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달라진 환경 덕에 잠시 얼떨떨해 있어야 했다. 평상시 들리던 새의 지저귐 이라던지,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따위는 없고, 단지 모래 바람만 들썩일 뿐이다. 굳게 닫혀진 창문 사이로 움직이는 약한 햇빛-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해는 뜨기 시작했다- 은 탁해 보였다. 하룻밤 사이에 쌓인 먼지들은 어마어마했다. 베루스는 침대 시트를 밀쳐내고, 뿌얘진 바닥에 발을 내딛었다. 이마 위로는 식은땀이 흐른다. 어젯밤의 모든 일이 꿈만 같다. 정말, 자신은 에슈티라는 소녀를 만난 것이었을까? 사막의 밤은 묘한 이면성이 있어서 모든 것을 애매모호하게 만든다.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하얗게 빛나는 머리칼들, 파르르 떨리는 눈썹조차도 이렇게 생동감 있게 기억나는데 말이다. 보고 싶다. 그렇지만 현실이라 해도 다시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한숨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째깍거리는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지금쯤 나가야지 햇빛이 가장 뜨거운 정오 때까지 목표하던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라스-굴에서는 낮에 모래 속을 파고 들어가, 시에스타 (Ciesta: 낮잠)을 자야 한다. 안 그러면 몸이 먼저 지쳐서 그 열기에 굴복하고 만다. 베루스는 어제 잡화점에서 사놓은 도구들을 대충 챙긴 후,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어제의 검은 망토로 몸을 덮었다. 사막에서 얇은 흰 옷을 입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하차하면 모래에 다칠 수도 있었고, 낮과 밤의 기온차도 대단했다. 그리고 검은색은 햇빛을 차단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바지와 부츠 역시 혹시라도 있을 전갈 때문에 길고 두터웠다. 간단한 끈으로 회색 머리칼을 묶어버린 베루스는 거울 앞에 섰다. 무의식적으로 눈은 허리춤으로 간다. 그 곳에는 날카로운 파냐드 대거 (Poniard Dagger)와 웨폰 브레이커 (Weapon Breaker)가 달려있다. 희미하게 미소가 그려진다. - 얼마 남지 않았다. 폭풍전의 마음은 평온하기만 하다.
서서히 드러나는 사막의 윤곽을 감상하며 베루스는 눈가를 훔쳤다. 자르칸이라는 곳은 원래 사막과의 경계가 희미했기에, 5분 정도만 걸으니까 새우등처럼 굽어진 모래언덕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집들이래 봤자 모두들 스러져가는 폐가들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나무판자나 깨진 포석 따위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자르칸의 보호에서도 벗어났다고 생각하며 그는 씁쓸히 미소 지었다. 드디어 사막의 고독을 약간이나마 맛본 듯하다. 그 텅 빈 기분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제나 마음 속 한구석에서 남아있던 외로움이 서서히 형체를 구체화시켜가는 느낌이었다. 베루스는 터덜터덜, 맥없이 걸어가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자신이 봐왔던 사람들, 장면들, 기억들. 그 모두가 잊혀졌다가 다시 꺼내지는 것 같다. - … 가! 도망…! 흠칫. 베루스는 잠시 몸을 떨었다. 불쾌한 기억이 돌연 수면위로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뒤돌아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자신은 어렸었고, 그 당시 할 수 있는 일은 말 그대로 도망가는 일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길고 오랜 수련으로 강해진 실력이다. 지금에서야 빚을 청구하러 간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그 사람도 방심하고 있을 터.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상대방의 머리로 계산 될, 잔혹한 복수…. 베루스는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고요 속에서의 생각은 방해 받지 않아 위험한 것이다. 그때,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 떠나는 거니?"
흡사, 심장이 멈추는 느낌. 고운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것이 보인다.
"으응…."
마음이 왠지 턱 막히는 기분이다. 그녀에게서 좋은 향기가 난다.
"그래? 기다렸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 "기다렸던 거야? 왜?" "그거야 내 맘 아니겠어?"
