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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려 開京은 河北 靑縣(大城).
1.고려사지리지로 부터 기본을 갖추고 송사,요사,당서를 참고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의 위치를 밝혀본다.
○王京 開城府 (왕경개성부)
本高勾麗扶蘇岬新羅改松嶽郡太祖二年定都于松嶽之陽爲開州創宮闕.(중략) 立市廛辨坊里分五部.
본 고구려 부소갑으로 신라가 송악군으로 개명했고 태조2년 송악의 남쪽을 수도로 정하고 개주라 하였으며 궁궐을 지었다.(중략) 도읍을 5방리로 나누었다.
光宗十一年改開京爲皇都
광종10년(959년)개경을 황도로하였으며
成宗六年更定五部坊里十四年爲開城府管赤縣六畿縣七.
성종6년(987년)5부방리를 정하고 14년(995년)개성부가 적현을 기6,현7곳으로 관리하였다.
顯宗九年罷府置縣令管貞州/德水/江陰三縣又長湍縣令管/松林/臨津/免山/臨江/積城/坡平/麻田/七縣俱直隸尙書都省謂之京畿.
현종9년(1018년)정주,덕수,강음의 부를 없애고 현령으로 관리하였다.송림,면산,임강,적성,파평,마전의 7현은 상서도성에 직접 예속되게하고 경기라 일컬었다.
十五年又定京城五部坊里(중략)二十年京都羅城成.[王初卽位徵丁夫三十萬四千四百人築之至是功畢. 城周二萬九千七百步羅閣一萬三千*閒大門四中門八小門十三曰(중략)又皇城二千六百*閒門二十(중략).一云丁夫二十三萬八千九百三十八人工匠八千四百五十人城周一萬六百六十步高二十七尺厚十二尺廊屋四千九百一十*閒.]
현종15년(1024년)경성5부방리를 정하였다.20년(1029년)경도의 나성을 축성하였다.현종초에 장정 30만4천4백명을 동원하여 성을 쌓았는데 그 둘레는 27900보(약19km)이고 라각 13000개,대문4개,중문8개,소문13개를 두었다.황성은1600칸,문20개였다.한편 전하길 장정 23만8938명 장인 8450명명을 동원하였고 성둘레는 10660보(7.4Km)높이는 27척(약8m)두께는12척(4m)방은 4910칸이었다.
운영자주:둘레 19Km은 조선의 한양성곽 둘레와 같다.
文宗十六年復知開城府事都省所掌十一縣皆屬焉.又割西海道平州任內牛峯郡以隸之.
문종16년(1062)년 지개성부사로 복귀시켜 11개 속현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서해도 평주 임내 우봉군을 나누어 개성부에 속하게했다.
忠烈王三十四年設府尹以下官掌都城內別置開城縣掌城外.
충렬왕30년(1304년)부윤을 설치하여 하관으로 하여금 성밖을 장악하는 개성현을 도성내에 별도로 두었다.
恭愍王七年修松都外城
공민왕7년(1358년)송도의 외성을 수리하였다.
恭讓王二年分京畿爲左右道以長湍. 臨江免山臨津松林麻田積城坡平爲左道; 開城江陰海豐德水牛峯爲右道.
공양왕2년(1390년)경기를 좌우2도로나누어 長湍.臨江 免山 臨津 松林 麻田 積城 坡平을 좌도로하고 開城 江陰 海豐 德水 牛峯을 우도로하였다.
又依文宗舊制[文宗二十三年正月以楊廣道漢陽沙川交河高峯豐壤深岳幸州海等州見州抱州峯城金浦陽川富平童城石泉荒調黃魚富原果州仁州安山衿州南陽守安交州道永興兎山安峽僧嶺朔嶺鐵原西海道延安白州平州俠州新恩牛峯通津安州鳳州瑞興等州縣屬京畿.]以楊廣道漢陽南陽仁州安山交河陽川衿州果州抱州瑞原高峯交州道鐵原永平伊川安峽漣州朔寧屬左道 以楊廣道富平江華喬桐金浦通津西海道延安平州白州谷州遂安載寧瑞興新恩俠溪屬右道
各置都觀察黜陟使以首領官佐之.
