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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로 수원월드컵경기장 등 꿈이 구장 10곳이 국내에 새로 지어졌다. K리그에겐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선물이었다.(사진 선원익) |
K리그는 2002년 한일월드컵의 수혜자다. 전국에 세계적인 수준의 경기장 10곳이 새로 지어지면서 FC 서울, 수원 삼성 등이 홈경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1960,70년대의 종합운동장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은 경기장이다. 한 축구 관계자는 “(한국이) 월드컵을 개최하지 않았다면 축구경기장은 야구장보다 시설이 더 낙후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월드컵 이후에도 K리그 경기장 시설은 꾸준히 좋아졌다. 올 시즌을 앞두고 포항 스틸야드에는 본부석 철망이 사라졌고 부산아시아드경기장에는 가변 좌석이 설치됐다. 경남 FC와 인천 유나이티드는 2010년 이후 전용구장을 갖게 된다. 1983년은 프로축구 원년이다. 1983년 5월 8일 오후 3시 수퍼리그 개막전이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다. 단체종목으로는 프로야구에 이어 두 번째로 프로화를 선언한 프로축구를 관전하기 위해 2만2,420명이 경기장을 찾았다.
좌석이 따로 없는 관중석에는 관중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프로축구 원년 멤버로 활동했던 이강조 광주 상무 감독은 할렐루야와 유공의 개막전을 잊지 않고 있다.
당시 경기에 유공 소속으로 선발 출전한 이감독은 “프로축구의 첫 단추를 끼는 의미 있는 경기였기 때문에 부담이 컸다. 선수 대기실에 있는데 긴장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며 “그라운드에 나서면서 구름같이 몰린 관중을 봤다. 짜릿했고 설레었다. 이렇게 좋은 여건에서 뛸 수 있다는 데 감사했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감독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현재 경기장 시설과 비교하면 잔디, 전광판 모든 게 열악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그게 최고의 시설이었다.”
맨땅 축구“경기장은 천연잔디 구장으로서 크기는 국제축구연맹(FIFA)이 정하는 규격에 의한다.-제 5조 경기장 기본 요건(2003년)” K리그가 출범한 이후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경기장 관련 규정 가운데 바뀌지 않은 게 한 가지 있다.
‘반드시 천연잔디가 깔린 경기장 위에서 경기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초반 국내축구의 기반시설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천연잔디가 깔린 경기장은 전국적으로 몇 되지 않았다. 아마추어 전국대회 결승전은 대부분 인조잔디가 깔린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다.
연맹은 K리그를 국내축구 최고의 무대로 만들기 위해 엄격한 잣대를 뒀던 것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당시 천연잔디를 지금의 사계절 잔디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국형 잔디로 질이 좋지 않아 선수들이 볼을 찰 때마다 잔디가 덩어리째 날아갔다. 한 경기가 끝나고 나면 그라운드 곳곳이 파였다. 한 축구 관계자는 “잔디는 밟으면 더 자라야 하는데 오히려 죽어 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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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축구 초창기 경기장은 모든 게 열악했다. 천연잔디 질이 좋지 않아 경기력에 큰 영향을 끼쳤다.(사진 제공=부산 아이파크, 대한축구협회) |
시즌 초인 3,4월과 시즌 막바지인 10월 이후에는 잔디가 죽어 그라운드가 누렇게 물들었다. 녹색 페인트를 칠해 잔디를 푸르게 하는 임시 방편도 썼다.
대한축구협회는 1999년 3월 28일 브라질과 친선경기를 앞두고 대외적인 이미지를 고려해 잠실올림픽주경기장 잔디에 녹색 페인트칠을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K리그에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올스타전 등 주요 경기 외에는 그냥 누런 그라운드 위에서 경기를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이전까지 국내 최고 수준의 경기장으로 꼽힌 포항 스틸야드와 광양축구전용구장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K리그 팀들이 사용하는 홈경기장에는 모두 한국형 잔디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1980년대에는 지역연고제라는 게 없었다.
모든 팀이 여러 도시를 돌며 경기를 했다. 유랑 구단의 장터 축구였다. 한 곳에서 하루에 두 경기를 치르다 보니 두 번째 경기가 열릴 때면 그라운드 상태는 엉망이었다.
이태호 부산 동의대 감독은 “연이은 경기로 잔디가 성한 데가 없었다. 비까지 내리면 그라운드가 질퍽거려 제대로 뛰기도 힘들었다”며 “연맹의 무리한 행정도 문제였다. 축구붐을 조성한다며 시설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은 중소도시를 돌아다녔다. 또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연속 경기를 해야 했다”고 말했다.
