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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후험적인 존재인가..
꽂혀있는 책 가운데.. 문득 "성철스님법어집"이라 하여 <자기를 바로 봅시다> 하는 책이 눈에 띈다.
책은 오래전 부터 그곳에 있었는데.. 오늘 홀연히 눈에 뜨인 것이다.
자기를 바로 보다..
나는 누구인가?..
위에 올려논 비디오는
"나는 몸과 의식하는 존재" 라는 우리가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존재론적인 나의 헛점이 무엇인지를 예리하게 파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술 방법이 놀랍게도 2500 여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자기 언어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럼 석가세존께서 나는 누구인가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잡. 306. 인경>을 봅니다.
306. 인경(人經)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2. 그 때 어떤 비구가 혼자 어느 고요한 곳에서 골똘히 정밀하게 사유(思惟)하다가 이렇게 생각하였다.
'비구가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법을 볼 수 있을까?'
이렇게 사유한 뒤에 선정에서 일어나 부처님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혼자 어느 고요한 곳에서 골똘히 정밀하게 사유하다가 '비구가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법을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3. 그 때 세존께서 그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해 보아라. 너를 위해 설명하리라.
두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이 그 두 가지인가? 안(眼)과 색(色), 이것이 그 두 가지이다.
(이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설한 것과 같다) 내지 그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4. 안과 색을 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이 촉(觸)이며,
촉과 함께 하여 느낌[受]·생각[想]·의도[思]가 생기기 때문이다.
5. 이 무색음(無色陰)과 안과 색 등, 이러한 법을 사람[人]이라고 하며,
이러한 법에 대해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어 중생(衆生).. 이라고 하느니라.
6. 또 이와 같이 말한다.
'나는 눈으로 색을 보고, 나는 귀로 소리를 들으며, 나는 코로 냄새를 맡고, 나는 혀로 맛을 보며, 나는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나는 뜻으로 법을 분별한다.'
7. 세존께서는 시설(施設)하고 나서 또 이와 같이 말한다.
'이 존자는 이름은 이러하고 이렇게 태어났으며, 성(姓)은 이러하고 이렇게 먹으며, 이렇게 괴로움과 즐거움을 겪고 이렇게 오래 살며, 이렇게 오래 머무르고 이렇게 목숨을 마쳤다.'
8. 비구들아, 이것을 곧 생각이라고 하고, 이것을 곧 마음의 기록이라고 하며, 이것을 곧 말이라고 한다.
이 모든 법은 무상(無常)한 것이고, 함이 있으며, 생각과 원(願)을 인연하여 생긴 것이라고 한다.
9. 만일 무상한 것이고 함이 있으며 생각과 원을 인연하여 생긴 것이라면 그것은 곧 괴로움이다.
또 그 괴로움은 생겨나고 또 괴로움은 머무르며, 또 괴로움은 소멸하고 또 괴로움은 자꾸 생겨서 일체가 다 괴로움뿐이다.
10. 만일 다시 그 괴로움을 남김 없이 끊고 토해 버리며, 탐욕을 여의고 쉬며 사라지게 한다면,
다른 괴로움이 다시는 서로 잇따르지 않고 생겨나지 않나니,
이것이 곧 적멸(寂滅)이요 이것이 곧 승묘(勝妙)이니라.
이를 일러 남아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일체의 애욕이 다하며 탐욕이 없고 완전히 소멸한 열반(涅槃)이라고 하느니라.
11. 귀·코·혀도 마찬가지이며,
12. 몸[身]과 감촉[觸]을 인연하여 신식(身識)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이 접촉[觸]이며
접촉과 함께 어울려 느낌[受]·생각[想]·의도[思]가 생긴다.
이 네 가지는 곧 무색음(無色陰)이요, 몸은 곧 색음(色陰)이니, 이것을 사람[人]이라고 한다,
(이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설한 것과 같다) 완전히 소멸한 열반이니라.
13. 의(意)와 법(法)을 인연하여 의식(意識)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이 접촉이며,
접촉과 함께 어울려 느낌·생각·의도가 생긴다.
이 네 가지 무색음과 4대(大)는 사부(士夫)가 의지하는 바로써 이러한 법을 사람[人]이라고 한다.
