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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동초등학교총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유랑아제
도산서원의 석양을 보다
오후 4시경이 되어서야 겨우 우리의 목표지인 도산서원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너무 맟설고 이상한 모습에 어리등절 할 수 밖에 없었다. 안동댐의 물이 너무 많이 올라와서 서원이 물에 떠 있는 모습으로 여겨질 지경이었다. 강 건너에 있는 시사대는 마치 어느 이국땅에 있는 시설물처럼 물 위에 덩실하게 남아 있는 모습이어서 시사대의 본래 모습은 연상하기조차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사대는 700여명의 선비가 늘어 낮아서 과거를 보았다는 곳인데 지금 보이는 공간은 700명은커녕 70명도 제대로 앉을 자리가 안 되어 보이고 물 위에 덩그렇게 시사대만 남아 있는 모습이 서글프고 우리 문화 정책이 개발꾼들에게 밀려서 맥을 못 추는 현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본 교수님도 어처구니없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이 도산서원이 유네스코문화유산의 등록을 추진하고 있는데, 지금 너무 어설프게 복원이랍시고 해준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 첫째로 도산서원을 복원하면서 담장을 너무 높게 복원하여서 건물을 방해하고 있으며, 둘째는 옥진각을 제거하여야 할 건물이라는 것이고, 셋째는 주차장을 너무 높여 놓아서 본래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게 되어 벌ㅆ다는 것이다. 물론 본래는 이렇게 편리한 도로가 없었으며, 배를 타고 양쪽의 풍경을 즐기면서 도산서원의 아래에 내려서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야 하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안동댐의 수위가 높아져서 배를 내리던 곳도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더구나 퇴계사상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반타석]은 수몰이 되어서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어져 버렸으니, 시사단의 초라한 모습과 함께 수몰 되어버린 문화재의 슬픈 현실을 볼 수 있는 곳이 이곳인가보다. 이 도산서원은 본래 한서암이라는 절의 터를 계산서당이라 하여서 서당으로 개조하여 쓰다가 퇴계에 의해서 도산서원으로 발전이 된 곳이라 한다. 도산서원은 퇴계학의 본당으로서 경의 철학의 산실이나 영남학파의 본고장이며 탯줄이 된 곳이라 하겠다. 퇴계의 철학은 지식과 함께 덕성을 길러서 지혜로운 인격을 길러야 한다는 인격철학을 주류로 하는 학문으로 퇴계의 제자들이 대를 이어서 훌륭한 역사적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본당이라 하겠다. 광명실이라는 도서관이 양쪽에 붙어 있는데 한쪽에 만으로는 다 정
퇴계학파의 한수제자이면서도 다른 제자들에게 왕따를 당해야 했던 기인 중의 한 분으로 월천이라는 분을 들 수 있는데, 이 분은 도산서원의 학풍을 받았지만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의 주장이 강해서 월천서원이라는 곳에 따로 모시는 신세가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설명을 듣고 도산서원의 곳곳을 돌아보았는데 하필이면 이곳의 경치, 특히 아름다운 석양의 모습을 못 찍어서 핸드폰으로 찍었는데, 너무 쉽지 않아서 잘 찍혔는지 알 수가 없다.
저물어 가는 석양빛이 안동댐의 물위에 먼 산 그림자를 드리우고 옅은 석양빛깔로 물들어 가는 모습은 분명 한 폭의 동양화 이었고, 시심이 절로 일어나는 풍경이었는데 너무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도산서원이라면 우리 서원 역사의 본류를 이루는 곳인데, 이다지 소홀한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있는 자자체에서 진정으로 문화재를 사랑하고, 잘 살려서 유네스코세계유산이 되도록 간수하고 관리하는 정성을 보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미안하지만 낙제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고 언짢아 진다.
헛제삿밥 먹고 제사를 공부하다
23일 행사가 도산서원의 탐방을 끝으로 온 종일 강행군을 한 탐방 기행이 끝을 맺었다. 저녁 식사로 헛제삿밥을 먹고 숙소로 들어 왔다.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기다리고 있는 강의를 맡은 교수님을 위해서 숙소배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강의를 먼저 듣기로 하였다. 한국국학진흥원의 지하 세미나실로 들어선 우리는 국학진흥원의 교수인 김미영교수의 특강 <안동의 종가와 제례문화(음식)>라는 제목의 강의를 들었다.
