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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윤정이
한류열풍, 민족의 상징 삼족오에서 찾을 수 있다
□ 세발 달린 까마귀는 아시아를 호령한 우리민족의 상징
▲ 역사드라마에 많이 등장하는 고구려 삼족오 깃발
(일본) 일본에서는 개국 신화에서 천황의 군대의 길 안내를 한 태양신의 사자인 일본의 삼족오 ‘야타가라스(八咫烏)’가 고대 고분과 각종 유물에서 등장하고 있으며, 아직도 쿠마노본궁대사(熊野本宮大社) 등에서 모시는 대상이기도 하다. 천황이 즉위식 때에 입는 곤룡포의 왼쪽 어깨에는 삼족오가 자수로 놓여 있다. 또한 일본축구협회에서는 삼족오를 엠블렘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의 방계 혈통이기 때문에 삼족오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기타) 그리스 신화에서 태양신 아폴론의 까마귀는 원래 흰 색이었지만, 아폴론의 노여움을 사서 까맣게 되었다고 한다. 별자리 까마귀자리의 그림에는 다리가 셋으로 그려진 경우도 있다.
이집트 신화를 그려놓은 벽화나 소아시아의 리키아, 팜필리아 등의 고대 유적에서 발견된 동전에도 태양을 상징하는 생물로서 까마귀가 등장하고 있다.
□ 까마귀는 지능이 높고 부모를 섬기는 유일한 새
까마귀는 새 중 유일하게 늙은 부모를 섬기는 효심 깊은 새이다. 자식이 성장한 뒤 어버이께서 길러주신 은혜에 보답한다는 효심(孝心)을 나타내는 사자성어인 반포지효(反哺之孝)는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사냥할 힘이 없어진 늙은 부모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먹인다”는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그만큼 까마귀는 효성이 지극한 새이고, 무리 내에서 많은 경험을 축적한 나이 든 까마귀를 공경하는 습성을 갖고 있는 새이다.
여러 연구결과에 의하면, 새들 중에서 IQ가 가장 높은 것도 '까마귀'이다. 영장류에 속하는 침팬지와 비슷한 수준으로, 조류인 까마귀는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줄 아는 놀라운 지능 수준을 갖추고 있다. 보통 머리 나쁜 사람들을 두고 ‘새 대가리’라는 농담을 하곤 하는데, 지능이 높은 까마귀는 대체로 머리 나쁜 조류와는 달리 아주 똑똑한 새인 것이다.
▲ 늙은 부모를 섬길줄 아는 유일한 새
서양 학자들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문명을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는 수메르는 환국 이래로 단군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계로 조공을 바치고 사신을 교류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 사이에선 원래 비둘기가 아닌 까마귀가 평화의 상징이었으나, 히브리인들이 까마귀가 육식을 한다는 이유로 비둘기로 대체했다고 한다. 육식을 하긴 하지만 주로 인간에게 해로운 해충을 주식으로 삼고 있어 까마귀는 인간에게 유익한 새이다. 즉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새인 것이다.
국조 삼족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선조들 사이에서 까마귀는 원래 진귀한 존재였으며 경의의 대상이었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단군 조선이나 북부여에서도 신성한 의미를 가진 존재로 숭상되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데, 서양의 고대 문명권에서 인식되어진 것처럼 우리 한민족 사이에서도 까마귀에 대한 주된 이미지는 흉조(凶鳥)가 아닌 길조(吉鳥)였다.
머리 좋고, 효심이 지극하고, 신성과 평화와 상징이었던 까마귀가 오늘날에 와서 대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불운을 안겨다 주는 흉측한 존재로 알려지게 된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 하겠다.
□ 삼족오 그 찬란한 슬픔의 역사
▲ 고구리 고분벽화에 그려진 삼족오는 태양의 상징
까마귀는 켈트족과 게르만족, 그리스 신화, 이란의 미트라 신화, 중앙 유목민들의 타타르 신화, 바이칼 유역의 브리야트 신화 등에서 하늘과 인간 세계를 이어주는 안내자 역할을 담당하는 신조(神鳥)였다.
일본의 기원과 깊은 관련이 있는 신라의 연오랑 세오녀(燕烏郞 細烏女) 전설에서도 까마귀는 태양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둘 다 이름에 까마귀 오(烏)자를 쓰고 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까마귀를 밝음의 상징으로 보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삼국사기 기이편(紀異扁)> 신라 21대 소지왕 10년의 기록에는 사람이 해야 할 바를 알려 주거나 일어 날 일을 예고해 주는 영험한 새로 그려져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여서 붉은 색이나 황금 색을 한 까마귀는 태양의 상징이나 효조(孝鳥- 효성스러운 새)로, 또한 옛 날에는 행복을 안겨 주는 새로 믿었으며, 한 해의 신수를 보는데 까마귀를 사용한 예도 있다.