에슈티는 무심하게 한마디 내뱉고선, 사뿐히 베루스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살짝 입꼬리를 올린 채 다가오는 그녀는 희한하게도 드레스 차림이었다. 약간 푸른 빛이 감도는 얇은 재질로 만들어진 그것은 시원해 보였다. 그렇지만 사막에서 돌아다니려면 여간 거추장스러운 게 아닐 텐데, 라고 베루스는 속으로 되뇌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에슈티의 붉은 입술이 열린다.
"동행하고 싶어." "으응? 뭐?"
잠시 귀가 미쳤는지 의심을 해보고서 베루스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전혀 동요하지 않는 에슈티는 다시 대꾸한다.
"같이 여행하고 싶다고. 안될 이유라도 있어?" "아, 아니 그런 건 없지만…. 산챠-라르고스로 가는 거야?" "아니. 솔에 가."
베루스는 다시 한번 회의감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솔이라면 산챠-라르고스와는 조금 다른 경로로 가야할텐데 말이다.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상당히 고민되는 마당에, 에슈티가 친절하게도 설명을 덧붙였다.
"솔에 볼일이 있긴 한데, 금방 갈 수 있어서. 오랜만에 알-라스-굴에 왔는데 인간처럼 여행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베루스는 보랏빛 눈동자를 흐트러트렸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소녀다. 그렇지만 에슈티는 그의 마음은 모르는 듯, 평범하게 미소 짓고 있기만 하다. 불쑥, 흰 손이 하나 건네진다.
"안가?"
베루스는 고개를 기웃였다.
"너, 옷도 그렇고, 생존도구조차도 없는데 어딜 가겠다는 거야?"
갑자기 에슈티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것은 웃음을 애써 참는 사람의 표정 같았고, 조금 후 역시 그녀는 폭소를 터트렸다.
"푸후후… 큭! 아직 몰랐던 거야? 하핫, 역시 인간들이란 재미있다니까. 베루스, 걱정 할 필요는 없다고요, 전혀. 풋!"
베루스는 아직 실컷 키득대며 앞으로 걸어가는 에슈티를 보며 머쓱하게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머릿속에서 에슈티의 말 중 하나가 켕긴다. 자신의 이름은 어떻게 안거지?
사막의 열기는 상상 이상으로 뜨거웠다. 끝없이 얼굴을 덮어오는 먼지와 더위의 파도는 몸을 지치게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희뿌옇게 발을 색칠해놓는 모래의 감촉은 까칠하기만 하다. 얼굴 위로는 자꾸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목은 갈증으로 인해 타고 있다. 덥다. 끔찍히. 분명히 알-라스-굴에 진입한 것은 반나절밖에 안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나머지 이틀을 어떻게 버틸지 걱정된다. 자꾸만 하늘위로 기어오르는 태양은 의지까지도 갉아먹고 있었다. 얼마 후면은 원치 않아도 모래 속에서 잠을 청해야 할 것 같았다. 베루스는 들고 있던 물병에 살짝 입술을 대며 옆으로 곁눈질했다. 더위에 쪄들어가는 자신과는 달리, 에슈티는 비교적 편안한 얼굴로 사막을 미끄러지듯 가볍게 횡단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물을 마신 적도 없는 그녀는 잘도 걸어가고 있었다. 땀방울은 찾아 볼 수도 없고, 살겿도 매끄러운 그대로이다. 베루스는 속으로 '괴물!' 이라고 몇 번도 더 외치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다 못해, '뭘 쳐다봐' 라고 물어봐 주기라도 한다면 좋을텐데. 동행하는 것 치고, 너무 재미가 없었다. 물론, 둘 다 수다가 많은 편이 아닌 이유도 있었지만, 여태까지 오면서 '물 마실래?', '쉬자', '안 더워?' 이 세말만 했다는 것은 베루스가 생각해도 심각한 문제였다. 말을 걸려고 해봐도, 그 특유의 차가운 눈빛만 보면 입이 닫혀지는걸 어떡하란 말인지. 자꾸만 대화가 끊기게 된다. 정말, 왜 같이 여행하자고 한 건지 궁금하다. 지금 상태로 봐서는 오히려 혼자 가는 쪽이 더 편하다. 베루스는 옅게 미소지었다. 그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동행하는 것이 싫지는 않다. 오히려 매우 기쁘다. 말할 수는 없지만…. 베루스는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의 그림자에게 눈길을 주었다. 위치로 봐서는 오전 10시쯤 된 것 같았다. 아무래도 곧 시에스타를 지낼 곳을 찾아야 할 듯 했다. 마침, 눈 앞에는 낮은 모래언덕이 있었고, 그것을 넘으면 웬만큼 평평할 것 같아 보였다. 그는 발걸음을 그 쪽으로 옮겼고, 옆에서 걷던 에슈티는 졸래졸래 뒤쫒아왔다. 상쾌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다시 한번 질린 듯 혀를 내두르며, 베루스는 참다 못해 질문했다.