헛 제삿밥 선비고장 안동 땅의 첫 끼니 헛 제삿밥 먼 조상의 고향 땅에 찾아오긴 했다마는 내가 모실 제사도 없이 헛제삿밥만 먹고 가네. 2012.10.25. 03;14’
우선 안동이 대단한 유교의 고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 것은 불천위라는 대접을 받는 분이 안동에만 50위가 된다는 것이었다. 불천위란 4대 봉사만 하는 집안의 풍습이 있지만, 그 위업이 대단하여서 대를 따지지 않고 자손이나 지방에서 계속 베사를 올리는 훌륭한 인물을 말하는데, 국가에서 내린 불천위를 [국불천]이라하며, 향리에서 추천하여 모시는 인물을 [향불천]이라 부른다고 한다. 개인의 경우 4대 봉사만하게 되어 있어서 퇴계16대손이 4대 봉사를 하고 있지만, 퇴계불천위 제사에서는 제관만 120여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제사를 올리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종가에서 올리는 제사는 그 집안의 후손들의 제사의 롤모델이 되는 것이므로 대부분은 종가의 제사 모습을 그대로 따라 모시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제사는 당연히 집성촌을 중심으로 온 집안<촌락>이 모두 같은 모양으로 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집성촌이라는 것은 0. 마을의 1/3 이상이 동성동본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며 0. 반드시 마을의 지배적인 문중이 있어야 하며, 0. 재실이나 누정 등을 갖추어야 비로소 집성촌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한 집성촌이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동성동본이 모여사는 마을로는 동성마을<재인부락> 동성촌락<재실 등을 갖추지 못함> 등의 일반인들이 집성 마을이 있지만 집성촌이라면 반드시 반촌<양반들의 마을>이어야 한다는 것이 재실 등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현재 안동에는 97개의 집성촌이 있으며, 본래 113개의 집성촌이 있었지만, 안동댐과 임하댐으로 인한 수몰로 인해서 16개 마을이 사라진 상태라고 한다. 이중에서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분이 48분이며, 이분들의 제사를 종가가 45개라한다. 3개의 종가에서는 2분의 불천위를 모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50위의 불천위 중에서 특이한 경우는 석주이상용 선생이 만주로 독립운동을 떠나시면서, 장주<신주를 땅에 묻음>를 하고 떠나셨다고 한다. “내가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면서 조상의 제사를 보시기 어려운데 자손 누가 제사를 모셔 드리겠는가 차라리 내 손으로 조상님을 모셔 드리고 떠나겠다.” 하시면서 신주를 묻어 버려서 불천위가 실행 되지 못한 경우가 생겼다고 한다. 제례에서 생략하여서 안 되는 것 4가지라는 강의를 시작하여서 1. 병풍, 2. 제사상<평상시 사용하던 상을 쓰지 않음>, 3. 제사용기<평상 식기로 제사를 모시지 않음>, 들은 알겠지만 마지막 한가지를 듣지 못하였는데 다른 분들은 알았는지 모르겠다. 보통의 제사는 1차 진설이 11시 40분 경에 시작을 하여서 모시는 것이 원칙이며, 나물 등 음식에서 말라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을 차려야 한다고 하였다. 요즘 TV 등에 제사상이 소개 되는 등 점차 알려지면서 집안의 위신을 위해서 점차 너무 많이 차리는 모습이 비춰져서 문제가 되고 있단다. 주자가례에는 단설<제사 당사자의 상만 차림>이 원칙으로 되어 있으나, 요즘 대부분은 합설<제사 주인공의 부부상을 함께 차림>으로 모시고 있으며, 의성김씨의 경우 합설 하되 상을 따로 차리는 각설을 하는 방식으로 모시고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복잡한 순서를 따라 지내는 것이 원칙이지만, 요즘은 시간도 점차 11시경이면 끝내는 등 약식으로 변해 가고 있다. 특히 주자가례에는 [조율이시]라는 명백하게 지정된 과일이 없으며 제철 과일로 하면 되는 것으로 되어 있고, 합문 구복이라는 것돟 기어이 구복을 기다리지 않고 잠시 묵념 형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특이한 것은 옛 종가의 [혈식분자]라하여 날것으로 올렸던 고기와 생선이 점차 익힌 음식으로 변해 가는 것은 음복시 나누어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한 방식으로 바꾸이 가는 것이라한다. 생선도 지방에 따라 각기 조금씩 다르며, 그고장에서 만호이 나는 생선을 놓는 ㄱ서으로 발전된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물도 콩나물 무국을 끓이는 지방과 달리 전라도 지방에서는 소고기국을 끓이기도 하고 탕과 같은 재료를 쓰기도 한다. 마지막 소지를 하면서 혼과 백을 자신의 자리로 돌아 갈수 있도록 모신다는 뜻을 표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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