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와 벌 에필로그 1
에필로그
1
시베리아. 광막한 대하(大河) 기슭에 러시아 행정 중심지의 하나인 도시가 서 있다. 거기에는 요새가 있고, 요새 안에는 감옥이 있다. 2급 유형수 로지온 로마느이치 라스콜니코프는 이미 9개월이나 그 감옥에 갇혀 있다. 그의 범행일로부터 거의 1년 반이라는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그의 사건 심리는 큰 곤란 없이 진척되었다. 범인은 사태를 뒤얽거나 자기의 이익을 위해 조건을 완화시키거나 사실을 왜곡하거나 하는 일 없이, 지극히 사소한 점까지도 잊지 않고 단호하고도 정확 명료하게 진술을 고집했다. 그는 살인의 전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상세히 진술함으로써, 피살된 노파의 수중에서 발견된 저당물(금속판을 댄 나뭇조각)의 비밀을 해명해주었다. 그리고 피살된 노파의 손에서 열쇠를 빼앗은 장면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그 열쇠의 모양을 설명한 다음, 트렁크의 겉모습과 그 내용물까지도 설명했다. 그리고 그 안에 있었던 몇몇 물건에 대해서는 그 품목까지 일일이 열거했을 정도다. 그는 또한 리자베타 살해에 관한 수수께끼도 풀어주었다. 코흐가 와서 문을 두드린 일이며, 그 뒤에 대학생이 찾아왔던 일, 그리고 그들이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까지 죄다 이야기했다. 그리고 범인인 그가 층계를 뒤어 내려가다가 미콜카와 미치카가가 서로 외치는 소리를 듣고 빈방에 숨었던 일이며, 그 후에 집으로 돌아갔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끝으로 보즈네센스키 거리의 어느 들 안 대문 밑에 돌이 있음을 명시했다. 그 돌 밑에서는 장물과 지갑이 발견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건은 명백해진 것이다. 예심판사와 재판관은 지갑과 물건을 쓰지도 않고 돌 밑에 감추어두었다는 사실에 특히 놀랐으나, 그보다도 더욱 놀란것은, 그가 자기 손으로 훔친 금품의 명목을 기억하지 못할뿐더러 그 가짓수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한 번도 지갑을 열어보지 않고 속에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도 몰랐다는 사실은 특히 있을 수 없는 일같이 생각되었다(지갑 속에는 지폐로 317루블과 20 코페이카짜리 은전 세 닢이 들어있었다. 오랫동안 돌 밑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위쪽의 고액권 지폐 두서너 장은 몹시 상해 있었다). 피고는 다른 모든 것을 자진해서 정직하게 자백하면서도 왜 이 한 가지에 대해서만 거짓말을 할까? 이 점을 규명하는 데 사람들은 오랫동안 고심했다. 결국 몇몇 인사들은(특히 심리학자들 몇몇은) 그가 정말로 지갑을 열어보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모르고 그냥 돌 밑에 감추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시인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범죄 그 자체는 일시적인 정신착란, 즉 무슨 이득을 위한 앞으로의 목적이나 타산 같은 것이 없는, 살인강도의 병적인 편집광에서 생긴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마침 거기에는 오늘날 가끔 어떠한 종류의 범인에게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일시적 정신착란이라는 최신 유행 이론이 알맞게 적용되었다. 게다가 라스콜니코프의 고질적인 우울증 증상이 많은 증인들에 의해서, 의사 조시모프며, 예전의 학우들이며, 하숙집 주인이며, 하녀 등에 의해서 정확히 증언되었다. 이러한 모든 사정은 라스콜니코프가 흔히 있는 살인범이나 강도나 도둑들과는 전혀 닮지도 않은, 무언가 좀 색다른 유형에 속한다고 결론짓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다만 이 의견을 주장한 사람들이 가장 유감스럽게 생각한 것은 범인 자신이 거의 자기변호를 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약탈을 하게 했는가, 라는 궁극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명료하고도 거칠 정도의 정확한 어조로, 일체의 원인은 자기의 추악한 정신 상태와 가난과 무력한 처지에 있었다고 대답하고, 노파를 죽이면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적어도 3천 루블이란 돈을 밑천 삼아 출세의 첫걸음을 굳건히 내디뎌보려 했다고 말했다. 그가 살인을 결심했던 것은 소심하고도 경솔한 자기의 성격 때문이며, 거기에 궁핍과 불행으로 초조해진 성격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럼 자수를 결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솔직히 진심으로부터의 회오라고 대답했다. 이 모든 것을 그는 난폭할 만큼 거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나 판결은 사람들이 그 죄목으로 미루어 추측했던 것보다 훨신 관대했다. 아마도 범인이 추호도 자기변호를 하려 들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범인 자신이 되도록 자기 죄를 무겁게 하려는 희망을 표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사건이 지니는 기괴하고 특수한 성격들이 모두 고려되었다. 