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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천 읍
정탁(鄭琢)
출생-사망:1526年(中宗 21) ~1605年(宣祖 38)
字는 子精, 호는 藥圃, 시호는 貞簡, 本貫은 淸州, 懸監 元老의 增孫, 1558年(明宗 13) 文科에 及第, 여러 벼슬을 거쳐 마지막으로 左議政을 지냈으며, 예천읍 고평리 89번지에 약포유물관을 건립하여 선생의 얼을 추모하며, 유물을 보존관리하고 있다.
박상영(朴湘永)
초대 한극민주당 국회의원
1918년 5월 13일생
재임기간(48. 5. 31 ~ 50. 5. 30.)
황재홍(黃在洪)
9대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1931년 7월 27일생
재임기간(73. 3. 12 ~ 79. 3. 11)
구범모(具範謨)
10대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1934년 1월 7일생
재임기간('79. 3. 12∼'80.10. 27)
용 문 면
권군보(權君保)
본관은 예천이고,판서 섬(暹)의 아들이다.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해부사(寧海府使)에 이르렀고, 그 손자 맹손(孟孫)이 귀(貴)하게 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 되었으며 휴구곡(紙鳩谷)에 살았다.
권 의(權 誼)
본관은 예천이니 판서 군보(君保)의 맏아들이다. 조선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가선대부 검교 한성부윤에 이르렀고 휴구곡(紙鳩谷)에 살았다.
권 상(權 詳)
본관은 예천이고 판서 군보(君 保)의 셋째 아들이니 의(誼ml 아우이다. 조선조 초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성주목사에 이르렀고, 그 아들 맹손이 귀히 되어 숭정대부 판중추원사에 증직 되었고 휴구곡(紙鳩谷)에 살았다.
권맹손(權孟孫)
본관은 예천이고 자는 효백이요, 호는 송당이며, 시호가 제평공(齊平公)이며,판중추(判中樞) 상(詳)의 아들이다. 1408(조선 태종 8 무오)년에 생원과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427년(세종 9 정미)년에 문과 중시에 오르고 벼슬이 숭정대부 의정부 찬성 겸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예천 휴구곡(紙鳩谷)에서 대제곡(大渚谷)으로 이사해 살았다.
문 헌(文 獻)
본관은 감천(甘泉)이고, 장령(掌令)이던 질(質)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서관 교리에 이르고 상금곡에 살았다.
보 문 면
김손(金遜) 1304~1389
본관은 김해이고 고려말 무장이며, 처음 이름은 저(佇)였으나 공민왕이 이름을 하사했으며, 19살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홍건적의 난에 공민왕을 모시고 어림성을 수축하였으며, 이성계에 항거하다 옥중에서 죽음을 맞 았음. 보문면 미호리에 위치한 표절사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김전(金鈿) 1320~1392
손의 아들로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이 되었고 고려가 망하자 고려에 대한 충과 의를 나타내는 시를 남기고 굶어 죽었으며 표절사에위패가 모셔져 있다.
김두(金斗) 1338~1400
전의 아들로 고려의 충신이며 공민왕 때 왜적을 토벌한 공로로 수문전학 사에 제수되었고 고려가 망한 후 율림에 묻혀 지내며 조선 태조가 여러 번 불렀으나 불을 질러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표절사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윤상(尹祥) 1373~1455
본관은 예천으로서 조선태조 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종30년에는성균관 박사가 되어 단종에게 학문을 강의하여 사림의 자랑이 되었다. 현관, 명사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며, 조선 개국이래 으뜸 가는 사범으로서 문종 원년(1451)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문집 목판이 있고 유물로 교지가 전한다.
윤국범(尹國範)1882~1911
구한말 의병장으로서 보문면 독양리 거묵골에서 태어났으며, 항일투쟁 을 위해 목숨과 재산을 바쳤고,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3년여에 걸쳐 활 동하였으며 1910년 체포되어 이듬해 서대문형무소에서 30세의 나이에 교수형을 당하였음. 무덤은 보문면 일방 화통골에 있으며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 되었다.
호 명 면
장말손(張末孫) (1431~1486)
본관은 인동(仁同)이요, 字는 경윤(景胤)이며, 옥산군(玉山君) 안량(安良)의 아들이다. 145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459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平定)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정충포의 적개공신(精忠布 義 敵愾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가선대부 예조참판(嘉善大夫 禮曹參判)으로 연 복군(延福君)으로 봉군(封君)되었고 시호(諡號)는 안양공(安襄公)이며 호명리 원곡에 살았다.