(이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설한 것과 같다) 완전히 소멸한 열반이니라.
14. 만일 이 모든 법에 대해서 마음이 따라 들어갔어도 해탈에 머물러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일으키는 얽매임과 집착에 있어서 나라고 하는 것이 없게 되느니라.
15. 비구들아,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 곧 법을 보게 되느니라.
16.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잡. 306. 인경>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떠오르셨는지요?^^.
안, 색, 안식, 촉, 수.. 한문이 거슬린다구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지금 거슬려 보여도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은 영어가 주류 언어이니 영어를 많이 사용하는 게 흐름이 아닌가 할 것인데..
영어를 섞어 본 뜻을 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로서는..
석가세존의 가르침[근본불교]를 바르게 알려면.. 아이러니처럼 들릴 것 같은데..
빨리어나 산스크리트어보다도 한문 단어 뜻을 바르게 알고 사용하는 게 가장 좋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니 천천히 다시 한 번 더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잡. 306경>에 나오는 비구의 질문 1.을 요샛말로 바꾸면..
"나는 누구인가?", "불교를 공부하려면 법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가 됩니다.
중생이라 불리는 인간인 나는 어떻게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를 하고 있습니까?
6. 또 이와 같이 말한다.
'나는 눈으로 색을 보고, 나는 귀로 소리를 들으며, 나는 코로 냄새를 맡고, 나는 혀로 맛을 보며, 나는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나는 뜻으로 법을 분별한다.'
라고 알고 있지요.
나는 눈으로 색을 본다는 말은..
나라는 주체는 나의 볼 수 있는 눈을 통해 외부에 보이는 사물을 접촉하여 보았다는 안식이 생겨..
그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사유하여 마음의 기록인 앎으로 기억한다는 겁니다.
사람은 접촉으로 경험한 것을 기억하는 있으므로.. 그런 나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기억하는 것이 본래 무상한 것이므로 흘러가도록 놔두면 되는데..
탐욕이 머물며 집착을 하도록 하니.. 괴로움이 생기고 그것을 기억하니 쌓입니다.
9. 만일 무상한 것이고 함이 있으며 생각과 원을 인연하여 생긴 것이라면 그것은 곧 괴로움이다.
또 그 괴로움은 생겨나고 또 괴로움은 머무르며, 또 괴로움은 소멸하고 또 괴로움은 자꾸 생겨서 일체가 다 괴로움뿐이다.
9. 까지가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답입니다.
즉 나는 무상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집착하고 있기에 괴로움을 안고 사는 존재라는 겁니다.
오랜만에 모여 반갑게 인사하고..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니..
며칠 전 물 난리가 나 자기가 아끼던 컴퓨터가 물에 빠져 너무너무 화가 났다고 합니다.
그 말은 듣고.. 함께 안타까워하던 지인은 속상한 것은 잊고 더 좋은 일이 일어나려고 벌어진 액땜으로 여기라고 위로합니다.
우리는 이렇듯 자기에게 남에게 괴로움이 생기면
서로를 위로하며 좋은 말과 행동으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지냅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런데 괴로움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라고 하나요?.
안과 색 등 2법6쌍이 접촉하여 생긴 것을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지 않나요!
그러니 괴로움을 멸하려..
집착을 멸해 머물지 않으면 괴로움은 쌓이지 않아 사라지겠지요.
집착을 내려 놓아라!
10. 만일 다시 그 괴로움을 남김 없이 끊고 토해 버리며, 탐욕을 여의고 쉬며 사라지게 한다면,
다른 괴로움이 다시는 서로 잇따르지 않고 생겨나지 않나니,
이것이 곧 적멸(寂滅)이요 이것이 곧 승묘(勝妙)이니라.
이를 일러 남아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일체의 애욕이 다하며 탐욕이 없고 완전히 소멸한 열반(涅槃)이라고 하느니라.
불교란 여기 나에게 있는 괴로움을 알고.. 그것을 멸하려 노력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 불교가 이천 오백년 이상을 전해져 오고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괴로움을 알고 멸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리고 괴로움은 나에게 법이 싸여 생기는 것인데..
