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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刀)와 검(劍)
고대 부족국가 시대의 도·검은 자연자원인 목재, 석재, 또는 골재 등을 이용하였다.
이 시기를 석기시대로 구분한다. 이후 청동기 시대로 접어 들면서 점차 청동으로 도·검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청동기시대의 동검은 전술적 목적으로는 주로 찌르는 무기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청동제 동검의 날은 날카롭지 못하여 베는 용도로는 부족하였다.
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철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여 철제 대도를 만들었다.
철재 대도는 검날이 날카로워서 베기와 찌르기가 동시에 가능한 무기였다.
얼한 도·검들을 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로 구분하여서 살펴보자.
(1) 석기시대
석기시대에 사용되었던 마제석검으로는 유경석검과 유병검이 있다.
이러한 석검은 돌을 다듬어서 만들었다. 석검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검이다.
① 육경석검 자루가 없이 날 부분과 뿌리만 만들고 뿌리에 자루를 박아서 쓰던 석검
② 유병검 자루까지도 붙여서 모두 졸 하나로써 만들어 쓰던 석검 형태
(2)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에 이르러서는 청동으로 된 동검을 만들었다.
청동제 동검은 전투의 형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청동제 동검의 구조와 연마의 특성을 보면, 동검은 베기의 기능보다는 찌르기의 기능이
주 사용 방법일 것이다. 이는 동검의 날이 날카롭지 못하고, 끝이 뽀쪽한 점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청동제 동검은 비파형 동검과 세형동검으로 분류한다.
① 비파형동검
비파형 동검은 검신이 우리 민족의 악기의 하나인 비파처럼
날의 아래가 둥글게 생겼으므로 이름 지어진 것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비파형 동검의 원류를 요녕지방에서 찾게 된 연유로 요녕식 동검,
또는 만주식 동검이라고도 불리어진다.
② 세형동검
세형동검은 기원전 4∼3세기 경인 청동기새대에 만들어진
독특한 동검이다. 세형 동검은 서남 만주의 요녕식 동검에서 출발하여
기원전 3백년 경에 대동강 지구에서 만들어졌다. 세형 동검은 독특한 형태로
발전 또는 변화를 하였다. 동검의 특징으로는 첫번째가 검신 중앙 등대의
모가 에임에서 끝나고, 검첨 곧 칼끝이 짧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두번째는 모가 에임을 지나 검신 하단까지 내려와 칼끝이 길어진 형식으로
크게 구별할 수 있다. 전자를 고식, 후자를 식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세형동검은 그 분포가 남만주에서 서부 일본가지 넓게 펴져 있다.
그러나 동검의 중심지나 발생지가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한국식
동검이라 불리기도 하는 특수한 동검이다.
(3) 철기시대
철기시대에 접어 들어서는 철제 대도가 도·검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앞서 살펴 보았지만 청동제 동검은 찌르기 공격이 주 목적이었다.
이에 반해 철제 대도는 베기 공격에 알맞게 이루어졌다.
이는 철제 대도의 검날이 매우 날카로워서 가능하였다.
이로부터 도·검의 기능이 전환되었다.
철기시대부터 검법의 진행이 형태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곧 찌르기 기술과 베기 기술의 혼합으로 검법의 체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시대적으로 보면 고구려의 장백검법, 신라의 본국검법 등이 철기시대의 검법 형태를 보여준다.
철기시대에 주로 쓰이던 철제 대도는 소환두 대도
(검 손잡이 끝의 고리 안에 아무 것도 없는 형태의 대도)이다.
또 대도의 구분에 있어서 검의 길이로 단검과 장검을 나눈다.
대도의 검날은 거의 직선을 이루면서 끝부분으로 갈수록 밋밋하게 좁아 들었다.
검신의 전반적인 형태는 세형동검과 흡사하다.
대도의 검집은 나무로 만들었고, 검 손잡이 부분도 나무로 된 것을 유물로 볼 수 있다.
삼국의 도.검은 먼저 고구려가 북방 민족의 도.검 문화를 접하면서 고구려
특유의 문화로 발전시켰다.
