鄧麗君私家相冊 등려군 개인 앨범 (제2부 4편)
时间:2010-3-24 23:36:37 点击: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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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집 鳳陽花鼓,
邓丽君最初是在台湾宇宙唱片公司旗下录音出碟。从1967年14岁开始的四年时间里,她推出了原唱个人专辑达20张。
这些作品以邓丽君之歌第一集、第二集……第二十集的顺序排列,其中因为邓丽君早年信仰天主教,忌讳13这个数位,所以系列中少了第十三集,总共是19集。
此外,唱片的系列号还曾以《台湾民谣》为名发行过。《邓丽君之歌》系列中的第四集曲目变更后,曾经再版过,第八集从缺。
등려군은 최초로 대만 우주음반 회사의 상표로 녹음하여 출반하였다.
1967년 14살 때부터 시작한 4년간 그녀는 원곡 개인독집의 앨범 20장을 출반하였다.
이 작품은 등려군의 노래를 제1집, 제2집... 제20집의 순서대로 나열하였다. [宇宙唱片鄧麗君之歌]
이 가운데에서 등려군이 일찍이 천주교를 믿었기에 13이란 숫자를 꺼렸고 그래서 순서 가운데 제13이란 숫자는 없었다.
모두 다 19 집이었다. 이외에 음반의 시리즈 번호는 또한 일찍이 [台灣民謠]라는 이름으로 발행하였다.
[鄧麗君之歌]시리즈 가운데에서 제4집 곡목을 바꾼 뒤에 일찍이 다시 출반하였다, 제8집은 빠졌다.
在东方歌厅演唱。和歌厅的乐手一起合照于东方歌厅后台。手中怀抱一个胖嘟嘟的婴儿,和这个孩子一样,邓丽君也有一张圆润的面孔。
照片拍摄于1969年家中。在演艺圈蹿红后,邓丽君成为台北各个歌舞厅的当红歌手。
동방 음악홀에서 공연을 하다. 음악홀의 악사와 더불어 같이 동방 음악홀의 무대 뒤에서 사진을찍었다.
손에 통통한 애기를 붙잡고 저 아이와 마찬가지로 등려군도 동글고 매끄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1969년에 찍은 사진이다. 연예계에서 갑자기 유명해진 뒤 등려군은 대북의 여러 음악홀의 인기 가수가 되었다.
演唱带来的收入迅速改善了家庭清贫的状况。
1960年,邓丽君一家从屏东搬迁到台北芦洲居住,这是一个一到台风季节就容易淹水的地方,随着家庭经济的改善,
邓家又搬迁到了台北市水源路的公寓住宅。
在水源路住了几年之后,邓家再次搬迁,到了北投奇岩路一座别墅,不久便把别墅卖掉,重新回到台北市区,
暂时赁居于敦化南路的金兰大厦,最后买进了现在的仁爱路四段的一幢新大厦的六楼。
邓丽君周围朋友有一种说法是,“邓丽君整天动脑筋赚大钱,邓爸爸却整天动脑筋打大牌。”
공연으로 벌은 수입이 가정의 가난한 형편을 빠르게 펴게 하였다.
1960년 등려군의 일가는 屛東(병동)에서 대북의 蘆洲(로주)로 이사를 한 후 살았는데, 이곳은 태풍의 계절이 오면은 쉽게 물에 잠기는 곳이었다.
가정의 형편이 좋아짐에 따라, 등려군의 집안은 또 대북의 水源路의 아파트로 이사하였다.
水源路에서 몇 년을 살고는 등려군의 집안은 다시 이사를 하였는데 北投奇岩路에 있는 별장으로 갔다.
머지않아 다시 별장을 팔아 버리고 다시 台北市區로 돌아갔다.
잠시 敦化南路에 있는金蘭(금란)빌딩을 빌렸으며, 마지막으로 지금의 仁愛路四段에 있는 새 빌딩인 6층을 샀다.
등려군의 주위에 있는 친구가 말하기 등려군은 하루 종일 돈 벌 궁리를 하고 등려군 아버지는 하루 종일 대 스타가 될 궁리를 한다고 하였다.
在全家人中,邓丽君与母亲关系最紧密,邓妈妈是个标准的家庭主妇,孩子第一,丈夫第二。
今天的邓丽君是成功了,谁知道她妈妈的泪水和汗水流出了多少。
1968年在东方歌厅与乐师及同行的合影。戴着桂冠的少女邓丽君。
전 가족 가운데서 등려군과 어머니의 관계가 가장 가까웠다.
등려군의 어머니는 표준적인 가정주부로 아이가 첫째고 남편은 그다음이었다.
오늘날의 등려군이 성공하였는데 누가 알고 있으리오, 그녀의 어머니의 눈물과 땀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를..
1968년 동방 음악홀에서 악사와 같이 찍은 사진, 월계관을 쓴 소녀가 등려군이다.
