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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2년 01월 21일 청년법회<출가여행 총정리>.hwp
원기 102년 01월 21일 청년법회
<출가여행 총정리>
설법 : 김제원 교무님
타이핑 : 초벌)홍석원, 완성)박준성
훈련을 다녀오신 분들이 기부, 공유차원에서 열심히 해주셨습니다. 다녀오신 분들은 다시 한 번 정리가 되셨을 것이고 못 가신 분들은 훈련을 나면 마음이 저렇게 생생해지고 신심도 나고 교법에 가까이 가는 것이 느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저는 이공계 계통의 느낌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데이터란 말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닌 팩트고, 가장 근접한 중도이자 사리연구의 극치입니다. 동양의 문제가 대충, 적당히, 두리뭉실, 근처. 동양 사람들은 데이터를 유형의 것만 잡는다 생각합니다. 아니죠. 우리 맘을 데이터로 잡는 게 일기입니다. 원불교 일기법은 수기법이죠. 계문 같은 걸 통해서 개수를 적는 겁니다. 이걸 몇 개 어겼는가를 체크해서 데이터화 하면 내 마음이 어디에 쏠렸는지가 나오게 됩니다. 이 데이터가 모여서 그래프로 나오게 되고 3년이면 어떻게 변하는가가 확실히 보이죠. 제가 유무념의 데이터를 확실하게 얻은 게 신발입니다. 저는 아무리 뛰어가도 신발은 똑바로 놓고 들어갑니다. 예전에는 의식으로 했죠. 그리고는 잊어버립니다. 아직 습관화가 안 되었기 때문에. 근데 하다보면 몸이 알아서 압니다. 운전도 하다보면 내가 운전을 하는지 안하는지 모를 정도가 됩니다. 앞뒤가 이정도 거리가 있겠다 싶어서 딱 쳐다보면 정확해요. 우리 몸도 식이 있어서 이걸 정확히 아는 겁니다. 내가 이번 출가여행을 숫자로 계산했어요. 어떻게 계산했냐하면 법회를 하루에 3시간으로 잡았어요. 한 달에 4번이죠. 1년 12달이죠? 144입니다. 144를 하루 24시간으로 나누면 6입니다. 출가여행 한 번이 일 년 동안 법회를 본 것과 같습니다. 더더군다나 스승님이 계시고 선진님의 역사가 있는 곳입니다. 거긴 핸드폰도 보고 싶어도 없습니다. 그래서 훈련의 효과가 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여러분, 운동을 해 보면 자기 한계치가 있습니다. 운동을 안 한 사람이 10층을 올라가려 하면 죽으려 하지만 계속 하다보면 익숙해지죠. 좌선도 다리 아프다고 계속 움직이면 잘 안 됩니다. 이번에 훈련 나신 분은 10시간도 할 수 있겠단 생각을 하실 겁니다. 이게 뭐냐면 집중적으로 한번쯤은 해 봐야 한다는 겁니다. 한번쯤은 긴장해야 하는 것이죠. 제가 이번에 훈련 나면서 정기, 상시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말씀 드렸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11과목중 경전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일, 이치 즉 사리로 되어 있습니다. 이게 결국 성리입니다. 성리라는 건 다른 말로 일원상입니다. 경전은 일원상을 밝혀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 공부를 계속 하다 보면 성과 리에 대해 감, 방향을 잡게 되죠. 경전은 공부의 방향을 알려줍니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어떻게 돼요? 운전대를 가끔 어디 갈 때 청년에게 주면 잘못된 길로 빠질 때가 있죠. 이건 방향이 틀렸단 겁니다. 공부도 네비게이션으로 방향을 제대로 잡고 가야 하거든요. 그래서 성리가 체가 되는 겁니다. 그 다음 의두. 이건 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경전이 성리이고 그건 근본자리에요. 그 자리의 감을 잡은 사람은 의두를 해서 써먹어야 해요. 현실 속에서 써먹는 겁니다. 체의 바탕은 용인데 일을 하다보면 놓치게 되어 있어요.