이열도(李閱道) (1538~1581)
본관은 진보(眞寶)요, 호는 우암, 字는 정가(瀞可)이며, 호명면 백송의 찰방(察訪) 굉(宏)의 아들이고, 퇴계선생(退溪先生)의 종손이다. 13살 나던 해 모친상을 당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호곡하며 모든 일을 어른과 같이 하니 향당이 모두 그 효성에 감복하였으며 그 때 벌써 4서 3경을 독파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576년 별시 문과 二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고 벼슬이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이르고 만년에 선몽대(仙夢臺)를 지어 놓고 자연의 절경을 마음껏 즐겼으며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이 많이 노닐고 시를 읊었으며 호명의 백송리에 살았다.
박견기(朴堅基)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현령(縣令)이던 금(錦)의 손자이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장령(掌令)이던 남정(南鼎)의 따님에게 장가들어서 군남(郡南) 번포리 (樊浦里)로 옮겨 살았다.
김호(金頀)
字는 숙화(叔和)이니 진사(進士)인 소(韶)의 아우이다. 1612년에 진사가 되고 문음(門蔭)으로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며 군(郡)의 남쪽인 종산 (宗山)으로 옮겨 살았다.
김황
字는 여화(如和)인데 진사(進士)이던 호(頀)의 아우이다. 1612년에 형인 호와 함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며 군남(郡南) 종산(宗山)으로 옮겨 살았다.
신원(申瑗 )
字는 백옥(伯玉)인데 현감(縣監)이던 응지(應之)의 아드님이다. 1480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사월리(沙月里)에 살았다.
노순(盧珣)
字는 온부이고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며 효행(孝行)으로 정표(旌表)되었고 우포리(愚浦里)에 살았다.
용 궁 면
장진우(張進禹)
용궁면 산택리에서 영수공(永秀公)의 장남으로 태어난 장진우 선생의 본관은 울진이며 호는 청운(淸雲)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운동에 호응하였으며, 3.1독립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으며, 의용단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한양이(韓良履)
송암리에서 태섭공(台燮公)의 2남으로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자는 여경(汝敬)이요, 호는 석초(石樵)이며 본관은 청주(淸州)다.
김존중(金存中)
용궁면 태생으로 호는 지암(芝巖), 시호는 정렬(貞烈) 본관은 용궁(龍宮), 구(丘)의 아들 용궁김씨의 시조(始祖)이다. 소과인 남성시(南省試)에 합격하고 인종때 문과에 급제한후 첨사부 녹사(綠事)의 벼슬을 하였다.
남천한(南天漢)
용궁현 출신으로 자는 장우(章宇), 호는 고암(孤巖), 본관은 영양(英陽) 란(欒)의 아들이다. 1630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46년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사간원과 사헌부의 요직을 거쳐 참의, 승정원의 승지, 사간원의 장관인 정3품 대사간에까지 이르렀다.
반충
공은 세계(世系)가 거제(巨濟)로서 효자이고 찰방(察訪)이던 유(濡)의 5대손이고 의서습독관(의서 習讀官)이던 사형(士형)의 둘째 아들로서 자(字)는 화중(和仲)이고 관물당(觀物堂)으로 자호(自號)했으며 1584년에 돌아가니 효종2년에 효자정려(孝子旌閭)가 내렸다.
개 포 면
이문흥(李文興)
15세기 문신, 개포면 출신.
자는 질보, 호는 나암이요. 본관은 성주이며 1462(세조 8)년 48세에 진사에 뽑히고 1469(예종 1)년 문과에 급제하고 성종때에 대사성에 이르러 16년간을 인재 양성에 전심전력하니 당대 유림의 종사로 많은 제자들이 조정의 공경대부 자리에 나아갔다. 1493(성종 24)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당대의 명공 석학들이 도성 문밖까지 배웅하면서 그 공덕을 노래하여 귀향하는 길을 영화롭게 했고 이 때의 이별을 아쉬워 하는 시들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48에 처음 벼슬하여 79에 치사하니 세상에 드문 일이다.
나암 서거 근 200년 후 사림이 1699(현종 10)년 용궁의 기천서원에 (고려 절신 노포 안 준을 모신 곳) 손자 이 구, 외손자 문 근문 관 등과 함께 모셨다.
이 구(李構)
공의 자는 성지, 호는 연경당.본관은 성주, 세준의 아들로 개포면 입암리에서 태어남.