범죄 수행 전에 범인이 병적인 비참한 심적 상태에 있었다는 점은 조금도 의심을 받지 않았다. 그가 장물을 이용하지 않은 것은 한편으로 회오의 정이 싹트게 되었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범행 당시의 정신 능력이 충분히 건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정되었다. 우발적으로 리자베타를 죽인 것도 오히려 이 가정을 뒷받침하는 예증으로서 도움이 되었다. 두 사람이나 살인한 범인이 그 시간에 방문이 열려 있는 것조차 잊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기소침한 광신자 니콜라이가 허위 자백을 하는 바람에 사건이 몸시 뒤엉킨 데다 진범인 자신에 대해서는 명백한 증거는 고사하고 거의 혐의조차 받고 있지 않았는데도(포르피리는 끝까지 약속을 지켰다) 바로 그런 시기에 자수를 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피고의 운명을 덜어주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 밖에도 피고를 몹시 유리하게 만드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났다. 전에 대학생이었던 라주미힌이 어디서 듣고 왔는지, 피고 라스콜니코프가 대학 재학 시절에 궁색한 호주머니를 털어서 가난한 폐병 환자인 어느 학우를 도와주고 거의 반년 동안이나 돌봐주었다는 사실을 제시한 것이다. 그 학우가 죽자 그는 뒤에 남은 그 학우의 노쇠한 아버지를 돌봐주었고(그 학우는 열세 살 때부터 제 힘으로 살림을 도맡으며 아버지를 부양해왔다), 나중에는 그 노인을 입원까지 시켰으며, 그 노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장례도 치러주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은 라스콜니코프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상당히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그전 하숙집 안주인이며 라스콜니코프의 죽은 약혼녀의 어머니인 자르니츠이나 미망인도, 그들이 아직 파치 길목에 살았을 당시 밤중에 불이 났을 때 이미 불길에 싸인 한 집에서 라스콜니코프가 두 어린아이를 구출해냈고 그 때문에 화상까지 입은 일이 있음을 증언했다. 이 사실은 면밀히 조사되었고, 많은 증인들에 의해서 충분히 증명되었다. 결국 한마디로 말해서, 범인이 자주한 점과 그 밖의 몇 가지 정상을 참작해서 2급 징역 선고를 내리고 형기도 겨우 8년으로 결정되었다.
재판 초기부터 라스콜니코프의 어머니는 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래서 두냐와 라주미힌은 재판 기간 동안 그녀를 페테르부르크에서 딴 곳으로 옮기려고 했다. 라주미힌은 재판의 자세한 내용을 정확하게 아는 동시에 가능한 자주 두냐와 만날 수 있도록 페테르부르크에서 가까운 어느 철도 연변의 도시를 택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병은 이상한 신경성의 일종이었는데, 완전히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도 어느 정도는 정신착란의 징후까지 수반했다. 두냐가 오빠와 마지막 면회를 하고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벌써 완전히 병이 나서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라주미힌하고 상의하여 어머니가 오빠 이야기를 묻는 경우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장래 돈과 명예를 얻게 될 어떤 사적인 임무를 띠고 러시아의 먼 국경 지방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미리 궁리해두기까지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그때든 그 이후든 간에 그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도 아들의 갑작스런 출발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나 꾸며놓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로쟈가 자기한테 작별 인사를 하러 왔을 때의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녀 혼자만이 지극히 중대한 여러 가지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과, 로쟈에겐 몹시 강력한 적들이 많으므로 피신할 필요가 있다는 것 등을 넌지시 암시했다. 아들의 장래 출세에 관해서는 몇 가지 불리한 사정만 해소되면 틀림없이 눈부신 성공을 거두리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라주미힌에게 자기 아들은 앞으로 국가적인 인물이 될 것이며, 그것은 그의 논문과 빛나는 문학적 재능이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논문을 그녀는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읽었다. 때로는 소리를 내어 낭독까지 할 정도여서 그야말로 밤에도 껴안고 잘 지경이었다. 