한편으로 문종의 구제도에 의하면 문종23년(1068년)양광~삭녕을 좌도로하고, 양광~협계를 우도에 속하게하고 각기 도관찰출척사를 두어 수령관을 돕도록 하였다.
王都鎭山松嶽[一名崧岳巓有神祠.]又有龍岫山進鳳山東江[在貞州.]西江[卽禮成江]碧瀾渡屬郡一縣十二.
왕도 진산송악(일명 송악전에 신사가 있다)또한 용추산,진봉산,동강(정주에 있다)서강(즉 예성강),벽란도가 속한 군1현12개 이다.
○開城縣
本高勾麗冬比忽新羅景德王十五年改爲開城郡.顯宗九年罷開城府置開城縣令管貞州德水江陰三縣直隸尙書都省.
본래 고구려 동비홀로 신라 경덕왕15년(756년)개성군으로 고쳤다.현종9년 개성부를 없애고 개성현령이 정주,덕수,강음 3현을 관리하고 상서도성에 속하게하였다.
忠烈王三十四年以開城府掌都城內別置開城縣掌城外.有井名曰大井[世傳懿祖娶龍女初到開城山麓以銀盂掘地水隨涌因以爲井.]有歧平渡.
충렬왕34년(1308년)개성부장도성내에 개성현장성외를 별도로 설치하였다.우물이있는데 일명 대정이라한다.지평도가있다.
○牛峯郡○貞州○德水縣○江陰縣○長湍縣○臨江縣○免山縣
우봉군,정주,덕수현,강음현,장단현,임강현,면산현이 속한다.
위지명들은 당이 고구려를 멸한후에 당서지리지에 그 기록이 있을것이므로 찾아보면
○臨津縣本高勾麗津臨城縣.[一云烏阿忽]新羅景德王改今名爲開城郡領縣. 顯宗九年爲長湍縣屬縣文宗十六年來屬恭讓王元年置監務. 有新京舊址[恭愍王欲遷都南京遣前漢陽尹李安修其城闕民甚苦之. 乃卜于太廟不吉不果遷. 於是親幸相地遂營宮闕時人謂之新京.]有臨津渡.
임진현은 본 고구려 임진성현에 속한다.(일전 오아홀)신라 경덕왕이 개성군령현으로 고쳤다.
현종9년(1018년)장단현속현으로하였고 ,문종16년(1062년)에 속하게하였고 ,공양왕 원년(1389년)에 감무를 두었다. 새서울의 옛터(공민왕이 남경으로 천도할 욕심이있어 이전에 한양윤 이안을 파견하여 그성을 수리하였는데 그 성백성들이 고달파하였다.이에 점을치니 태조사당이 불길하다하여 천도하지 않았다. 임금이 그곳에 친히 나시어 그 땅에 궁궐을 경영하려 했던곳을 신경이라 부른다) 임진도가 있다.
운영자의 생각으로 고려의 새로운 지명들은 그이전에 당나라에서 차지했을것이므로 구당서를 찾아보았더니 역시 임진현이 나오는데 구당서에는 이지역이 한나라 영토라는 기록에 이어서 주인이없다가 갑자기 600년을 넘어 수나라 땅이라 하는데 이런 지명들은 중국사가들이 최소 600년간 이지역 영토의 주인을 빼먹은 엉터리 기록인것이다. 고구려,백제의 옛땅에 이런식으로 지명을 붙인것이 대부분이다.
구당서에서 임진을 찾으면 창주에 속함을 알수가있는데
臨津 漢東光縣地。隋於故胡蘇亭置胡蘇縣。武德四年,屬觀州。貞觀十七年,屬滄州。天寶元年,改為臨津。
한나라 동광현으로 수나라가 호소현으로 하였엿고 무덕4년(621년) 관주에 속하게 하였으며 정관17년(643년)창주에 속하게하였으며 창주를 임진으로하였다.
곧 滄州가 臨津인것이다.
