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130 (4권 3. 김홍신. 펌글)
"얽히고 설켜서 다 그런 것들 아니냐? 뻔할 뻔자 아냐?"
녀석한테 내가 은근히 채켰다.
"나도 첨엔 그런 줄 알았지. 안에서 들여다 보면 달라. 더럽게 고생하고 쥐꼬리만큼 받는 애들야."
"그만큼 받으면 상류 아니냐?"
"고생하는 거에 비해선 동냥하는 셈이란 말이다."
"우리나라서 어느 놈은 일한 만큼 배 터지게 받는 사람 있니? 악착같이 알겨먹으려고 눈깔에 불을 켠 판에 말이다."
"어느 집단이나 마찬가지지만 그 속에도 꽤 아귀찬 찰거머리들이 있지.
배역 선정하고 파우치 조정하고 출연자 점 찍을 수 있는 몇 놈들이 다 해처먹으니까."
"꺼내 놔."
녀석은 내가 꺼내놓으라고 하자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연예계 애들과 몇 년 어우러져 돌아다닌 실력이었다.
녀석은 그쪽 사정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다.
"장부장이 왕초격이지. 그 자식은 철저해. 주면 준 만큼, 안주면 안 준 만큼 반드시 지키는 놈이지.
노래 한 곡 보내며 봉투 넣어 주면 액면가만큼 틀어 주는 거야. 봉투가 없으면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고....
그게 싫은 사람들은 아예 그 근처엔 가지 않아. 그런 반면에 나머지 PD들은 철저한 일벌레들이지.
건성으로 프로그램 짜기나 하고 모니터랍시고 프로그램이 어떠니 출연자가 어떠니 깝신대는 것들은,
방송국에 들어가서 PD노릇 열흘만 하면 제발이 저려서 뛰어나올 놈들이지."
녀석은 거품을 물고 프로듀서들을 옹호하고 나섰다.
"임마, 뭔가 잘못하니까 비판받는 거 아냐?"
"정말 뭣두 모르는 것들이 뭣보구 탱자탱자 한다더니 그꼴이지. 아가리로야 무슨 말을 못해.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프로그램이 거적대기 쓰고 설렁설렁 만드는 깡통놀음인 줄 알아?
밤 새며 피 토하며 만든 거라구. 여건이 안 맞고 부족하고 대갈통 나쁜 거야 부정하지 않겠지만,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핟다 이거야. 그 몇 놈들 때문에 인식이 나쁠 뿐이지."
"너 아예 때려치우고 프로듀서 옹호위원회나 대변인 노릇해라."
"그러고 싶을 때도 있다구. 배부른 놈들이 비스듬히 누워서 프로그램 쓱 보고서,
배부른 소리로 깝신대는 건 올바른 비판이 못 돼. 비판하려면 근본적으로 애정의 전제없인 이빨 까는 소리밖에 안 돼.
뭐든 보고서 욕지거리 하기쉬운 게 어디 있어? 욕 못하는 놈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어? 그렇다고 칭찬해 달라는 건 아냐.
뭐 좀 알고 비판하든지.... 비판 잘하는 놈이 똑똑하다는 인식도 문제는 문제야."
"지랄 떨지 말고 장부장 얘기나 해라. 내가 필요한 건 다수의 고생하는 프로듀서 얘기가 아니라,
장부장같은 찰거머리때들 얘기다. 황마담하고 어떻게 된 관계냐?"
"그러니까 이런 사실을 알고 개떡같은 자식들 얘길 들으라 이거다. 네 말처럼 어느 집단이든 그런 찰거머리떼들은 있는 법이다."
"임마, 나도 알 만큼은 알아. 지금 고생하는 일꾼들 얘기 하자는게 아냐. 장부장 같은 찰거머리들 얘길 하자는 거야."
"알았다."
녀석은 장부장의 내력을 상세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장부장 같은 찰거머리들은 소수이긴 하지만 방송국 안에 견고한 성을 쌓고 찰거머리처럼 연예인들을 뜯어먹고 산다고 했다.
신곡이 나오면 봉투나 몸을 대가로 지불해야 하고, 탤런트라면 배역을 맡기 위해 똑같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황마담과 장부장의 사업적인 결탁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장부장과 황마담의 사업은 공공연한 비밀처럼 떠돌았다.
황마담이 연미희같은 탤런트를 박명수라는 사기군에게 소개시켜 준 것도 소개비를 듬뿍 받아내고 저지른 장삿속이었다.
황마담의 부탁이면 장부장은 무리를 해서라도 기용하는 끈끈한 인연이라고 했다.
황마담이 언제부터 신인들을 거느리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연예인이 필요한 사람이면,
황마담과 협조체제를 만들어 황마담의 손길만 얻으면 된다고도 했다.
돈 많은 사내들은 황마담에게 두둑한 현찰과 연예인을 교환하는 은밀한 거래를 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그런 쪽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면 대충 아는 사실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장부장과 그를 추종하는 거머리들이 아직까지 존재하는 것과 황마담과 같은 고급 뚜쟁이가 엄연하게 존재하는 것은,
그들의 존재가 절실한 이해집단이나 개인이 존재한다는 결론이었다.
