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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해탈(三途解脫)의 고개, 될마라
디라북 사원에서의 꿈결 같은 하루 밤을 새우고 새벽에 인더스의 발원지인‘셍게카밥’ 즉 “사자의 입에서 흘러나옴”이라는 뜻의 사천하(獅泉河)를 건너 오른쪽으로 카일라스의 북면의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가파른 고갯길로 접어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다키니의 비밀통로(칸도상람)’의 입구가 나타난다. 카일라스를 적어도 12번 순례한 사람에게만 허용된다는 바로 그 비밀스런 순례도인데, 비록 될마라를 넘어가는 정식의 꼬라도보다는 가까운 직행로이지만, 대단히 위험한 길이라고 한다.
다시 길을 재촉하여 이번 순례 중 가장 힘든 코스인 될마라(5,668m)로 오른다. 여기서부터는 공기 중의 산소가 절반도 안 된다. 게다가 급경사여서 천천히 오르는데도 숨이 턱에 바쳐온다. 몇 발자국에 한 번씩 숨을 몰아쉬어야만 한다. 낙오자가 생겨 업혀서 되돌아가는 일도 있다는 곳이다.
1900년, 확인된 자료상으로 동양삼국권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여기를 오른 가와구치 에가이(河口慧海)는 이 고개의 어려움을“삼도해탈(三途解脫)의 고개”라고 불렀다. 그는 일본 황벽종(黃壁宗)의 승려로서 단신으로 네팔을 통하여 설역고원에 올라 카일라스산 꼬라를 마치고 라싸에 잠입하여 몽골인으로 위장하여 세라사원에서 3년간 승려 노릇을 하면서 티베트불교를 공부하다가 신분의 위협을 느껴 귀국하였다가 10년 뒤 다시 한차례 더 잠입하여 티베트대장경을 수집하여 가져갔다. 그의 수집품은 지금 일본의 동북대학(東北大學)의 <가와구찌 콜랙션>으로 보관되고 있다. 그의「티베트여행기」전5권은 다시「Three years in Tibet」이란 이름으로 영역되어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 방면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이 고개는 가와구치에 이어 1907년 스웨덴 탐험가 스벤 A.헤딘(Sven Anders Hedin)이, 그 다음으로는 푸른 눈의 볼리비아의 승려 고빈다가 역시 일주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흔히 이 카일라스 산은 우주의 연꽃에 비유된다. 정상은 화심(花芯)에, 보살의 이름을 가진 8봉우리는 그 꽃잎[八瓣蓮花]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저 건너 보이는 북쪽면의 봉우리는 관음, 문수, 사리, 금강 봉우리이고 아마 저 정상의 북동사면 아래의, 푸른빛으로 빛나는 만년설의 빙하가 힌두신화의 재물의 신, 쿠베라(Kubera)의 궁전일 것이다.
한참을 주저앉고 싶은 심정을 누르면서 안간힘을 써가며 그렇게 한참을 오르니 조금은 경사가 완만해져 좀 여유가 생겨 뒤를 돌아보니 산 정상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 아래의 봉우리들은 거의 지호지간으로 다가온다.
4,5세기경에 출현한 인도문학사상 최대의 작가로 꼽히는 카리다사(Kalidasa)는 저 수정궁전을 무대로 유명한 서정시 <구름의 사자(Cloud Mesenger)>를 남겼는데, 그 속에는 건축의 신이 지었다는 아마라바띠 신전의 호화스러움과 여신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어 고대 산스크리트 문학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카일라스 산의 신전은 재보의 신 쿠베라가 지키고 있다. 그의 시종 중에는 반신 야크샤(Yaksha, 夜叉)가 있는데, 그는 방탕한 성격으로 인해 종종 근무태만을 하게 되어 남쪽지방으로 유배를 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 곳에서 그는 카일라스궁전의 즐거웠던 생활을 술회하고 그리워하면서 지나가는 구름에게 안부를 전해줄 것을 당부한다. 이 장편 시에는 궁중생활의 묘사와 여신들의 모습이 화려함의 극치로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보면, 위로는 구름에 닿았고 금은보석으로 치장된 얼음과 수정으로 만들어진 궁전, 하늘에 걸려있는 은하수의 월광보석의 반짝임, 하늘거리는 천의를 입은 입술이 사과같이 빨간 여신들, 손에는 연꽃을 들고 머리에는 말리화(茉莉花)를 꽂고 신들의 놀이상대가 되어 금모래 속에 숨겨둔 보석을 찾는 여신들의 자태 등등이다. 여기서 한 구절 정도 음미해보자.