이후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와의 교류를 통하여 이전의 도.검 문화에 새로운
고구려의 도검 문화를 흡수하여 그들 고유의 도검문화를 형성하였다.
(1) 고구려
고구려는 한반도의 북방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북방 민족과의 교류를 통하여
예술 양식과 세공기법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러한 것들을 자주적인 양식이나 기법으로 발전시켰다.
문화적인 자주의식은 고구려가 북방의 여타 민족과의 전쟁에서
이길수 있는 배경을 이루었다.
중국의 고서인 [한화고구려유]를 보면 "한반도 사람들은 도려를 차고
이로써 등위를 나타내었고, 금우로써 귀천을 밝혔다"고 하였다.
이는 검을 항상 패영하고, 검으로써 신분을 나타낼 수 있을 정도로 검이 널리
사영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철제 대도는 백제와 신라. 가야에까지 전하여져서 드디어 삼국시대는
철제 대도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철제대도는 다시 일본에까지 전하여져 일본 도.검의 원류를 이루었다.
일본의 옛 기록에서 보이는 맥검이나 고려양대도 등은 일본 도.검의 이름이
고구려의 환두대도와 검을 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백 제
백제는 육로를 통하여 고구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다.
또한 중국과느이 해상교역을 통해 중국의 예술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러한 문화의 유입을 바탕으로 백제는 고유의 문화를 재창출 하였다.
이후 백제는 삼국중 가장 정교한 문화를 자랑하였다.
백제의 도.검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이나 고구려의 도.검을 백제 고유의 것으로
발전시켰다.
기르고 나중에는 백제의 발전된 문물을 일본에 전하여 주기도 하였다.
국가적으로도 도부를 두어서 전문적으로 도.검을 다루는 장인의 육성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금속공예 기술이 발달하여 우수한 무기를 생산하였고, 장식품과 불상을
조각하기도 하였다.
백제의 뛰어난 세공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대도로는 용환두 대도가 있다.
이 대도는 소환두 대도와 삼엽환두 대도에 이어서 나타나는 형식이다.
이대도는국내에는 없고 일본에 몇 자루가 전한다.
대도의 고리 안에 용의 현상을 새겨넣은 것으로 세공기술의 앞선 문화를
보여주는 태도이다.
(3) 신 라
신라의 국가형태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고구려나 백제보다 늦게 이루어졌다.
신라는 내물왕 이후부터 고구려와 백제 문화를 접촉할 기회가 많아졌고,
그로부터 신라의 문화는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후 신라는 군사력 증강으로 중국과 집접적인 문화 교류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기존의 신라 고유의 문화와 융합되면서 하대의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들 고유의 웅장하면서 장엄한 문화적 색채를 보여준다.
신라시대의 고분 출토품에는 보검, 대도, 대자 등의 패도가 많다.
이러한 패도들에서는 다채롭고 풍부한 의장 요소를 찾아 볼 수가 있다.
이로 보아 이러한 패도류는 실제로 전쟁에서 쓰이는 무기와는 다른 기능을
가졌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의식이나 제례행사에 쓰이던 의장용 도.검이었다.
장식패도의 일종인 황금장단검의 장식법은 다채장식법에 속한다.
이 장식기법은 그리스, 로마, 이집트, 서아시아 등지에서 유행하였다.
그러므로 황금장단검이 가지는 의의는 신라와 중앙 아시아와의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증거품이라 하겠다.
신라에서 사용되었던 환두대도는 삼환두대도가 주류를 이루었다.
삼환두 대도의 일부는 일본에도 전하여졌다.
그 외에 용봉문 소환두대도가 있다. 이 대도는 고리 안에 용 또는 봉황의 머리를
입체 또는 맞새김으로 나타내었다.
이 대도의 기원은 중국 육조 때의 호족들이 시작한 것으로 전하여진다.
이 용봉 형태는 신분에 따른 검의 장식이었다.
곧 환두대도는 그 자루의 형태에 따라 신분서열을 나눌 수 있었다.