"어떻게 그렇게 멀쩡히 걸을 수 있는 거지?" "글쎄?"
에슈티는 싱긋 웃어보였다. 대화가 또 끊어질 조짐이 보이자, 베루스는 냉큼 덧붙였다.
"사막에 와보는 건 몇번째야?" "세보지는 않았지만 꽤 많이 될거야." "어땠어?" "어떠다니? 그야 편안했지." "편안하다고?" "사막에서는 오로직 모래, 태양, 그리고 자기 자신 밖에 없어. 가장 세계의 본질에 접근해 있지."
깊은 숲을 연상시키는 눈동자가 한번 깜박이고선 광활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라고 내가 알았던 한 사람이 그러더군."
자조적이게 미소 지으며 에슈티는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감상적인 얼굴이 된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베루스를 지켜보았다.
"저 모래언덕을 넘을 생각인 거야?" "응. 그리고 나서 자야겠지." "그런가."
에슈티는 휙 몸을 돌려버리며 몇 발걸음 만에 거뜬히 언덕을 올라탔다. 베루스는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그녀를 따라갔고, 필사적으로 언덕을 올라가려고 발버둥 쳤지만, 이내 미끄러지고 말았다. 붙잡을 곳도, 몸을 지탱할 곳도 없는 모래언덕을 올라가기란 정말 어려웠다. 이미 꽤 높은 곳에 서있는 에슈티는 킥킥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도와줄까?" "그러면 좋겠어."
에슈티의 손을 잡은 베루스는 하마터면 그것을 놓칠 뻔했다. 이질적이게 차가웠다. 마치 고드름을 만지는 것처럼.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도움을 받아 언덕의 중반쯤의 그나마 평평한 지역으로-그래 봤자 였지만- 올라갔다.
"고마워." "뭘. 그것보다, 조심해."
베루스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에서 파냐드 대거를 뽑았다. 그러나 그는 평소 반원으로 돌아 허공을 긋는 행동을 하지 않고, 대신 자신의 몸으로 에슈티 앞을 가렸다. 에슈티는 살짝 놀란 듯, 날카롭게 숨을 들이 쉬었다. 베루스는 에슈티가 자신의 뒤에 밀착 된 것을 확인 하고, 그제서야 몸을 돌렸다.
"… 어?"
그것은 모랫바닥에 배를 붙인 채, 자신을 향해 검은 눈알을 부라렸다. 마치 말라붙은 피딱지 같은 색깔의 등껍질은 태양 아래서 희번뜩하게 빛난다. 자세히 보니, 노르스름한 줄무늬도 있었다. 그렇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퉁퉁하고 뾰족한 앞 집게들과 날카롭게 곤두선 꼬리였다. 베루스는 그 호전적인 짐승이 서서히 꼬리를 높이는걸 보자마자, 그 속에 치명적인 맹독이 있음을 감지했다. 그 역시도 독을 취급하는 암살자였으니까 말이다. 베루스는 칼을 휘두르는 것 조차 잠시 잊고, 그 생물체를 내려다보았다. 곤충과 파충류의 어중간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그것은 한번도 보지 못한 생김새를 갖고 있었다. 사막의 작은 전사라고 해도 될 만큼 탄탄하고 위협적이다. 베루스는 처음으로 전갈을 보았다. 프츠츠-…. 전갈은 집게들을 딱딱거리기 시작했다. 원래 사막의 동물들은 기온이 낮아지는 밤에 활동하기 마련인데도 이 녀석은 겁 없이 나돌고 있다. 아니면 자신이 올라오다가 실수로 집을 건들였을 수도 있다. 베루스는 고민했다. 이렇게 전갈이 가까이 온 지금, 도망치면 당하게 된다. 그렇지만 어떻게 저 딱딱한 갑옷을 뚫는다? 그는 옷 안에서 단도들을 몇 자루 더 뽑고, 그것들을 왼쪽 손가락들 사이에 끼워 넣었다. 전갈의 투박한 등이 구부려지는 것이 보인다. 다리를 향해 달려온다!
