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회모임에서 (2008. 10. 3) 배재81회 홍성욱은 언제까지나 여러분의 곁에서 언제나 함께하고 싶습니다. | |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우남 이승만 박사
나는 몇 년전 강원도 화진포에 있는 이승만별장을 다녀 오며 '이렇게 위대하신 분이 우리의 뇌리에 독재자로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피가 끓는 분노를 느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20평도 안되는 별장이란 이름의 초라한 옛날집을 보고, 또 초라하지만 확실한 근거가 될 수 있는 전시된 자료들과 유품을 보면서 이렇게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받치신 분이 홀대받는 것에 대하여 너무나 화가 났었다.
물론 이렇게 위대하신 분인데 역사가들이 이분을 제대로 평가하여 언제인가는 역사속에서 건국의 아버지로 우뚝 서실거라는 것은 믿지만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일생을 바치시고 건국을 이루신 이승만 박사에 대하여는 독재자로 낙인찍어 전연 거론조차하지 않는 것을 보며 4.19 혁명을 격으며 포플리즘에 취해 건국의 아버지를 잊어 버리게 되었고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일행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부정부패의 파렴치한으로 몰아 부치기 시작하면서 이승만의 공과 업적은 사그리 없어지게 되고 잘못된 것은 부각되는 그 단초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박정희시절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사회주의 이념속으로 빠져들게되고 10.26 이후 그네들(사회주의 신봉자)이 민주라는 이름으로 이세상의 여론을 주도하며 세상의 비주류도 되지 못하던 사람들을 영웅으로 만들며 오던 이나라에도 일부 양식있는 사람들이 건국에 대하여 이제 서서히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에 대하여 조심스렇게 거론되고 있지만 아직은 이승만을 역사속에서 올바르게 제대로 원래의 위치로 가져다 놓기엔 너무 오랜 시일이 걸릴 것 같아 가슴 아프다.
우리는 이승만을 미국에서 호화호식하다가 해방이되고 어느날 갑자기 우리나라로 돌아와 갑자기 대통령이 된 사람쯤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가 위에서 이야기 한대로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이승만의 업적을 슬쩍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거나 빼버려 이승만의 업적이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을 어제 총동창회가 주체한 우남 이승만 박사와 배재학당 이란 주제로 조선일보의 '이한우 기자'의 강연을 어제 듣고서야 나도 자세히 알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리고 배재학당을 나왔다는 것이 새삼 자랑스러워 젔다.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인 이승만박사가 우리나라 독립의 기초가 된 정치적인 자유를 배우고 주시경, 최현배 선생과 같으신 우리글의 대가를 만나 독립정신을 키웠던 배재학당이란 배움터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나에겐 그렇게 자랑스러워 질 수가 없었다.
어제 강연을 하였던 이한우 기자는 이미 1995년도에 이승만 90년 이란 책을 지어 출판함으로서 이승만에 대한 기존인식의 벽깨는 실증적 접근 을 하였다고 이화여대 진덕규교수(정치학) 의 평을 받은 분이었다.
여기서 잠시 진덕규 교수의 서평을 보면
기존 인식의 벽깨는 실증적 접근 이승만에 대해 글을 쓰는 것, 그것도 객관적 평가를 전제로 한다는 것은 용기와 결단이 요청되는 일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이승만에 대해 최종 판결이 난 것처럼 노탐에 가득찬 독재자라는 표현이 아무런 유보없이 그에게 적용됐으며 은연중에 그러한 생각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막상 그 뒤 몇사람의 대통령과 지도자들을 경험하고부터는 이러한 비판적 시각도 변하게 됐는데 이를 단지 과거가 갖는 미화적 기능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없을 것같다.
오늘의 정치인들에게 필자는 이렇게 일갈하고 있다. 자신들은 과연 이승만에 견줄만한 애국심과 국가의 비전을 갖고 있는가. 이러한 주장과 논지가 바로 이 책을 관류하는 기본적 특징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필자의 주장과 접근이야말로 어느 의미에서는 참어려운 작업일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작업은 곧 엄연한 사실처럼 자리잡고 있는 기존의 관념과 인식의 벽을 깨는 작업일 수 밖에 없으며 그만큼 결연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최소한 다음 몇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이 책은 일정한 인식의 흐름을 갖고 있다. 즉 이 책에서는 어제와 오늘을 같은 시간대에서 수시로 넘나들고 있다. 어제의 사실을 오늘의 상황에 의해 재단하는가 하면 오늘을 어제의 연장으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시간의 통일성에 입각해 문제를 바라보고 상황을 평가하는 특징을 보여주고있다.
둘째 이 책에서는 기존 논의의 틀과 주장을 철저하게 극복하고 있다. 이승만에 대해 적어놓은 주장이나 생각의 편린들을 철저하게 분석하면서 그것에만 끝나지 않는 필자 자신의 조명을 새롭게 더하고 있다.