아랍인들은 까마귀를 예조(豫兆)의 부(父)라 부르며, 오른쪽으로 나는 것을 보면 길조(吉鳥), 왼쪽으로는 흉조(凶鳥)로 믿었다. 유럽에서는 일반적으로 불길한 새로 지목되고 있으나, 북유럽 신화에서는 최고의 신 오딘의 상징으로 지혜와 기억을 상징한다.
그리스의 신화에서는 예언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서 예언의 신 아폴론과 여신 아테나의 성조(聖鳥)이기도 하다. 아테네라는 도시 이름은 그 도시의 수호신인 아테나라는 여신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아테네의 한자 음역은 아전(雅典)으로 雅는 원래 까마귀를 뜻하는 글이고, 典은 갑골문에서 책을 뜻한다.
그런가하면 일본에서는 신들의 사자(使者)로 알려져 있으며, 세계 유일의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삼족오를 일본축구협회 상징으로 삼아 그들 축구국가대표팀 엠블럼으로 쓰고 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삼족오를 일본이 훔쳐다 쓰는 역사적 배경을 보자.
고구려 지역에서는 오룡(五龍) 외에 까마귀도 천제(天帝)의 아들로 상징되었고, 고구려 지역에서 이주한 박혁거세나 석탈해도 천제의 아들 상징으로 까마귀 또는 알을 사용하였다. 이 신앙은 진한과 변한인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살면서 전파되어 일본서기 신무천황기에는 까마귀가 신무천황을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까마귀의 일본어는 '가라스-갈아놓은 숯처럼 검다'의 어원이니 우리말이다. 또 현해탄(玄 검을 현 海 바다 해 灘 여울 탄)은 '검은 까마귀가 바다를 건너 여울로 갔다'이니, 우리 동이족의 한 갈래임을 입증한다.
우리가 신성시 여기는 봉황은 삼족오에서 변형된 형태이며, 또한 하늘과 인간의 매개체로 새를 신성시 여겨 민족의 상징으로 삼았다. 신라 화랑들이 머리에 장식하던 새의 깃털도 하나의 상징으로 보며, 고관대작들이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검은 모자를 쓰는데 이것을 오우관(烏羽冠)이라 부르는데 '까마귀 깃털 모자'로써 바로 하나님의 사자를 지칭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까마귀를 뜻하는 아(雅)는 새 추(隹)변이 까마귀 오(烏)가 있는 아(鴉)가 본 글자로써 우아(優雅)하다, 아량(雅量)를 베풀다, 아담(雅淡)하다, 고아(高雅)라, 이름을 대신한 아호(雅號) 등이 생겼으며, 옛날 표준어를 뜻하는 아언(雅言)은 우아한 말을 뜻하고 시경(詩經)에 수록된 대아(大雅)나 소아(小雅) 등은 아름다운 음악을 말한다.
우리 민족의 맥을 살펴보면, 과거 까마귀는 한님(하나님)이나 해의 신(神)을 상징하는 동물로 단군의 지팡이 머리에 까마귀를 조각함으로써 신의 사자(使者)임을 나타냈고, 까마귀의 모습을 한 솟대, 정월 대보름날의 까마귀제(烏忌日) 등에서도 신조(神鳥)로써의 흔적이 보인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보면, 8대 단군 서한(혹은 오사함 BC 1993) 때 삼족오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 왔는데 그 날개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甲寅七年三足烏飛入苑中其翼廣三尺)는 기록이 있으며, 까마귀에 대한 고사성어로는 반포지효(反되돌릴 반, 哺먹일 포,之갈 지,孝효도할 효)의 새로 까마귀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는 데서 나온 말로 자식이 자란 후에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까마귀를 살신효공(殺身孝供)의 새로 불리기도 한다.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는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오른 쪽 어깨에 어머니를 올려 모시고 살갗이 다 헤어지고 어깨뼈가 드러나 골수가 보여 수미산을 백 천 번 올라도 그 은혜를 다 갚지 못한다.'라고 했다.