천연잔디 구장이라면 당연히 천연잔디가 촘촘하게 심어져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예전엔 그렇지 못했다. 면적당 잔디보다 흙의 비율이 더 높았다.
거의 맨땅 축구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선수들이 최상의 경기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웠다. 패스를 받으려 하면 발 앞에서 갑자기 볼이 튀어올랐다. 볼은 발에 맞고 그대로 터치 라인 밖으로 나갔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해당 선수를 질타하지 않았다. 그라운드 상태가 나빠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정운 성남 일화 유소년팀 코치는 “그라운드에 잔디보다 맨땅이 더 많았다. 10경기 가운데 3경기는 그런 상태에서 볼을 찼다”며 “그렇다고 시에게 구장을 빌려 쓰는 처지에서 잔디를 교체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사용해야 했다. 기술 축구가 뿌리내릴 수 없는 척박한 환경이었다”고 말했다.
심판도 힘들기는 선수 못지 않았다. 정확한 판정을 내리는 데 어려움이 따랐다. 선수가 태클을 하면 그라운드에 뿌연 먼지가 일어 파울인지 정상적인 태클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황선홍 부산 아이파크 감독은 “잔디보다 흙이 많다 보니 상대 선수가 깊게 태클을 해도 먼지 때문에 심판이 못 알아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권종철 전 국제심판은 “선수들의 불평을 이해한다. 그렇지만 심판도 힘들었다. 태클은 고사하고 볼을 뺏기 위해 선수 2,3명이 달라 붙어도 먼지가 뿌옇게 끼었다. 그 상황에서 누가 파울을 했는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K리그 구단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안은 잔디구장 확보였다. 전용연습장이 없던 시절로 홈경기장 외에 천연잔디가 깔린 연습장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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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14개 팀은 모두 야간경기를 치를 수 있는 홈경기장을 쓰고 있다. 그러나 10년 전만 해도 조명탑은 쉽게 지을 수 없는 경기장 시설이었다.(사진 김수홍) |
홈경기장도 시 소유여서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거의 맨땅에서 훈련을 했다. 거래 은행의 허락을 받아 은행 연수원에 있는 천연잔디 구장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구단으로선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다 1999년을 앞뒤로 국내 경기장들의 잔디 교체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 준비와 함께 한국형 잔디가 아닌 외국형 잔디를 깔아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K리그 구단들의 홈경기장에는 켄터키 블루그래스 등 사계절 양잔디가 깔렸다. 연맹이 규정을 내세워 구단들에게 사계절 잔디 교체 작업을 강제한 것은 아니다.
경기장 잔디에 관련한 연맹의 규정은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냥 ‘천연잔디 구장’이면 된다.
야간경기는 꿈의 경기“경기장에는 밝은 조명장치를 설치하여야 한다. 홈팀은 조명장치의 이상 유무를 사전에 확인하고 고장 시에는 신속히 수리하여야 한다.-제7조 조명장치(1995년)” 요즘 팬들에게 야간경기는 익숙하다. 평일이거나 무더운 여름에는 축구 팬들의 관전 편의와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야간경기를 한다. 그렇지만 10년 전만 해도 야간경기는 꿈의 경기였다.
1980년대의 경우 ‘조명시설을 켜면 전력 소비가 커 경기장 주변이 정전될 수 있다’며 정부에서 연맹에 야간 경기 금지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한 축구 원로는 “현역 시절 야간 경기에 뛰어 본 게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1990년대 조명탑이 설치된 경기장은 한정돼 있었다. 안양 LG의 홈경기장인 안양종합운동장과 천안 일화의 홈경기장인 천안오룡경기장에는 1996년까지 조명시설이 없어 야간경기를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안양종합운동장은 1997년 5월 35억 원을 들여 조명탑을 세웠지만 오룡경기장은 천안이 성남시로 연고지를 옮긴 1999년 12월까지 조명탑이 없었다.
경기장에 새로운 시설을 만들거나 보수할 경우 비용을 시와 구단의 모기업이 분담한다. 시에 잘못을 따지긴 어려웠다.
건설 비용으로 몇 십억 원이 필요한 데 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돈이었다. 재정 자립도가 낮았던 천안시로서는 더욱 지갑을 열기가 어려웠다.
