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07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7주)
“두발로 일어서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겔2:1-5; 고후12:2-10; 막6:1-13
예언자 에스겔은 여호야긴 왕과 함께 유대의 유력한 사람들과 바벨론 포로로 끌려왔던 제사장이었습니다. 에스겔은 당시 유대의 귀족에 속했고, 솔로몬이 세운 대제사장 사독 계열의 많은 권한을 가진 사제 그룹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에스겔은 함께 포로로 온 사람들과 함께 그발 강가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 뒤, 그는 아주 특이한 환상을 보고 예언자로 소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본 에스겔은 자리에 엎드렸습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이 구절은 히브리어로 다음과 같이 직역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네 두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말할 것이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벤 아담)’은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이 에스겔을 부를 때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개역개정에선 ‘인자’로, 영어성경에선 ‘son of man/mortal’로 번역되는데,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함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에스겔의 모습은 나라를 잃고 낯선 땅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자신의 비참함, 무력함,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제사장이었지만 자신의 직분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할 수 없었습니다. 혼돈과 절망 속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들려줄 희망의 메시지도 자기 안에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무력감, 패배감이 뒤범벅된 그는 현실에 두발 딛고 온전히 서있을 수 없었습니다.
암담한 현실 앞에 무너져버린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네 두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말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 속으로 들어와서 그의 두 발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무기력과 두려움에 빠져 몸과 마음이 얼어붙어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현실을 마주하고 직면하도록 그가 두 발로 설 수 있는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땅에 두 발이 잘 붙어 있도록 에스겔을 일으켜 세우신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격적이어서 사람에게 결코 강압적으로 행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신뢰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내면에서 판단과 비난, 반드시 이래야만 한다는 당위의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은 초자아의 소리일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는 만큼 우리의 속도와 역량에 맞춰 하나님은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에게 부드럽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신성에 참여하도록 언제나 인격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된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당신에게 반역을 해왔던,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는 겁니다. 그들이 듣든지 말든지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앞뒤로 조가와 탄식과 재앙이 적혀있는 두루마리 책을 펴서 보여주시고, 그 책을 먹게 하셨습니다. 겉보기에는 쓴 소리였지만, 입 안에 들어가자 그것은 꿀처럼 달았습니다.
이어지는 복음서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복음을 전하신 것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고,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치신 이야기가 오늘 읽은 마가복음 6장 바로 앞인 5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 기적들로 인해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몰려든 사람들과 함께 하나의 세력을 만들려고 그곳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계시던 갈릴리 호숫가를 벗어나, 고향인 나사렛으로 제자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동네 사람들이 모두 회당에 모여들었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호기심과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듣고 놀랐습니다. ‘듣고 놀라’(6:2)를 원어로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 듣고 나서 한 번 놀랐다는 말이 아니라, 들으면서 계속 놀랐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에게 주어진 지혜와 그의 손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저런 권능과 기적들은 어찌된 것인가?’주님의 말씀은 시종일관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은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깜짝 놀라 수군거렸습니다. 예수님은 틀림없이 자기 동네에서 같이 자란 목수이고, 자신들과 꼭 같은 평범한 보통 사람인데, 자신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을 하니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습니다(6:3).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배척’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원어 ‘에스칸달리존토’는 미완료 수동 직설법 동사로 계속되거나 반복되는 동작을 나타냅니다. 이 단어의 원뜻은 ‘걸려 넘어지게 하다(stumble)’입니다. 수동태로는 ‘걸려서 넘어진다’는 뜻이 됩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예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마치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이 생각이 주춤거리고 더 이상 나갈 수 없이 계속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능동적으로 배척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에 의심을 품고, 의아해하며, 스스로 함정에 빠졌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예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높이거나 믿거나 신뢰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자 예수님은 놀랐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권능을 베풀어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 효과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몇몇 병자를 고쳐주신 것 외에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사실, 자기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고향 사람들의 생각 밑에는 자기비하, 자기혐오가 깔려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처럼 가난하고, 못 배우고, 보잘 것 없는 후진 동네에서 자란 인간이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냐’는(요1:46) 구절과 오버랩 됩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고집하다 그것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찾아오신 이 사건이 그들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결단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자의식, 자기비하에 빠져있느라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주님을 거절할 때가 참 많습니다. 초자아가 퍼붓는 비난의 말에는 아무런 의심도, 반박도 못하고 얼어붙지만, 우리에게 부드럽게 다가오셔서 들려주시는 따뜻한 사랑의 음성엔 한사코 귀를 막고 손사래를 칩니다. ‘내가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너는 사랑 덩어리이고, 행복 덩어리이다. 너는 자유다.’ 조건 없는 행복을 주시는 주님을 거부하면서 우리는 이러이러한 조건들이 있어야 자신이 행복하고 사랑 받을만하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나사렛 사람들과 너무나 닮아있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네 두 발로 일어서라.’ 암울한 현실 앞에 무너져 현실을 직면할 수 없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네 두 발로 일어서라.’ 이 말씀이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전환점이 되려면, 우리는 마음을 열어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야 그 벌려진 틈사이로 주님의 영이 들어오셔서 우리가 현실에 두 발 딛고 일어설 힘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의 어둔 마음 속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에 하나님의 빛이 채워지도록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생각이 신앙적이고 경건해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를 단순함으로 이끌어 우리의 모든 이해와 경험을 더 깊이 헤아리게 합니다. 믿음은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에서 의식적으로 통합되게 합니다. 믿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장 깊은 영적 차원에 이르게 하고, 바로 그 깊은 곳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과 만나게 합니다.
자신의 나약함, 불안감, 무력함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으로 인해 자기의심이 들 때, 그 의심을 강제로 억누르기보다 꺼내어 마음의 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일치감, 능력, 빛, 하나님의 사랑 같은 보다 높은 영역을 우리에게 열어주어서 우리가 생각에 걸려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두 발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오늘 고린도후서 말씀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데서 완전해집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교만을 꺾으려고 가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살면서 겪는 고통조차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하나 되는 자리로 경험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사건들로 변형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습대로 가던 방향을 돌이켜 결단하고 그 길을 계속해서 가도록 지향하는 과정이 있을 때 그렇습니다. 우리의 돌이킴-결단-지향은 하나님의 신성함에 참여하는 과정이 됩니다. 믿음은 우리가 마음을 열어 이 과정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친절하게 안내합니다.
엎드려 있는 에스겔이 하나님이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두발로 땅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마음에 그려보십시오. 우리는 불완전하고 나약하지만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일어설 때, 성령님께서 우리의 두발을 잡아 세워주십니다. 살다가 자기 생각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자신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열어 우리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하나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두발로 일어서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자기 생각 속으로 빠져들 때마다, 의식적으로 두발로 땅을 딛고 천천히 일어서십시오. 자기를 받쳐주는 땅에 깊이 뿌리내린 나무처럼 척추는 곧게 펴고 두발로 단단하게 서있으십시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다.”는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으로 경험될 것입니다. 두발 딛고 일어서는 움직임은 돌아섬-결단-지향으로 이어져 우리가 삶을 의미 있고 풍요롭게 가꾸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신성에 참여하도록 부르시는 음성에 우리가 돌이켜 결단하고 끊임없이 당신을 지향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