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걸 영화로 만든 ‘와일드’는 당연하지만 새삼 놀라운 사실 하나를 보여준다. 영화라고 하는 것이 원래, 단 두 줄이 뿜어내는 상상력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은 원작을 기반으로 한 시나리오의 탁월함이고 또 그것을 스크린으로 펼쳐보일 수 있는 연출력의 수준일 것이다. 앞의 임무는 현대 영국 작가 가운데 가장 촉망받는 이 중 한 명인 닉 혼비가 맡았으며, 뒤의 일은 언제부터인가 혜성처럼 나타나 전 세계 영화계를 흔들고 있는 장 마크 발레가 해냈다.
영화는 주인공 셰릴(리즈 위더스푼)이 난 코스로 유명한 PCT(the Pacific Crest Trail·미국 캘리포니아 주 멕시코 국경에서 시작해 캐나다 국경 너머까지 아홉 개의 산맥을 따라 펼쳐지는 도보여행 길)를 도보로 여행하는 얘기다. 모하비 사막을 지나야 하고, 킹스 캐니언 국립공원을 거쳐 타흐 레이크 등 서너 개의 호수를 돌아가야 하며, 워싱턴 산·제퍼슨 산 등 넘어야 할 산은 끝없이 많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하는 곳이 ‘신들의 다리(the Bridge of Gods)’다. 정확하게는 4285Km의 거리다. 부산을 왕복으로 5번 왔다 갔다 하는 거리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영화가 무슨 인간승리나 자연 다큐의 분위기일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걷는 것이 주요한 모티프지만 영화는 셰릴의 끊임없는 독백과 자기 고백 그리고 과거의 기억으로 향하는 플래쉬 백으로 구성돼 있다. 왜 그녀는 걷는가. 그녀로 하여금 죽을 힘을 다해 걷게 만든 일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가. 자칫 죽을지도 모르는 이 길 한가운데로 누가 그녀를 밀어 넣었는가.
그녀가 PCT로의 여행을 결심한 것은 다름 아닌 ‘대지의 복원’, 곧 ‘내면으로라도 어머니를 되찾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다. 온갖 군데가 부르트고, 까지고, 발톱이 빠져도 그녀는 그 길 바닥 한가운데에 있어야만 어머니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걷고 또 걸으며 셰릴은 생각하고, 기억하고, 후회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울고, 웃는다.
그런 것이다. 삶은 야생(와일드)의 강과 들판처럼 늘 굽이와 변화가 많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 한 피리어드(period)를 살 뿐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그 피리어드가 좋을 때와 힘들 때에 다양하게 걸쳐 있는 경우다. 사람들은 그렇게 희로애락을 겪으며 결국 삶을 통찰해 내게 된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그 피리어드가 어느 한 지점에 콕 박혀 있는 경우다. 그런 사람의 눈은 우물 안 개구리의 그것과 다름이 없어진다.
인생을 살다 보면 한두 번쯤은 길을 잃게 마련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꾸 길 밖으로 나가려 한다. 길을 잃으면, 그 길 안에서 다시 길을 찾아야 한다. 길을 벗어난들, 거기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셰릴은 늘 혼자 말로 되뇐다. 난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미 구원을 한번 받은 상태여서 더 이상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닐까. 영화는 그 구원의 의미에 대해서, 그래서 거꾸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새삼 성찰하게 만든다.
셰릴이 마지막 도착지인 ‘신들의 다리’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이 드라마틱하거나 요란하지 않아서 좋았다. 삶에 있어 진실의 순간은 늘 그렇게 평면적인 것이므로.
주인공 역을 맡은 리즈 위더스푼은 2월에 있을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있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수상을 하게 될까? 그것 역시 충분한 자격이 있어 보인다. 22일 개봉.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anmail.net 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