그러나 현재 로쟈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 그녀는, 모두가 이야기를 꺼리는 것이 분명하고 또 그것만으로도 의심을 품기에 충분했는데도 거기에 대해서는 물어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마침내 그들은 몇 가지 점에 관한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이상한 침묵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전에 시골에 있을적에는 사랑하는 로쟈의 편지가 한시바삐 오기를 바라는 희망과 기대만으로 살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는 것을 조금도 불평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하여도 설명할 길이 없었으므로, 두냐의 가슴은 더욱 불안해질 뿐이었다. 두냐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까지 떠올랐다. 어쩌면 어머니는 아들의 운명에 무언가 무서운 것을 예감했기 때문에,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을 듣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해 이것저것 자세히 캐묻기를 꺼리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두냐는 어머니가 건전한 정신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하기는 두어 번쯤 어머니 쪽에서, 지금 로쟈가 어디 있는지를 대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이야기를 유도해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대답이 부득이 불만스럽고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때면, 그녀는 갑자기 침울하고 슬픈 얼굴이 되면서 입을 다물어버리고 그 상태가 무척 오랫동안 죽 계속되곤 했다. 나중엔 두냐도 거짓말을 하거나 말을 꾸며대는 일이 수월치 않음을 깨닫고, 몇 가지 점에서는 아예 침묵을 지키는 게 상책이라는 최후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가엾은 어머니가 무언가 무서운 것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은 갈수록 점점 더 명백해졌다. 그러는 동안 두냐는 마지막 운명적인 날이 닥쳐오기 전날 밤, 즉 그녀와 스비드리가일로프의 그 일막극이 있었던 그날 밤에 자신이 헛소리하는 것을 어머니가 들었다던 오빠의 말을 상기했다. 어머니는 그때 무슨 말을 들으신 게 아닐까? 이따금 몇 날 몇 주일이나 침울한 침묵과 무언의 눈물이 계속된 뒤에 병자는 갑자기 히스테릭하게 활기를 디며, 큰 소리로 아들의 일이며 자기의 희망과 장래의 일 등을 거의 숨도 돌리지 않고 지껄여대기도 했다. 그녀의 상상은 때로 지극히 괴이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녈르 위로하면서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그녀 자신도 어쩌면 두 사람이 단지 자기를 위로해 주려고 맞장구를 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자기 얘기를 계속했다.
범인이 자수한 지 다섯 달 뒤에 판결이 내렸다. 라주미힌은 면회가 허가되는 대로 자주 감옥으로 찾아가서 그를 만났다. 소냐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이별할 때가 다가왔다. 두냐는 오빠에게 이 이별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맹세했다. 라주미힌도 그렇게 말했다. 젊은 피에 불타는 라주미힌의 열정적인 머리에는 앞으로 3,4년 동안 되도록 장래의 기반이 될만큼이나마 돈을 모아가지고, 모든 점에서 토지가 비옥하고 일손과 인재와 자본이 부족한 시베리아 지방으로 이주하려는 계획이 굳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로쟈가 이송되는 도시에다 같이 자리를 잡고, 거기서.....모두가 함께 새 생활을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헤어질 대는 모두 울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마지막 며칠 동안 줄곧 깊은 생각에 잠겨, 어머니 일을 꼬치꼬치 깨물으며 어머니 걱정만 했다. 두냐가 금심하던 것과 똑같이 그도 어머니에 대해서 근심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증상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듣고는 한층 더 우울해졌다. 소냐하고는 왜 그런지 유달리 말이 적었다. 소냐는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남겨준 돈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이제 그가 끼여갈 죄수 일행을 뒤따를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그녀도 라스콜니코프도 아직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으나,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것은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이윽고 마직막 이별을 고할 때 동생과 라주미힌이 출옥 후의 행복한 미래에 관해 열심히 맹세하자, 그는 야릇한 미소로 답하며 어머니의 병적 상태는 머지않아 불행으로 끝나리라고 예언했다. 그와 소냐는 드디어 출발했따.