법은 12처의 3사화합촉으로 생긴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멸해야하는 겁니까?.
12처와 12처에서 생기는 법을 멸해야 하는 거지요.
정리해 보면 인간인 나는 누구인가?.
11. 귀·코·혀도 마찬가지이며,
12. 몸[身]과 감촉[觸]을 인연하여 신식(身識)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이 접촉[觸]이며
접촉과 함께 어울려 느낌[受]·생각[想]·의도[思]가 생긴다.
이 네 가지는 곧 무색음(無色陰)이요, 몸은 곧 색음(色陰)이니, 이것을 사람[人]이라고 한다,
(이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설한 것과 같다) 완전히 소멸한 열반이니라.
13. 의(意)와 법(法)을 인연하여 의식(意識)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이 접촉이며,
접촉과 함께 어울려 느낌·생각·의도가 생긴다.
이 네 가지 무색음과 4대(大)는 사부(士夫)가 의지하는 바로써 이러한 법을 사람[人]이라고 한다.
12처를 알고 있나요?^^.
2법인 (안과 색), (이와 성), (비와 향), (설과 미), (신과 촉) 그리고 (의와 법) 이렇게 2법이 만나면..
각각의 식[안식 등 6식]이 일어나
그 셋이 결합하여3사화합] 촉이 생기면..
그 촉을 연해 느낌인 수가 생기고, 상이 생기고, 행[의도]이 생기는 게
인간입니다.
세존께서 가르치는 '나'라는 인간은
부모로부터 태어난 존재라 하지 않고..
마치 제2의 탄생을 말하는 듯..
안과 색이 만나면[12처]
안과 색과 안식 등[18계]이 3사화합촉을 일으키고..
수,상,행 그리고 식이 생겨 기억하는 존재[5온]를 나라고 하십니다.
이게 중요한 것이냐구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답이 되고,
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니 바른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부모님에게서 태어나면서 부터 또는 그 전부터 본래 있는 게 아니라.
안과 색 등 12처인 2법6쌍에 의해 생긴 존재다.
이해가 되는지요?.()^^.
오늘 공부에서..
불교와 오직 인생은 한번 뿐이라는 단멸론과 차이는 무엇일까요?
6. 또 이와 같이 말한다.
'나는 눈으로 색을 보고, 나는 귀로 소리를 들으며, 나는 코로 냄새를 맡고, 나는 혀로 맛을 보며, 나는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나는 뜻으로 법을 분별한다.'
에서 단멸론적 주장은 '나'를 5온과 같은 것으로 보아.. 즉
'나=5온(몸과 생각)'으로 보아 '5온이 멸하면 나는 멸한다'라고 아는 겁니다.
요새 유투비를 보면 불교를 단멸론으로 설명하는 이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트만을 가르치는 힌두교에서는 '나'를 아트만이라고 하는데..
현재 5온이 멸하면 아트만[나]은 다른 5온을 찾아가는 것으로 주장합니다.
5온은 생멸하지만 아트만은 항상한다는 겁니다.
불교는
3. 그 때 세존께서 그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해 보아라. 너를 위해 설명하리라.
두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이 그 두 가지인가? 안(眼)과 색(色), 이것이 그 두 가지이다.
(이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설한 것과 같다) 내지 그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4. 안과 색을 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이 촉(觸)이며,
촉과 함께 하여 느낌[受]·생각[想]·의도[思]가 생기기 때문이다.
5. 이 무색음(無色陰)과 안과 색 등, 이러한 법을 사람[人]이라고 하며,
이러한 법에 대해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어 중생(衆生).. 이라고 하느니라.
하는 부분을 차분히 보면.. 답이 보입니다.^^.
우리는 내 눈으로 사물을 보고 안다고 하듯.. 사물을 보기 전에 내가 있는데..
<306경. 3,4>에서는 눈으로 사물을 보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자[식]를 인간인 '나'라 하여..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행위가 있으면 그런 행위를 하는 자를 '나'라고 하여 후험적으로 봅니다.
나인 여러분은 어느 게 맞는 것으로 보이나요?^^.
이 참에 분명히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아란 무조건 나는 없다는 게 아니라..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나는 없다고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