그 곳에는 뛰어다니느라 머리에서 떨어져 땅에 뒹구는 만달라화 패달라화의 꽃송이들이 어지럽고 귓가에서 떨어진 금색의 연꽃목걸이와 유방에 부딪혀 끊어진 화환들이 모두 간밤의 여신들의 밤중의 은밀한 외출의 잔재들이네.
언제까지나 깨고 싶지 않은, 화려한 신화의 삼매에서 깨어나, 다시 천근만근 같은 발걸음을 옮겨 산 모퉁이를 도니 거기서부터 괴기스런 풍경이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조장장(鳥葬場)이다. 티베트인들은 죽으면 우리처럼 땅에 묻거나 화장하지 않고 새한테 시신을 보시한다. 티베트의 특성상 시신을 땅에 묻으면 썩지 않고 물은 사람과 가축의 마실거리로 귀히 여기고 나무는 천금처럼 귀하기에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조장인 셈이지만, 이해의 눈으로 보면 그들에게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겠지만, 눈앞에 벌어져 있는 조장장의 풍경은 그래도 괴기스러울 수밖에 없다. 넓은 공간에 죽은 이가 입었던 옷가지, 머리카락, 뼛조각, 이빨 등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데, 길은 그 사이로 뻗어 있어 피할 수 없이 삶과 죽음 사이를 넘어가야만 했다.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몇 마리의 독수리 떼가 날개를 접은 채로 땅위에 서서 우리들을 빤히 처다 보고도 움직이지를 않는다. 사람을 먹이감으로만 보는지, 무서워 하기는 커녕 기분 나쁠 정도로 도도하게 처다 본다.
까짓것 뭐 어떠랴! 영혼이 떠난 몸뚱어리야 어차피 피고름 살덩이인데, 어차피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흩어질 것인데, 땅에 묻어 구더기 밥이 되면 어떻고, 불에 타서 한줌 재가 되면 어떻고, 강물에 넣어 물고기 밥이 되면 어떻고, 새의 먹이가 된들 어떠하리…
다시 조금 더 오르니 거기 또 다른 원초적인 공포가 기다리고 있었다.‘수미산설’에는 이 북쪽사면은 사천왕 중에서도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속계의 중생이 오르지 못하게 지키고 있다는 곳이다. 그런데 마치 그 천왕이 지키고 있는 문 같이 생긴 큰 바위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 바위에는 수 없이 많은 기원의 오색 깃발이 매달려 있었고 그 밑에는 일단의 티베트 인들이 무아지경으로 오체투지의 굴신운동을 하고 있었다. 바로 업경대바위(業鏡臺. Dikpa Karnak)였다. 영험(?)하기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혼의 거울’이어서 전생의 업이 그대로 비친다고 하는데, 어떤 이는 그 업의 무거움에 스스로 놀래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기도 한다고 한다. 성스런 산의 순례로 중에서 가장 힘들고 가장 일기변화가 심한 곳에다 지옥의 입구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업경대라 칭하는, 인간의 죄업을 심판한다는 무대를 설정해놓은 것은, 누구의 연출이었던지 다분히 의도적인 속셈이 있다. 그 의도란 바로 기고만장한 우리 인간의 유일한 약점인,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극대화시켜서 그 문제를 피하지 말고 정면 돌파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 아닐까?
인과응보설은 어찌 보면 마음의 거울 속에 저장된 우리 스스로의 행위의 결과일 수 있다. 그냥 하나의 큰 바위에 어찌 자기의 죄업이 비칠 것이냐 만은, 우리는 스스로 가슴속의 잠재되었던 죄의식을 저 바위를 스크린 삼아 쏘아보고는 스스로 놀래 자빠지는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각인된 지옥도는 무한대의 공간에서 무생물의 바위에다, 스스로 촬영기사, 연출, 효과, 음향 그리고 주인공과 관객까지 일인다역 하는 모노드라마 한편일지도 모른다.