신분이 맨 아래인 소환두에서 삼엽환두, 그리고 최상급이 용봉환두로 여겨진다.
(4) 삼국시대 이후의 도.검
삼국시대 이후의 도.검은 이전의 철기문화가 계속 이어져 현대의 도.검 문화로까지
이어진다.
삼국시대의 철기문화가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화려한 장식을 위주로
발달하였다. 당시의 대표적인 장식검으로는 황금장단검이 있다.
황금장단검은 황금을 사용하여 장식하였다.
이후 고려의 도.검은 통일신라의 화려한 장식을 지양하고 질박한 장식을 위주로 하였다.
고려의 도.검은 이전의 시대보다 실용적이며, 힘찬 고려 무인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고려 무인의 정신은 생활의 검소함과 국가를 위한 헌신적 충성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무인 정신은 고려 중기의 삼별초 항전에서도 보여진다.
조선시대는 문신 위주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는 무인들 개개인의 단병기술이나 순사적 훈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유교적 덕목을 더욱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의 무인들은 예전의 무인정신이나 기백을 계승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조의 무인은 유교적인 무인정신이 강조되는 새로운 차원의 무인으로
변해갔다. 곡 조선시대의 유교적 무인들이다.
그러나 국가 정책에 있어서는 이러한 유교적 무인들도 천시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조선시대의 양반 계급사회)에서 도.검의 장인들 또는 고유의
장인정신이 없었고, 기능적인 무기 생산에 그쳐 전대의 뛰어난 세공기술을
전승받지 못하였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사회는 전반적인 변화를 겪었다.
그 중에서도 군제 개편을 가장 먼저 하였다. 도.검의 중요성도 널리 인식되어,
임진왜란 이후에도 도.검 문화의 중흥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곧이은 서양 총기문물
의 유입으로 도.검문화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조선은 중국,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우리 고유의 문화 자체를 읽어 버렸다
조선의 도.검도 가까스로 명맥만 유지한 채 이어졌다.
35년에 걸친 일제 통치 하에서 한반도에서 유구히 전래되어온 무인정신은 달절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곧바로 우리의 문화를 되찾기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다.
이후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어버린 우리 문화를 찾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 결과 전래 문화가 조금씩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 중에서 검술도 한 맥을 유지하면서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전의 검술을 완벽하게 복원한 형태는 아니지만, 앞으로의 전승.발전의 단초를 연 것이다
도와 검의 비교
도,검의 비교
도와 검은 서로 다릅니다.
칼 자체에도 서로다르게 분류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검사들은 굳이 도와 검에 대한 구분을 지으려 하였습니다.
약간 고루하지만 내용이 재미있고 옳바른 이해를 돕기위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벌써 외형상의 차이점을 간파하셨다구요? 잘 보셨습니다.
도는 단방향으로 날이선 칼을 지칭하고,
검은 양방향으로 날이선 검을 두고 이르는 말입니다.
참고로 도(검)법은 '+' 와 '×'을 중심끼리 맞춰놓으면 모든 검법
(베기,찌르기)의 공격과 방어방법이 90%정도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변화와 변화사이에 원형을 이루어지면 더욱 좋은
도(검)법이 이루어집니다.
물론, '+' 와 '×'를 포개어 만나는 중심점은 찌르기 공격을 의미합니다.
과거 동양의 검사들은 한사코 검은 하급의 칼로, 도는 상급의 칼로
구분지으려 하였습니다. 이유는 많습니다.
칼의 발전방향은 검에서 도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즉, 도도 처음에는 직도였지만 시대가 변할수록 곡도 (휘어진 칼)로
발전했고 지금 한국도,일본도와 같은 형태로의 완성을 실현하였습니다.