어린 아이는 타력, 자력중 뭐가 필요할까요? 타력이 은혜가 되죠. 그런데 이건 자력을 키우기 위한 타력이죠. 자력과 타력이 결국 자력을 위한 건데 어린 아이가 다 필요 없다고 알아서 하겠단 반응을 하면 그 사람은 자력을 갖추기가 어려워지겠죠. 그런데 공부도 마찬가지에요. 큰 사업하는 사람도 멘토 없는 사람이 없어요. 우리 분야도 똑같다. 원불교 교리 구조상 가만히 보면 이게 동정간에 있어요. 동정간의 공부, 자타력에 공부가 있어요. 초반에 정시와 타력이 제일 중요합니다. 정기 훈련 난 것은 정시입니다, 정시. 그러면서 타력을 많이 입은 겁니다. 근데 정시는 주로 수양과 연구주체고 동시는 시사가 주체입니다. 살면서 나사가 풀리고 강급하는 건 타력을 입어야 할 사람이 자력 타령하고 있고, 동정간에 정시가 먼저 우선되어서 취사를 해야 할 사람이 수양, 연구 없이 취사만 하는 겁니다. 최종의 결론은 취사를 잘하는 것, 자력을 갖추자는 것인데 그 전 단계에 정시의 수양연구가 체를 잡아야 하고 타력에 신심을 통해 자력을 기를 수 있게 도움을 충분히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타력을 받을 때 최종 결정을 다 자기가 하려 듭니다. 출가여행 공고를 달력, 회장단을 통해서 다 했어요. 결정은 누가 하냐, 가든 안가든 자기가 합니다. 제가 뭘 말하려고 했냐하면 자력이 필요한사람이 타력이 주가 되거나, 타력이 필요한 사람이 자력이 주가 되는 경우는 본인이 손해입니다. 어린 아이도 자기 인생 알아서 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효율 면에서 보면 엄청난 시행착오를 통해서 마이너스가 됩니다. 그 시행착오가 자기를 쳐버립니다. 그 시행착오들이 문제들을 계속 양산해냅니다. 그 문제 해결을 하려다가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타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타력에도 신이 필요하고. 자력의 신은 ‘나는 부처님이다’ 라는 겁니다. 본래 부처라는 게 첫째 자력입니다. 성자가 되자? 나는 본래 성자요. 이것이 자력입니다. 근데 마치 뭐와 같냐하면 아이가 태어난 것과 같은 겁니다.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아이는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어요. 다만 힘이 없는 거지. 한 자리를 봤다 하더라도 실지 경계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되는 거죠. 그러나 갖출 건 다 갖춘 자력이 있더라. 근데 자력이 약하니까 타력의 신이 필요한 겁니다.
그건 먼저 앞서간 지혜가 있는 스승, 교법. 경전 봐. 여러분이 궁금한 거 선배들이 다 물어봐서 다 해놨습니다. 그런걸 나는 날로 먹는 거죠. 경전과 진리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걸 문자화 해 놓은 게 경전이에요. 그런데 교법과 수행의 체도 잘 모르고 처사법도 모른다 할 때, 그때는 신이 정말 중요합니다. 신은 정이라 했죠. 내가 스승이나 교법의 뜻에 따라서 부처라는 걸 딱 정해버리고 이 가르침에 따르겠다. 그래서 신을 백지장이라고 해요. 내 의견을 좀 멈추고 법마 상전까진 자기가 자길 믿으면 안돼요. 본래 부처이지만 자기가 자기를 믿으면 안돼요. 여러분 친한 친구가 계문을 어길까 말까 할 때 교무님한테 물어보면 하지 말라 하시지만 친구는 같이 하자하죠. 지자 하나는 대중 수천 명보다 낫고, 부처님은 온 인류보다 나을 수 있어요. 내가 아직 자력이 약하고 열리거나 깨닫지 못한 분들은, 아직 성리 자리의 가늠을 잡지 못하신 분은 타력의 지도를 따르세요. 거지근성으로 하라는 게 아니라 자력을 갖추기 위한 타력을 가지라는 거죠. 내가 아직 이해가 안 되거나 수행하지 못한 건 판단을 보류하세요. 아님 진짜 신심이 있다면 시키는 대로 하겠단 마음이 들겠죠. 어떤 사람이 9인 선진님 중 하나에게 대종사님이 자결하라 했을 때 진짜 죽고 싶었냐고 물었어요. 답은 아니다였죠. 그러나 대종사님이 시키니 그렇게 되어버리더라는 말을 하셨죠. 간화선도 옆 사람이 하면 같이 되어버려요. 같이 기운이 연결돼있어요. 어떤 사람은 집에서 기도해도 된다고 해요. 철저하게 자력이 있으면 괜찮아요. 그러나 그 사람도 타력을 입으면 더 좋죠. 근데 라이브. 함께 하는 것, 대종사님은 기성복이 아닌 맞춤복이라고 표현했죠.