□ 태양의 상징 삼족오가 흉조가 된 사연
◇ 한족(漢族)에게는 검은 까마귀(=북방민족)가 혐오의 대상
이러한 까마귀가 우리에게 흉측한 새로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공자의 유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 때문이다. 주자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4례를 지은 학자로 공자(孔子)의 유학사상을 접목하여 유교철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이다. 그가 공자의 시경 국풍(詩經國風)에 나오는 까마귀를 불길한 새로 여긴 것은 다음과 같은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주자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이웃한 금(金)나라가 그의 조국을 침략해와 휘종과 흠종 두 황제를 포로로 잡고 금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리고 흠종에게는 혼덕공(昏德公), 휘종에게는 중혼후(重昏候)이라는 모멸적인 칭호가 붙여지는 수모를 당한다. 역사는 이를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라 하는데, 중국인들은 이를 중국 역사상 가장 치욕의 역사로 여기고 있다. (정강의 변에 대해서는 19-2부에 연재됩니다)
그런 그들에게는 검은 옷을 입은 조의선인(皂衣仙人)은 침략자일 뿐이었다. 금나라는 여진족이었고 여진족의 뿌리는 대진국(발해)이며, 대진국은 고구려의 후예들이었으니 금나라는 우리 민족인 동이족이었다. 고구려인들은 국선도가 국기였으며, 문무를 겸비한 상위 계급 집단을 조의선인이라 불렀다. 국가의 기강을 굳건히 한 조의선인의 맥은 동이족인 금나라에까지 그 맥을 이어간다.
조의선인이 검은 옷을 입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검은색은 생명의 씨앗을 담고 있다. 음양오행에 보면 모든 생명은 북방의 물에서 탄생하였다고 하는데, 물을 상징하는 색이 바로 검은 색이다. 또한 사신도의 현무(玄武)에서 보듯이, 고대 중국 특히 송나라 사람 주자가 혐오의 대상으로 여겼던 북방민족의 색은 검은색이었다.
◇ 주자(朱子)의 영향으로 까마귀를 흉조로 여긴 조선왕조
명(明)나라의 속국이 된 조선왕조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의례의 근간으로 삼아 건국이념과 통치철학의 기본 강령으로 채택했으며, 조선조 유학자들은 이러한 주자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명나라 헌종(1465) 때 구준(丘濬)이 주자의 4례(四禮)와 사상을 집대성하여 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 8권을 저술하고 조선왕조는 이를 받아들여 더욱 강화시킨다.
주자가례가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 준행을 강요하여 이를 보편화 시킨다. 이에 따라 가례의절이 정착되면서 국가의 제례가 왕실을 중심으로 귀족화되고 더욱 엄격히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그 폐해 또한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예(禮)에 의한 송사(訟事)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색당파의 근원이 되어 조선조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또한 지배계급을 형성하여 계급사회가 되며 반상(班常)의 위상은 더욱 강화된다. 서자(庶子)들은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막혀버려 훗날 각종 난(亂)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퇴계 이황, 율곡 이이, 김장생, 우암 송시열, 이재로 이어지는 성리학자들은 가례집람(家禮輯覽) 사례편람(四禮便覽) 등의 저술을 통해 의례의식은 더욱 강화된다. 훌륭한 학자로 학문의 스승이었던 이들의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에 관련된 글들을 보면 이들이 과연 우리 민족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처럼 성리학이 융성하면서 다른 일체의 사상과 종교를 이단과 사교로 규정하고 유교에서의 조상숭배 사상을 종교적 단계로 끌어 올려 제사를 매우 중요시 했다. 그리하여 유교적 제례는 사회 기강을 바로 잡는 국가적 기반이 되었고,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념이 되었으니 이것은 중국을 월등히 능가하는 것으로 장장 5백 년에 걸쳐 조선조의 절대사상과 유일사상으로 이 땅에서 꽃을 피운다.
송나라 이후, 주자의 주석으로 고정된 유교 경전은 국가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학문 체계로 공자는 신성불가침한 권위로 세상을 지배했다. 부처와 노자보다 훨씬 파괴력을 지닌 공자를 비판하거나 경전의 진리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을 이어 온 주자가 까마귀를 불길한 새로 낙인찍음으로서 그를 추종하던 조선조 학자들의 머리에 각인되고, 사대주의 모화사상에 젖어 조선조 5백 년 세월 잠재의식 속에 흉조로 수모를 당하고 검은 색깔에 대한 인식 변화를 가져 왔으며, 죽음으로 묘사되는 까마귀의 슬픈 연가는 오늘 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명지대 한재규교수의 <만화 환단고기>에 실린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