이는 모든 종교들이 이 죄의식에 대하여 교리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그 해답을 제시하려고 한 것을 보아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우리는 이성적인 논리로는 지옥과 천당을 부정하지만 한편으로는 혹시나 화탕지옥(火湯地獄)이나 도산지옥(刀山地獄) 같은 그런 무서운 공간이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은 떨쳐 버리지 못한다. 이승을 떠나야 할 때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 두려움은 더욱 증폭된다. 그래서 급기야는 우리는 절을, 교회를 찾아가게 된다. 과연 우리들 중에서 누가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으랴!
이 해동의 순례자도 돌 하나와 지폐 한 장을 그 발밑에 놓으며 참회진언을 외우며 간절히 기원하였다. 이생이 끝나 다음 생으로 이사할 때 담담하게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그리고 하나 더, 무사히 이 꼬라를 끝내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지옥문은 무사히 통과하였지만 온갖 사연의, 수많은 중음신들이 찐득찐득 들어붙어버렸는지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 지는데, 멀쩡하던 하늘까지 갑자기 껌껌해지더니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맨살에 맞으면 아플 정도의 크기여서 황급히 머리를 가리고 큰 바위 사이로 피난을 하느라 부산을 떨다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날씨가 개이면서 이번에는 일진광풍이 불기 시작한다.
우리가 배워왔던 일반적인 과학지식이 종종 통하지 않는 설역고원이라 이미 웬만한 일쯤은 이미 습관이 되었지만 이곳 될마고개의 날씨는 정말 예측불허였다. 볼리비아 태생의 푸른 눈의 까귀빠 승려인 고빈다는 1948년 9월 이곳을 지나면서 이곳의 변화무쌍한 날씨에 대해 역시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때때로 성스러운 산에서 일어나는 번개구름과 돌풍은 구름이 걷히고 바람이 잔잔해질 때까지 순례자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며칠씩이나 기다리게 하였다. 그러면 산은 태고의 정적을 되찾았고 현란한 흰 봉우리, 초록빛의 얼음폭포, 보랏빛의 그림자, 그리고 짙은 자줏빛의 바위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그것은 도저히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사람도 날아갈 듯한 바람 속에서 기다시피 하여 이윽고 될마라 정상에 올랐다. 그 곳은 귀신 울부짖는 소리 같은 바람소리 속에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돌탑이 서 있고 그 사이로 기원의 오색 깃발 수천 개가 찢어질 듯 펄럭이고 있었다. 그 광경은 마치 지옥으로 들어가는 유명계(幽冥界)의 입구 같은 괴기스러움을 풍기고 있어서 원초적인 두려움을 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될마는 티베트 민중의 고통을 보고 관음보살이 흘린 눈물 속에서 생긴 보살의 이름으로 티베트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자비의 화신이다. 그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낮에는 흰색으로 밤에는 그린 색으로 그들 앞에 나타난다고 한다.
바람이 너무 강해 돌탑 뒤로 몸을 피했지만 음식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물 몇 모금 마시면서 기다려도 바람이 쉽게 잘 것 같지가 않아 허기지고 탈진한 몸을 이끌고 구르다시피 하여 동쪽 계곡으로 내려 오다보니 눈 아래 거대한 터키석 반지 같이 생긴 호수가 내려다 보였다. 꼭 지옥의 입구 같은 두려운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지도에서 보았던, 가우리쿤트, 즉 자비의 호수(Tukje Tso)였다. 자연의 색깔이 저런 터키석 색깔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믿겨 지지가 않았다. 왜 이런 지옥의 입구 같은 곳에 자비의 화신의 이름을 붙여 놓았으며 자비와 지옥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 의문은 나중에 「티베트사자의 서」의 기원문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내 삶의 주사위가 완전히 던져졌을 때 이 세상의 가족들은 나에게 아주 소용이 없다.
나 혼자 사후세계를 방황할 때, 평화의 승리자와 분노의 승리자들이여!
당신들의 자비의 힘으로 무지의 어둠을 걷어내 주소서.
사랑하는 친구들과 헤어져 홀로 방황할 때 내 자신의 공허한 생각들이 환영이 되어 나 타 날 때 당신들의 자비의 힘으로 사후세계의 두려움과 공포를 물리쳐 주소서.
역시 티베트인들도 나처럼 될마라 고개와 자비의 호숫가에서 원초적 두려움을 느꼈기에 그들이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보살인 될마에게 구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그 곳의 수호신으로 될마를 앉히게 된 것이 아닐까?