"으챠!"
기운차게 소리를 질러주며 베루스는 전갈의 꼬리와 배를 이어주는 부분을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나 껍질이 단단했는지, 단도는 허연 긁힘만 낼 뿐이었다. 베루스는 발을 덮치려 드는 전갈을 가볍게 피했다. 그는 이번에는 전갈의 미간 사이에 단도를 하나 푹 박았다. 작전은 성공했다. 감각과 지구력을 잃은 전갈은 비틀거렸다. 베루스는 약간은 무모하게, 발에 힘을 주어 전갈을 걷어찼다. 전갈은 뒤뚱거리다가 뒤집어졌고, 결국 딱딱한 껍질들이 맞닿은 지점에, 좁기는 하지만 하얗게 드러난 속살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다. 푹! 파냐드 대거는 깔끔하게 껍질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탁한 핏방울과 함께 체액이 흘러나온다. 베루스는 서서히 멈춰가는 전갈의 발들을 보다가, 품 안에서 작은 플라스크(flask)를 하나 꺼냈다. 유리로 만든 작은 병으로, 용도는 짐작 가지 않았다. 그는 몸을 굽혀, 전갈의 축 쳐진 몸뚱아리를 받혔다. 치명적인 상처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살아있었다. 그것이 베루스가 원하는 바였다. 독을 채집하려면 아무래도 전갈이 살아있는 것이 효과적이니까. 베루스는 여태까지 가만히 있었던 에슈티를 향해 미소 지었다.
"도와주겠어?"
에슈티는 못 미더운, 그렇지만 호기심 섞인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에슈티는 베루스가 건네주는 도구들을 잡았다.
"내가 달라고 할 때 줘. 독을 빼내려고 하거든." "독극물도 취급했었어?" "응. 독뿐만 아니라 약초 라던지, 관심이 많거든. 살면서 유용할 때가 많더라."
베루스는 그 '유용한 경우' 가 거의 다 암살에 포함한다는 말은 슬기롭게 빼놓았다. 전갈 독이라면 희귀할 뿐 더러 치료하기도 힘들 터. 이왕 사막까지 왔으니, 이런 것도 갖고 가는 것도 좋았다. 베루스는 프로다운 손놀림으로 독을 짜내고 있었다. 피와 다른 액체들이 섞이지 않게 조심스레 노력하며, 그는 서서히 노르스름한 전갈 독을 유리병 안에 붓고 있었다. 에슈티는 그런 그를 심드렁하게 쳐다보며 신랄하게 한마디 툭 내뱉었다.
"조만간 전갈들도 천연기념물이 되겠는걸. 이런 용도로 죽이다니."
피식, 작게 웃었다.
"원래 목적은 채집이 아니었어. 처음에는…."
말끝을 흐렸다. 순간, 심장이 막혀오는 기분을 느꼈던 것이었다. 자신이 전갈을 죽인 이유는 자기방어 때문에도 있었지만, 역시 그 상황에서 생각나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었다. 오로지, 그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대거를 뽑았었다. 지금, 자신 앞에서 백금발 머리카락을 자유롭게 흩날리며 서있는 단 한 사람. … 정말, 이럴 필요까지는 없잖아. 머릿속이 삐걱거리는 느낌이야….
"핀서 좀 줄래?"