가장 살상력이 뛰어난 칼의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도에게 자리를 양보해준 검은 칼의 본래목적인
살상용이 아닌 주술용, 장식용, 과시용, 의례용으로 변질 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권의 상징이던 사인검 (인년,인월,인일,인시에 제작하는 검)만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중국의 경우, 검은 영혼을 죽일 수 있는 무기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즉, 도가 곡선과 단날을 지향한 이유는 같은 재료, 같은
가공(열처리)이라는 조건에서 검과 도로 만들어진다면, 도가 검보다
충격흡수력, 파워....면에서 앞서가기 때문입니다.
다시표현하면 수없는 세월의 흐름에따라 도가 검보다
기능적,실용적,파워적인 면에서 앞서간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인 체험적
깨달음 혹은 과학적인 인식을 얻었다는데에서 기인한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동양에서 도가 검보다 추앙받는 이유가 있다면,
동양인들이 서양보다 양날의 도에대한 우월성을 먼저 깨달은 까닭도
있겠지만 그보다 살생에 임하는 무사 혹은
검사들의 서양의 기사들관 달랐다는데에서 기인합니다.
즉, 동양에서 검은 살인의 미학을 앞세운 살육/도륙행위에 지나지 않는행위인반면,
도는 동일한 살상행위에 있어서도 상대에 대한 예와 사용상의 정통성을
존중하였습니다. 다시말하여,
동양에서 도는 살상행위에 있어서도 자비를 아끼지 않는 마음이 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동양의 무인들은 검을 휘두르면 칼부림에 지나지 않는
다고하여 천대하였고,도를 휘두르면 도법이라 칭하였습니다.
"검은 '양날'의 칼을 칭하고, 도는 '한날'의 칼을 칭한다."
그래서, 무술에서는 찌르기 위주의 공격이 주류를 이루고,
도법은 베기 위주의 공격기술이 주류를 이룬다."
도(刀).검(劍)의 종류
이글은 박종률님께서 저술하신 『우리검도의 원류 - 해동검도의 실제』(학민사, 1997)에서 발췌하였음을 밝힙니다
칼의 종류 및 명칭(기록상의 도.검)
도여(刀礪) : 숫돌과 칼
비수(匕首) : 칼집과 발자루의 크기가 거의 같으며, 날이 몹이 예리해 흉기로 사용한다.
단도(短刀) : 칼자루가 붙박이로 된 짧은 칼로, 주로 찌르는데 쓰인다. 길이 28cm이내의 발을 말한다.
도검(刀劍) : 칼과 검
도자(刀子) : 작은 칼
도필(刀筆) : 옛날 중국에서 종이가 발견되기 전 죽간에 문자를 기록하던 붓과 그 틀렴을 깎아 내리던 칼
검(劍) : 병기 내지는 살상용 칼로써 곡선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환도(環刀) : 패용에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칼집과 고리가 있는 칼
보졸일 경우 길이가 1척 6촌, 너비가 7푼
마병일 경우 길이가 1척 7치 3푼, 너비가 7푼
군도(軍刀) : 칼집은 어피(魚皮)로 싸고, 칠은 검은칠을 하고, 장식은 은(銀) 대신 황동을 사용하며, 홍조수아로써 드리우고 띠는 가죽으로 한다.
운검(雲劍) : 임금의 좌우에서 검을 잡고 호위하는 관원의 칼. 칼집은 어피로 싸고 칠은 주홍색을 사용하며, 장식은 백은(白銀)으로 하며, 홍조수아로써 드리우고 띠는 가죽으로 한다.
패검(佩劍) : 병기 내지 살상용 칼로써 우리말로 환도(環刀)라 한다.
난도(鸞刀) : 종묘(宗廟)에서 희생(犧牲:제물로 쓰는 산 짐승)을 베고 끊는 칼인데, 고리에 방울이 있고, 칼 끝에도 방울이 있다.