조명시설이 없는 경기장은 시즌 일정을 짜야 하는 연맹에게도 골칫거리였다. 연맹은 혹서기에는 밤경기 위주로, 혹한기에는 낮경기 위주로 하며 평일에는 야간경기를 기본으로 경기 일정을 짰다.
따라서 조명시설이 설치되지 않아 야간경기를 치를 수 없는 팀들은 무더운 여름과 평일의 홈경기를 치르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런 문제 때문에 제비뽑기로 승패를 가리는 K리그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1998년 8월 22일 천안과 전남 드래곤즈의 경기가 오룡경기장에서 열렸다. 연맹과 천안구단은 날씨를 고려해 경기 시작 시간을 최대한 늦춰 오후 5시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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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가 열리는 종합운동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좌석이 모자라면 일부는 트랙에 앉아 관전하곤 했다.(사진 김수홍, 송기찬) |
천안은 전반 32분 이상윤의 페널티킥 골로 앞서 나갔으나 후반 40분 전남 김인완에게 동점골을 내줬다.
정규경기에 이어 연장전에서도 1-1로 비긴 두 팀은 승부차기에 들어갔다. 연맹은 그해 축구 팬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정규경기에서 비길 경우 연장전과 승부차기를 차례로 해 승패를 가렸다.
그런데 두 팀의 다섯 번째 키커까지 모두 승부차기를 성공했을 때 이미 경기장 주변은 어두웠다. 그 경기의 부심을 맡았던 안상기 심판은 “경기를 늦게 시작한 데다 그날 따라 날씨까지 흐렸다.
골키퍼가 볼이 잘 안 보이니까 승부차기를 할 때 대충 넘어지는 시늉을 했다. 어떻게 해서든 승패를 가려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날이 어두워 낭패였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결국 경기감독관과 심판, 두 팀 감독 합의 아래 제비뽑기로 승패를 가리기로 했다. 경기감독관이 승리와 패배를 적은 흰 종이를 접어 상자에 넣었고 두 팀 대표선수가 나와 이를 뽑았다.
천안의 장대일이 승리가 쓰여진 종이를 뽑아 승점 1점을 챙겼다. 장대일은 “개운치 않은 승리였다. 제비뽑기로 승패를 가린 건 내 평생 처음이었다. 후진국에서나 벌어질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연맹과 구단은 제2의 제비뽑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조명장치 관련 규정을 강화했다.
그동안 없었던 조명장치의 밝기에 대한 규정도 2003년 새로 만들었다. 야간경기를 위해 최소 1,200룩스의 조도가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한일월드컵을 치르면서 알게 된 FIFA의 규정을 참고한 것이다.
이전에는 경기장을 환하게 비춰 줄 밝은 조명장치만 있으면 된다는 막연한 내용이었다. 연맹은 지난해 이를 1,500룩스로 상향 조정하면서 만약의 사고에 대비해 1,000룩스 이상의 조도를 갖춘 비상 조명장치를 구비할 것을 명시했다.
트랙에 모인 관중“홈팀은 양호한 상태로 홈경기를 실시할 수 있도록 경기장을 유지, 관리할 책임을 진다.-제 4조 경기장의 유지(1999년)선수들이 누비는 그라운드는 최우선적으로 안전이 확보돼야 한다. 그러나 지금껏 사고율 0%는 아니었다. 자주 있지는 않았지만 크고 작은 사고가 꾸준히 이어졌다.
선수들의 신변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위협 요소는 관중이다. 과격한 팬들은 자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오는 돌출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한 선수는 “터치라인 바로 옆에 관중이 모여 있으면 불안하다. 경기를 할 때 가장 무서운 건 관중”이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육상 트랙에 관중이 들어서는 일이 꽤 있었다. 관중이 너무 많이 들어와 스탠드에 앉을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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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스틸야드는 2002년 한일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국내 최고의 축구경기장이었다.(사진 제공=대한축구협회) |
구단과 연맹에서는 어쩔 수 없이 관중들을 트랙에 앉혀 경기를 보게 했다.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인데 관중이 경기장 옆 트랙에 진입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8년 10월 28일 울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울산 현대와 수원 삼성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이다.
당시 울산시의 축구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울산은 10월 21일 벌어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포항 스틸러스에 2-3으로 졌으나 사흘 뒤 열린 2차전에서 골키퍼 김병지의 헤딩골로 2-1로 이겨 1,2차전 합계 4-4가 된 뒤 승부차기에서 4-1로 승리해 극적으로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다.
