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말의 화가 포화가 신품이라 극찬했던 민영익의 묵란 / 우리에게 이런 작품이 있었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추사의 묵란 - 화제로 판교의 시를 인용하여 썼지만 난 잎위의 점들은 무엇일까?
아침 이슬을 그린 것이다. 독특하지 아니한가?>
추사의 <불이선란도> - 그림을 서예로 표현했다는 평도 있지만, 가장 아름다운 꽃,
난의 마음을 추상화하여 표현한 독특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선조의 맏 딸 정명공주의 글씨 - 당파 싸움 하지 말고 빛나는 정치를 하라는 가훈인데 중국 어느 여인의 글씨가 이렇게 힘이 넘칠수 있을까? 조선의 한석봉체가 안진경체보다도 더 힘이 넘치지 않는가? 선조도 글씨를 잘 썼지만 한석봉체를 좋아하셨다고 한다. 정명공주도 아버지에게 글씨를 배워 한석봉체를 이만큼 쓰게 되었는데 자식들에게는 일체 남의 이야기를 하지말라는 교훈을 자녀들에게 남기셨다고 한다. 공주께서는 엄한 가정교육을 하셨으니 이런 가훈을 지켜 자손들이 당파에 흔들리지 않고 대를 내려갈수록 점점 잘 되어 한 집안에서 최대의 과거급제자를 낸 것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홍중효 홍양호 홍봉한 홍국영 홍만선 홍석주 조선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홍길주, 혜경궁 홍씨, 정조의 사위 홍현주, 한일합방 후 최초를 자결한 홍범식, 미국의 유명한 정치학교수 홍충식, 등등 수많은 학자, 애국자들을 냈는데 현대에 와서는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도 공주의 후손이다. 글씨도 글씨지만 한 어머니의 바른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금 떠올리게 해 준다.
(중국의 풍죽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
<중국의 묵란과 다르다.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 졸작중에서>
<한국에선 장미 잎을 그릴 때 잎 줄기를 꼭 그려 넣는데 중국에서는 장미 자체를 잘 그리지 않고 간혹 그려도 잎 줄기도 넣지 않는다 -졸작>
중국이란 대국에 한번 가 보는 것이 꿈 중의 하나였다.
웃대 할아버지들 중에 여덟분이나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셨지만 그 어른들이 청나라에
가셔서 무엇을 보시고 무엇을 느끼셨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양화와 서예의 종주국인 중국에 가서 그림과 서예를 겨루어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 와서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된다는 생각에 본격적인 연구는 못하고
차일 피일 미루다가 세월만 3년 반을 흘려보낸 셈이다.
와서 보니 한국의 예술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비슷해 보이면서도 같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비슷해 보이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묵란 같은 것도 중국화가들은 그저 보이는 대로 그리지만
우리나라 묵란은 그 난의 의미와 심성을 그리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명한 추사 김정희는 꺾이는 난 - 난을 추상화로 그린 것이다.
어렸을 때 선친께서 난을 그리되 보이는 난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난의 마음을 그려야 한다 -
하시었는데 나중에야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난을 그리되 난의 정신을 그리라는 것이다.
중국화가나 중국 미술 애호가 들이 내 그림을 은근히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 사람치고 묵란이나 묵죽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다.
자주 다니는 고완상에 그림을 표구하러 가면 좌우로 즐비한 가게 주인들이 내 화통속의 그림을 보여달라 조른다.
보여주면 "흔 하오!" 하고들 외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내어 사지는 않고 내가 고완품을 좋아하는 줄 아니까 자기네 고완품과 바꾸자고 한다.
이래서 얻는 돌이며 옥이며 자기 벼루 낙관 심지어 화병까지 수두룩 하다.
몇몇 가게들은 내 그림을 표구해서 걸어놓고 있다.
어떤 가게 주인은 내 그림을 빼앗고는 그 대신 밤톨만한 옥을 목에다 걸어준다.
마지 못해 받긴 했으나 처음 매보는 옥이라 거북살 스러운데 아내도 당장 벗어버리라 한다.
그러나 줄을 어떻게 줄였는지 쉽지 않고 오히려 벗기가 성가시어 한 여름을 그래도 지내고 말았다.
그러다가 한번은 안순루에 있는 고완상가에 갔은데 머리에 소나무가 새겨진 붉은 벼루를 보고 눈이 뜨거워졌다.
사고 전서를 낸 중국 최고의 석학 기윤이 우리 할아버지 (양자 한자 - 정조때 양관 대제학을 지내신 분)가 사신으로 오셨을 때 아주 귀한 홍연(붉은 벼루)를 선물로 주셨다는데 그 벼루 생각이 나서 이리 저리 쓸어보고 있는데 주인이 처음에는 5천원을 부르다가 특별히 4천원에 주겠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망서리고만 있는데 주인이 내 목을 살피더니 그게 뭔지 좀 볼 수 있느냐고 묻는다. 셔츠 단주플 풀어
옥을 보여 주었더니 풀랫쉬로 비쳐보기도 하고 돋보기로 살피기도 하더니 나중에는 벼루하고 바꾸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마음에 드는 벼루를 또 하나 얻게 되었다.
대원군의 손자사위인 구룡산인은 유명한 화가였지만 평생 그림을 팔아본 적이 없다고 들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데 왜 그림을 파는가?
마음에 든 사람이면 그냥 준 것이다.
나도 그 흉내를 내어 왔다. 그래서 그림이나 글씨를 큰 맘 먹고 주었는데 얼마 지나서 보면 내가 준 그림이나 글씨가 사라지고 없다. 남은 큰 맘먹고 공을 들여 그려준 그림을 제대로 간직하지 못해 잃어버리다니! 얼마나 서운한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꼭 표구를 해서 주거나 표구를 한다는 약속을 받고 그림을 준다.
한번은 우리가 인터내셔널 파티를 할 때 신세를 진 분이 있어서 그림 몇 점을 보여주고 고르라 했다. 부인은 장미를 남편은 묵란을 를 골랐다. 그리고 <모란을 그리다가 무궁화가 되었네!> 하고 한문으로 화제를 단 내리닫이로 긴 꽃 그림도 보여주었다.
주인은 그걸 달라 한다. 그러나 이건 안 된다고 했다. 화제가 얼마나 재미있는가?
내가 모란을 배우는 과정이 드러난 작품이 아닌가?
이걸 옆에서 본 중국 직원이 얼마전에 결혼을 했는데 그 그림을 갖다 걸고싶다 - 고 주인이 통역을 해주었다.
나는 그냥 주었다. 주인이 탐을 내어도 안 주던 그림을 중국직원에게 준 것은 중국에 우리 것을 소개하고 싶어서였다.
한국에서 일부러 와서 중국에 우리 문화를 소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에 살고 있다.
우리가 중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겠지만 그 중 하나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 문화를 중국에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번 우리 것을 알리기 위한 <Rose Garden Party>에서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