邓丽君为城中一家新开张的餐厅剪彩志庆,时为1969年7月5日。
初时出道成名的邓丽君已经在台北成为一位家喻户晓的名人,诸多机构均以邀请到她出席或者剪彩,而引为幸事。
등려군은 시내에서 새로 개업하는 식당의 축하 테이프 커팅을 하였는데 그 때가 1967년 7월 5일 이었다.
처음 데뷔하여 유명해진 등려군은 벌써 대북에서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된 유명 인사가 되었는데
수많은 곳에서 모두들 그녀가 참석하거나 테이프 커팅을 해 달라고 초청하여서 다행스러운 일로 여기게 되었다.
而邓丽君似已习惯于这种生活。她时常以少女之心之身奔走于早年的名利场中。世故的时代所需要表达的一切早已扑入毫无防备的少女的世界。
但据邓家人称,少时的邓丽君似乎对此并没有什么不适应,反而对此很受用。
그러나 등려군은 벌써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는 늘 소녀의 마음, 몸으로 어린 나이에 세속적인 세계를 분주히 뛰어다녔다.
세속적인 시절에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일찍이 아무런 준비도 없던 소녀의 세계에 몰두해야 했다.
등려군의 가족에 의하며 어린 등려군은 마치 이런 것에 대해 결코 적응하지 못한 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이것에 대해 매우 편안하였던 것 같다고 하였다 .
邓丽君在台北员林玫瑰中心骑摩托车。
台北市的大多街市道路不宽,因此,虽然经济发达起来,但摩托车依然是许多人首选的交通工具,它方便、便宜,又可以有百变造型,
因此在20世纪60年代的台湾,拥有摩托车成为了一种独特时尚。
등려군은 台北員林의 장미센터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
대북시의 대부분의 거리는 넓지 않아서 비록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오토바이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우선으로 하는 교통수단이다.
이것은 편리하고 값이 싸고 또한 모양을 다양하게 할 수 있다.
이로 인해서 20세기 60년대의 대만에서 오토바이를 보유하는 것은 일종의 독특한 시대적 유행이 되었다.
拥有一辆时尚的摩托车就成了当时诸多人的梦想。当然对于邓丽君来说,这样的时尚对她并不成问题。少时邓丽君常骑着摩托车开工。
图片上的邓丽君显得有些古灵精怪。在弟弟邓长禧的记忆中,姐姐显然是最受宠的一个人。
시대적 유행인 오토바이를 보유하는 것은 당시의 수많은 사람의 꿈이 되었다.
당연히 등려군에 대해 말을 하면 이런 시대적 유행은 그녀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결코 되지않았다.
젊은 시절의 등려군은 언제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림속의 등려군은 어느 정도 재치가 있던 귀여운 요정처럼 보인다.
남동생인 鄧長禧의 기억에는 누나가 분명히 가장 사랑을 받던 한 사람이었다.
她的嘴很甜,很得父母欢心。当然她也如小跟班似的,曾经跟随着哥哥与弟弟们一起爬山上树,以至于被父亲责骂。
当然,弟弟也回忆,他们小时候并不认为姐姐唱歌有多好听,反而他还时常可以回忆起来当年姐姐首次登台忘记了歌词的情景。
그녀의 말솜씨가 달콤하여서 부모의 환심을 잘 얻었다, 당연히 그녀도 귀여운 아이 같았다.
일찍이 오빠를 동생과 같이 뒤따라서 등산을 가서 나무에 올라 갔는데 아버지에게 심하게 혼이 났었다.
당연히 동생도 회상하기를 그들이 어린 시절에는 결코 누나의 노래가 듣기 좋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때 누나가 처음 무대에 올라서 가사를 잊어버렸던 모습이 생각난다고 하였다.
[p40-41]
邓丽君在台北员林玫瑰中心与儿童们在一起。她的娃娃脸在一群娃娃们中间,似很难令人想到她已是一位16岁的少女。
邓丽君从小就有爱心,还会与小孩子们呆在一起,一起做游戏或者唱歌。邓家人称,与孩子们在一起,是邓丽君最幸福的时候。
16岁的邓丽君。《谢谢总经理》剧照。[p40-41]
등려군은 台北員林의 장미 센터에서 어린이들과 같이 하고 있다.
그녀의 어린애 같은 얼굴은 여러 아이들 가운데에 속하여서 사람들이 그녀가 이미 16살의 소녀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기 어려운 듯하였다.
등려군은 어릴 때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고, 또한 어린아이들과 같이 함께 하려고 하였으며 놀이 또는 노래 부르기를 함께 하였다.
등려군 집안의 사람이 말하길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그녀가 가장 행복해 하는 때라고 하였다.
16살 때의 등려군, [謝謝總經理]의 스틸 사진,
첫댓글 번역문은 며칠 전에 받았었는데 사진이 준비되지 않아서 늦게 올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나마도 몇 컷의 사진은 미처 구하지 못했습니다. 구하게 되면 훗날에라도 추가 삽입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번역에 애써 주신 김강현님께 감사드리며..^^
수고 하셨습니다, 지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