에슈티는 무신경하게 베루스의 말에 행동을 개시했다. 베루스의 거친 손끝이 에슈티의 부드러운 살결에 닿았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따뜻하다. 아까 에슈티를 등 뒤로 숨겨놓았을 때 느껴지던 온기와 똑같다…. 마음이 조여온다.
"다 끝났네."
청명하리만큼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베루스는 에슈티를 향해 싱긋 웃어준 후 유리 플라스크의 마개를 닫았다. 찰랑찰랑, 노란 액체는 그 속에서 흔들린다.
"…."
그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베루스의 경우에는 기어간다고 봐도 무난했다. 모랫바닥에서 한번 뒹굴면 온 거리를 다시 올라가야 했고, 걸음을 잘못 짚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에슈티가 인심 써서 도와주고는 있었지만, 손을 잡고 부축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대략 10분여를 미적미적거리는데 소비한 후, 에슈티는 두 팔을 하늘을 향해 올렸다.
"맙소사! 설마 이카드리보다 심할 줄이야 상상도 못했어. 안되겠다, 넌 너무 늦어."
베루스는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떨구었다. 꼭 같이 동행할 필요는 없었는데, 괜히 자신 때문에 에슈티만 늦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했다.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이번은 조용히 있기로 결정한 그였다. 에슈티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베루스의 보랏빛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여태까지 시선을 제대로 맞닿으며 상대방을 볼 기회는 없었기에, 기분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풀숲을 닮은 초록빛이 자신의 어둠을 밝히는 것 같다.
"베루스, 당황하지마. 알았지?"
그녀는 격려하듯 작게 속삭였다. 마치 편안한 자장가 같다고 생각하며, 베루스는 얼떨결에 얼굴을 끄덕였다. 에슈티의 목소리에는 어떨 때 강한 주문이라도 걸려 있듯, 무조건 동의하고 싶은 마음을 발현시킬 때가 있다. 짧은 망설임 후에, 에슈티는 팔을 가슴 높이까지 올렸다. 그리고 춤은 시작되었다. 손가락들의 축제. 아무리 화려한 무희들이 무대에서 발을 놀린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 에슈티가 그녀의 손가락들로 벌이고 있는 댄스와는 비교가 안될 것이다. 창백하고 날씬한 손가락들이 주점에서 한번 그랬듯, 허공을 찝어내고 그 끝을 둥글게 말아낸다. 베를 짜듯 정확하고 부드러운 놀림으로 공기에 점점이 악보를 그려내고, 보이지 않는 흐름의 파도를 불어낸다. 베루스조차도 그녀의 손목을 휘감는 바람의 실들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 태초적인, 아주 오래된 비밀을 꺼내는 기분. 그것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외국어와도 같고, 밟아본 적 없는 타지이다.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고귀한 영역. 에슈티의 손짓은 베루스에게 그랬다. 베루스는 그것이 일종의 수인(手印)이라고 짐작했지만, 에슈티가 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손동작은 본적이 없었다. 그녀는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듯, 거칠게 팔을 한번 뿌리쳤다. 베루스는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 매혹적인 춤에 두 눈이 묶인 채로. 아까만해도 땀이 줄줄 흐르던 목이 차가워진다. 희한하게도 냉기가 팔을 타고 오른다. 마법인 걸까? 베루스는 눈을 내리깔았고, 그제서야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빽 내질렀다.
"으엑!"
베루스는 허공에 떠있었다. 몸은 바닥과 적어도 5M는 차이 날 정도로 높이 있었다. 그는 당황해서 몸을 비틀어댔지만 곧 에슈티가 신경질적으로 쏘아 붙는 것이 들렸다.
"쉿! 조용히 좀 해."