두 달 뒤에 두네치카는 라주미힌과 결혼했다. 결혼식은 슬프고도 조용했다. 초대받은 손님들 중에는 포르피리 페트로비치와 조시모프도 끼어 있었다. 최근 라주미힌의 얼굴에는 언제나 굳은 결심의 빛이 어려 있었다. 두냐는 그가 반드시 자기의 모든 계획을 실현할 것이라고 무조건 믿었고, 또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에게서는 강철 같은 의지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에게서는 강철 같은 의지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 다시 강의를 들으러 대학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 두 사람은 끊임없이 미래의 계획을 세워 나갔고, 5년 후에는 반드시 시베리아로 이주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거기에 가 있는 소냐에게 희망을 걸기로 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라주미힌과 결혼한 딸을 기쁜 마음으로 축복해주었다. 그러나 그 결혼식을 마치자 그녀는 어째선지 더욱 침울해지고 더욱 근심스러워진 것 같았다. 라주미힌은 조금이라도 장모를 기쁘게 해주려고, 폐병을 앓던 대학생과 그의 늙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며, 작년에 로쟈가 두 어린아이의 목숨을 건지느라고 화상을 입었을뿐더러 병까지 앓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러한 보고는 그렇잖아도 머리가 좀 이상해진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를 환희의 절정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그녀는 노상 이야기만 했고, 한 길에서까지도 이 이야기를 끄집어냈다(물론 그 옆에는 언제나 두냐가 붙어 있었지만). 그녀는 합승마차 안에서도, 가게에서도 아무나 닥치는 대로 붙들고 자기 아들 이야기, 그의 논문 이야기, 그가 학우를 도와준 이야기, 화재 때 부상을 입은 이야기 등으로 화제를 끌고 갔다. 두네치카는 어떻게 어머니를 말려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러한 병적인 흥분 상태가 위험하다는 것 말고도, 거기에는 또 하나의 위협이 있었다. 즉 누군가가 언젠가의 재판 사건에서 나온 라스콜니코프 성을 상기하고 그 말을 끄집어낼지도 모른다는 위협이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불 속에서 아들이 구해낸 어린아이의 어머니가 사는 주소까지 알아내서는 꼭 한 번 그집을 방문하겠다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녀의 불안은 극도로 심해졌다. 그녀는 걸핏하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자주 앓아누워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 그녀는 별안간 자기 계산으로는 로쟈가 이제 곧 돌어올 것이다, 그 애는 자기가 헤어질 때 아홉 달 후엔 꼭 돌아오겠다고 말했고 자기는 그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집 안을 깨끗이 치우면서 아들을 맞을 준비를 시작하고, 로쟈의 것으로 정한 방(즉 자기 자신의 방)을 장식하는 가 하면, 가구를 닦고 커튼을 빨아 갈아 달기도 했다. 두냐는 마음이 아팠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빠를 맞기 위해 방을 치우는 일을 거들기까지 했다. 끊임없는 환상과 기쁨에 넘친 꿈과 눈물 속에서 불안한 하루가 지나자, 그날 밤부터 그녀는 다시 앓기 시작하여 이튿날 아침엔 벌써 열이 높아져서 헛소리만 하게 되었다. 열병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하여 두주일 후에 그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헛소리를 하는 가운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로 미루어 볼 때, 그녀는 옆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아들의 무서운 운명을 훨씬 더 의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시베리아 생활이 시작된 초기부터 페테르부르크와는 연락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라스콜니코프는 오랫도안 어머니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 편지 연락은 소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녀는 매달 어김없이 페테르부르크의 라주미힌 앞으로 편지를 보냈고, 자기도 페테르부르크에서 답장을 받았다. 처음에 소냐의 편지는 두냐와 라주미힌에게 어쩐지 시들하고 못마당하게 여겨졌으나, 나중에는 그들 두 사람도 그보다 더 잘 쓸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국 그녀의 편지로 불행한 오빠의 운명에 관해서 더없이 충실하고 정확한 관념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냐의 편지는 지극히 평범한 그날그날의 일상행활과 라스콜니코프의 유형 생활 전반에 걸친, 아주 간결하고도 명료한 기술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거기에는 그녀 자신의 희망의 표시나, 미래에 대한 상상이나, 그녀 자신의 감정 묘사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그의 정신 상태라든가 그의 내면생활을 설명하는 대신에, 그저 사실의 나열이 있을 뿐이었다. 