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佛 더모코스메틱 '아벤느' 만든 피에르파브르그룹 베르트랑 파르망티에 CEO
'오너 vs 전문경영인(CEO).'
경영학의 이 케케묵은 논쟁은 끝날 줄 모른다. 기업을 둘러싼 환경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뚜렷하게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떤 기업들엔 이런 논쟁 자체가 불필요하다. 오너 경영도 전문경영인 체제도 아닌 기업, 경영 방식이 독단적이지 않으면서 주주들의 입김에 휘둘리지도 않는 기업이 있을 수 있을까.
프랑스 제약·화장품 기업인 피에르파브르그룹은 이 질문에 독특한 답을 내놓는다. 창업주가 전 재산을 털어 공익재단을 세우고, 그 재단이 기업의 대주주가 되게 한 것이다.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그룹의 가치가 변질되지 않도록 기업 지분은 공익재단이 소유하고,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형태다. 피에르파브르그룹은 국내에 '약국화장품'으로 알려진 더모코스메틱 브랜드 아벤느를 만든 회사다. 더모코스메틱은 피부과학(Dermotology)과 화장품(Cosmetic)을 합친 용어로, 의학적인 요소가 반영된 화장품이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약국에서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피에르파브르그룹의 창업주 피에르 파브르가 바로 이 더모코스메틱이라는 개념을 처음 만든 주인공이다. 약사 출신인 그는 피부 환자를 위한 화장품이 따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들을 위한 제품을 개발했는데, 이것이 더모코스메틱의 시작이었다.
단기적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환자를 위한, 사람을 위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피에르 파브르의 경영철학은 독특한 기업지배구조로 이어졌다. 창업주는 회사를 자녀에게 물려주지도, 주식 상장을 하지도 않았다. 꾸준히 좋은 제품을 만드는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공공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지배구조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제약회사로 시작한 피에르파브르그룹은 더모코스메틱으로 화장품 사업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그룹은 이제 전 세계 44개국 1만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더모코스메틱은 전 세계 두 번째 규모이며, 제약회사로는 프랑스에서 세 번째로 크다.
3년 전 창업주가 숨을 거둔 뒤 그룹은 새 CEO를 맞아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매일경제 더비즈타임스는 최근 한국을 찾은 베르트랑 파르망티에 피에르파브르그룹 CEO를 만나 피에르파브르만의 경영철학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그룹의 대주주가 공익재단인, 특이한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
▷공익재단인 피에르파브르재단이 기업 지분의 86%를 소유하고 있다. 창업주가 자신의 재산을 모두 쏟아 재단을 만들었다. 기업 지분의 대부분을 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보니 지배구조가 안정적이라는 게 큰 장점이다. 일반적으로 상장기업은 수익성을 신경 써야 해서 혁신을 하고 싶어도 기업의 철학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단기적 이익에 매달리지 않기 때문에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공익재단이 대주주가 되면서 세제상 이익을 보지는 않았나.
▷프랑스에서는 상속세율이 상당히 높은데 창업주가 재산을 재단에 기부했기 때문에 상속세를 많이 내지 않았다. 덕분에 재단은 자금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었고 기업에 더 많은 투자가 이뤄졌다. 기업 자본의 건전한 승계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더모코스메틱과 일반 화장품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더모코스메틱은 피부과 치료를 받는 환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창업주 피에르 파브르는 피부 질환을 앓는 환자들이 일상에서 쓸 만한 화장품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들을 위해 더모코스메틱 제품을 개발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평소 피부를 관리할 때 쓸 수 있는 제품인 것이다. 일반 화장품과 달리 의사와 약사가 제품 개발 단계에서 컨설팅을 하는 등 의학적 요소를 담았다. 아벤느의 경우 효능을 입증하는 임상시험 결과만 200개가 넘는다.
―피에르파브르는 현재 제약 부문과 화장품 부문을 양대 축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 기업 규모로 봤을 때 화장품 부문이 전체 그룹의 55%를, 제약 부문이 45%를 차지한다. 우리는 종양 치료제, 종양 피부 약품, 일반 의약품, 일반 헬스케어 제품 등 다양한 의약품을 만들고 있다. 화장품 부문인 더모코스메틱 브랜드로는 아벤느, 듀크레이, 아더마, 클로란 등이 있다.
―한국에서도 피에르파브르 제품이 크게 인기다.