셋째 이 책은 우리사회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시각, 그것을 실증적 객관성 이라고 해도 좋을 일정한 접근방식을 보여준다. 이 책을 집필한 필자의 성격을 엿볼수 있는 주요한 단락은 부록이다. 이 부분을 읽고 있으면 이 분야를 공부해온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절감하게 된다. 이제까지 이승만과 그가 살았던 시대의 한국 현대사를 연구했던 수다한 저술이나 연구저서조차도 이승만 90년 이 한권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우리 학문의 현실성이야말로 더할 수 없는 참담함이 아닐 수없다. 그만큼 이 책은 우리의 어제와 오늘을 새롭게 되집어봐야 하는 새 과제를 던져주었으며 그러한 과제에 접근하는 인식의 좌표 설정의 가능성까지 열어주었음에 틀림없다
진덕규 이화여대 교수.정치학
서평만 보아도 이책의 내용을 가늠케 하는 책이다. 이책을 쓴 이후 계속 이승만에 대한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니 여간 안심이 되는 것이 아닌데 이한우씨와 같은 기자뿐 아니라 학자들도 이승만에 대한 연구 논문이 많이 나오고 하여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편향된 우리의 현대사가 바로 잡혀야 할 것이다.
이한우 기자의 보도된 글중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 역사 근거 많다. 조선초 태종 등 영유권 강력 주장 이승만 대통령도 "반환하라" 요구 란 기사를 오늘 다시 보며 다시한번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사람들의 야욕에 대한 불쾌함과 함께 이쯤에서 역사적 근거에 의해 우리도 대마도는 우리땅이라고 일본에 반환을 요청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이글이 이승만의 뛰어난 역사관, 그리고 국가관을 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오늘 이승만 탄생 134주년을 기념하며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을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대마도(對馬島)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결사 항전한 (대마도)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戰蹟碑)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1949년 1월 7일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첫 연두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이날 이승만은 한일국교재개를 언급하면서 대마도 문제를 꺼냈다.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라는 미국 요구에 맞서기 위한 지렛대로 대마도 카드를 뽑아든 것이다. 이 대통령의 발언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지 사흘 뒤인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그해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연두 기자회견 직후인 1949년 1월 18일 제헌의원 31명이 '대마도 반환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얼마 후 있게 될 샌프란시스코 미일 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국내의 한 언론이 2005년 입수한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1년 4월 27일 한국 정부는 미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칭,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j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고 밝혔다.
아쉽게도 같은 해 7월 9일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가 국무부에서 존 덜레스 미국대사를 만나 대마도 문제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전하자 덜레스는 "대마도는 일본이 오랫동안 통제하고 있고 이번 평화조약은 대마도의 현재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한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우리 정부도 더 이상 대마도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조선 초에도 강력하게 제기됐었다. 그것은 고려 때 대마도에 대한 인식이 여진족과 탐라(제주도) 중간쯤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와 접경한 여진족은 고려 관직을 받는 것을 영예로 생각했고 이 전통은 청나라가 성립되던 조선 중기까지 이어졌다.
탐라도 상대적 독립을 누리다 고려에 복속됐다. 반면 대마도는 상대적 독립을 유지했지만 고려나 조선의 관직을 얻고 생필품을 얻기 위한 교역을 꾸준히 요청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 대마도를 다루는 고려와 조선의 원칙이었던 것이다.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자 세종 원년(1419년) 상왕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심한다. 그때 밝힌 교유문(敎諭文)의 서두다.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대마도는 섬으로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들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놀기 시작했다."
태종의 교유문은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그리고 정벌이 끝난 후 대마도 도주에게 교유문에서 그는 다시 한번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명확하게 밝힌다.
"대마도가 섬으로 경상도의 계림(鷄林-경주)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文籍)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물론 대마도가 제주도나 거제도 같은 우리 땅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대마도가 우리에 조공을 바치던 땅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종 때 대마도가 일본 땅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15세기 초 태종 이방원의 대마도 인식과 20세기 중반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인식은 일맥상통한다.
이후 조선은 대마도에 대해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 그저 왜구의 근거지 역할만 해주지 않으면 좋다는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대마도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양다리를 걸쳤던 대마도주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일본화를 지향했고 임란 직후인 17세기 초 일본의 막번체제에 편입됐다. 조선 전기 때만 해도 조선의 신하임을 당당히 밝혔던 대마도 도주가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적대로 1870년대 완전히 일본화됐다. 지금 대마도는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그 근거는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는 것보다 훨씬 근거가 약하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에 비하면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고 근거도 있다.
이한우 기자 (hwlee@chosun.com)
끝으로 이한우 기자가 강연한 내용중에 '사회주의자들의 우상 여운형씨가 일제시대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간 것을 말하는데 여운형씨가 감옥에 간 이유가 '라디오 방송을 들으니 일본은 곧 망한다'는 말을 하고 다니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간 것인데 이러한 사실은 부각이 되고 있지만 막상 '미국에서 일본은 망한다고 방송한 장본인 이승만에 관한 이야기는 쏙 빠져 버려' 우리는 이승만의 업적을 모르고 있다 라는 말이 새삼 떠 오른다. 언제나 행복하소서~
배재학당 81회 홍성욱 드림 좋은 내용, 종친들과 함께하고자 홍성욱 선배님의 글을 옮겨왔읍니다. ^L^ ?
| 편안한 고전음악 모음
01. 마스네 - 타이스의 명상 02. 챠이코프스키 - 잠자는 숲속의 미녀 03. 드볼작 - 유모레스크 04. 토셀리 - 세레나데 05. 마스카니 -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 06. 와이만 - 은파 07. 드비쉬 - 월광 08.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5번 09. 챨리 채플린 - 라임라이트 10. 오펜바하 - 호프만의 뱃노래 11. 베토벤소나타 - 월광 12. 멘델스존 - 바이올린협주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