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마이너가 (사)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와 함께 전국의 장애인야학에서 현재 진행 중인 의미 있는 수업이나 프로그램을 탐방 취재합니다. 장애인야학은 초기에 주로 학교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장애성인을 대상으로 검정고시 위주의 교육을 진행했지만, 최근 들어 장애성인 평생교육의 다양한 영역으로 그 범위를 확대해 나가고 있습니다. 비마이너는 총 8회 연재될 이번 기획 취재를 통해 장애인야학에서 진행되는 알찬 장애성인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_ 편집자 주 |
발달장애 아이를 둔 부모들은 자녀가 학령기에서 성인기로 들어서면 고민이 더 깊어진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부족하나마 낮 시간에 돌봐줄 사람을 찾지 않아도 되지만,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부터는 그나마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에게 대학 진학이나 취업의 길이 넓지 않은 상황에서 ‘학교 졸업’은 곧 가족에게 부담으로 다가오고, 결국엔 사회와 가족 모두로부터 방치되는 결과를 낳고 만다.
물론 일부는 장애인 보호작업장에서 일하기도 하지만 최저임금 적용도 못 받는 노동권의 사각지대인 경우가 허다하고, 주간보호센터는 넘쳐나는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주간보호센터를 이용하더라도 그야말로 낮 시간 ‘보호’ 기능만을 할 뿐 그 이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렇다 보니, 단순한 ‘보호’를 넘어선 발달장애인의 자립생활은 아득한 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조건에서도 보호작업장이나 주간보호센터와는 다른 형태로 발달장애인 자립의 삶을 실현해 보려는 이들이 있다. 바로 주거-직업-여가를 한데 묶은 ‘발달장애인 자립지원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대구 질라라비장애인야학이다.
발달장애인 자립생활 위한 새로운 실험
질라라비야학의 조민제 활동가는 보호작업장과 주간보호센터 등 기존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체계들이 “근본적으로 성인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구조”라고 문제를 지적했다. 성인 발달장애인의 욕구와 특성을 무시한 채 그저 ‘방치’하지 않는 수준에서만 발달장애인을 관리하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질라라비야학은 실질적으로 성인 발달장애인에게 필요한 것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모델을 고민했다.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주거·노동·여가의 3박자였다. 이 세 가지는 발달장애인 자립에서 가장 핵심적이기에 통합적으로 연계되어 지원돼야 한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 통계를 보면, 2012년 말 전체 장애인생활시설 거주자(약 3만 명) 중 40%에 가까운 1만 2천여 명이 지적장애인일 정도로 발달장애인에 대한 지역사회에서의 주거지원은 열악하다. 물론 이들에게 집만 제공한다고 끝이 아니다. 독립된 주거공간에서 일상생활을 혼자 꾸려갈 수 있도록 하는 훈련도 필수적으로 따라야 했다.
또한, 열악한 임금·근로조건을 강요하는 보호작업장 이외에는 발달장애인에게 적합한 직업형태가 제공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를 극복할 대안도 필요했다. 오랜 시간 집중해서 일하지 못하는 이들의 특성에 맞춰 짧은 시간 일을 하면서도 일한 만큼의 급여를 줄 수 있는 체계가 절실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하루의 일과시간을 다양한 여가, 문화, 친목활동 등으로 채워나갈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도 필요했다. 이를 통해 발달장애인 스스로 자신의 욕구를 인식하고 사회성을 향상토록 해야 했다.
이를 위해 질라라비장애인야학은 2009년부터 이 세 가지를 한데 묶은 발달장애인 자립지원사업을 지원할 것을 대구시에 요구했고, 마침내 2011년부터 예산지원을 받아 시범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 이 사업은 10여 명의 고3에서 20대 초반 성인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주말 2박 3일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즉 평일에는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고 주말에는 단기체험홈에 합숙하면서 독립된 주거공간에서 자립생활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카페·패스트푸드점·도서관 등에서 진행되는 직업전환 프로그램과 댄스스포츠·난타·자조모임 등 각종 문화여가 프로그램을 접목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2박 3일 체험프로그램으로는 실질적인 자립생활로의 전환이 힘들다는 판단 아래, 2013년부터는 체험홈 합숙 프로그램을 빼고 평일 오전 직업전환 프로그램과 오후 문화여가 프로그램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상시 체험홈은 대구시 측에 별도로 요구 중이다.