경기 시작 전부터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울산공설운동장은 만원을 이뤘다. 경기가 시작되고서도 관중은 끊임없이 들어왔다.
좌석이 없었기 때문에 관중들은 최대한 좁혀 앉아 경기를 봤다. 그래도 스탠드에 있는 관중들은 나은 편이었다. 경기장 밖에는 입장하지 못한 축구팬으로 인산인해였다.
그러다 후반 들어 경기장 출입구의 철제 문이 무너지면서 팬들이 밀물처럼 그라운드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때문에 경기가 잠시 중단됐고 밀려들어온 팬들이 연맹과 울산 구단의 통제 아래 트랙 주변에 앉은 가운데 경기가 재개됐다.
어수선한 경기장 분위기에 선수들이 동요했다. 특히 홈팀 울산 선수들이 더 흔들렸다. 일방적으로 밀리던 수원이 경기의 주도권을 쥐며 울산을 몰아붙이더니 후반 16분 신홍기의 프리킥 골로 1-0으로 이겼다.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0-0으로 비겨 수원은 창단 이후 첫 우승을 차지했다. 예상치 못한 팬들의 그라운드 진입이 우승팀의 향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당시 경기의 기록원이었던 연맹 신명준 경기지원팀장의 설명이다. “팬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안전 관리의 문제였다.
입장권을 구입한 팬들이 왜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하느냐고 항의했다. 당시는 입장권 판매 통합전산망은 물론 계측도 없던 시절이다.
매표소에서 마구잡이로 입장권을 팔다 보니 수용 제한 인원을 넘어섰다. 철제 문이 무너진 마당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팬들을 트랙에 앉힐 수 밖에 없었다.” 그 경기 이후 관중이 터치라인 밖에서 경기를 보는 일은 사라졌다.
연맹은 선수와 관중의 안전을 위해 관중은 반드시 경기장 좌석에서만 관전하도록 했다. 그리고 사고가 일어나면 홈팀이 모든 책임을 지도록 했다.
현재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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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도 흥행 상품이 됐다. 이제 포항 스틸야드의 명물이었던 철망을 보기 어렵다.(사진 제공=창원시청, 김수홍, 이창곤) |
“팀은 연고지역 내에서 연맹 규정에 부합하는 경기장을 선정하여 연맹에 통보하여야 한다. 연맹은 경기장 실사를 통해 경기 개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제11조 경기장의 점검(2007년)” 한일월드컵을 개최하면서 전국 10개 도시에 세계적인 수준의 경기장이 생겼다. 2001년 7월 11일 문수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울산과 포항의 경기를 첫머리로 10개의 월드컵경기장이 K리그 구단의 홈경기장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월드컵경기장은 모든 게 완벽했다. 잔디는 사계절 푸른 색을 띠었고 고르게 깔려 있었다.
조명시설은 야간 경기를 치르는 데 문제가 없었고 샤워실, 선수 대기실 등도 쾌적했다. 열악한 시설의 종합운동장에서 뛰던 2,3년 전과 비교해 초고속 발전이었다.
노상래 전남 코치는 “10년 전만 해도 광양전용구장이 최고의 경기장이었다. 그런데 (월드컵의 개최로) 이젠 K리그 14개 팀 홈경기장 가운데 가장 처지는 경기장이 됐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대전 시티즌의 한 관계자도 “어느날 구형 경기장이 신형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꿈같은 일이었다”고 말했다.
한일월드컵을 통해 단숨에 여러 단계를 진화한 K리그 경기장은 올 시즌 한 단계 더 발전했다.
부산은 9억 원을 들여 아시아드주경기장에 5천 명이 앉을 수 있는 가변 좌석인 터치라인석을 설치했다. 부산은 구덕운동장을 떠나 2003년부터 아시아드주경기장을 홈경기장으로 썼지만 그라운드와 좌석이 멀어 관중들이 관전하는 데 불편했다.
터치라인석은 축구전용구장을 지을 때까지 관중들에게 관전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일시적인 조치다.
부산의 한 관계자는 “일본 프로축구 J리그 제프 유나이티드 치바의 홈구장인 후쿠다 전자 아레나를 본보기로 삼았다. 터치라인석으로 축구전용구장의 느낌이 나도록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부산은 관중들의 안전을 고려해 터치라인석에 보호그물을 설치했다.
포항은 부산과 반대로 포항 스틸야드 중앙 본부석과 맞은 편에 설치했던 철망을 없앴다. 그동안 포항 스틸야드의 철망은 관중들의 시야를 가린다는 지적이 있었다.