1510년에(중종 5) 진사가 되고 36살 나던 해, 곧 1519년(중종 14)에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으나 이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 광조 등과 의지가 통하는 신진사류라는 이유로 투옥되었다가 하루만에 석방되었고, 또 향약을 실시하면 도둑이 없어진다고 건의하여 이를 실시케 하였는데 도둑이 여전히 횡행한다 하여 2년 후 1521년(중종 16) 파직되어 낙향했다가 16년 후 작고하고 1538년(중종 33) 기묘명현들이 신원될 때 직제학으로 불렀으나 작고 후이므로 증직에 그쳤다.
기묘년에 한림으로 용궁에 있는 본집에 다녀 상경한 뒤 왕에게 아뢰기를 "향약
을 행한 뒤로 풍속이 후해지고 점점 향방을 알게 되었사오니 계속하여 시행한다
면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을 날이 올 것으로 믿습니다."하였다. 그는 신진사
류 조 광조 등과 뜻을 같이 하며 이상 정치를 추구하였으나 뜻을 펴지 못했다
무문의 화(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승정원에서 잡혀 옥에 갇혔다가 다음날 아침
풀려나자 입시하여 아뢰기를 "어제 일이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되었습니까 사초
에 쓰려고 해도 그 원인을 알 수 없습니다."하니 임금은 "일의 원인을 사관으로서
알고자 하느냐. 그날 홍 경수(무오사화를 일으킨 주역)등이 신무문 밖에 모였으
므로 내가 서문으로 들어오라고 했다."하였다.
사관 권 예등과 다시 아뢰기를, "이 같이 중대한 일은 대신들이 도당에 모여 백일하에 처리하는 것이 옳습니다. 밤은 음이고 낮은 양인것과 같이 군자는 양이요 소인은 음입니다. 밤중에 거사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아니라 신무문은 거사할 곳이 아니옵니다." 하였으나 임금은 답이 없었다.
뒤미처 공이 아뢰기를 "이 계교를 먼저 시작한 사람과 신무문을 연 일들을 들어서 적고 싶사오나 신이 사필을 잡고서도 근본 원인을 모르므로 이같이 아뢰나이다"하고 이어 아뢰기를 "신이 정원에서 숙직했는데도 그 열쇠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왕이 또 이르기를 "그 때 승지들이 모두 간의대에 갔었는데 어떻게 알겠느냐"하였다.
또 아뢰기를 "그 때 신도 또한 옥에 갇혔었는데 조 광조등이 서로 붙들고 통곡하기를 생각컨데 화변이 중간에서 일어난 것 같다고 하다가 새벽에 이르러서 까닭을 듣고 서로 술을 권하면서 위로하여 이것이 임금의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면 죽은들 무슨 한이 있으리요마는 성스럽고 밝은 임금을 만났는데 어찌 이같이 애매한 일이 있을 줄 생각하였으리요. 하였습니다."라고 옥중 동정을 아뢰니 왕은 더 말이 없었다.
그 뒤 1521년(중종 17)에 이 빈, 유 관등이 "이 구가 향약을 실시하면 풍속이 순화된다고 하더니 도둑이 자주 일어나니 그의 속인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합니다."라고 왕에게 아뢰어 파직이 되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향약은 사회의 덕화와 상호 협동을 위하여 만든 규약이요 중종조에는 신진 사류들의 진언으로 채택되어 풍습과 민정에 끼친 공이 큰 것인데 이렇게 반대당의 진언이라고 배척되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 하루빨리 없어져야 될 악습이다. 이후로 고향(개포면)에 돌아온 그는 연경당을 짓고 고향 산천을 가꾸며 여생을 보냈다. 기천서원에 모신다. (※ 문헌: 연려실기술, 성종실록, 용궁현읍지)
이발곤(李發坤)
절의 현손으로 호는 은촌, 광행군 때 진사로 문장과 행실이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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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欄에 처음 들어와 봤습니다, 너무 허술 하군요, 국회의원만 해도 예천출신이 박상영, 황재홍, 구범모 밖에 없습니까? 또 독립운동으로 건국 훈, 포장을
받은이가 얼마나 많은데,,, 달랑 몇사람만 올려 놓었으니,,, 차라리 이난을 없애는게 어떨까요? 앞뒤 사정 모르고 이 欄을 본 사람들은 예천군내 위인이
여기 올라있는 이 사람들 뿐인줄 알지 않겠습니까? 내 얼굴이 화끈 거립니다.
부산 사는 晩村人 全在성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