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라텍을 나온 우리 둘은 뒤풀이 겸 인근 호프집에서 500CC 생맥주를 한잔 씩 마시고 있다. 아직 완연한
봄은 아니라서 제법 스산한 날씨에 날씨는 흐리고 조금씩 봄비가 내리고 있다. K 가 말을 꺼낸다.
“로즈가 이제 와서 나에게 다 큰 아들을 데려 가라고 하네요” “맙소사!” 알다시피 내가 지금 아들과 같이
생활할 처지가 되는가요?” 깊은 한 숨을 쉰다 K 는 지금 서울 마장동의 허름한 원룸에서 혼자 살고 있다.
나는 담배를 하나 꺼내 들었다. K 에게도 하나 건네고 둘은 시가에 불을 붙였다. 바로 얼마 전 인가 K 와 나는
장안평의 어떤 카바레에서 K 와 함께 있는 데 우연히 로즈 를 마주친 적이 있다. 첨에는 그녀가 로즈 라는 사실
을 몰랐다. 파트너 사이인 듯한 데 훤출한 키에 겉모습만 그럴듯한 어떤 남자와 함께 있었다.
K 가 먼저 미소를 지으며 아는 척을 했으며 몇 마디 의례적인 얘기를 나누던 중 K 는 갑자기 옆에 서 있던
나를 소개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쪽은 내 선배님 야” “아 로즈 라고 해요” 그러고는 바로 각자의 자리로 돌아
갔었다. 아무래도 어디 콜라텍에서 인가 몇 번 안면이 있었음 직한 인상이었다. 따지고 보면 춤의 세계는 생각
보다 그 바닥이 좁으니가...
중년을 한창 넘어선 ‘로즈’ 는 다소 통통한 몸매에 키가 좀 작은 편이었고 장미색 계통의 붉은 댄스 의상을 입고
있었다. 눈가의 아이쉐도우 와 빨간색의 립스틱을 바른 얼굴의 화장은 좀 짙었다. 나이보다는 좀 젊게 보이는
외모와 인상은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냉정하고 앙칼진 성격의 여자 같았다. 심사가 틀린다면 언제든
충분히 상대방 남자하나 쯤은 말로라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모습이랄가?
이젠 내 얘기도 해보자. K 와 다르게 나는 집에서 동거하는 내 처가 있다. 내 아내도 춤을 즐긴다. 애초에 내가
권유해서 나보다도 훨씬 늦게 배우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남 못지않게 추고 있는 듯하다. 한 때는 잠시 구민회관
같은 곳에서 함께 댄스강습을 받은 적도 있지만 그 후 무슨 이유에선 각자 다른 곳에서 춤을 배웠다.
내 처는 직장을 가지고 있었고 몇 년 전에 퇴직을 했다. 전직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서 정부에서 나오는 적지
않은 공무원연금으로 그럭저럭 나름대로 자기 생활을 즐기고 있다. 우리는 어느 때부터 인가 집에 들어와서는
적어도 서로 가급적 춤 이야기를 포함한 각자의 사생활 얘기는 모르는 척하는 게 불문율이다.
나는 현재 가끔 함께 춤을 추는 여자파트너가 있지만 내 처도 남자파트너가 있는 줄은 확실치 않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녀도 그녀의 남은 인생을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으니가...
둘 다 춤을 추지만 콜라텍이나 다른 카바레 같은 댄스홀에서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
나는 주로 대한민국 댄스의 메카라고도 불리는 강북 장안평이나 강동 쪽 근처에서 주로 놀고 있고 내 처는 영등포
시장과 구로공단 쪽에서 춤추고 있다. 서로의 노는 구역이 다르다. 솔직히 그런 곳에서 서로 맞부딪치기라도
한다면 둘 다 모두 자연스럽지는 못할 거다. 그래서 가급적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나는 10년여 전 수십년간 다니던 직장에서 원치 않게 명예퇴직을 했다. 그 후론 떳떳한 직업을 갔지 못했고
거의 내 처가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을 했다. 명퇴금으로 받은 적지 않은 돈과 그동안 내 처도 모르게 숨겨 놨던
주식투자금으로 내 용돈을 충당해 왔다.
그래도 퇴직 후 최소한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돈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이나마도 점점 통장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적어도 아직까지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취미는 댄스인 데 가진 돈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계속 춤이라도 즐기며 살아가려면 최소한의 돈은 있어야 하는 데...” 나도 모르게 당장
뾰족한 대책이 없는 막연한 걱정을 하며 한숨을 쉰다.
