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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8일 토요일[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제1독서 : 하바 1,12─2,4
복 음 : 마태 17,14ㄴ-20
그때에 14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15 말하였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또 자주 물속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16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
하고 이르셨다. 18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호통을 치시자 아이에게서 마귀가 나갔다.
바로 그 시간에 아이가 나았다. 19 그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20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유청 안셀모 신부
오늘 복음은 아들을 낫게 해 달라는 한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병행 구절에서 아이의 아버지는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9,24)라고 말합니다.
그의 고백은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믿음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하는지,
내가 얼마나 하느님 가까이 있는지, 그저 어렴풋한 느낌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내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의지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고,
자신이 선택해서 하느님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자기 힘과 의지로만 믿음을 지켜 낼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에게도 기적이 일어나면
하느님을 더 잘 믿을 수 있다는 사람들도 더러 만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믿음은
하느님이 아닌 자신이 바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태 17,19) 하고 묻습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17,20)
산도 옮길 수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깊이 연결된 것은 바로 기도가 아닐까요?
“믿음은 기도를 샘솟게 하고, 샘솟는 기도는 믿음을 튼튼하게 해 줍니다.”라고 하신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이 아버지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기도하는 것이 힘들어요. 미사에 집중할 수 없어요.
스마트폰만 계속 보게 돼요. 시간 활용을 제대로 못 해요.
너무 게으릅니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정말 힘들어요.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자기의 부족함에 죄책감이 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마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나도 그런데….’
맞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슷한 삶을 산다고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너무 많은 이가 틀린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완벽한 모습을 꿈꾸는 우리입니다.
어쩌면 삶 안에서 완벽하기 위해 너무 힘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에 운동 배울 때 코치님께서 항상 말씀이 생각납니다.
“힘 빼!!!”
우리 삶에도 힘을 빼면 어떨까요? 이것이 겸손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면서
자기 자리에서 조금 더 노력하는 삶을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져 죄스러운 마음 갖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지금 문제없음의 기준이 너무 높은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뇌전증(간질)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는 아들을 고쳐 달라며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제자들에게 먼저 데려가 보았지만 고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마태 17,17)라고 말씀하신 뒤에,
호통을 쳐서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제자들이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태 17,19)라고 말합니다.
실패를 숨기거나 남 탓을 하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께 답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예수님은 믿음의 양을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온전히 하느님을 향해 살아있다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이 실패했던 이유는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기술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나는 할 수 있어.”라는 자기 암시가 아니라,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어.”라는 철저한 의탁에서 나옵니다.
힘을 빼는 삶, 하느님께 철저히 의탁하는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면서, 더불어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께서 산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신 후,
산을 내려오시어 군중에게 가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말하였습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마태 17,15-16)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마태 17,17) 하고 말씀하십니다.
‘비뚤어졌다’는 것은 <신명기> 32장 5절에서 모세가 말해주듯이,
주님을 향하지 않아 비뚤어 우상숭배에 빠짐을 말합니다.
곧 주님께 속하기보다 우상을 소유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함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인정하기에
전능하신 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임을 뜻합니다.
곧 하느님과의 맺는 실재적인 신뢰 관계입니다.
그러니 ‘비뚤어졌다’는 것은 주님을 믿으려 하지 않음이요,
그 결과 병을 치유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말해주는 반면,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받아들임이요,
그 결과 병을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못할 일은 하나도 없는'(마태 17,20) ‘전능’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태 17,19) 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그렇습니다.
‘믿음’이 약하고 강한가, 혹은 작고 큰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향의 순수성, 곧 진실성에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작고 약해도 진실하고 순수하면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마태 17,20).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어버리는 바람에
주님을 향한 믿음이 약해져 버립니다.
결국 우리가 무능한 자신을 믿으면 무능해질 것이고, 전능하신 그분을 믿으면 전능해질 것입니다.
사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믿음’이란 '초월성이 진짜임을 인정하는 능력',
곧 ‘삶의 이면에 실재하는 우리가 경험하는 그 어떤 것보다
실재하는 더 성스러운 차원을 인정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정’은 지성의 굴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렴풋이 느끼는
‘비경험적인 실재들을 인정하고 기뻐하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믿음’에는 ‘기쁨’이 동반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믿음’을 지니고 있다면, ‘기쁨’ 속에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믿음 안에서 주님과 함께 있으니, 함께 계신 주님으로 하여 기뻐하게 하소서. 아멘.