용광검(龍光劍) : 『단군고기』에 나오는 해모수가 찬 전설의 칼
삼인검(三寅劍) : 호랑이념 호랑이월 호랑이일에 맞추어 만든 칼
당상보검(黨上寶劍) : 당상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이상의 관직으로 국왕이 좌정하는 전상(殿上)에서 의장(儀仗)의 하나인 보검을 받들고 서는 당상관
쌍수도(雙手刀) : 자루 길이 1자 5치, 날의 길이 5자. 한쪽에만 날이 있고 칼 등쪽 으로 젖혀져 베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으며, 날의 자루쪽에 길이 1치의 구리로 된 호인(護刃)이 있다. 칼의 무게가 무거우므로 두 손으로 자루를 잡고 사용함. 이것을 사용하는 무예를 쌍수도라 한다.
예도(銳刀) : 본래 단도(短刀)라 일컬음. 환도 또는 검이라고도 한다. 쌍수도와 비슷한 모양으로 자루의 길이 1자, 날의 길이 3자 2치
왜검(倭劍) : 일본도라고도 함. 길이는 일정하지 않으며, 또한 크고 작은 두 칼을 함께 차고 쓰기도 하며, 모양은 쌍수도와 비슷함. 이것을 쓰는 무예를 왜검이라 한다.
월도(月刀) : 언월도(偃月刀)라고도 함. 자루 길이 6자 4치, 날의 길이 2자 8치. 날 등의 중간에 기인(岐刃)이 있고 그 끝에 술을 장식하였음. 이것을 쓰는 무예를 월도라 한다.
협도(狹刀) : 모양은 월도와 비슷하며 자루 길이 7자, 또 그것을 쓰는 무예를 협도라 한다.
날의 길이가 3자, 자루의 길이가 7자, 무게가 4근인 일종의 치도이다.
쌍검(雙劍) : 본래 자루의 길이 5치 5푼, 날의 길이 2자 5치이었으나 따로 만들지 않고 요도(腰刀) 가운데서 짧은 것을 택해서 쓴다. 이것을 양손에 하나씩 쥐고 쓰는 무예를 쌍검 이라고 한다.
제독검(提督劍) : 모양은 쌍수도와 비숫하며 날의 길일 3자 4치. 명나라 장국 이여송이 전하였다 고 한다. 이것을 쓰는 무예를 제독검이라고 부른다.
본국검(本國劍) : 모양은 쌍수도와 비슷하며 신라 때부터 전해온 우리나라의 칼. 속칭 신검 및 신라검이라 하며, 그 무예는 신라의 황창의 소전(所傳)이라고 한다.
마상쌍검(馬上雙劍) : 말을 타고 쓰는 쌍검. 모양은 쌍검과 같다.
마상월도(馬上月刀) : 마릉 타고 쓰는 월도. 모양은 월도와 같다.
언월도(偃月刀) : 이것은 도보(徒步)로 사용하는 것을 이른다. 언월도는 대도의 한가지로 날의 끝이 넓고 초승달과 같이 생겼으며, 칼들은 두 갈래가 지고 밑은 용의 아가리를 물리었으며, 자루는 붉은 칠을 하여 끝에 물미를 맞추었음. 언원도를 가지고 검술을 하는 보졸(步卒)을 월도수(月刀手)라 한다.
마상언월도(馬上偃月刀) : 언월도는 일본의 난도와 비슷한 무기로써 날의 길이가 2자 8치, 자루의 길이가 6자 4치이며, 월도라고도 한다.
패도(佩刀) : 천년 묵은 고검(古劍)이라야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고, 그 다음이 6~7백년 된 것이며, 근년에 만든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여긴다. 하루에 한번 단련하여 1백일이 되면 또 땅에 수년 동안 묻었다가 꺼내서 다시 단련하여 1백번의 단련을 거쳐야 천하의 이도(利刀)가 된다. 사람마다 장도(長刀) 하나를 지니는데 이것을 패도라 하녹, 패도 위에 또 소도 하나를 꽂아 잡용(雜用)에 편하기 하며, 또 길이가 한자 되는 자도(刺刀) 하나가 있는 이것을 해수도(解手刀)라하고, 길이가 한자 남짓한 것을 급발(急拔)이라 하는데, 역시 자도(刺刀)의 종류이다. 이 세가지는 늘 차고 다니는 것이다. 큰 것을 도(刀)라 하고 작은 것을 협협(脇狹)이라 한다.