滄州上
漢渤海郡,隋因之。武德元年,改為滄州,領清池、饒安、無棣三縣,治清池。其年,移治饒安。四年,平竇建德,分饒安置鬲津縣。五年,以清池屬東鹽州。六年,以觀州胡蘇縣來屬,州仍徙治之。其年,又省棣州,以滴河、厭次、陽信、樂陵四縣來屬。貞觀元年,以瀛州之景城,廢景州之長蘆、南皮、魯城三縣,廢東鹽州之鹽山、清池二縣,並來屬。又以滴河、厭次二縣屬德州,以胡蘇屬觀州,仍移治於清池。又省鬲津入樂陵,省無棣入陽信。八年,復置無棣縣。十七年,以廢觀州之弓高、東光、胡蘇來屬。割陽信屬棣州。天寶元年,改為景城郡。乾元元年,復為滄州。舊領縣十,戶二萬五十二,口九萬五千七百九十六。天寶領縣十一,戶十二萬四千二十四,口八十二萬五千七百五。在京師東北二千二百一十八里,去東都一千三百八十二里。
滄州에 鹽州가 있다는것이고 이지명은 고려사에 염주가 안서도호부에 속한다는 기록이다.
高麗史58卷-志12-地理3
○安西大都護府 海州
本高勾麗內米忽[一云池城一云長池.]新羅景德王改爲瀑池郡.太祖以郡南臨大海賜名海州成宗二年初置十二牧州其一也(하략)
○塩州
本高勾麗冬音忽[音一作彡一云豉塩城.]新羅景德王改爲海臯郡. 高麗初更今名成宗十四年置防禦使顯宗初廢防禦使來屬後置監務. 高宗四年以禦丹兵有功陞爲永膺縣令官四十六年以縣人將軍車松祐有衛社之功陞知復州事元宗十年又以衛社功臣李汾禧之鄕改爲碩州. 忠烈王三十四年又陞爲溫州牧忠宣王二年汰諸牧降爲延安府別號五原[成廟所定.]有大堤號曰南大池州東有氈城古祭天壇.
해주에는 송사에서 기록된 송나라사신 진청이 고려개경으로 항해 여정에 나오는 개경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지명으로 白州와 鹽州(송사에는 閻州로)와 옹진이 나온다.
또 遼史지리지를 보면,
鹽州。本渤海龍河郡,故縣四:海陽、接海、格川、龍河,皆廢。戶三百。
이곳을 宋史지리지로 보면
滄州,
上,景城郡,橫海軍節度。崇寧戶六萬五千八百五十一,口一十一萬八千二百一十八。貢大絹、大柳箱。縣五:清池,望。熙寧四年,省饒安縣為鎮入清池。有乾符、巷姑、三女、泥姑、小南河五砦。政和二年,改巷姑曰海清,三女曰三河,泥姑曰河平。
구당서지리지와 송사지리지에서 창주의 위치는 같은 지명이 중복 되어있어 변하지 않은것으로 알수있다.
따라서 臨津=滄州=鹽州로 비정되는 것이다.
고려사지리지에 개성부에 속한 임진을 좌도로했으므로 개경은 우측에 있는것이다. 아래 대청광여도에서 창주,안주,염주,덕수,교하가 나와있다.
창주 우측에 염산이 바로 염주인것이다.
거란이 송과 고려를 공격하니 송과 고려가 가까와져 송나라에서고려로가는 행로를 내륙수로에서 외부해로로 바꾸었는데 송나라에서 고려개경으로가는 기록이 송사에 나온다.
2.서긍의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위치.
남송의 徐兢이 지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왕성을 설명한 글을 보면,
군읍,
州,縣之建。實不副名。特聚落之繁處。自國之西北。與契丹,大金接境。粗有壘壍。其東南濱海。亦有建於島嶼者。惟西京最盛。城市略如王城。又有三京四府八牧。又爲防禦郡一百一十八。爲縣鎭三百九十。爲洲島三千七百。皆設守令監官治民。惟牧守都護。公廨數楹。令長則隨所在。舍於居民。夷政租賦之外。無健訟在官者。公田不足以資用。則亦仰給於富民云。
고려의 서북에 거란과 함께있고 금나라와 경계를 접한다. 성채가있는데 동남에 빈해가 있다.역시 섬들도있다. 오직 서경이 최고로 번성하기가 개경 왕성과 같으며 3경4부 8목이있다.(하략) ..