그래서 이 신이 무엇과 연결되냐하면 서원을 정해버려야 한다고 하셨죠. 그래서 신과 서원은 뗄레야 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에게 컵을 하나씩 주면서 컵에 들어갈 만큼만 가져가라고 했어요. 단, 비율을 큰 것과 작은 것을 비슷하게 가져가라고 했어요. 어떻게 가져가야 할까요? 멍청한 사람은 작은 걸 먼저 깔아놓고 그 위에 큰걸 얹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다른 사람은 큰 걸 넣고 작은 걸 그 위에 뿌려서 빈 공간을 채우는 사람이 있어요. 인생을 살 때 큰 걸 먼저 잡으라는 겁니다. 알아서 자동으로 자잘한 건 채워집니다. 물론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다 가져갈 순 있어요. 법문에는 이게 근본에 충실하고 선후에 선을 하고 주종에서 종을 하고 본말에선 본을 하면 자잘한 건 다 따라온다는 법문이에요. 서원이라는 큰 보석을 박아놓고 이걸 하면 여러분이 원하는 인간적 욕망도 다 채울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적 욕망도 다 채우고 나서 나중에 나이 들어서 서원을 세우겠다고 하는 건 아마 나이 상으로도 안 될 거고, 감옥도 가야하고 인간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은 사자나 큰 동물을 잡으려는 사람은 가는 길에 토끼나 사소한 것들을 잡으려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사자와 범은 많지 않아요. 토끼는 많아요. 새끼도 금방 낳고. 똑같아요. 정말로 서원을 세운 사람은 많지도 않고 그건 너무 소중해요. 자잘한 건 다 따라옵니다. 제가 원로원에 가면 일반 사회 생활한 노인들과 교무님하고 비교합니다. 일반인들은 술 먹고 싶을 때 먹고, 여행가고 싶을 때 가고 결혼해서 자식도 보고. 인간적 쾌락은 재밌죠. 교무님들은 그 안에서 못했죠. 근데 살고 나서 보면 인간적 쾌락을 즐긴 이들은 결혼을 안 하는 것도 괜찮다고 하고 네가 젊을 때 어떻게 그런 판단을 했는지 대단했다고 해요. 나는 출가하기 전에 내 재산 1호가 음향기기라고 생각했어요. 난 잘 알아요. 딱 보면 비싼 것도 알아봐요. 소리만 들어도. 이게 진공관인지 트랜지스턴지. 내 집보다도 이게 더 좋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출가하니 끝나버렸죠. 남들 한 달 급여가 내 1년 전체 연봉보다 많더만, 그런데 시각에 따라 정말 다른 것 같아요. 이 세계를 모르고 하나만 볼 때는 정말 출가는 아까운 걸 버리는 행동인데 이쪽 세계를 알고 보면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제가 간사때 군대 갔다 와서 출가했는데 할머니 교도들이 나한테 큰절을 했어요. 왜 저분이 나한테 인사를 하나 생각해보니 자기가 자기에게 한 겁니다. 나는 젊을 때 이런 세계를 몰라서 재색명리를 향해 사람으로 태어나서 젊을 때는 이성이 필요하니 관심을 갖고 필요한 걸 사기 위해서 돈을 버는 삶을 살았는데, 그런데 젊은 당신은 어떻게 그런 것들이 있다가 없어지는 걸 알아서 영원한 그 진리를 향해 과감히 세속적인 걸 버리고 출가했느냐. 그 참회의 마음에 나에게 인사한 게 아니냐.