믿음은 불가능한 것이 없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는 권능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마태 10,1 참조),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소년을 치유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그 원인을 “믿음 없음”이라 지적하시며,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너희가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20절)라고 하신다.
여기서 믿음은 단순한 심리적 확신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드러나는 신뢰와 의탁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명한다.
“믿음은 단순히 말이 아니라, 기도와 단식으로 정화된 마음이
하느님께 완전히 의탁할 때 비로소 능력을 드러낸다.”(n Matthaeum Homilia LVII 요약)
즉, 믿음은 지식이나 외적 권능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 겸손과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의탁의 문제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는 작지만,
땅에 떨어져 죽을 때 큰 나무로 자라난다(마태 13,31-32).
이는 믿음의 생명력이 비록 작게 시작되더라도,
하느님께 뿌리내릴 때 엄청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믿음을 씨앗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한다.
“믿음은 겨자씨와 같다. 그것이 작아 보이지만,
사랑의 불로 태워질 때 열매 맺고 성장한다.”(Sermones 요약)
따라서 믿음은 우리 안에서 자라나도록 기도와 사랑, 단식과 희생으로 양육해야 한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9,29)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의탁을,
단식은 자기중심적 욕망을 버리는 행위를 뜻한다.
교리서는 “유혹을 이기려면 기도와 절제가 필요하다.
기도는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고,
단식은 우리의 욕심을 낮춘다.”(540, 1434항 참조)라고 가르친다.
즉, 악을 몰아내는 힘은 하느님과 깊이 연결된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복음에서 간질병 환자의 아버지는 아들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주님께 간청한다.
이는 믿음의 공동체적 차원을 보여 준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과의 일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치를 낳는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이들은 서로를 형제로 사랑하게 된다.”(Adversus Haereses, IV 요약)
하느님과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다른 이의 고통과 문제에 더 민감해지고,
그들의 짐을 함께 지려는 마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오늘날 우리도 제자들과 같은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다.
가정 문제, 사회적 불의, 개인의 고통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과 진실한 기도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희망을 준다.
우리가 겨자씨 같은 믿음을 지니고, 기도와 단식으로 주님께 의탁할 때,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과 욕심이라는 “마귀”가 물러가고,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다크(Dark) 심리학’을 읽었습니다. 제목만 보면 조금 어둡고 위험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선한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토끼는 그저 약하기에 도망가야 하고, 먹히는 존재가 된다고 합니다.
약함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악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약함,
불의를 보면서도 침묵하는 약함, 두려움 때문에
순종만 하는 약함은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악을 이기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자기 욕심을 위해 쓰지 않고 통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힘이 없어서 선한 것이 아니라,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사랑과 진리 안에서 다스리는 사람이 참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성서에도 순종만의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서에는 반항과 도전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있었고, 카인의 반항이 있었고,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배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반항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아담의 불순종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교만에서 나온 반항이었습니다.
카인의 반항은 시기와 분노에서 나온 반항이었습니다.
유다의 배반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실망과 욕망에서 나온 반항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배신은 두려움에서 나온 반항이었습니다.
이런 반항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자신도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전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존의 질서와 제도를 그대로 따르지만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셨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실패와 저주의 상징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구원과 사랑의 표징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의 힘은 남을 이기기 위한 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힘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힘은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섬기는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힘은 상처 주는 힘이 아니라 살리는 힘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병자를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예수님의 말씀도 들었고, 예수님의 기적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고통 받는 사람 앞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 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막연한 낙관이 아닙니다.
“다 잘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 안에서 악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입니다.
믿음은 가장 강한 마음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말씀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 안의 두려움이라는
산, 분노라는 산, 욕망이라는 산, 절망이라는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들을 고쳐줍니다.
두려움 때문에 문을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이 이제는 광장으로 나가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들이 갑자기 세상의 권력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갑자기 강한 군대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가진 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이 두려움을 이겼습니다.
믿음이 죄책감을 이겼습니다.
믿음이 세상의 협박을 이겼습니다.
믿음이 그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바쿡 예언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께서는 눈이 맑으시어 악을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잘못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시면서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바라보고만 계십니까?”
우리도 때로 그렇게 묻습니다.
왜 악한 사람이 더 잘되는 것처럼 보입니까?