고려는 서북에 거란이있고 동남으로 빈해가있다는 위치가 아래 대청광여도에서 일치하며 바로 개경이 청주,대성임을 일수있다.
3.宋史 卷四百八十七 列傳第二百四十六 外國三
二月,(중략) 靖等自東牟趣八角海口,得思柔所乘海船及高麗水工,即登舟自芝岡島順風泛大海,再宿抵甕津口登陸,行百六十里抵高麗之境曰海州,又百里至閻州,又四十里至白州,又四十里至其國。治迎使於郊,盡藩臣禮,延留靖等七十餘日而還,遺以襲衣、金帶、金銀器數百兩、布三萬餘端,附表稱謝。
2월,유청등은 동모에서 팔각해구로 향하여 고려항해사가 운행하는 배에 승선하였다.즉 지강도에서 배를 타고 나아가니 대해에 이르렀다.옹진구에 상륙하여 다시 묵었다. 160리를 가니 고려의 국경인 해주에 다다랐다.또 다시 100리를 가니 염주였다.또 40리를 가니 백주였고 또 40리를 가니 왕치가 교외에 나와 사신을 영접하고 신하의 예를 다하였다.진청등은 70여일이 지난후에 돌아왔다.고려에서 습의,금은기 수백냥,3만여단의 베를 보내니 감사하다는 표를 보냈다.
옹진구------160리------->해주----100리--->염주--40리-->백주--40리-->개경
옹진에서 육지로 총340리(약 136 Km)를 가야 개경이 나온다는것이다.
○瓮津縣(고려사지리지)
本高勾麗瓮遷高麗初改今名顯宗九年置縣令.有麒麟島昌麟島魚化島孤島謀島屬縣二.
옹진현은 고려儒州에 속한다고 되어있다.
滄州라는 지역은 동시대의 거란지리지와 지도를 살펴보면 그지역은 覇州로 某州와 남북으로 위치해있어 이에대한 지명 또한 거란 이전의 당나라 지명에서 살펴봄이 가능하다.
구당서지리지에서
莫州上(모주 상)
本瀛州之鄚縣。景雲二年,於縣置鄚州,割瀛州之鄚、任丘、文安、清苑,幽州之歸義等五縣屬之。其年,歸義復還幽州。開元十三年,以「鄚」字類「鄭」字,改為莫。天寶元年,改為文安郡。乾元元年,復為莫州。管縣六:莫、文安、任丘、清苑、長豐、唐興。天寶領縣六,戶五萬三千四百九十三,口三十三萬九千九百七十二。去京師二千三百一十里,至東都一千四百三十里
모주는 본 영주의 정현이다. 그러나 당시대의 영주는 하간 유역에 있었다.莫、文安、任丘、清苑(현 保定)、長豐、唐興。
가 그에 속한다 되어있다.
송나라 패주라는 지명은 당서와 요사(요 패주는 요녕부근) 에 나오지 않으므로 송사지리지에서 살펴보면,
霸州(패주)
中,防禦。本唐幽州永清縣地,後置益津關。周置霸州,以莫之文安、瀛州之大城來屬。政和三年,賜郡名曰永清。崇寧戶一萬五千九百一十八,口二萬一千五百一十六。貢絹。縣二:文安,上。景祐二年,廢永清縣入焉。有劉家渦、刁魚、莫金口、阿翁、雁頭、黎陽、喜渦、鹿角八砦(성채)。元豐四年,割鹿角砦隸信安軍。政和三年,改劉家渦砦曰安平,阿翁曰仁孝,雁頭曰和寧,喜渦曰喜安。
大城。上。
본 당 유주 영청현에 속했다.나중에 익진관을 설치했다.패주는 모주의 문안,영주의 대성이 속했다.(아래 대청광여도에 익진,문안,창주,고려사지리지에 나오는 교하,덕수가 보인다)
패주의 위치 (현재 랑방시로 흡수)
霸州市地处河北省冀中平原东部,位于京、津、保三角地带中心,属环京津、环渤海城市群。北距首都北京80公里,东临海港城市天津70公里,西距古城保定65公里。宋人称:“此固三关之锁钥,实则冀中之机枢”,史有“帝阙下临通万国,行人至此望燕山”的记载。
패주시는 하북성기중평원동부에 있고 북경,천진,보정의 삼각지대 중심에있다. 북으로 북경과80Km,동으로 항구 천진과 70Km,서쪽으로 보정고성과 65Km거리에 있다.