그들에게는 될마가 친근하다지만 해동의 나그네에겐 그래도 관세음보살이 익숙하기에 아슬아슬한 고비마다‘나무 관음보살’을 외우며, 지친 몸으로 몇 시간을 구르다시피 겨우 경사 급한 돌밭을 내려오니 거기 푸른 잔디밭이, 맑은 시냇물이, 무엇보다도 반가운, 먼저 온 야크 등에 실려 있는 요깃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허겁지겁 허기를 채우고 뒤처진 일행을 기다리느라고 따듯한 햇볕이 내리쬐는 풀밭에 누워
“왜 티베트인들은 그런 지옥문 같은 곳에다 자비의 보살이름을 부쳤을까” 라는 화두를 잡고 있다가 달콤한 낮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밀라래빠의 토굴, 쥬툴북
꿈속에서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한 사내를 만나 그를 따라 그의 집이라는 동굴로 갔다. 거기서 따듯한 차 한 잔을 대접 받았다. 그는 노래를 계속 불렀고 나그네는 감명 깊게 들었다. 그 것은 참으로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남자도, 여자의 목소리도 아닌 그런 투명한 목소리였다.
내가 누구인지 그대는 아는가? 나는 명상수행자 밀라래빠라네.
가슴 속에 깨달음의 꽃이 핀 사람이라네.
칼칼한 목소리로 그대에게 비유의 노래 부르리라.
진실한 말로 그대를 위해 진리를 설하노라.
따듯한 마음으로 그대에게 충고의 말 전하노라.
그대 안에 깨달음의 보리심 싹터 해탈의 길로 나아가길 바라노라.
나의 가르침 따라 진리로 나아가면 영원한 기쁨이 그대를 감싸리라
꿈이었다. 장자(莊子)의나비의 꿈(胡蝶夢)이었다. 꿈을 꾸는 동안 내 몸은 정말 그를 따라 쥬툴북 사원에 도착해 있었다. 즉시 그의 토굴로 달려갔지만 토굴은 텅 비어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 보았던 천장의 손자국만은 선연하였다.
불교의 전입 이전에는 이산은 샤머니즘적 전통종교인 뵌뽀교의 성지였다. 이름 또한 강 린뽀체가 아닌 그냥 눈의 산인강 디세였다.
어느 날 유명한 밀교행자 밀라래빠가 찾아와 수행할 곳을 찾음으로써 당시까지 주인이었던 뵌뽀와의 한판승부가 벌어졌다. 표면상으로는 강 디세 산의 헤게모니 쟁탈전이었지만, 실제로는 전 티베트고원을 걸고 싸운 전면전의 양상이었다. 그렇기에 어느 쪽에서도 결코 물러날 수 없는 건곤일척의 대회전이었다. 이 역사적인 싸움은 3막으로 구성되었고 뵌뽀의 대표선수는 유명한 초능력자였다. 서막은 뵌뽀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세상에는 밀라래빠가 참으로 위대한 자라고 알려져 있건만 알고 보니 벌거벗고 잠자는 늙은 망나니에 지나지 않네. 아름다운 노래 입으로 읊고 다니지만 손에 든 것은 등지팡이 하나 뿐 찾아보아도 위대한 것은 하나도 없네.
우리 뵌뽀의 신은 ‘센랍’이시니 스와스띠카[雍仲 卍字]가 그 상징이네. 입 크게 벌린 무서운 흡혈대신이네. 머리는 아홉 개요 팔은 열여덟이니 온갖 신통력 지닌 대왕이시네.”
뵌뽀교의 대표선수 나로뵌충은 빈정거리며 시비를 걸었고 밀라래빠는 받아쳤다.
명성 높은 백설의 디세산은 지순하고 흠 없는 붓다의 가르침을 상징하네.
수많은 강물 모여드는 마팜유초 호수는 절대의 진리세계 상징하네.
이 늙은 미라는 벌거벗고 잠자니 이원(二元)의 상대세계의 초월을 상징하네.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내 가슴속에서 넘쳐흐르는 샘물은 붓다의 경전들을 말하는 노래들이라네. 손에 쥔 지팡이는 윤회의 바다 건너는 도구 마음과 물질 통달한 머리는 신들의 도움 없이도 모든 기적 행하네.