즉 그가 한 말이며, 그의 건강 상태에 간한 상세한 보고며, 어느 날 면회 때 그가 무엇을 원했고 또 무엇을 부탁했으며 어떤 일을 위힘했다느니 하는 것들이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소상하게 적혀 있었으므로, 나중에는 불행한 오빠의 모습이 저절로 떠오르면서 명확하고도 정확히 눈앞에 그려졌다. 거기에는 틀림이 있을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정확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냐와 그 남편은 이 보고에서, 특히 처음에는 그다지 기쁨을 느낄 수가 없었다. 소냐는 번번이 그가 언제나 침울하며 말수가 적다고 알려왔다. 페테르부르크에서 편지가 올때마다 소냐가 여러 가지 소식을 알려주어도 그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쩌다가 어머니 소식을 묻기도 했으나, 이제는 거의 진상을 눈치채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마침내 소냐가 어머니의 별세를 알렸는데, 놀랍게도 그는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별로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자기 자신 속에 깊숙이 틀어박힌 채 모든 사람과의 교제를 끊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래도 자기의 새 생활에 대해서는 지극히 솔직하고 단순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전해왔다. 그는 자기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가까운 장래에 아무런 좋은 변화도 기대하지 않거니와, 아무런 경솔한 희망도 품지 않고(그의 처지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전하고는 무엇 하나 닮지도 않은 새 환경에 둘러싸인 채 거의 아무 일에도 놀라는 기색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냐는 그의 건강은 만족할 만하다고 보고했다. 그는 노역에도 나가곤 했는데 별로 그것을 피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음식에 대해서도 거의 무관심했으나, 그 음식은 일요일과 축일을 제외하고는 말할 수 없이 지독했으므로, 그도 결국은 자진해서 그녀 곧 소냐한테서 돈을 얼마간 받아가지고 매일 차를 마시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말아달라, 오히려 그것은 자기를 불쾌하게 만들 뿐이라고 그녀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그녀는 또 감옥 내의 거처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쓰는 공동 감방이라고 알려왔다. 그녀는 감옥 내부를 본 적이 없으나, 좁고 더럽고 건강에 해로운 곳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담요를 깔고 판자 침상에서 자지만,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이토록 조잡하고 궁색한 생활을 감수하고 있는 것은 결코 미리부터 생각한 어떤 계획이나 의도 때문이 아니라, 다만 자기 운명에 대한 외면적인 무관심과 부주의 때문이었다. 소냐는 또 솔직히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다. 그는 처음 얼마 동안 그녀가 면회를 하러 가도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그녀에게 짜증을 내며 말도 하지 않고 무뚝뚝한 태도로 대했었으나, 나중에는 그 면회가 그에겐 습관이라기보다 요구처럼 되어버려서 요즘은 혹시 그녀가 병이라도 나서 이삼 찾아가지 못하면 무척 그리워하게끔 되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축일마다 감옥 정문 옆이나 위병소에서 면회를 하는데 그가 4,5분 동안 그곳으로 불려 나왔다. 평일에는 그녀 자신의 일터로 찾아가고, 때로는 작업장, 때로는 벽돌 공장, 때로는 이르트이쉬 강변의 오두막집 같은 데서 만났다. 자기 자신에 대해 소냐는 시내에서 몇 사람 안면이 생기고 후원자까지 생겼으며, 자기는 양재 일을 하고 있는데 그곳엔 양재사라곤 거의 없기 때문에 여러 집에서 소중히 떠받드는 존재가 되었다고 알려왔다. 다만 그녀 덕택에 라스콜니코프가 장관의 보호를 받아 노역도 경감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끝으로 (두냐는 최근에 그녀에게서 받은 편지 몇 통에서 일종의 특별한 동요와 불안을 느끼기까지 했으나) 그가 모든 사람을 피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자신도 며칠씩이나 입을 다물고 있고 안색도 몹시 나빠져간다는 소식이 왔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에서, 소냐는 그가 중병에 걸려 감옥 병원에 누워 있다고 알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