천진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覇州의 왼편에 臨津이 보인다. 공양왕2년(1390년)경기를 좌우2도로 나누어 長湍.臨江 免山 臨津 松林 麻田 積城 坡平을 좌도로하였으니 이곳이 고려국 경기도의 왼편이 되는곳이므로 개경과 가까운곳이 된다고 볼수있다.
4.원사 세조기록을 보면;
十年九月 壬辰,中書省臣奏:「高麗王王田屢言小國地狹,比歲荒歉,其生券軍乞駐東京。」詔令營北京界,仍敕東京路運米二萬石以賑高麗.
1273년 중서성 신하가 진언하길" 고려왕 왕전(원종)이 누차에 전하길 고려는 작고 좁은나라이며 세세로 거칠고 어려우니 생권군을 동경에 머물게 하길 바랍니다."하였는데 세조(쿠빌라이)가 북경근처에 군영을 허락한다하였다. 또 교지하길 동경로에서 쌀2만석을 운반하여 고려를 구휼하라 하였다.
七年二月 高麗國王王田來朝,求見皇子燕王,詔曰:「汝一國主也,見朕足矣。」□請以子愖見,從之。(중략)令國王頭輦哥等舉軍入高麗舊京,以脫朵兒、焦天翼為其國達魯花赤,護送□還國。仍下詔:「林衍廢立,罪不可赦。安慶公淐本非得已,在所寬宥。有能執送衍者,雖舊在其黨,亦必重增官秩。」世子愖奏乞隨朝及尚主,不許,命隨其父還國。 1270년 고려왕 왕전이 래조하여 황자 연왕을 보길 구하자 세조가 "당신은 일국의 왕이니 짐을 보는것으로 족하시오하니 따랐다."(중략)국왕의 수레및 군대를 고려의 옛서울에 진입하게 하였다.탈타아,초천익으로하여금 고려의 달로화적으로 하였다.(하략) 요사 권16 본기 권16 요나라 소배압이 고려 침공시 상황 타하는 어디일까? 호타하를 사이에 두고 격전을 벌였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와 전쟁을 치루는 상황을 요사 내용으로 보면, 丙辰,詔以東平郡王蕭排押為都統,殿前都點檢蕭虛列為副統,東京守耶律八哥為都監伐高麗。仍諭高麗守吏,能率眾自歸者,厚賞;堅壁相拒者,追悔無及。(중략) 十二月 是月,蕭排押等與高麗戰於茶、陀二河,遼軍失利,天雲、右皮室二軍沒溺者眾,遙輦帳詳穩阿果達、客省使酌古、渤海詳穩高清明、天雲軍詳穩海裡等皆死之。 병진일,동평군왕 소배압을 도통으로하였다.소배압과 고려가 차하,타하에서 전투했으나 요군이 이득이 없었다.천운,우피실2군에서 물에 빠져 죽은자가 많았다. 乙亥,東平王蕭韓寧、東京留守耶律八哥、國舅平章事蕭排押、林牙要只等討高麗還,坐失律,數其罪而釋之。己卯,詔加征高麗有功渤海將校官。(중략)六月戊子,錄征高麗戰段將校子弟。(중략)乙巳,以南皮室軍校等討高麗有功,賜金帛有差。秋七月己未,征高麗戰歿諸將,詔益對其妻。 을해,동평왕소한녕,동경유수아율팔가,국서평장사소배압,임아요지등이 고려를 토벌하고 귀환했다.좌실진등은 석방했다.기묘일,고려정벌에 공적자에 발해군장을 더하였다.(중략)6월무자일 고려를정벌한 장병에게 녹읍을주다.남피실군등 고려토벌에 공이있는자들을 금과비단을 차등하여주었다. 고려와 거란의 소배압이 전쟁을 한곳이 차하와 타하라고 하는데 여기서 타하는 호타하를 일컽는것으로 운영자는 본다. 5.요사 성종28년조를 보면 丙寅,詳穩張馬留獻女直人知高麗事者。上問之。曰 :「臣三年前為高麗所虜,為郎官,故知之。自開東京馬行七日,有大砦,廣如開京。旁州所貢珍異,皆積於此。勝、羅等州之南,亦有二大砦,所積如之。若大軍行由前路,取曷蘇館女直北,直渡鴨綠江,並大河而上,至郭州與大路會,高麗可取而有也 。」