서원은 결정이죠. 그래서 정이에요. 경영학에서 전략은 뭐죠? 여러 개로 나눈 것에서 핵심이 되는 것을 모아서 뭐라고 해? 딱 두 가지로. 선택과 집중이라고 하죠. 여러분의 마음속에 딱 서원과 대치되는 말이 과욕. 탐욕입니다. 딱 반비례해요. 무슨 이야기냐. 경영학적으로 아주 멍청한 판단이거든요. 아마 여러분들 마음에 하고 싶은 거 적으라고 하면 아마 수십 가지 나올 겁니다. 버킷리스트는 참 중생적인겁니다. 버킷 리스트를 따라가면 다 못 이뤄요. 세상 이치가 그런 겁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신기하고 똘망해서 다른 동물에 비해 몇 배의 욕심이 있는 겁니다. 탐할 욕도 그렇고 엄청난 욕심이 있는 게 인간이다. 그래서 수양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 수양을 하면서 먼저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전략적으로 핵심이 될 만한 것을 골라서요. 글을 쓸 때도 큰 대의나 뼈대를 잡아놓아야 해요. 그러면 거기에 채워넣기만 하면 돼요. 근데 글 못 쓰는 사람은 생각나는 대로 쓰니까 방 어질러진 것처럼 생각이 어지러운 겁니다. 나도 하고 싶은 게 많아요. 바이올린, 기타, 플롯 다 하고 싶고. 그렇지만 하고 싶다고 다 하느냐. 여러분, 세상에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사람 봤어요? 없어요. 내가 가장 핵심으로, 거기서 가장 놓지 않아야 할 걸 세워놓으면 자잘한 건 따라 들어오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이게 신이 서 있으면 목적이 잡힌 거고 그 담부턴 밀고 나가야 해요.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어떤 친구들은 복귀하고 싶지가 않대요. 근데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내 형이나 선배들 때는 더 심했는데, 그 남들 다 하는 걸 나는 왜 못하냐고 생각한 거죠. 분발, 내가 서원을 세웠으면, 어떤 타력에 대한 신을 세웠으면 그걸 그냥 밀고 나가는 겁니다. 깨달은 사람들이 있으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분발심을 내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분발 전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토요일에 지금 이 시간에 앉아있다. 얼마나 멍청한 일이에요? 공부하고 스키장도 가야하고. 그런데 여러분들은 뭐가 있냐. 나는 원불교 잘 몰라요, 자신이 없어요. 그렇지만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인연이 있는 겁니다. 타력이죠. 또 하나는 여러분 내부에 정말로 원하는 땃땃하고 뜨끈뜨끈한 무언가가 있어요. 인간답게 맑은 영혼으로 이 세상을 쉽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구도심이 있는 겁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게 있다는 걸 믿어요. 본인은 안 믿을지 몰라. 그러면 나는 왜 못하냐, 하고 분발심을 충분히 낼 수 있어요. 하다 보니 이렇게 저렇게 다 해보고 막히기도 하고. 그게 의심이에요. 의심이라는 표현보단 의문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죠. 까닭. 따라다니면서 알려주는 사람은 없죠. 최종은 자기가 선택해야 해요. 남에게 도움을 받아도 결국엔 내가 내 안에 있는 스승의 뜻을 따르는 거죠. 그럴 꺼내 쓰려고 하는 게 의문이에요. 덕진이 아버지가 식당을 했는데 망해버렸습니다. 그래서 3년간 날마다 경제 신문을 다 봤어요. 그랬더니 3년을 읽고 나니까 세상은 이렇게 돈 벌고 이렇게 돌아가는구나라는 눈을 딱 떴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공장도 진주에 납품하고 가게도 벌써 두 개 째에요. 우리는 연마하고 의문을 갖고 하다 보면 다 하게 되어있어요. 여러분 안에 지혜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여러분의 능력을 얼마나 믿는지 모르겠어요. 과학에서도 머리를 10프로도 못 쓰고 간다며. 이번에 수행해본 사람도 느끼겠지만 하면 다 되는 겁니다. 바쁘다고 하는 사람은 일을 못하는 사람이에요. 똑같은 사람이어도 일 처리 능력이 100배, 1000배 차이나는 걸 할 수 있습니다. 본인이 자기 자신의 능력을 사장시켜버립니다. 의문이 없어서.