다만 이제 나이도 제법있고 춤 출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가? 물론 가끔은 남들과 같이 여행과
야외로 하이킹도 가고 친구도 만나지만 아무래도 주말에 가끔 동호회 모임의 댄스홀에 가서 내 여자친구와 춤을
추는 것만 못하다. 좌우간 아직은 춤을 출 수 있어서 다행이다. 오늘 밤 이 시각에 내 처가 집에 있는 줄은 모르지만
나는 늦게라도 집에는 들어갈 것이다.
늦은 시각이지만 내 처한테 스마트 폰으로 연락을 취해 본다. “지금 집에 있는 거야?” 그러나 어디서 뭘 하는 지
응답이 없다. 내 여자파트너에게도 건성으로 문자를 보낸다. “지금 K 와 함께 있는 데 시간되면 나와서 술 한잔
할 수 있어?” 바로 연락이 온다. “오늘 밤은 피곤해서 그냥 집에 있을래요” “알았어, 낼 다시 열락할 게...” 라고
나도 바로 회신해 준다.
내 여자파트너도 혼자 사는 여자다. 자식들은 있지만 다들 출가해서 따로 살고 있다. 분명 자식이 있으니 남편도
있었을 거고 지금은 분명 혼자란다. 이혼? 별거? 아니면 사별?... 혼자인 이유는 아직 물어보지 않았다. 나이는
나보다 몇 살 어리지만 그녀 역시 춤에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
왠지 오늘 밤은 홀가분하게 K 와 단둘이서 이런저런 인생사 얘기로 밤늦게 까지 술을 마시고 싶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오면 나는 내 여친을 불러내서 서울 어딘가의 콜라텍에서 또 춤을 출 것이다. 지루박과 블루스와 탱고도
추고 가끔 댄스스포츠 종목인 룸바와 자이브도 출 것이다.
뭐 나이 들어 앞날의 특별한 비전은 없지만 “인생 게 뭐 별 거 없다. 그냥 하루하루를 즐겁게 사는 수 밖에...” 지금
내 처지에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여자파트너와 가끔 주말에 만나 즐겁게 춤추는 일 뿐이다.(끝)
※ 주 : 여기에 나는 내가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길...단지 1인칭 픽션일 뿐입니다,
원래 글이란 상상 속에서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누구나 거짓말을 하게 되고 그 결과로 욕도 먹고 비난을
받지만 글 쓰는 사람들의 거짓말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게 다른 점이죠.
왜냐면 글이란 거짖말을 전제로 쓰게 되고 거짖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더 재미있게 되니까요. 이 글은 지난
주말 그 원수 같은 신종 코로나로 집에만 있으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오늘 이제사 내 할 일
겨우 끝내고 시간되어 올려 봅니다. ㅎ~
첫댓글 윈드님의
게시글을 읽고
입가에
살짝
미소를~~~~~^^*
ㅎ. 방장님의 미소의 의미는 요 ?
별 건 아니겠지만```
심심한데 읽을거리 주셔서 감사해요 ㆍ
인생 별거 없죠 ㆍ한치 앞을 알 수 없는데 기왕 사는것 즐겁게 ᆢ
밤늦게 읽어 주셔서 저도 감사해요.
늘 건강에 유의하시고요```
즐독 했습니다
언제나 술자리 단짝은
변함없이 "처음처럼" 앉아있지요
처음 느낌을 간직 하고픈건지
처음이라 느끼고픈건지
강렬함 보다는 순하고 부드러움에
그녀를 찾는답니다 "처음처럼"
항상 활기찬 이곳 댄스방의
보루 역할을 해 주시는 고죽님...
늘 고마움을 느끼고 있고요.
앞으로도 처음처럼 잘 부탁드립니다.
호호호~~~순간 착각했습니다.
윈드님 자서전인줄 착각했어요.
단지 픽션일 뿐인데도 이야기 전개가
드라마 한 편 보는 듯 재미 있었어요.
다음에 또 올려주세요... 윈드 작가님!
재밋게 읽으셨다니 다행이고요.
사실 글 쓰는 건 조금은 고통이죠.
그 고통을 즐기는 게 글 쓰는 거고요.
댄스는 즐거움을 즐기면 되는 것뿐인 데...
그래서 전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주저없이 춤을 선택할 겁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