그러고 보니 그녀도 날고 있었다. 에슈티는 두려워하는 베루스와는 달리 몸을 받혀주는 의자라도 있듯,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마치 이런 것은 천 번도 넘게 해본 듯, 무신경하다. 베루스는 할 수 없이 입을 다물었고, 둥실둥실 떠오르는 자신의 몸을 응시했다. 입가에서 미세하게 경련이 일어난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아무리 마법이라 해도 이렇게 높이 올라오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나 기분 하나는 끝내준다. 옷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손자국을 남기며 스쳐 지나가고, 울 새의 알처럼 푸른 하늘은 마음을 정화시켜 준다. 눈 앞에는 연갈색 모래로 만들어진, 끝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에슈티가 옆에서 눈을 찡그리다가 두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골치 아픈 일이라도 생겼다는 듯,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런. 바람을 일으켜 지형을 바꾸려고 했는데, 간섭이 심하군. 하긴 사막의 정령들은 좀 특이하니까." "으응?"
에슈티는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다시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허공을 한번 세게 두드려준다.
"!!"
지금, 눈 앞의 광경이 현실일까? 바람이,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 모래폭풍의 기미도 없었는데, 에슈티의 손짓-그것은 수인이라고 하기에 지나치게 간단했다- 하나로 바람은 모여든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자신이 향하는 곳을 향해 집결하는 바람. 깨알 같은 모래들이 섞여, 금빛 파도를 연상시킨다. 넘실넘실, 사막 위에서 굽어 치는 그 풍파(風波)는 빗자루라도 되듯 모래언덕들을 쓸어 담는다. 그렇게 순식간에 사막의 지형은 바뀌고 있다. 납작했던 곳에는 낙타의 등만큼이나 불룩하게 먼지가 쌓이고, 튀어나왔던 곳은 평평해진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여행에 유리하게 길을 터는 것으로 밖에 안 보인다. 이제서야 에슈티의 정체를 알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지금 그녀는 옆에 없다. 그러나 그녀가 만들어 준 보호막은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다. 그렇게 흔적을 남긴 채, 바람과 동화 되어있을 한 소녀. 에우라엘. 바람의 호의는 칼날과도 같다고 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쏴아아- 후두둑. 모래 알갱이들이 굵은 빗방울처럼 보호막을 때리며 떨어진다.
"에슈티…."
그녀의 이름을 지긋이 불러본다. 모래폭풍 앞에서는 너무 작은 목소리였을까. 대답은 없다. - 내게 이름은 없어. 의지만 있을 뿐. 네 의지는 무엇일까. 너는 왜, 나 같은 하찮은 인간 따위와 동행하려는 걸까. 너는 왜 나에게….
"에슈티!"
어느새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있었다. 일순간, 바람이 정지하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목구멍까지 감정이 치밀어올라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입술은 이미 잃어버린 목소리 대신에 그림자만 되뇌고 있다. 지금 어디 있는 거니?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와줘. 와줘. 이리로. 네게 내가 무슨 의미일지는 모르겠어. 그렇지만 내게 너는….
"… 멈춰."
말 한마디에 세상이 그대로 얼어버린다. 먼지 섞인 바람도, 다리가 달린 듯 모양을 바꾸던 사막도, 하늘의 태양빛도. 푸스스…. 보호막 조차도 눈앞에서 투명하게 부서져 내린다. 베루스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선 가볍게 허공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이만큼 길을 텄으면 됐잖아? 에슈티, 이제 가자."
마음의 침범은 돌이킬 수 없지만, 없었던 척 연기할 수는 있다.
짙푸르다고 생각했다. 사막을 묵묵히 감싸도는 농밀한 어둠. 그리고 냉소적인 미소를 띤 채 굽어보는 초승달 속의 여인이. 별은 차가운 공기를 껴안고 간헐적으로 떨린다. 눈동자의 깜박임처럼 불규칙이게 흔들리고 도깨비불 같이 파르스름한 빛을 낸다. 얼음개비의 땅이라도 되듯, 온통 식어버린 사막. 태양이 굴곡진 모래 언덕 너머로 자취를 감춘 세상은 싸늘하기만 하다.
내 마음속 잿빛 파도의 곶. 얼어버린 미로의 중심에는 달빛 머금은 장미가 가시를 치고 있다네.
