척의 대상인 반면 훈구들의 우호적인 기존 사림들에게는 이에 맞설만한 사상체계를 이룩한 거유가 없었던 서인들은 환호하며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였다.
사실 구도장원공의 문재 등 이이는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다. 29세로 한참 명성을 날리던 이이가 장원 자리 노리고 과거 판에 뛰어드는 것은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단적으로 이이는 진사과 초시와 복시에만 2번이나 응시했다.), 이이의 성격은 "교만하고 일처리를 멋대로 한다"라는 삼사의 탄핵사유를 만들어낸다. 그뿐만 아니라 이이는 실록을 보면 어전에서 이황이나 서경덕의 학문을 비판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서 그 제자들이 이이를 역공하기도 했다.
가령 이황의 제자였던 김성일과 동석한 어전에서 "이황의 학문은 다 좋은데 자풍이나 정신이 옛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고 발언했다가 김성일이 발끈해서 "이황의 학문은 하늘의 해와 같은데 어찌 언론이나 세간의 평판으로만 말할 수 있겟습니까?"라고 반박하기도 했고, 이황의 또다른 제자인 류성룡은 이이에 대해 "다 좋은데 뭐든지 따지고 고치려 드는 게 흠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서경덕의 학문을 비판했다가 그 제자이자 허균의 부친이기도 한 허엽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6] 특히 이이와 허엽은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는 사이였는데 향약의 시행을 두고 허엽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허엽은 이이를 가리켜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거의 혐오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으며 이이는 허엽을 평하여 "이론에 모순된 점이 많고 문의에 어둡다"고 비판했다. 또한 허엽의 아들인 허봉은 이이를 탄핵한 '계미삼찬'의 한 명이다. 1.3 십만양병설에 대한 논란 ¶
서인의 종주로 추대된 이후 임진왜란 종전과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서인이 정권을 얻은 뒤, 이이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다[7].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선조실록에는 없으나 선조수정실록에는 실린 십만양병설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선조실록에는 이이가 선조에게 여러가지 국방과 세제개혁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기록인 시무6조는 있으나 10만이라는 구체적 숫자의 언급은 전혀 없다. 십만양병설은 서인들이 이이를 신격화하기 위해 짜맞춘 기록일 가능성이 높아 여러모로 의심스럽다.
우선 이이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 올린 시무6조에는 양병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10만이라는 숫자는 나오지 않는다. 더구나 이이는 양병은 양민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면서 우선 양민부터 하고 나서 논의할 일입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건 당시의 수많은 유사한 의견들과 같다.
그럼 십만양병설은 이후에 주장했다면 시급하여 의견을 바꾸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십만양병설에 대한 주장은 1582년 선조수정실록에 등장한다. 여기서도 본문에는 없고 덧붙여진 기사로 10만을 양병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선조실록에는 없고, 서인 집권 이후인 선조 수정실록에만 존재하는 이 내용은 그 외에도 여러 글들에 등장한다. 문제는 이게 모두 이이의 제자인 서인들의 문집으로, 그나마도 양이 점점 불어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글은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이 1597년 편찬한 율곡행장이다.
'일찍이 경연에서 청하기를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 위급한 사태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장차 토봉와해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실록과 이후의 글들은 모두 이 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다음으로 성혼의 제자로 역시 서인이고 이이가 죽었을 때는 겨우 13살이었던 안방준이 '임진기사'에서 그 내용을 보강하고 있다. 그 내용은 역시 서인으로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율곡연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연에서 아뢰기를 "국세가 부진한 것이 극도에 달했으니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마땅히 토봉와해의 화가 있을 겁니다. 원컨대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을 비치하고, 세금을 덜어주고 재주 있는자를 훈련시켜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다가 변란이 있으면 도성을 파수하게 하여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게 하소서'
이 글들에서는 10만이라는 수 외에도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이라는 구체적 방법과 더해서 앞서 언급된 글의 10년이 되지 않아서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참고로 임진왜란이 1592년 4월에 일어났다는데, 송시열의 율곡연보에는 1582년 4월 조에, 선조수정실록은 <del>그 시기에는 율곡이 상소를 올린 기록 자체가 없으니 그나마 비슷한</del> 1582년 9월에 기사를 올리고 있는 것을 보면 무척이나 작위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김장생의 율곡행장에 영향을 받은 책은 역시 서인인 이정구의 율곡시장, 이항복의 율곡신도비명, 서인으로 역시 성혼의 문인이었던 어우당 유몽인이 1622년 편찬한 어우야담 등이다[8].