칼집은 후박(厚朴)나무로 만들어 바볍고 연하여 칼이 녹슬지 않게 한다. 칼집에 붉은 칠이나 검은 칠을 하거나, 교초(상어가죽)로 둘러싸기도 한다. 상어는 하교, 매화교, 남교, 호표, 국악 따위 이름의 것이 있다. 표는 칼집 끝인데, 상어 가죽으로 말고 그 위에 끈을 감는다. 심은 칼코등이 이른바 환인데 금, 은, 철, 동, 진유(眞鍮:놋쇠)로 만들며, 철을 좋은 것으로 여긴다. 오래 묵은 것일수록 더욱 좋으며, 오래된 것은 매끄러운 검은색에 조금 붉은색을 띠었다. 두들겨 만든 것을 귀하겨 여기고, 부어 만든 것을 천하게 여긴다.
야도(野刀) : 기다란 칼이며, 미첨도(眉尖刀)라고도 하는데, 자루의 길이가 3~4자이다.
은장도(銀粧刀) : 나무로써 이것을 만든다. 그 칼집의 조각은 도금(鍍金)을 하는데 , 그 사이에 붉은 색, 녹생의 채색을 칠한다.
오늘날의 도.검
칠성검 : 칠성검은 조선조 중기에서 후기쪽에 가까운 검으로 궁궐 무관들이 주로 패용하고 있던 검이었다. 표면에는 7개의 별자리가 있는데, 6번째 별에는 특별한 생김새의 별을 새겼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칠성검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검을 제작.판매한다. 길이 94cm, 중량 1.4kg
한국도 : 한국도의 특징은 날끝이 예리하지 않아 모든 일을 과격하지 않고 신중히 처리하던 옛 선인들의 자비로움을 느끼게 해 준다. 한국도의 외형은 다른 것에 비해 화려하며 장식이 많아 해(害)하기보다는 평화를 추구하는 활인검이라 할 수 있다. 대/길이 101cm 중량 1.6kg, 소/길이 75cm 중량 1.4kg
사인검 : 사인검은 조선조 중기에 왕들이 장식용 또는 호신용으로 지녔던 검이었다. 여기서 사인(四寅)이란 12지간 중에 호랑이를 뜻하는 인(寅), 즉 네 마리의 호랑이를 뜻한다. 인해와 인달, 인날, 인시에 열처리한 것으로 60년만에 한 자루를 제작하는 진귀한 검인 것이다.
사인검의 표면에는 사인검을 설명하는 한자 27자가 순금으로 새겨져 있다. 이글은 사인검의 용맹스러움과, 사인검이 갖고 있는 영험한 신비를 알려주고 있다.
칼집은 어피(철갑상어 껍질)로 되어 있고, 손잡이는 동으로 되어 있으며, 순슴으로 사인금이라 상감되어 있다. 길이 94cm, 중량 1.4kg
화랑도 : 옛 무인들이 화랑오계(충.효.신.용.인)에 그 뜻을 두고 무예를 연마하며 사용하던 검이다. 손잡이 형태에는 수련 중 손에 땀이 차면 땀이 스며들고 미끄러지지 않도록 면으로 된 끈을 사용하여 견고하고 튼튼하게 묶어 수련하기에 편리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대/길이 101cm 중량 1.6kg, 소/길이75cm 중량 1.4kg
삼인검 : 삼인검은 조선조 중기에서 후기까지 이르는 장식용 검이었다. 삼인검은 사인검과 같이 왕족이 지녔던 것이다. 삼인검 역시 호랑이의 용맹스러움이 간직된 검이다. 그러나 왕족은 왕의 신분에 비할 수 없어 세 마리의 호랑이, 즉 인해와 인달, 인날에 제작되는 검이다. 삼인검도 사인검처럼 60년만에 만들어진다. 사인검은 인시의 2시간 동안에 한 자루가 만들어지지만, 삼인검은 인날에 통틀어 만들어진다. 길이 94cm, 중량 1.4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