말없이 입술만 움직이던 베루스는 고개를 비틀었다. 어깨에는 백금발 머리카락들이 새의 깃이라도 되듯, 어지럽게 흐트러져있다. 숨결이 느껴져. 네 따뜻한… 살아있는 숨소리. 마치 인간이라고 쉽사리 착각할 수 있을 만큼 생동감 있게. 내 심장소리는 네 두근거림과 하나가 되어 감히 부르지 못하는 노래를 뽑아내지. 그것만으로도 만족해.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고 있던 에슈티가 몸을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휴식이었다. 사막에서 지낼 마지막 밤. 이틀이 지나감과 동시에 셋째 날의 새벽인 지금은 몹시 추웠다. 해가 진 후로 겨울날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추워졌고, 끝내 베루스와 에슈티는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베루스는 일말의 씁쓸함을 느끼고 다시 한번 힘겹게 숨소리를 떼었다. 이 밤만 지나고 나면 자신은 산챠-라르고스에 도착한다. 그것은 즉, 에슈티와의 동행이 끝난다는 얘기였다. 그녀가 정령이란 걸 안지도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역시 숨겨둔 감정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뭘 그리 생각해?" "아무것도."
에슈티는 녹색 눈동자를 굴리며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재밌는 것이 생각나기라도 한 듯, 빙긋이 입가를 말았다.
"아침이 오면 이 차가움을 모두 남김없이 태워버리겠지, 태양은."
이 마음도 함께 재가 되어버리면 좋을 텐데.
"우리의 여행도 막을 내리네." "으응."
에슈티의 푸르스름한 옷자락이 옅게 들썩인다. 그녀는 주름을 살짝 두 손으로 쭉 펴 보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귀찮은 정령 하나 떼어내서 좋겠어?" "아, 아냐! 그런건…." "푸훗. 알았어, 알았어. 놀리려고 해도 저렇게 소심하게 굴면 미안해서 도통 못하겠다고."
말을 맺으며 그녀는 하얗게 반짝이는 머리카락들을 왼손에 모았다. 악기의 현으로 만들어진 듯, 고와 보이기만 한다. 베루스는 그녀의 손 사이로 새어 나온 머리카락을 한 가닥 매만지며 서글프게 웃었다.
"너란 에우라엘은 정말…." "뭐? 꺼벅 죽게 예쁘다고? 성격 끝내주게 좋다고? 아니면 샤프한 인텔리 족이라고?" "… 왠지 악담을 퍼붓고 싶군." "헤에, 너무하다. 벨군."
에슈티는 최대한 뾰로통하게 입술을 오므리며 그녀 나름대로 지어낸 '벨군'이라는 애칭으로 베루스를 불렀다. 그게 싫지는 않은지, 베루스는 그저 보랏빛 눈동자를 말갛게 뜬 채 뿐이었다.
"약간 이르긴 하지만, 여태까지 고마웠어." "뭘. 이 정도로 고마워하다니, 날 너무 얕보는 거 아냐?" "내가 어떻게 감히 고귀한 정령을 얕보겠어? 안 그래?"
베루스는 과장된 손짓을 지어가며 능청을 떨었지만 그의 눈 속에 깊이 박혀있는 망설임을 에슈티가 놓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잠시 옛 향수에 젖어 들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미 죽어버린 그와 분명 성격은 판이하게 다른 베루스였지만 나름대로 공통점은 있었다. 아니, 실로 말하자면 이 땅을 밟아가는 모든 인간들 속에서 그를 발견 할 수 있었지만, 베루스 같이 정반대인 사람에게서까지 그의 기척을 느껴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에슈티가 기억하는 그는 오만했다. 그 자만심이 끝내 그에게 약속된 파멸을 불렀지만, 에슈티는 그의 당돌함을 좋아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너, 나한테 말하고 싶은 것 있지?"
에슈티가 직설적으로 말해버리자 베루스는 마치 기다렸었다는 듯 솔직하게 대답했다.
"전부터 궁금했어. 넌 왜 나를 돕는 거야? 난 네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물어볼 줄 알았어. 오히려, 더 일찍 묻지 않은 게 이상했지."
에슈티의 어조는 한층 가라앉아있었지만, 굉장히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도 같은 표정이랄까. 그녀는 베시시, 아이답게 웃었다.
"간단해. 그건 단지 네가 나의 '두 번째'였기 때문이야." "'두 번째'라니?" "그건."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숨을 깊이 들이 쉬었다.