다만 실제로 류성룡이 한양에서 후퇴하며 '문성(文成, 이이)의 말이 과연 사실이었구나.' 식으로 후회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문성' 칭호는 인조가 내렸다. 임진왜란 때 류성룡이 이이를 문성이라고 부를수가 없는 것[9]있는데, 사실 '이문정은 참 성인이다'라는 이야기는 뛰어난 선견지명에 대한 당시의 관용구로 쓰였고, 실제로 율곡행장의 초판이나 율곡연보에도 이문정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문성으로 된 것은 개찬자의 과잉충성 아니면 무식탄로급.
그리고 그때 당시의 조선의 상황으로 볼때 10만 양병설은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200만 정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0만이나 되는 군사를 훈련하고 먹이는 비용은 상상도 못할 비용이라서 그 때당시 조선으로서는 안하는것이 상책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10만의 군대를 모았다 해도 백성들의 민심이 나라를 떠나버리기 때문에 의병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수도 있었다.
문제는 이이가 주장한 것이 십만양병설 하나가 아니라 십만 양병설은 그저 그가 주장한 경장의 일부였을 뿐이라는 것을 너무나 간과한 주장이다. 이이는 기본적으로 사회개혁을 주장한 경장론자였고 그의 경장에는 대동법의 전신인 수미법, 세제개혁 등 여러 개혁이 있었으며 10만 양병론으로 대표되는 것은 그 중 군제개혁방안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십만양병론 때문에 이이의 군제 개혁의 기반을 위한 양민정책이 묻혀 버린 성향까지 존재한다. 이이의 주장은 시종일관 양민 후에 양병이었다.
여하튼 학자적인 성취는 상당해 지금은 여러나라의 학자들에게 연구대상이며 조선의 엘리트층을 길러낸 밑거름이지만 당파싸움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그의 위치와 서인들의 신격화 흔적 등은 그의 가치를 깎아내고 있다. <del>예나 지금이나 광신적인 추종자들이 문제</del> 1.4 성리학의 완성 ¶
학자적인 성취는 이후 이황과 함께 조선의 사상을 크게 변화시킨다. 성리학을 주자가 집대성했다면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과 이이가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10]. 둘이 이기론을 만들었고 이후의 조선 모든 붕당은 이기론의 해석에 따라 갈렸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과거에서 성리학을 토대로 한 답변을 정답으로 쳤지만 양명학등 다른 학문도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다면 정답으로 친것에 반해 조선에서는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바탕으로 한 답이 아니라면 불온한 사상을 가진 자로 간주되었다. 이황과 이이는 조선의 학문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나 이후 붕당이 변질되면서 당파싸움이 격해지는 한계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은 이 둘이 바라지도 예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유학(新儒學)을 주창한 두웨이밍 교수는 한국의 1천원 지폐와 5천원 지폐를 가지고 다니며 유학자가 이런 대접을 받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링크 1.5 트리비아 ¶
세종대왕급 구축함 2번함은 그의 이름을 따왔다. 22사단은 원래 '뇌종부대' 였지만 이후 부대명을 변경하기로 하고 그 명칭을 공모했는데, 22가 <del>EE</del>'이이'로도 읽을수 있으니까 '율곡'으로 하자는 의견을 받아들여 '율곡부대'가 되었다. <del>하지만 현실은 부대마크 탓에 여전히 콘돔사단. OTL</del><del>특이한건 22사단 신교대 성당의 제례 앞에 있는 예수상마저 손가락 두개씩 펼쳐져 있다. 씨풋 외쳐EE!!</del>
여담으로, 민담중에는 퇴계 이황 선생과 율곡 이이의 밤일 비교를 해놓은 것이 있다. 어느날, 율곡 이이의 제자들이 스승의 밤일을 엿보는 일이 있었는데, 과연 대학자였다는 율곡 선생은 아주 점잖은 체위와 점잖은 빠르기로 조용히 일을 한회 치르고 바로 잠들었다 한다.
