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을 맞춘 지도 오래되었다. 요즘 들어 글씨가 자꾸 흐려졌다. 휴대폰을 오래 봐서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렌즈를 한번 바꿔야겠네.' 그렇게 생각만 하던 어느 날 퇴근길. 아파트 현관에 전단지 하나가
붙어있었다.
신장개업 기념으로 첫 방문 고객에게 렌즈를 무료로 교체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시간이 남아 발길을 돌렸다.
가게는 작고 조용했다. 직원은 별다른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내 안경을 받아 렌즈를 갈아 끼웠다.
마지막으로 안경을 건네며 말했다. "예전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일 겁니다."
무슨 뜻인지 묻기도 전에 그는 미소만 지었다.
가게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 머리 위에 숫자가 하나 떠 있었다.
0. 눈을 비볐다. 다른 사람도 보였다. 0. 또 다른 사람도 0.
길을 가던 사람들 머리 위에는 하나같이 0이 떠 있었다. 안경을 벗자 숫자는 사라졌다.
다시 쓰자 나타났다. '렌즈가 잘못된 건가?' 이상했지만 집으로 돌아왔다.
경비실입구에서 늘 마주치는 경비 아저씨가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머리 위에는 75가 떠 있었다.
순간 멍해졌다. 거리의 모든 사람은 0이었는데, 매일 인사만 나누는 경비 아저씨는
75였다. 인사도 받지않은 채 황급히 승강기를 탔다.
다음 날 아침. 다시 만난 아저씨 머리 위에는 74가 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1이 내려갔다.
이번에는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저씨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그 다음 날 숫자는 다시 75로 올라가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 숫자는 사람의 나이도, 수명도, 행운도 아니었다. 나와 그 사람 사이의
관계의 온도였다. 모르는 사람은 모두 0. 관계가 시작되어야 비로소 숫자가 생기는 것이었다.
안경에 숫자가 보인뒤 처음 본 같은 팀 강 대리 머리 위에는 82. 늘 웃으며 먼저 말을 걸어오는
미스 김 머리 위에는 43.
나는 한참 동안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완전 반대잖아.'
강 대리는 말투가 거칠었다. 늘 퉁명스러웠고, 웃는 얼굴을 본 기억도 거의 없었다.
반면 미스 김은 언제나 친절했다. 누가 봐도 내게 호감이 있는 사람은 미스 김이었다.
그날 오후.컴퓨터가 갑자기 멈췄다. 발표 자료가 날아갈 상황이었다. 강 대리가 말없이 다가오더니
몇 번 키보드를 두드렸다. 파일이 살아났다. "조심 좀 하시죠." 퉁명스러운 말투는 여전했다.
그 순간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입사 초년생이던 강 대리가 거래처에 실수로 잘못된 메일을 보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던 날.
나는 조용히 그를 불러 함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부장에게도 먼저 설명해 크게 혼나지 않도록
도와준 적이 있었다.
나는 이미 잊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잊지 않았던 것이다. 82라는 숫자는, 그가 몇 년 동안
품고 있던 고마움의 온도였다.
그렇다면 미스 김의 43은 무엇일까.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그녀는 늘 먼저 인사했고, 커피를 타면
내 몫도 챙겨 주었다. 눈이 마주치면 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받은 만큼 돌려준 적이 거의 없었다. 친절을 받기만 했고, 관계는 키우지 않았다.
43이라는 숫자는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내가 만든 거리였다.
며칠 뒤 회의 시간. 강 대리가 농담처럼 던진 말을 나는 날카롭게 받아쳤다.
그날 오후 그의 숫자는 76으로 내려가 있었다.
'몇 년 동안 쌓인 온기도 말 한마디에 금세 식어버린 것 같았다.
반대로 다시 데우는 데는 훨씬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 이후 나는 숫자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온도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먼저
안부를 묻고, 고맙다는 말도 건넸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숫자는 조금씩 올라갔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대학 동창을 만났다. 아주 친하게 지냈던 친구다. 그런데도 머리 위에는
62. 다툰 적도 없었다.미워한 적도 없었다. 그저 오래 연락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우리는 술 한잔하기로 약속했다. 약속한 날 만나 삼겹살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서로 살아온
얘기들을 나눴다. 밤 9시쯤 헤어질 무렵, 그의 숫자는 68이 되어 있었다.
관계는 특별한 사건으로 따뜻해지는 게 아니었다. 가끔씩이라도 안부를 전하고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관계의 온도는 올라가는 듯했다.
그 뒤로도 한동안 머리위 숫자를 확인했다. 그러다 어느 날 회사에서 미스 김에게 커피를
건네며 보니 숫자가 보이지 않았다.
강 대리도, 경비 아저씨도, 머리위에 아무 숫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안경을 벗었다 다시 써도 마찬가지였다.
퇴근길에 안경점을 찾아갔다. 며칠 전까지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런 가게는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와 안경을 다시 써 보았다. 숫자는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렌즈가 고장 난 줄 알았다. 하지만 곧 웃음이 났다. 숫자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숫자를 보지 않아도 될 만큼 관계를 보게 된 것이었다.
그날 이후 안경은 다시는 숫자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제는 안다. 관계는 하루에도 몇 번씩
따뜻해지고, 또 식어 간다는 것을.
<오늘의 팝송> Morning side of the mountain / Donny & Marie Osmond
Morning side of the mountain은 음악가족으로 이름이 알려진 오스몬드가의 남매 Donny Osmond 와 Marie Osmond가
듀엣으로 불러 히트한 곡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엇갈린 운명과 추억에 관한 노래다. 1974년 리메이크했다. 원곡은 타미
에드워즈(Tommy Edwards) 가 1951년 발표했다. https://youtu.be/eAreqALd73g
첫댓글
요술 안경인가봅니다.
안경이 너무 잘 보여서 보기에 더하여 관계까지 보였나봅니다.
잠시마음의 안경까지 겹쳤었나봅니다.
이젠 마음이 안정되다보니 겹으로 출연했던 사실들은 다 사라졌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달리보이는 안경입니다.
감사합니다. 시니방장님,
내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다니와 마리 오스먼드가 아주 인기 가수였지요.
말씀대로 예전에 인기가 많았지요...
세상은 점점 더 그 수치가
내려가고 있겠네요.
담 낮은 시절, 이웃집 숟가락
숫자까지 알던 시절엔 그 수치가
110이었을 것 같은데...
오늘도 비온뒤님 덕분에
이른 아침 샘물 마시듯
마음 정화하며 시작합니다.
맞습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게 도시 생활이니까요...
감사합니다. 마음자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