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양(Secret Sunshine)'은 이제는
한국 영화의 클래식이라 말해도 무방할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이창동 감독의 2007년작인 '밀양'은
대한민국 영화 대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밀양'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남편과 사별한 주인공 신애가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밀양'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재앙의 당사자인
피해자가 마주한 실존의 비극이다.
영화는 피해자라고 말하기도 조심스러운,
인생의 단 하나의 희망이라 할 수 있는 아들을 잃은
엄마의 시점에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저씨, 밀양이란 이름의 뜻이 뭔지 알아요?”
남편을 잃고 밀양에 정착하려
아들과 함께 내려온 신애(전도연)는
고장 난 차를 고쳐준
종찬(송강호)에게 밀양의 뜻을 묻는다.
하지만 종찬에게 밀양은
‘경기가 엉망이고, 한나라당 도시고,
부산이 가깝고, 인구는 많이 준’ 그런 동네다.
그에게 이름의 뜻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냥 사는 동네일 뿐.
신애가 그 뜻을 종찬에게 알려준다.
“한자로 비밀 밀, 볕 양. 비밀의 햇볕. 좋죠?”
그러자 종찬은 그제야 자신이 살던
동네의 이름이 그런 뜻이었다는 걸 알았다는 듯
허허 웃으며 말한다.
“비밀의 햇볕. 좋네예.”
혼자 머리를 자르려는 신애의 곁으로 다가와
가만히 거울을 비춰 주는 종찬의 미소,
그가 비춘 거울의 틈새로 은밀히 비추는
한 조각의 빛살을 끝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아들이 유괴되어 시신으로 돌아오고
그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신애는
종교에 귀의해 평화를 얻었다 생각하지만,
막상 유괴범을 면회하고 나서는 절망에 빠진다.
유괴범 역시 종교에 귀의해 용서받았고
평화를 얻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그 누가 먼저
그 인간을 용서할 수 있냐"며 신애는 아파한다.
**가해자에 대한 용서는 신의 영역이 아니라
피해자의 영역이 아닐까?**
권리인가, 의무인가?
함부로 용서를 이야기하지 마라!
同病相憐의 아픔을 겪어보지 않는 자.
함부로 말하지 마라
그 아픔을 겪어 보았느냐!
각자도생과 이기심에 가득한 자들.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 본 적이 있는가?
“사람들은 용서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한다.
정작 자신이 용서할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그렇다.
―C.S. 루이스
우리나라 최초의 성문법 고조선 팔조금법(八條禁法)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로
알려진 탈리오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lex talionis)
문장 중 가장 유명한 글귀이며
인과응보와 비슷한 의미.
도스토예프스키 의'죄와 벌’이 떠오릅니다
참척慘慽의 고통은 눈을 감을 때까지
가슴에 납덩이로 얹혀 있고,
세월이 흘러도 딱지가
앉지 않는 상처라고 한다.
慘慽之變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그 참혹한 슬픔을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일을 당하는 사람은
그 참담한 슬픔을 잊기가 쉽지 않고
평생의 한이 되어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
그러다 膏肓고황의 깊은 병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종교를 저주하고 피폐해 가는
신애를 구원해 주는 건 과연 뭘까.
‘밀양’은 그것이 종찬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늘 옆에 있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들지만
그렇기에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존재들.
혼자 머리를 자르려는 신애에게
종찬이 거울을 들어줄 때,
카메라가 틸다운 되며 바람에 날려 바닥을 뒹구는
머리카락과 음지에 버려진 것들을 비추는
햇살을 담은 엔딩이 긴 여운으로 남는
이 작품은 묻는다.
당신의 밀양 같은 존재는 누구인가.
또 당신은 누군가의 그런 존재가 되고 있는가.
신애에게 강요한 또 하나의 폭력은 용서의 폭력이다.
하나님의 용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
이 엄숙하고도 성스러운 보편적 교리가 제시한
절대 극복의 사랑이 절대 용서로 돌변하고 만다.
신애가 아들을 유괴한 유괴범을 용서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그건 보편적 용서를 향한 과도한 욕망과
그 욕망이 당연한 하나님 사랑이라고 펼쳐 놓은
보편적 교리의 무정함에 있지 않을까?
기독교가 말하는 용서는 어쩌면
그 모순의 극한에 빠져든 실존의 고통을 마주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할지도 모른다.
분명 조심스러운 접근이지만,
기독교는 실존의 비극 앞에서 보편적 원리인 죄와 구원,
용서를 말한다는 게 모순이란 사실을
긍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오해는 말자.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의 보편성을 거부하자는 게 아니다.
그것은 분명 고귀하고 거룩한 기독교의 불변 가치다.
하지만, 용서의 보편성을 받아들이는 것과 자신 앞에 놓인
실존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고통은 고통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실존적 현실을 회피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진짜 용서가 아니다.
<용서라는 고통>에서 스티븐 체리Stephen Cherry는
용서에 대한 윤리적인 권면보다는 고통받는
피해자의 용서의 길을 곁에서 함께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에 공감하며
그들에게 희망 있는 미래를 그릴 수 있도록 돕는 것,
‘상처의 황무지’를 빠져나오는 걸음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는 것이지요.
저자는,
용서가 단번에 이루어지는 단회적이고
종결적인 사건이 아니라,
끝까지 완성되지 않지만 계속해서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영화 저편에서 깊고 짙은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마지막 한 걸음을....
뼈를 깍는 참척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홀로이
내 딛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1994년 5월 10일 1판 5쇄
기쁨은 그것이 왜 기쁜지에 대해 분석하지 않는다.
그냥즐기면 된다.
그러나 슬픔으로 인한 고통은
내가 왜 그것을 당하는지 이유를 알아야 하고
그것의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영국의 목사 시인 조지 허트는
"무엇보다도 마음은 가장 긴 구간을 견뎌내지 않으면 안된다.
But above all, the heart mist bear the longest part"
영화가 개봉한 지 제법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참고 : 스티븐 체리 지음 송연수譯
황소자리刊 "용서라는 고통"
박완서님 일기(저널) "한말씀만 하소서"
출판사 '솔'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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