율곡의 제자들은 라이벌이었던 퇴계의 제자들을 만나서, "실로 우리 선생께서는 방사조차 거유 (젖 유乳가 아니다! 선비 유儒다!) 답게 하신다."고 자랑을 하였다. 그러자 화가 난 퇴계의 제자들은, "우리 선생께서 율곡에게 점잖음으로 처지실 리가 있겠느냐."며 자기네도 스승의 밤일을 훔쳐보기로 결의했다. 그러고는 즉각 계획을 실천했는데, 뜻밖에 퇴계는 매우 드문 체위로 격렬하게 몇번이고 일을 치렀다고 한다.[11] 제자들이 졌다는 부끄러움에, 다음날 스승에게 전말을 고하고 그 까닭을 따졌더니, 퇴계는 허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무릇 남녀의 정사란 천지간의 큰 화합과 같아, 비구름이 끼고 천둥이 몰아치듯 해야 한다. 율곡이 그 이치에 맞지 않게 일을 치르니, 필경 후사가 포도알처럼 많게 되지는 못하리라."
<del>유학자라면 폭풍꼐임!</del>[12]
...일단 이이와 이황은 한세대 정도 다른 시대의 인물이라는걸 감안하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는 힘들다. 아들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야사 속 이야기. 그러나 실제로 퇴계는 후손이 있어 퇴계의 종손이 그의 사상을 정리하고 세계에 전파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는 반면, 율곡은 아들을 낳지 못해 후손은 당대에서 끊어졌다.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어 앞날을 예측했다고 한다. 십만양병설이 대표적인 사례. 인터넷에서도 이이의 예언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떡밥으로 떠돌고 있다.
어느날 이이는 "오늘은 사람의 운이 불길하니, 집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말거라"라며 가족들과 하인에게 당부했다. 그리고 하인들은 모든 대문을 걸어잠군채 모든 이들이 외출을 삼가고 있었는데 옆집 아이가 몰래 이이의 집에 들어가 감서리를 하다 문여는 소리에 놀라 감나무에서 떨어져 죽었다. 아이의 부모는 슬펐지만 상대가 양반이자 대학자인지라 항의도 할 수 없었다. 이 일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에 잠긴 이이는 아들에게 석함을 건네며 "앞으로 내가 죽고, 7대손에게 위험이 미치면 이 함을 열어보아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훗날 그의 7대손이 죄를 지어 포도청에 끌려가게 되었는데 7대 조 할아버지의 유언이 생각나 유언대로 석함을 들고 나섰다고 한다. 원님은 석함에 대해 물었고 후손은 율곡선생의 유물이라고 말했다. 후손은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기를, 7대 후손인 제가 어려움에 처할 것이니 그 때 열어보라 유언하셨다 합니다."라고 말했다. 분명 대학자의 유언인 만큼 큰 뜻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원님은 가져올 것을 명했지만 후손은 비록 죄인인 처지지만 율곡선생의 유품인 만큼 직접가져가는 것이 옮다고 말했다. 원님은 수긍하며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함을 받아 들었다. 그 때 원님이 앉아있던 자리 위의 대들보가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원님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급하게 함을 열었고 함안의 문서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내가 너의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너도 나의 7대손을 살려주길 바란다."
율곡 이이는 옆집 아이의 죽음이 7대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을 미리 알고 그것을 예방 해 놓은 것이었다.<del>오오 율곡선생 오오</del>
물론 이 항목을 열심히 읽은 위키니트라면 뻥인걸 알 수 있다. 위에도 설명했듯이 이이는 직계 후손이 없다.