그 다음 마지막에 성이라고 하죠. 정성 성이에요. 이건 일본의 사무라이가 격돌을 했는데 죽어도 이기는 놈이 있다며. 결국 끈질긴, 자빠져도 일어나는 놈이 이긴다고 하죠. 성즉성이란 말이 있어요. 즉이 진리거든요 사실. 은연 자제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인거죠. 곧 이것이 진리고. 색즉공이고 성즉성이에요. 어떤 성자도 정성이 끊어져서 성자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중생은 작심삼일이고 핑계거리가 나오죠. 성자들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겁니다. 중생들은 분리가 안돼요. 목표를 잡은 걸 놓지 말아야 해요. 중생들은 눈앞에 보이는 자잘한걸 잡는 게 우선이에요. 불보살들은 근본을 먼저 하지 급한 걸 먼저 하지 않아요. 본말을 잘 하는 거죠. 성리를 알아야 의두가 되는 것입니다. 일원상을 알아야 진정한 수양, 연구가 되는 것입니다. 성자들은 이 사람들이야. 이건 사업에도 적용하면 백발백중 성공입니다. 이 마음으로 수양, 연구, 실행에다 들이대면 100% 성공입니다. 원불교인에게는 추가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상대방을 부처로, 감사의 대상으로 보고 행하는 수양, 연구, 취사가 가능해집니다. 신앙에 바탕한 삶인 겁니다. 만나는 대상을 부처님으로 보고 대하면서 합니다. 좌선을 해도 그래요. 신앙에 바탕이면 편안한 미소지은 수행이 돼요. 사업을 해도 처처불상의 신앙으로 하면 천지 차이가 나요. 미국에서 어렵게 해서 돈을 엄청 번 사람의 강의가 신분의성을 1시간 강의하고 1000만원 받아요. 그래서 성을 하다보면 알게 되면 신심이 나고 알게 되면 분발심이 나고 알게 되면 성이 나요. 이게 순환구조입니다. 그러면서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수월해지고 안 보인 게 보이고. 여러분 달인 안 봤어? 자기 분야가 아니라 다른 걸 시켜도 해버리잖아. 그 사람은 감을 잡은 거거든. 그 계열의 일에 대해서. 여러분이 젊은 시절에 하면 된다는 그 체험을 하셔야 합니다. 이 체험이 없는 사람은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학벌, 부모, 외모, 머리 탓을 하는 거죠. 신분의성을 다 모아보면 결국 이것들이 마음이 들어서 하더라. 이 마음을 알아서 지키고 지키고 지켜서 잘 쓰고, 쓰다보면 잊어버리고. 다시 알아가다보면 안목이 달라지고 보이는 게 달라지고 계속 달라집니다. 그래서 정전 마지막에 보면 법위등급에 보면 체크리스트가 있습니다. 이 공부 다음에는 무엇을 하고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질의응답>
Q1. 송밀운 교우님
법마상전급 전까진 내 스스로를 믿지 말라 하셨는데 성경에도 내 뜻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나왔는데 그게 그 말인가요?
A1.
같은 표현입니다. 나를 완전히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과거 나의 깨닫지 못한 마음 과거의 습관의 마음, 욕심의 마음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래는 나는 부처인데 구름이 끼면 어리석어지니까. 그래도 부처님이죠, 사실은.
Q2. 홍석원 교우님
자신의 서원이 어렸을 때부터 있어서 일찍이 깨달음을 얻는 사람도 있지만 열심히 하지만 외부의 조건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에게 간절하지 못해서, 신분의성을 제대로 행하지 못해서라는 말을 듣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했는데 이루지 못하는 경우에는 어떠한 것이 잘못되어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A2.
자전거가 가려면 핸들링을 해야 합니다. 서원은 방향입니다. 경전은 공부의 방향이라고 했습니다, 의심이, 까닭이 없는 정성은 골치 아픕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것에 만족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서원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초입자들에게는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 범위가 가정을 넘어가면 서원이라고 합니다. 목표를 생멸로 잡으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생멸 없는 근원의 진영에 목표를 잡으면 쭉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원은 성불제중이라는 말을, 일원상이라는 말을 붙여줍니다. 성불이라는 것, 부처를 이룬다는 것은 내 마음자리를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자리를 확실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변함없는 마음이 체가 되어서 이 우주만유의 변화를 운영해나간다는 것입니다. 일원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서원은 문제가 없습니다. 더 성장하고 경계를 겪을수록 커나갑니다. 유형의 변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그걸 이루고나면 타락하게 됩니다. 고대 법대생 삼분의 일이 고시패스 못합니다. 서원이 국한 있는 서원이라면 그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난다. 근데 일원상의 서원은 변하지 않는다. 라는것입니다.
첫댓글 타이핑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