‘발달장애인의 노동’이라는 험난한 숙제를 풀기 위하여
이 사업의 핵심은 발달장애인의 하루 일상을 당사자의 욕구와 특성에 따라 새롭게 구성하는데 맞춰져 있다. 특히 이 사업에 참여하는 대부분 발달장애인은 비장애인에게 표준인 ‘하루 8시간 노동’을 버텨내기 힘들어한다. 또한 자기결정에 대한 훈련과 역량강화가 어릴 때부터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직무지도가 필요했다.
이 때문에 오전에 3시간 정도 일을 할 수 있는 근무지 확보와 발달장애인 참여자가 근무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조력해 줄 수 있는 직무지도원(Job Coach) 배치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어디서도 흔쾌히 발달장애인을 직원으로, 그것도 하루에 절반만 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구시에서는 예산만 지원해 줄 뿐, 적당한 직업전환 프로그램 현장을 물색하는 일은 고스란히 질라라비야학 활동가들의 몫이었다. 지역사회의 여러 자원, 그리고 인맥까지 동원해가며 어렵사리 근무지를 섭외해도 중간 관리자 한 명만 바뀌어도 바로 취소되기 일쑤였다.
그래도 활동가들의 오랜 노력 끝에 공공도서관 서가 정리, LH공사가 분양해주는 텃밭에서의 도시 농부, 대구 지하철 청소 업무 등의 직업전환 프로그램을 진행할 현장을 확보해냈다. 특히 지하철 청소 업무를 직업전환 프로그램 현장으로 따내기 위해 대구도시철도공사 사장실을 직접 찾아가 강하게 건의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조민제 활동가는 “발달장애인의 직업전환은 일반 노동시장에서의 경쟁에 맡길 게 아니라 공공부문이 책임을 지고 해 나가야 할 부분”이라며 “공기업인 대구도시철도공사가 이런 부분에 대한 책임성을 인식해 줄 것을 요청했고, 수차례 설득 끝에 공사 측도 이를 수용해 별다른 마찰 없이 합의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직무지도원 배치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질라라비야학 황보경 활동가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서 운영하는 양성과정을 참고해 직무지도원을 양성했지만, 초기엔 대부분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 식으로 해서 갑작스레 결근하는 등 사고가 잦았다”라면서 “이후에는 장애인 활동보조인 경험이 있는 인력들을 집중적으로 직무지도원으로 양성해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현재 이 직업전환 프로그램은 대구 동구청에서 지원하는 ‘복지 일자리’ 사업으로 발달장애인 참여자에게 인건비를 지급하고 있는데, 질라라비야학은 향후 이를 공공고용제로 발전시킬 계획을 마련해 대구시와 협의를 추진하고 있다. 공공고용제란 비영리민간단체에서 장애인 고용을 확대하고 국가가 인건비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장애인 고용을 사회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장애인야학이 발달장애인의 ‘주거-노동-여가’를 고민하는 이유는?
여기까지 기사를 읽은 독자들은 다소 의아할 것이다. 교육을 해야 하는 장애인‘야학’이 왜 복지관이나 장애인자립생활센터처럼 발달장애인의 ‘주거-노동-여가’와 관련된 사업을 하는지. 하지만 여기에는 장애인야학들의 오랜 고민이 녹아있다.
학령기 교육을 받지 못한 지체장애인을 중심으로 출발했던 전국의 장애인야학에 어느 때부터인가 학교에서 정규 특수교육을 다 받은 발달장애인들도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받은 교육만으로는 일반 성인 수준의 학업 성취를 이루지 못한 점도 있지만, 당장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갈 곳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장애인야학을 찾아온 이들을 외면할 수 없어 한 명 두 명, 발달장애인 학생을 받기는 했지만, 기존의 지체장애인과는 전혀 다른 특성과 욕구를 지닌 이들과 어떻게 수업을 함께해 나갈지 장애인야학으로서는 큰 고민을 안게 되었다. 한 때 질라라비야학에서는 지적장애가 있는 학생이 학생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이들과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듯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들에게 온전한 교육적 지원을 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이 때문에 질라라비야학 활동가들은 단지 수업을 함께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성인 발달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고민의 결과, 지금은 질라라비야학과 만난 발달장애 학생 11명이 텃밭과 지하철, 도서관 등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함께 모여 난타, 댄스스포츠, 합창 등을 하며 하루하루 알찬 자기 일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들 11명의 참여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립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하는 소위 ‘중증 발달장애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질라라비야학 활동가들의 노력과 지역사회의 뒷받침 속에서 자립을 향한 소중한 한 발을 내디뎠다. 이들이 장애인야학과 함께 내디딜 두 번째, 세 번째 자립생활을 향한 발걸음이 사뭇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