한편 정치에 있어서는 서인쪽이 압도적으로 앞서서 이이-김장생-송시열로 이어지는 서인 노론은 조선시대 후기 붕당 정치사를 주도하게 된다. 이걸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문묘에 배향된 18인을 의미하는 동국 18현이다. 동국 18현은 고려시대에 헌액된 최치원, 설총, 성리학을 전래한 안향(또는 안유)가 종사 되었고, 조선시대에 정몽주,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김인후, 이황, 이이, 성혼,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이 종사되었다. 이중에서 이이의 제자가 김장생과 조헌(덤으로 성혼의 제자이기도 하다), 김장생의 제자가 송시열과 송준길, 김장생의 아들이 김집이고, 김집의 제자가 박세채이다. 즉 이이의 후대로는 이이의 문열이 아니면 아무도 문묘 배향이 안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기대승, 서경덕, 이언적, 조식 등의 굵직한 인묻들의 명단은 하나도 없는 것을 봐도 그 위세를 알만하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 율곡 이이는 또 한 번 부상되는데, 바로 율곡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전면에 들고 나왔던 율곡사업 때문이었다. 이 시기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은 그야말로 이슈가 되어서 수많은 논문이 쏟아지고, 교과서[13]에도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결국 율곡사업은 율곡 비리사업이라고 불릴 정도로 비리의 온상으로 드러났고, 마침내 부정부패의 상징이 되었다. 이 때문에 덕수 이씨 문중은 비리 사업에 율곡 사업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조상 이름 더럽힌다고 항의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물론 비리사업으로 드러나기 전에는 그런 적 없었다.
민간설화 중에 젊은 시절의 이이가 금강산 구경을 갔다가 천년묵은 구미호에게 홀렸다 달아나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은 이들의 공통적인 소감이 "주변 충고 더럽게 안듣는 찌질이"다. 실제로 이야기를 읽어보면 말 안듣고 멋대로 굴어서 자기를 도와주는 신들을 여럿 피보게 만든다.
참고: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2 춘추말기의 사상가로 전해지는 노자의 본명 ¶ 사기에서는 초나라 출신으로, 주에서 도서관장을 역임한 경력이 있으며, 공자의 스승이었다고도 전한다. 실체는 불명.
3 오나라의 무장으로 삼국지의 등장인물 ¶ 李異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로 삼국지의 등장인물로 손환의 부하.
정사에서는 218년에 형주 공방전 때 여몽을 대신하여 육손이 도독이 되었을 때 그의 휘하에서 사정과 함께 3천명을 인솔해 수군을 이끌고 촉의 장수인 첨안, 진봉 등을 공격하여 진봉을 사로잡았다. 또한 방릉태수 등보, 남향태수 곽목 등을 격파한 후 자귀현의 호족인 문포와 등개 등을 격파하였다. 221년에 이릉대전 때 무현에 주둔했다가 풍습의 공격에 격파당했다.
삼국지연의에서도 이릉대전에서 사정과 함께 등장하지만 사정이 장포와의 대결에서 달아나는 것을 보고 금칠을 한 도끼를 들면서 나갔다가 장포와 싸우지만 20여합을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았으며, 담웅이 이이를 도와주기 위해 장포의 말을 쏘아 말에서 떨어지자 달려가서 장포를 죽이려 했지만 관흥(관우의 아들)에게 당했다.
삼국전투기에서는 1번 항목의 이이로 등장. 4 Drakedog의 길드 'EE(Evil Empire)'의 구호 ¶ 일을 저지른 후 EE! 라고 외친다. 마치 소설에 나오는 도둑들이 물건을 훔쳐가고 그곳에 자신의 표식을 남기는 행위와 일맥상통며, EE길드원이 존재하는 곳에는 항상 존재할 것이다.
위의 이이 때문에 율곡EE! 라고 변형되기도 한다.
참고로 율곡 이이의 아명 중 하나는 견룡. <del>예아!! EE!!</del>
하지만 위인이신 율곡 이이 선생의 이름을 저딴 식으로 불러대는 건 무개념 인증이니 생각이 있으면 삼가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네이버캐스트의 '오늘의 인물' 코너 율곡 이이편의 댓글들은 정말 가관. 좀 적당히 하자?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티내나?