▷우리 제품은 외모를 가꾸는 뷰티 제품이면서 의약품처럼 피부를 건강하게 만드는 측면까지 갖고 있다. 이런 점이 소비자들에게 인기 있는 것 같다. 또 아벤느와 아더마 등 브랜드 제품은 자연 물질을 추출해서 만든다. 우리는 식물 성분을 이용해 화장품을 제조하는 데 있어 독자적인 기술력을 갖고 있다.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저개발 지역의 의료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힘쓰고 있다.
▷창업주가 공익재단을 세운 이유가 저개발국가의 의료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에서 불법 복제약(copy drug)이 유통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는 공익재단을 세우고 불법 복제약 퇴치 운동을 벌였다. 지금도 재단의 주요 사업 중 하나가 개도국을 지원하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복제약 퇴치 운동이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질병 퇴치에 많은 힘을 쏟고 있다.
우리 재단이 맞서 싸우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질병이 겸상적혈구병(sickle cell disease)이다. 면역체계를 떨어뜨리는 질병인데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일대를 비롯한 개도국에서 많이 걸린다. 제약 교육에도 투자하고 있다.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에서 메콩 파르마(Mekong Pharma) 석사 과정을 운영한다. 약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제약 석사 프로그램으로 공중보건과 관련된 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그룹의 목표 중 하나가 지역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적 공헌을 하고 있나.
▷우리 그룹은 기본적으로 지역 주민, 시민과 함께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책임(CSR)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먼저 창업주 피에르 파브르의 고향인 프랑스 남부 타른주에서 사회공헌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디지털 헬스케어 사업이다.
암 환자들이 치료는 병원에서 받지만 디지털 기기를 통해 집에서도 관련 케어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증상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병원을 자주 오가는 건 번거로운 일이다. 이처럼 집에서 병을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 디지털 헬스케어 사업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엔지니어 학교도 설립했다.
지자체와 협력해 프랑스 툴루즈시에 옹코폴(Oncopole)이라는 종양학 클러스터도 세웠다. 병원과 학교 등 관련 시설이 집결해 있는 기초연구단지다. 2001년 툴루즈에서 화학공장이 파괴된 사건이 일어나자 프랑스 정부와 지자체는 그 용지를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툴루즈에 유명한 대학과 병원이 많다는 점을 살려 연구단지 조성이 결정됐고, 저희 그룹도 투자를 유치하는 등 클러스터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
―기업인데 수익을 내야 한다는 압박이 있지 않나.
▷아무래도 그런 측면이 없을 수 없다. 물론 사적인 이익이 아니라 미래 투자를 위한 수익 추구다.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주고 있다. 또 저희 지배구조에서 독특한 점 중 하나는 지분의 8%를 직원이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직원 주주제'를 실시해 사내 결속력을 다지고 있다. 직원이 주주로서 회사 비전에 투자한다는 철학이다. 본사에서 시작했는데 해외지사에도 확대 중이다. 단 국가마다 세금 등 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지사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현재는 8개국 지사에서 시행하고 있다.
―당신은 피에르 파브르 창업자 사후 첫 번째 CEO다.
▷나는 1991년부터 2008년까지 17년 정도 그룹에서 일했다. 나 자신이 창업주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그 옆에서 이 그룹의 발전을 함께 지켜보며 회사에 큰 애착을 갖게 됐다. 잠시 다른 곳에서 일했지만 창업주가 돌아가시고 회사에서 내게 다시 돌아오라고 했을 때 1초도 주저하지 않았다. 창업주 뒤를 이어 이 회사를 이끌어나가게 된 것은 내게 큰 영광이다. 창업주의 성공을 잘 이어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과제이기도 하다.
―CEO로서 지난 3년간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창업주의 경영과 다른 점도 있는지.
▷창업주는 카리스마적 리더였다. 자신이 세운 회사를 오랜 기간 혼자 이끌었다. 모든 역량을 집대성해 회사를 끌어가는 스타일이었다. 이렇게 카리스마적 창업주의 시대가 가고 이를 계승할 때 다른 기업에서 많이 하는 실수가 창업주를 대신할 사람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 창업주를 대신할 사람을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전환기에는 기업을 재창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창업주의 카리스마적 경영에서 이제 모두가 함께하는 경영으로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CEO가 된 첫해에 '우리의 가치를 지키되 우리 자신을 재창조하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건강부터 미용까지(From Health To Beauty)'라는 우리 기업의 전통을 지키되 이를 재정의하고자 한 것이다.