포항은 올 시즌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하게 된 것을 계기로 AFC 규정에 맞게 경기장을 개보수하면서 철망도 뜯었다.
포항의 한 관계자는 “서포터의 그라운드 진입을 막기 위해 양쪽 골대 뒷편의 철망은 그대로 뒀다. 그렇지만 앞으로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점차적으로 이마저 없애 최적의 관전 환경을 갖출 계획”이라고 밝혔다.
K리그 14개 구단의 홈경기장 가운데 종합운동장은 성남 일화의 탄천종합운동장과 경남 FC의 창원종합운동장, 인천 유나이티드의 문학월드컵경기장, 대구 FC의 대구스타디움, 부산의 아시아드주경기장, 광주의 광주월드컵경기장 등 6곳이다.
종합경기장은 축구전용구장에 비해 관전하기가 불편하고 선수들의 집중력에도 문제가 있다. 구단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완벽한 축구경기’가 이뤄지기 어렵다. 때문에 군팀인 광주를 뺀 5개 팀은 축구전용구장 건설 및 이용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경남은 창원시 사파동에 짓고 있는 영남축구센터 내 축구전용구장을 사용할 계획이다. 창원시청의 한 관계자는 “현재 공정률이 12%다. 예정대로 공사가 진행되면 2010년부터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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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축구연맹은 오래 전부터 경기장에 의료진 및 구급차를 항시 대기시킬 것을 규정화했다.(사진 송기찬) |
인천의 경우 숭의종합경기장이 지난 2월 철거 작업에 들어 들어가 공사가 곧바로 이뤄질 경우 2011년부터 숭의축구전용구장을 홈경기장으로 사용할 수 있다.
대구는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유치와 맞물려 보조경기장을 축구전용구장으로 변경하는 방안을 계획하고 있으며 성남과 부산도 장기적으로 연고 지역 내에 축구전용구장을 지어 사용할 계획을 갖고 있다.
연맹의 신명준 팀장은 “연고지 이전이 아닌 연고지 안에서 경기장을 변경하는 건 크게 문제될 게 없다. 연맹 규정에 따른 실사를 거쳐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곧바로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 축구 관계자는 K리그 경기장이 빠르게 발전한 것에 대해 “돌이켜보면 프로축구 초창기 경기장은 우습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게 최고의 시설이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열심히 뛰었기에 오늘날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경기장의 진화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장 규정 어떻게 변했나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규정은 해마다 이사회를 거쳐 일부 개정된다. 그동안 경기장에 관한 규정도 많이 바뀌었다.
연맹은 지난해 제5조 경기장의 기본 요건에 경기장의 최소 관중석 규모 조항을 신설했다. K리그가 열리는 경기장은 1만2천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맹 신명준 경기지원팀장은 이에 대해 “2002년 한일월드컵을 전후해 K리그의 경기당 평균 관중이 1만~1만 1천 명 수준이었다. 안전사고 등을 고려해 최소 1만 2천 석 이상의 경기장에서 경기를 열어야 한다고 못을 박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2년까지 경기장 장내 아나운서는 여성의 전유물이었다. 연맹은 제11조 경기에 관한 고지 1항에 ‘아나운서는 반드시 여성이어야 한다’는 규정을 뒀다.
이 규정은 2003년 이사회에서 삭제됐다. 고경섭 FC 서울 장내 아나운서는 “아무래도 축구경기가 거칠다 보니 경기 진행을 부드럽게 하고 관중들의 거친 행동을 자제하도록 유도하는 건 남자보다 여자가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해 그런 조항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골포스트와 크로스바에 대한 규정은 엄격했다. 흰색이어야 하고 지름 12cm의 원형이어야 했다. 그러나 2003년부터 원형 외에 정방형, 장방형, 반원형, 타원형이어도 무방하게 됐다.
이제는 좀더 완화돼 국제축구연맹(FIFA) 및 국제축구평의회(IFAB)가 정한 규격에 맞기만 하면 된다.
경기장 부대 설비도 1995년까지는 탈의실, 전광판, 출전선수 명단 게시판, 방송 설비, 경기 감독관석, 기자석, 국기 게양대 등만 있으면 됐다.
그러나 13년이 지난 현재는 의무실 및 도핑 검사실, 경찰관 및 소방관 대기실, 기자실 등도 기본적으로 갖춰야 한다.SPORTS2.0 제 95호(발행일 3월 17일) 기사
이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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