"정령의 생(生)에는 최대 세 명까지의 의미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어. 그러나 워낙 인간들과 정령들 사이의 교류가 힘든 만큼 드무니, 고위 정령이 아니면 보통은 의미 있는 사람들 없이 살아가지."
에슈티는 눈에 띄게 씁쓸해진 얼굴로 베루스를 마주보았다.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예전, 자르칸의 밤거리에서 딱 한번 본적 있었다.
"나에게는 '첫 번째'가 있었어." "그런…." "그는 내게 소중했어. 정말, 난 운이 좋았지. 그런 대단한 인간을 '첫번째'로 삼게 되다니. 그렇지만 난 그를 이해하지 못했어. 그의 자신감을, 눈빛을, 영리함을 좋아했지만 끝내 우리는 실망감만 남긴 채 반목하고 말았지. 서로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아서였어."
에슈티의 잎사귀 빛 눈이 어둠 속에서 묘하게 빛났다. 그것은 말로 형용하기는 힘든 감정을 담고 있었다.
"거짓말 하지는 않겠어. 나는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그를 미워했어. 그리고 결국 그것을 후회하게 되어버렸지만. 이제, 그가 죽은 지 이백 년이 지난 후에 난 내 '두 번째', 즉 너를 만났지."
어쩐지 에슈티의 말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마치 고의로, 내용의 일부분을 빠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베루스는 불평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에겐 과분한 사람이었으니까.
"난 네 '두 번째' 가 될 자격, 없어. 특별한 능력도 없을 뿐 더러, 난 그저 네 말대로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더러운 짓을 손수 해주는 암살자야." "'두 번째' 라는 건…. 그런 걸로 정하는 게 아니야. 그냥 보는 순간, 딱 알게 되어버리는 거지. 네가 왜 내 '두 번째'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너와 나 사이에는 인연이 닿아있다는 증거야. 지금은 이렇게 친구로 만났지만, 다음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보게 될까. 짐작밖에 할 수 없어."
베루스는 입을 다물었다. 말할 수 없었지만, 뼛속에서부터 잠재되었던 예지가 들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다시 만나게 되겠지. 그치만 절대로 다시는 이렇게 웃으며 서로를 마주 볼 수는 없을 거야. 다시 만날 때, 너와 난….
"…."
이미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던 에슈티를 잡았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그녀의 손목은 가늘기만 했다. 에슈티는 설명하란 듯이 눈썹을 치켜 세웠다. 그에 답해, 베루스는 희미하게 웃음을 자아냈다.
"나는 아마도 너를 좋아하지만…."
바람이 불었을까. 모래가 잔뜩 낀 바람은 말까지 가로채어가 버린다. 베루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에슈티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자신보다 몇배는 현명한 그녀일 테니까. 그러니까, 분명….
"아, 벨군…?"
에슈티는 베루스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중얼였다. 그러나 그녀 역시도 머뭇거리다가 이내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 역시도 이미 감지하고 있는 걸까. 이미,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퇴색되어버린 감정들이다. 방금 전이 아닌, 까마득하게 오래 전의 일 같은. 흰 손톱 같은 초승달이 아로새겨져 있는 밤하늘 아래 벌어진 단 하루의 세레나데. 그것은 마지막을 노래하고 있었다.
BGM- Love
안녕하세요! 라피엘입니다.
굉장히 굉장히 오랜만에 올리는 리퀘단편이군요.
쓰느라고 상당히 애먹었습니다;
주제도 없을 뿐더러, 상당히 애매한 리퀘스트였고, 계속 썼다가 안썼다가 하니 맥이 끊겨서;
흐음.. 잘 쓰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리 맘에 들지는 않군요.
그치만 아까워서 올리겠습니다[..]
상당히 긴 분량입니다.
전에 내용이 기억 나지 않으시는 분들은 유감스럽다는 말밖에[...]
첫댓글 재미있었는데...주기좀 줄이지그래--; 여튼 즐감!
아아, 스고이乃 너무 멋져!! 건필!!
와아아아아/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