上納之 병인일,장마유가 고려의 종사를 알고있다는 여직인을 헌하며 묻기를"신이 삼년전에 낭관으로 고려에 포로로 끌려갔었는데 옛일을 알고 있습니다.개경에서 동경으로 말을 타고 칠일을 가면 큰 목책지가 있는데 넓기가 개경과 같고 여러곳에서온 공물을 그곳에 쌓아놓고있는데,승라주의 남쪽에도 역시 2개의 큰 목책성이 있는데 그곳도 공물을 쌓아 놓은곳인데 만약 대군을 이끌고 앞길을 따라가면 여직북에 있는 갈소관을 취할수있고 바로 압록강을 넘으면 큰강을 따라 위로가 곽주에 이르면 큰길과 만납니다.고려를 취할수 있습니다"라고 올렸다. 또한 요사 성종조에 사신(史臣)이 논하기를,“고려가 임금 왕송(穆宗)을 시해하고서 왕순(현종)을 세웠는데, 요나라에서 그 죄를 추궁하는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니 고려에서는 마땅히 음식물을 싸 들고서 나와 요나라의 군사를 맞이하고, 숙소를 청소해 놓고서 기다려야 마땅하였다. 그런데 험한 곳에 웅거하고 군대를 들어 항거해 요나라로 하여금 지혜로운 자가 지모를 다 쏟고 용맹한 자가 힘을 다 쓰게 하였다. 비록 그 수도를 얻은 바 있었지만, 좁다랗게 바다 한 귀퉁이에 있는 고려는 예전 그대로였다. 그러니 어찌 다른 사람을 승복시키는 것은 힘으로는 안 되고 덕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고려의 궁실을 무너뜨리고 고려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았으니, 이는 이른바 죄를 물을 자격이 없는 자가 죄를 묻는 군사를 출동시킨 것이다. ” 즉 패주 인근에 임진이있고 그 부근에 많은 고려지명이 보이므로 그 부근을 고지도와 위성으로찾아보니 대성 인근에 왕도라는 지명과 청주 인근에 가로 세로1 킬로미터의 성터가 보인다.
송사지리지에서
霸州(패주)
中,防禦。本唐幽州永清縣地,後置益津關。周置霸州,以莫之文安、瀛州之大城來屬。政和三年,賜郡名曰永清。崇寧戶一萬五千九百一十八,口二萬一千五百一十六。貢絹。縣二:文安,上。景祐二年,廢永清縣入焉。有劉家渦、刁魚、莫金口、阿翁、雁頭、黎陽、喜渦、鹿角八砦(성채)。元豐四年,割鹿角砦隸信安軍。政和三年,改劉家渦砦曰安平,阿翁曰仁孝,雁頭曰和寧,喜渦曰喜安。
大城。上。
본 당 유주 영청현에 속했다.나중에 익진관을 설치했다.패주는 모주의 문안,영주의 대성이 속했다
송나라와 고려가 같은시기에 존재했고 송사,요사,금사를 작성한 원나라 승상 탈탈은 왜 이곳에 왕도가 있었음을 밝히지 않은것일까? 중국 어느 왕조가 대성 인근에 왕도를 설치했던것인가?
원나라 지도에서도 패주의 위치는 바뀌지 않았다.
王자가 변형된 지명이 주위에 많다.
미국 군사지도에서 대성은 매우큰 성벽이나 위성에서 흔적이 보이지않는다.
대성우측 서공성의 모습으로 성이 크다.
大城이 중국왕조의 수도가 아니었다면 주변지형과 지명으로 보아 이곳이 王京開城府 일 가능성이 매우높다.
잃어버린역사 보이는 흔적 운영자 심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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