말로서 끝날 싸움이 아니었다. 이윽고 실력대결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마팜호수에서, 다음에는 장소를 옮겨 디세 산기슭에서 싸움은 이어졌다. 일회전은 순례방향의 문제가 발단이 되었다. 밀라는 왼쪽으로, 뵌충은 오른쪽으로 서로 힘을 써서 상대방을 잡아 당겼지만 승부가 나지 않아 둘은 일 단 각기의 방향으로 꼬라를 돌았다. 그리하여 지금도 그 자리에는 그 때의 발자국들이라고 전해오는 것들이 바위에 선명하게 남아있게 되었다.
둘은 산을 한 바퀴 돌고나서 다시 쥬툴동굴 앞에서 부딪혔는데, 마침 소낙비가 내려 둘은 잠시 휴전하고 합작하여 비를 피할 집을 짓기로 했다. 기초석과 지붕을 분담하여 일을 시작하였는데, 둘은 암암리에 술수를 써서 상대를 방해하면서 집을 지었다. 완성된 집의 지붕이 너무 낮아 밀라가 밀어 올리자 이번에는 너무 높아져 다시 내려 눌러 지금과 같은 적당한 높이가 되었다. 역시 이때의 두 사람의 손자국이라고 전해오는 것들이 지금도 천장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삼회전은 산꼭대기 오르기 내기였다.
뵌충은 마술의 북을 타고 날아올라 정상 근처까지 갔지만, 그때까지도 밀라는 선정에 들어 움직이지 않았다. 뵌충의 승리로 끝나려는 순간, 이때 아침 햇살이 비추자 밀라는 앉은 채 순식간에 빛을 타고 공간이동을 해서 정상에 안착하였다. 이에 놀란 뵌충이 북을 떨어트려서 굴러 내리는 바람에 산에는 지금도 깊은 고랑이 생겼다고 한다.
싸움은 점입가경이었지만 3판 모두 밀라래빠의 승리였다. 불교의 승리였다. 이에 나로뵌충은 패배를 인정하고 디세 산의 소유권을 밀라래빠에게 내어주었다. 이에 밀라도 너그러이 디세 산과 마팜호수의 참배권은 인정해주기로 양보하여 지금도 뵌뽀교도들은 자유로이 그들 방식대로 오른쪽으로 순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한다.
그렇게 하여 강 디세산은 강 린뽀체, 즉 ‘눈의 활불(活佛)’이 되었고 광재용왕(廣財龍王)이란 뜻의‘마추이초’는 “영원히 패하지 않는 진리의 호수”란 뜻의 마팜유초가 되었다. 그렇게 하여 오색의 무당(巫堂) 깃발 날리던 티베트고원은옴 마니 반메 훔이 울리는 불국토가 된 것이었다.
티베트의 고대 역사는 어찌 보면 뵌뽀교와 불교의‘대립과 융화’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자의 손이 누구 편을 잡았느냐에 따라서 시대적 부침은 겪었지만 두 종교는 끊임없이‘대립과 융화’를 되풀이 하였다. 일견하면 티베트가 완전한 불교국가처럼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두 종교 간의 갈등의 역사는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불교가 완전히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위의 밀라래빠의 일화는 실은 그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지만 밀라래빠에 의해서 불교는 뵌뽀를 젖치고 민중들의 가슴속에 깊숙하게 불심을 심게 된 게기를 맞게 된다. 그 만 그는 티베트불교사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영향력이 큰 전설적인 인물이다.
밀라래빠(1052-1135)의 생애는 드라마틱한 반전의 연속이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재산을 친척들에게 빼앗긴 복수를 하기 위해 흑마술(黑魔術)을 배우려고 집을 떠난 밀라는 이를 갈아가며 뵌뽀의 저주법을 배워 고향으로 돌아와 그의 집안을 배신한 친척들을 33명이나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통쾌할 것만 같았던 그의 가슴은 그 때부터 지옥불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스승을 찾아다니며 회개의 길을 찾아가 인도에서 무상요가법(無上Yoga)을 터득하고 돌아온 마르빠를 만나게 된다.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밀라래빠는 참으로 피나는 고행을 한 끝에 원만경지에 들어 스스로 박은 가슴속의 못을 빼고 보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한 평생 흰 옷을 입고 청빈하게 살면서 노래로서 중생들을 교화하였기에 그의 이름은 밀라래빠, 즉 “무명옷을 입은 사람”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는 말년에 이곳 쥬툴북 동굴에서 쐐기풀을 삶아 먹으며 고행으로 일관하는 수 년 간을 보냈다. 그는 질그릇 하나를 발우삼아 궁핍하게 살았는데 하루는 실수로 질그릇이 깨어지자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질그릇은 나의 스승이 되었다. 이 질그릇이 깨어지면서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으며 세속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게 하는 가르침을 주었다.”