바리에이션으로 EE!!=22!!=李李!! 5 井伊, 일본의 성씨 ¶ ---- [1] 특히 별시 당시 내놓은 답안인 '천도책'(天道策)은 그의 학문적 깊이는 물론 성리학적 우주관의 극치를 보여준다. [2] 모 언론사에서는 단순히 이이의 이러한 과거 성적을 근거로 그가 조선 최고의 천재라는 칼럼을 내기도 하였는데 하지만 이 칼럼은 유독 시험 성적에 집착하는 현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반영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 주장대로라면 현 대한민국 최고의 천재는 고승덕이라는 주장도 성립된다. [3]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불교에 심취하여 금강산에서 불법(佛法)를 공부했다고 한다. 삭발까지 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의암(義庵)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걸 밝혀낸 인물이 바로 이병도이다. [4] 카를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경덕의 경우는 기가 리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건 중국성리학에도 없는 내용이었고, 이후에도 서경덕 계통의 학파는 맥이 단절된다. [5] 서로를 그르다고 주장하는 분열된 사림들에게 양쪽 다 옳고 그르다고 하자 사림들이 양시론과 양비론을 들고 나왔는데, 이에 전국시대 군주들의 전쟁은 다 그른 것이고 주 무왕이 주왕을 정벌한 것이나 백이 숙제가 말린 것은 다 옳은 일이라고 또 한마디를 하였다 [6] 서경덕을 지나치게 도에 치우쳤다고 비판했다. 다만 서경덕의 우의정 추증을 찬성한 것도 이이였다. [7]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명 조식과 그 직계인 정인홍 등의 북인, 특히 대북계역은 말 그대로 아작난다. [8] 진짜 엽기는 율곡 이이의 진짜 문집인 율곡전서에는 십만양병설이 본편에는 없고 부록에 들어가있단 것이다. 물론 율곡전서 역시 김장생의 율곡행장보다는 편찬시기가 느리다. [9] 이항복이 쓴 이이신도비에는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었다(李文靖眞聖人也)라고 쓰여있고, 율곡전서에도 문성이 아닌 문정으로 되어있다. 문성으로 나오는 것은 후대의 것이다. 이문정은 북송때의 명신 이항으로 류성룡이 이이를 이항에 빗대어 찬탄한 것인데, 율곡전서의 후기 교정자가 문정을 문성으로 잘못 교정한 것이다. 따라서 교정자의 실수에 불과한 것을 십만양병설 후대 조작설의 근거로 볼수는 없다는 주장이 있다. 수정실록이 편찬되기 전에 지어진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도 십만양병설이 등장하고 유성룡의 후회도 같이 기록되어있는데 여기서는 유성룡이 이이를 숙헌(이이의 자)이라고 지칭했다. [10] 중국에서 성리학은 수많은 학문체제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성리학은 조선 500년의 세월이 지남에 기대승과 이황의 4단칠정논쟁, 이이와 성혼의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 등의 논의를 거쳐 인간 심성론으로 변화해 갔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이 심성학으로 변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이와 이황에 의해서였다. 때문에 이이와 이황의 성리학을 성리학의 완성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성리학과는 또 다른 학문으로 변했다고 봐야 하는지도 의문스럽다. [11] 율곡은 인간의 감정을 긍정하는 사람인데 비해, 퇴계는 감정 이상의 도덕적 본성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율곡보다 엄숙한 사상가였던 퇴계였기 때문에 상당히 갭이 크다. [12] 원래 과거 선비들도 공적인 일이나 일상생활에서만 선비다운 풍모를 보여줄 뿐, 부부생활은 화끈했다고 한다. 낮에도 학문을 연마하고, 밤에도 연마(?)하는 것이 배우는 자의 자세. [13] 그것도 도덕교과서에 올라갔다. 십만양병설과 도덕교과서의 접점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하지만 당시에는 국민윤리라는 명칭으로 통용되었으니 먹히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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