왜 의로운 사람이 고통 받습니까?
왜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입니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늦어지는 듯 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믿음은 하느님의 시간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기다리는 힘입니다.
믿음은 악이 강해 보일 때에도 선을 포기하지 않는 힘입니다.
믿음은 당장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성실하게 오늘의 십자가를 지는 힘입니다.
우리는 약해서 착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워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믿음 때문에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믿기 때문에
세상의 악과 불의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겸손을 만나면 사랑이 피어납니다.
믿음이 희생을 만나면 희망이 열매 맺습니다.
믿음이 용기를 얻으면 산도 옮겨집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을 청하십니다.
그 작은 믿음이 우리 안의 두려움을 옮기고,
우리 가정의 상처를 옮기고, 세상의 어둠을 옮길 것입니다.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설교했던 도미니코 사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도 여전히 성인 성녀들이 꾸준히 탄생하고 있습니다.
성인 성녀들은 각 시대의 필요성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부자와 기득권층에 둘러 쌓여 본질을 잃어갈 때,
하느님께서는 아시시 프란치스코 성인을 세우셨습니다.
산업화의 그늘에서 신음하며 죽어가던 아이들이 넘쳐나던 시절,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청소년들의 아버지 돈보스코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도미니코 사제(1170~1221) 역시 시대적 요청의 결과물입니다.
도미니코회 역사 자료에 따르면 그는 언제 어디서나 말과 행동으로
자신이 복음의 전달자라는 신원의식을 드러냈습니다.
낮 동안 동료들과 엮어가는 수도 생활 속에서 그는 더없이 명랑하고 소탈했습니다.
얼마나 다정다감하고 붙임성이 많았는지
그의 주변은 언제나 그를 존경하는 동료 수도자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러다가 밤 시간이 다가오면 그보다 더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주 밤새워 기도하곤 했는데, 너무 열심히 기도하다 보니
동료 형제들이 그의 기도 소리에 밤잠을 설치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덕행 중에 눈에 띄는 것 한 가지는 그의 과묵함입니다.
그는 수도공동체의 분열과 상처의 주원인이 되는 말을 지극히 아꼈습니다.
그가 입을 여는 순간은 주로 이런 때였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할 때. 형제들을 칭찬할 때.
하느님 앞에 형제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드릴 때.
무엇보다도 도미니코는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그의 탁월한 인품과 높은 성덕에 감화를 받은 그 지역 교황대사가
몇 번에 걸쳐 그를 주교품에 올리도록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 마다 손사래를 치며 강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면서 주교직에 오르기보다는 공동체 형제들과 더불어
겸손하고 가난한 한 수도자로 남기를 간절히 염원했습니다.
도미니코 성인이 살아가셨던 12~13세기는
교회, 정치, 경제적으로 급변하던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발달, 여러 국가들의 출현이 있었지만,
그에 따른 빈곤층을 양산했습니다.
십자군은 이슬람과의 끝도 없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이런저런 이단으로부터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당시 인간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극단적 청빈주의, 극단적 금욕주의를 지향하는 이단들이 성행했는데,
알비 지방의 카타리파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토록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선물을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가 바로 도미니코였습니다.
도미니코는 여러 이단들로부터 가톨릭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통 교리에 능통한 설교단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유능한 설교자들로 구성된 도미니코회를 창설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정통 가톨릭 신앙의 파수꾼으로서 선봉에 선 도미니코회 회원들은
언제 어디서건 누군가의 회개를 위해서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갑니다.
그들의 모토인
‘진리를 관상하십시오! 그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십시오!’에 따라
밤낮없이 기도하며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공부하고
그 깨우친 바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도미니코 성인이 남기신 모범 가운데에서
오늘 날 우리 사제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말로서 만의 설교’가 아니라
복음 선포자가 먼저 복음대로 살아감을 통해 가르치는 ‘행동이 뒷받침되는 설교’입니다.
뿐만 아니라 도미니코의 감동적이고 효과적인 설교의 배경에는
늘 깊은 하느님과의 일치와 기도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의인
최 빠코미오 수사
1. 눈앞의 어둠과 하느님의 침묵
살다 보면 참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겪게 됩니다.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애써도 상황은 자꾸 꼬이고,
오히려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일이 더 잘 풀리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언자 하바쿡 역시 바로 이러한 현실 앞에서 하느님께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세상에 불의와 오만함이 판을 치는데, 왜 하느님께서는 보고만 계시냐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비슷한 일을 겪습니다.