―모두가 함께하는 경영이란 어떤 것인가.
▷기업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의 관점을 받아들여 우리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기업은 기업 차원의 비전을 추구하려고 하고, 직원 개인은 자아실현 등 자신만의 욕구를 갖고 있다.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공동의 경영'이다. 우리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선대의 생각을 이해하고, 발전시키며, 전수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업을 함께 운영하고자 한 결과 회사에 대한 직원의 신뢰도 높아지고 있다. 회사 지분에 직원이 투자하는 비중이 매년 커지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지금까지의 성공을 발전시키고 전수하는 방법은.
▷지속 가능한 성장은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더모코스메틱 브랜드는 10여 개가 있는데 관련 혁신 건수가 매년 150건에 머무르다가 지난 3년간 230여 건으로 늘어났다. 혁신 없이는 지속 가능한 성장도 없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제품을 개선한 덕분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혁신이 인본주의적인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시적 트렌드를 좇기보다 인간을 존중하는 혁신을 추구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하는 철학이 제품에도 반영된 것 같다.
▷그렇다. 젊은 시절부터 노년까지 소비자의 인생을 함께하는 제품들을 만드는 것이 우리 목표다. 예를 들어 여드름 때문에 고민하는 10대 청소년을 위해서는 여드름을 줄이는 제품을 개발했다. 폐경기 여성들을 위해서는 또 그들의 건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품을 제시한다. 특정 소비자 층만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이대에 적합한 제품을 선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연구개발(R&D)에 투자하고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
―지난해 R&D에 투자한 금액은 어느 정도인가.
▷지난해에는 매출액 22억유로 중 2억유로를 R&D에 투자했다. 제약 부문은 영업이익의 17%를, 더모코스메틱 부문은 영업이익의 4%를 R&D에 투자한다.
―제약과 화장품 부문 사이에서 협업도 일어나는지.
▷그렇다. 예를 들어 피부 치료에 어떤 물질이 적합한지, 어떤 식물에서 성분을 추출해 제품을 개발할 수 있는지를 잘 아는 건 제약 부문이다. 반면 화장품 부문은 소비자들의 욕구, 제품의 텍스처에 대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 서로 전문성을 공유해 더 좋은 제품을 만들고 있다.
―화장품을 해외로 수출하는 과정에서 방부제가 들어가지는 않나.
▷그렇지 않다. 아벤느 온천수는 공장이 수원지 바로 옆에 있어서 온천수를 멸균 처리된 파이프로 공급하고 역시 멸균 처리된 용기에 바로 주입한다. 우리 제품 생산 공장은 프랑스 정부의 의약제품 제조 공장으로 인증을 받았다. 주사기를 만드는 것과 같은 조건에서 화장품을 만든다고 보면 된다. 제품 제조부터 화장품 용기까지 멸균 처리되고 화학 보존제가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한국 화장품 시장 전망은 어떻다고 보나.
▷한국은 우리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시장이다. 더모코스메틱 시장 규모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뷰티 트렌드는 우리와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새 브랜드, 새 제품을 출시하기 가장 적합한 시장이기도 하다. 한국 소비자들은 혁신적인 제품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2018년 모공 축소 기능이 있는 제품을 출시할 예정인데, 정식 출시에 앞서 시범 출시할 국가 중에 한국도 포함된다. 한국 화장품 시장에 영향을 받아 출시한 제품도 있다. 비비크림과 마스크 시트가 대표적이다. 한국과 더불어 아시아 시장 전반에서도 더모코스메틱 분야가 크게 성장하고 있다. 현재 피에르파브르그룹 매출에서 아시아 시장이 17%를 차지하는데 3년 후에는 이 비율이 25%까지 올라갈 것 같다.
■ 베르트랑 파르망티에는…
베르트랑 파르망티에(Bertrand Parmentier) 피에르파브르그룹 CEO는 2013년부터 그룹의 CEO이자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피에르 파브르 창업주 사후 그 뒤를 이은 첫 CEO다. 1991년부터 2008년까지 피에르파브르그룹에서 일했으며 재무 부문 사장, 그룹 부회장을 역임했다. 2009년부터 4년 동안 항공기 회사 라테코에르의 사장으로 있다가 피에르파브르로 다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