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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산 산 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 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 산 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 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전라도 사랑의 노래 '부용산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논설고문이 1998년 2월 14일자 신문에 '부용산 오리길에'라는 칼럼을 통해 노래가 만들어진 애절한 사연을 소개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해 2월은 공교롭게도 전남 출신의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달이다. 전남 사람들이 숨죽여 불렀던 노래가 김대중 정권의 출범과 더불어 햇빛을 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순천 도립병원에서 숨지자 벌교 부용산에 묻고 돌아와 쓴 시다. 이듬해 박 시인은 목포 항도여중으로 전근을 가 나주 남평 출신의 안성현이라는 음악 교사와 친하게 지냈다. 그 무렵 천재소녀요 문학소녀였던 김정희라는 3학년 학생이 폐결핵으로 죽어 온 학교가 슬픔에 잠겼다. 얼마 뒤 박기동의 시작 노트를 몰래 가져가 안성현이 곡을 붙인 것이 '부용산'이다. 즐겨 불렀기 때문에 전라도 사람들 스스로가 부르기를 자제했던 곡이다. 그는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의 조카로 전쟁 때 월북, 북한에서 공훈 예술가로 활동했다. '부용산'이 월북자의 곡이다보니 작사자 박기동에 대한 시선도 곱지않아 결국 교사직에서 물러나 생활고를 겪다 90년대 초반 호주로 이민을 갔다. '부용산' 특집이 잇따랐다. 목포와 벌교에서는 서로 자기 고장의 노래라고 주장하면서 각각 '부용산 음악 발표회'를 갖는 등 한때 작은 알력이 있었다. 벌교 부용산에는 2001년 10월, 목포여고에는 2002년 4월 부용산 노래비가 세워졌다. 시인도 지병이 악화되자 귀국해 지난 2002년 5월 9일 85세로 쓸쓸하게 숨을 거뒀으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 그들은 저 세상으로 갔지만 '부용산'은 전라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2004년 2월12일 벌교에서 ▲ 54년만에 누이동생이 묻힌 전남 벌교 부용산을 찾은 박기동 시인
이유로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이 노래가 50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부활하게 되기까지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정리해본다. 벌교로 이사와서 살게되었었다. 1947년에 이르러 그의 친누이인 박영애가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사망하자, 박영애의 시댁 식구 몇명과 함께 이 곳 부용산에 그를 묻었다. 그날 부용산 오리길을 내려오면서, 살아남은 오빠의 애절한 마음을 시(詩로) 만든 것이 '부용산'의 출발이다. 일본유학을 가게되었다.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관서대학에 진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는데 이때 우리말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되어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귀국 후 교편을 잡으며 문학적 감성을 후학들에 가르치는데 열성을 쏟지만,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좌경계열의 시로 낙인찍히면서 한 곳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굴곡의 연속인 삶을 살게되었다. 80년대에까지 가택수사 등 감시와 얽매임을 받았던 그는 결국 한 많은 조국을 등지고, 호주로 이민을 떠나 현재 6년째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7평 남짓한 임대주택과 호주정부로부터 받는 월 연금40만원이 전부인 그의 가난한 삶에는 아직 희망찬 두 가지 미래가 남겨져 있다. 하나는 죽기 전에 개인 시집과 수필집을 발간해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버린 조국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신념이다. 다음은 그의 주요 경력이다.
시와 수필 등을 집필하고 있다. 수재로 해방이 되자 고향인 목포로 전학을 왔으며, 당시 교장이었던 소청 조희관 선생이 김정희학생을 가르킬 만한 사람이 없어서 박기동을 불러왔다고 자주 이야기했을 정도의 천재적인 소녀였다. 또한「감화원 설계」라는 글로 전국글짓기 대회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도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가 요절하자 전교생이 슬퍼하였으며, 음악담당이었던 안성현 선생이 박기동의 시작 노트 중 '부용산'을 보고 곡을 붙여 노래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 곡은 학교 교정을 넘어 목포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 빠르게 전파 되었으며,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는 벌교에서까지애창되었다. 약간의 수정을 직접 하였다고 한다. 또 곡의 뒷부분 '푸르러 푸르러'를 상여 나가는 소리처럼 들리게 처리하자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제자들은 낭만적이고 인간미가 넘치는 미남선생님으로 피아노를 매우 잘 쳤다고 회고하고 있다. 합창단을 직접 지도하며, 노래 집을 만들고 1년에 두 차례씩 발표회를 갖기도 했던 안성현은 제자 김정희의 장례가 있은 지 얼마 안돼 이 노래를 만들었는데, 자신의 누이동생의 죽음에 관해서는 잘 몰랐을 것이라고 박기동은 회고하고 있다. 중요한 원인이 있다. 그는 동경유학시절 만났던 무용가 최승희의 "북은 예술인의 천국이다" 라는 말을 듣고 그를 따라 북으로 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국립교향악단장을 지냈다는 소문이 있을 뿐 현재로서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의 열정을 엿 볼 수 있다. 다만 이노래가 이데올로기의 피해가 심각했던 우리사회에서 좌익계열의 음악으로 주목받게 되자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부르는 것을 조심스러워 했을 것이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가사가 자신들의 처지를 노래하는 것처럼 가슴에 와 닿아 즐겨 불렀다고 한다. 김성옥(목포에서 부용산 음악회 개최)가 2절 작사를 제의, 그가 수락함으로써 2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박기동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들이 오래가지 못하고 빨리 사라지는 슬픔을 소재로 2절의 가사를 지었으며, 마지막은 인생무상의 감정을 느끼는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80평생에 단 두 번 밖에 울어 본 적이 없다는 그도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에 서 있으니' 부분을 지으면서 30여분 책상에 앉아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있었는데, 항도여중 출신 경기대 김효자 교수(93년 동국대 철학과 정교수로부터 동문회모임을 통해 건너받게 되었다고 함.)가 작곡집을 보관하고 있음이 알려지면서 원곡의 악보와 가사가 밝혀지게 되었다. 9월에는 부용산에 기념비와 기념누각을 세우기도 하였다. 있는데, 몇몇 지역의 노래가 아닌 같은 시대 같은 정서를 가지고 살아갔던 한국인 모두의 노래로 발전되어 가기를 바래본다. |
첫댓글 자주듣던 노래인데
한동안 잊고 지냈네
노랫말 한글자에 가슴이 저렸든.......
그런 감성의 나날들이 있었지
이 긴 여행길에
가끔은 동행 해준 노래들이 있었지요
날씨가 덥네요
팥빙수배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