자식 일이나 건강 문제, 혹은 평생을 바친 일터가 흔들릴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느님,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안겨주십니까?” 하는 질문이 터져 나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하바쿡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살리라.”(하바 2,4)
눈앞에 아무런 응답이 보이지 않고 속이 타들어 갈 때조차,
하느님을 향한 인내와 굳건한 신뢰를 잃지 않는 삶의 태도가
바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성실함입니다.
2. 율법의 행위를 넘어선 진정한 믿음
하바쿡 예언자가 전한 이 한 줄의 말씀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우리 구원의 가장 튼튼한 기둥이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계명이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의화론을 선포할 때
이 하바쿡 2장 4절의 말씀을 핵심 근거로 인용했습니다.
내가 가진 능력이나 잘난 실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혼란과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그분께 끝까지 충실한 사람이 구원을 얻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위대한 성인인 도미니코 사제의 삶이
바로 이러한 믿음과 성실함의 좋은 본보기였습니다.
성 도미니코는 이단과 혼란이 교회를 흔들던 힘든 시절에,
오직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에 대한 신뢰 하나만을 품고 길을 떠났습니다.
당장 눈앞에서 눈부신 성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밤새 기도하며 진리를 전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겼습니다.
성 도미니코가 걸었던 길은 인간적인 계산이나 세속적인 힘에 의존한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에 끝까지 성실했던 참된 의인의 길이었습니다.
3. 내 안의 완고한 산을 무너뜨리는 권능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고 좌절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부족함을 지적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마태 17,20)
여기서 산을 옮기는 힘은 인간 자신의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마술이 아닙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할 때,
우리를 통해 들어오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힘입니다.
아무리 작아 보이는 미소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온전히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내어 맡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 믿음은 우리 마음속에 완고하게 자리 잡은 불신과 절망,
그리고 인간적인 장애물이라는 큰 산을 무너뜨리는 엄청난 힘이 됩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으며
그분께 삶을 내어 맡기는 거룩한 성실함으로 살아갑시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믿음으로 살리라”
<믿음은 인간품위의 기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시편92,3)
게절의 흐름이 반갑고 고맙습니다.
어제 입추 후 오늘 아침 공기는 선선한 가을 분위기입니다.
사람은 생명이지만 AI는 기계입니다.
사람은 얼굴이 있지만 AI는 얼굴이 없습니다,
사람은 믿음이 있지만 AI는 믿음이 없습니다.
사람만이 생명을, 얼굴을, 믿음을 지닙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호> 표지글이 강렬했습니다.
“AI습격에 저항하라. 사람이 먼저다!
인공지능은 들불처럼 확산되고,
사람들은 그것이 인류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인류는 그것을 원하는가?
일자리와 기후, 사생활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는 디지털 몰록(Moloch) 앞에서
저항은 세계 곳곳으로 번지고 있다.”
현대판 몰록, 강력한 우상이, 얼굴도, 생명도, 믿음도 없는 기계인 인공지능 AI입니다.
참으로 절실해지는 <믿음의 삶>입니다.
생명의 믿음이요 얼굴을 통해 드러나는 믿음입니다.
얼마 전 <겨울 숲 노년인생이 좋다>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여름오니
겨울 좋은 줄 알겠다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겨울 숲
여름 숲 나뭇잎들 온통 하늘을 덮었는데
겨울이 되면 나뭇가지들 본질만 남고
환히 드러날 배경 하늘과 산
이래서 젊음의 환상 허욕 탐욕들 거품 다 걷힌
그래서 믿음만 남은
텅 빈 충만 겨울 노년 인생이 나는 좋다.”<2026.6.27.>
더불어 생각나는 <소원>이란 엣 자작시입니다.
“누웠을 때는
넉넉한 들판이 되고
앉았을 때는
듬직한 산이 되고
서있을 때는
늠름한 나무가 되고
걸을 때는
유유히 흐르는 강이 되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싶다”<1998.3.12.>
다 증발되고 남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그래서 노년의 품위 유지의 우선적 순서는 1.믿음, 2.건강, 3.돈이라 강조합니다.
하느님 믿음이 없고 밥과 돈, 건강 욕심뿐이라면
노욕老慾의 노추老醜에 참 허무하고 무의미한 삶일 것입니다.