연예계 여자와 하룻밤을 즐겼다는 것으로 남자의 길을 걸었다고 믿는 철부지 사내와 그것을 이용해 먹는 뚜쟁이와,
연예인들의 피를 빨아 치부하는 프로듀서의 상태는 한마디로 오락산업의 인간화라는 현대의 비극인지도 모른다.
장난감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복잡해지는 인간의 두뇌처럼 정교하거나 영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을 오락적 기구로 등장시키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그 대표적인 것이 프로레슬링에서 프로권투로 넘어온 것 같고,
여자가수가 오락산업의 주역으로 발돋움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람끼리 오락기구로 느끼는 감정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인간의 파괴를 뜻하는 무서운 전쟁놀음을 유도해 내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은 힘센 자만의 특권인지도 모른다.
황마담의 표정은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나를 퍽 다그치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오늘까지 고급 뚜쟁이로 커온 배짱인지도 모른다.
여자이면서 같은 처지의 젊은 여자들을 돈 많은 사내에게 팔아넘기는 짓을 해 낼 수 있다는 건 보통 배짱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이봐 총각."
"네?"
계속 미스터 김이라고 부르던 여자가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를 불렀다.
"총각, 배 고파?"
"아뇨."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왔어?"
황마담이 눈치를 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주저 앉을 수는 없었다.
"황여사님 집 아닌가요?"
"너 어디서 굴러먹다 온 녀석이야?"
황마담은 단번에 이렇게 나왔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어떻게 아셨죠?"
"이 녀석아, 여기가 어디라는 것쯤은 알고 와야지. 건방진 녀석, 용돈이 필요하면 달라든지...."
황마담은 핸드백을 열었다.
"너, 얼마 필요하냐?"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냈다.
"이왕 들통난 마당인데 그게 뭡니까? 황여사라면 손 큰 걸로 소문난 분인데 말입니다."
"잔소리 말고 가지고 썩 나가라. 벼락치기 전에."
"장부장한테 연락해 보신 겁니까?"
"멍청한 녀석,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왔냐?"
"이건 영화판 아닙니다. 대사 외운걸로 얘기가 끝나진 않아요."
"그럼 어쩔 테냐?"
"좀 부숴 줄까 합니다."
"힘 있으면 부숴 봐라."
"정말입니까?"
"그렇다."
나는 소파 위에 있는 꽃병을 집어들었다.
"이건 모조품이겠죠?"
나는 장식용 여물통에다 꽃병을 내던졌다.
"이만하면 무단 주택침입에 폭행죄는 되겠죠? 일어나보슈. 얼마나 콧대가 센지 좀 봅시다."
나는 황마담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 블라우스를 찢어버렸다.
황마담이 소리쳤다.
문이 벌컥 열렸다.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나보다 한 뼘씩 더 커보이는 사내들이었다.
건장한 어께선과 가슴을 느낄 수 있는 덩치들이었다.
"저놈을 죽여 버려. 어서!"
찢어진 앞가슴을 여미며 황마담이 소리쳤다.
나는 소파에 다시 앉았다.
"앉아서 말로 합시다. 덩치 큰 형씨들."
"이 자식이 제법 귀엽게 노는군."
한 사내가 여유 있는 몸짓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형씨들이 더 귀엽게 노시는구만. 황마담 밑 닦아 주느라고 끼웃끼웃대는 게 정말 귀엽다."
"어허!"
사내들이 나를 에워쌌다. 황마담이 차갑게 웃었다.
사내들은 황마담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황마담은 기죽지 않는 내 표정에 잠깐 당황하는 눈치였다.
"너 어디서 왔냐?"
황마담이 거만하게 물었다.
너무 배짱좋게 나가는 내가 미덥지 않아 보였던 모양이었다.
"서울서 왔다. 어디서 온 게 그렇게 중요하슈?"
모처럼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나선 게 그녀에게 마음을 쓰이게 한 것 같았다.
"뭘 믿고 까부냐?"
"하나님 믿고 까불면 안 되는 거유? 그렇지 않으면 염라대왕 믿고 까부는 거유."
"없애!"
매몰찬 한마디였다.
이쯤이면 신분을 밝힐 일인데 자꾸 딴소리만 하는 것이 두려워할 곳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것 같았다.
사내들이 들어왔다.
나는 껑충 베란다 쪽으로 붙어서 앞장 선 녀석부터 걷어찼다.
한 녀석이 고꾸라졌다. 뒤미처 사내들이 합세했다.
매듭 공예품을 벗겨 사내들을 후렸다.
사내들은 날선 칼을 꺼내 들었다.
"이 새기, 죽인다."
"아직 생명보험도 안 들었다. 이 자식아."
나는 몸을 날려 치고 들어가며 차례로 가격했다.
사내들이 쭉 뻗어 누웠다.
"황마담 이리 오시지."
황마담은 차갑게 나를 쏘아보았다. 독기 서린 눈매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여서 다루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더구나 나같이 풋내나는 사내 정도는 상대조차 않던 여자였다.
큰 손님만 상대하던 텃세가 역력하게 보였다.
"이리 오슈. 당신 졸개들 자빠진 거 보면 오시는게 상책이란 것쯤은 알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