이렇게 그는 주위의 모든 것에서 배움을 얻는 겸허함으로 세상을 대하며 항상 참회하는 삶을 살았기에 그의 주위에는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그의 가르침을 경청하였다고 한다. 주로 노래로서 전해지는 그의 가르침은 10만개나 된다하여, 그의 제자들은 그것들을 묶어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후세에 전하였다. 바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십만송」이 그것이다. 불교사적으로도 그의 족적은 크다. 까귀파의 전통대로 그의 법을 전수받은 의발제자인 감뽀빠에 의해 까귀파는 종풍을 크게 날리며 설역고원 곳곳까지 전파되어 후에 ‘4갈래 8파’로 갈라지며, 지금까지 티베트불교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해동의 나그네도 그의 시를 좋아하기에 그의 체취와 발자취가 곳곳에 배어 있는 동굴에서의 하루 밤, 아니 이틀 밤은 그래서 더욱 감개무량하였다. 다리부상으로 뒤처진 일행을 기다리느라고 하루를 더 묵게 되어서 그의 체취를 흠뻑 맡을 수 있는 포만감도 맛볼 수 있었다. 낮에는 휴식을 취하면서 저녁나절이 되면 마당가를 거닐며 핏빛 노을이 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는 귀소본능에 젖어, 이생에서의 인연들이 살고 있는 해동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그리운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눈물겨워 하기도 하면서 보내는 이틀간은 참으로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또 다른 새날이 밝아 왔다. 우리는 또 떠나야만 하였다. 이제는 정말 그님과 헤어져야 하였다. 그는 안개가 짙게 낀 마당가에 나와서 해동의 나그네를 배웅하면서 그 특유의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래, 그것은 그의 오도송(悟道頌)이었다. 그의 깨달음을 후대의 중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바람에서 우러나오는 관음, 미륵, 아발로키데스바라, 따라 보살들의 자비심에서 우러나오는 이별가였다.
흘러가는 것, 충만한 것, 돌아가 안기는 모든 것은,
존재의 본질을 직시함에 한 결 같이 힘을 주네.
모든 형상에서 자유로움은 하나의 힘이요,
스승의 가르침을 실행함은 또 하나의 힘이요,
죄를 짓지 않고 이승을 마감함도 또 다른 힘이라네.
그래 그건 힘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거대한 에너지였다. 어떤 깨달음만이 끌어 낼 수 있는 신비스런 영혼의 힘이었다. 뭔가 이승에 살 동안에 꼭 마쳐야할 어떤 숙제를 끝낸 홀가분함에서 오는 개운함이었다.
그렇게 하여 해발 5,668m의 될마라 고개를 넘어, 3박4일간의 53km 순례의 전 코스를 회향하는 일정은 그렇게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종추 시내를 따라 정남으로 뻗어 내려간 계곡을 따라 내려오니, 거기 만자(卍字)형상의 스와스띠카 평원이 펼쳐지고 그 너머에는 히말라야의 능선이 한 낮의 태양아래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 아래 둥그런 거울 같은 마나스 호수가 또한 반짝이고 있었다. 마침내 바깥쪽 산돌이 순례가 모두 끝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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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판 <티베트의 신비와 명상> 초고본 발췌
될마라를 힘들게 넘는 모든 해동의 나그네에게 드리는 격려사.
첫댓글 오래전 한 20년 가까이 된 목판화입니다만, 될마라 사진을 보니 갑자기 그곳이 그리워져 한 두장 올립니다.
우리 카일라스님의 한국에서의 나날이 따듯해지기 바라면서....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역시 내공있는 내용이군요
귀하신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될마라! 될마라....종교의 뿌리가 다름에도 가슴을 치는 글귀들이 있어 그리움을 더하게 합니다.
이런 글들이 가슴을 적셔주는 청량함으로 옵니다.
티벳사자의서의" 고빈다" 볼리비아 승려라는걸 처음알았습니다
_()_
오랫만에 읽어도 늘 새롭게 다가오네요
오랫만에 다시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