그러니 노년이 되어 갈수록 품위 있는 삶에 각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주 예전 왜관 본원에서
저녁 어둠 속에 걷는 노수도자들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참 초라해 보였습니다.
순간 <믿음이 걷는 모습>으로 보이면서
존경스러운 마음 가득했던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시 제목도 “믿음으로” 말마디를 집어넣어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았습니다>로 해야 완전합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믿음뿐입니다.
믿음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믿음의 <푸른 솔>같은 참으로 품위 있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식과 제자들의 물음과
예수님의 답을 통해 뚜렷이 부각되는 믿음입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삶의 거품이 걷혔을 때 과연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남아 있을런지요?
진짜 부자는 믿음 부자요 진짜 가난한 자는 믿음이 없는 자임을 깨닫습니다.
탓할 바 주님이 아니라 내 믿음 부족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날로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은 그대로 믿음의 여정이 됩니다.
끝까지 기다리는 인내의 믿음입니다.
주님은 초조해하는 하바쿡 예언자에게 기다림과 인내의 믿음을 촉구합니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죽음처럼>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살리라.”
<죽음처럼> 말마디는 제가 삽입했습니다.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입니다.
죽음을 늘 염두에 두고 살 때 거품은 걷히고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믿음의 삶만 남을 것입니다.
결코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는 유혹에도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믿음으로 삽니다.
모든 성인들이 특히 오늘 기념하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창립자인 도미니코 성인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그는 수도공동체를 거룩한 배움의 중심지로 삼고
구성원들의 연구, 교육, 설교, 그리고 기도에 전념하도록 했습니다.
성무일도는 전통적인 방식보다 간소한 형태로 낭송했으며,
최초로 육체노동을 공식적으로 포기한 수도회였습니다.
프란치스코와는 달리 뛰어난 조직가였고 공동책임의 선구자였습니다.
도미니코는 간결하고 조정의 여지가 있는 아우구티누스 규칙을 선택했고
더 큰 효과와 효율성을 위해 몇 가지를 추가했으며,
유럽 전역, 아시아, 북미, 중미, 남미로 까지 전파된 선도적인 선교단체중 하나가 됩니다.
성인의 말년 삶에 대한 묘사입니다.
“도미니코는 육류를 피했으며, 정해진 단식 시간과 침묵 시간을 준수했고
사치스러운 침소를 피하고, 될 수 있는 한
가장 누추한 거처와 가장 초라한 옷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입술은 슬픔이나 부정적인 말 대신에
오직 하느님을 찬미하는 소리만이 나왔습니다.
오늘날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의 하나인 묵주기도가
가톨릭교회에 널리 확산되어 활발히 보급되기까지
도미니코가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도미니코는 금욕적인 생활과 노동으로 몸이 버티질 못해서 결국 51세에 선종합니다.
도미니코는 죽기 전, ”형제들 간에 서로 사랑하여라,
겸손하여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하여 영적인 보화를 만들어 가도록 하여라.”
유언한 후 1221년 8월6일 정오에 선종합니다.
1234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1300년 경에는 500여 곳의 수도원에 1만 여명의 회원들을 지닌 수도회로 성장합니다.
성인의 성덕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참으로 믿음의 거인, 도미니코 성인이었습니다.
믿음의 여정, 믿음의 의인이요 성인들입니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믿음으로 삽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루하루 <믿음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성실한 의인으로 품위 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생각하심 그 얼마나 깊으시나이까"(시편92,6). 아멘.
믿음이 없으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승화 시몬 신부
요즘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도
점을 보거나 무당을 찾아가는 사람들도 많아진다고 합니다.
특히 청년층에서 더 많이 보인다고 하는데
이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현재의 고단함에 의한 좌절이나 포기 상태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공권력보다는 사적 제재를 가하는 경우가 더 인기를 얻고
올바르게 살기보다는
나만 바라보고 사는 게 맞다는 인상을 주곤 합니다.
그만큼 현실의 어려움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삶을 흔들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희망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기억하고
지금까지 우리를 돌봐주신 하느님 손길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기억이 없다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도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보다 더 큰 희망을 간직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자기 영혼을 더럽히는 선택이 아닌
하느님을 향한 그리고 참 행복을 향한 선택을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그러한 믿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고
희망을 붙잡을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