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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저편의 땅 운남(雲南)을 추억하며
새해 1월 3일(수요일) 5박6일의 여정에 맞추어 중국의 서쪽 끝 운남(雲南)으로 떠나기 위해 19명의 회원들이 오전 10시 경 속속 대구공항으로 집결하였다. 그 중 몇 분(차한근 선생님 사모이신 임계향 님, 조인숙 선생님 지인이신 거창의 김정덕 님과 부산의 이민경 님, 그리고 숲과 문화반의 박건애 님과 박명희 님)은 당시반 회원이 아니기에 초면인지라 서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출발 전의 설레고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며 12시 발 동방항공 5054 항편에 몸을 싣고 상해 푸동공항[浦東空港]으로 날아갔다. 상해 도착 시각은 현지 시각 오후 2시 30분. 상해는 요 며칠 내내 비가 내렸고 우리가 도착했을 때도 약간의 한기를 느낄 정도의 쌀쌀한 날씨에 겨울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여행의 목적지인 운남성의 성회(省會) 곤명(昆明)으로 떠나는 항편이 저녁 9시가 조금 넘는 시각에 맞춰진 터라 대여섯 시간의 여유가 생겨 상해 현지 가이드의 인솔 하에 2층 관광버스를 타고 곧장 상해박물관으로 향했다.
[상해 푸동공항에서 상해박물관으로 가기 위해 탄 2층 관광버스. 오른편에 서 있는 상해 현지 가이드 뿐 만 아니라 곤명의 가이드와 여강의 가이드까지 모두‘唐詩班’이라 적힌 피켓을 준비하여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상해박물관은 AAAA級 景點으로 상해 중심가인 황포구(黃浦區)에 위치하며 1993년에 시공하여 3년 만에 완공되었다. 원형의 지붕 위에 아치 모양의 활선을 추가하여 전체 건물이 중국의 고대 청동기 그릇 모양과 흡사하며, 11개의 전문전시실을 갖추고 청동기와 도자기 및 역대 서화가 소장되어 있다. 청동기는 주로 강남의 몇몇 수집가의 일부 소장품과 1930년대 이후에 발견한 것으로 대극정(大克鼎)·혼원이기(渾源彝器)의 정화희준(精華犧尊) 등이 유명하다. 도자기는 강남의 진품 자기가 대부분이며 특히 서화는 강남의 서화가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 외에 화폐와 옥기 등의 옛 물건들도 다수 전시되어 있다. 대략 한 시간 반 남짓 주어진 자유 시간 동안 각자의 취향에 맞는 유물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는 역대회화관과 역대인장관(歴代印章館) 그리고 역대서법관이 있는 3층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상해박물관의 1층 로비. 상해박물관은 원래 160元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으나, 2015년 후반 중국 인민들에게 조상이 남긴 우수한 문화유산만큼은 입장료의 부담 없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전국의 모든 박물관에 대해 무료 관람이 전격적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행정시책들은 우리도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삼삼오오 우산을 쓴 채 비좁은 골목길을 뚫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 예원(豫園)으로 향했다. 예원을 조성한 만든 사람은 명나라 때의 고관 반윤단(潘允端)으로, 그의 아버지 반은(潘恩)을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예원은 ‘愉悅老親’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는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린다’는 뜻이다. 이후 여러 번 주인이 바뀌는 부침을 겪으면서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으며, 현재의 모습은 중국정부의 복원작업으로 새롭게 다듬어진 것으로 1961년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많은 양의 비는 아니지만 계속 조금씩 내리는데다 날도 점점 저물어 어둑어둑해지고 또 홍치아오공항[虹橋空港]까지 가야할 시간이 빠듯하여 개별적으로 30분 남짓 자유 시간이 허용되었기에, 예원에 들어가서 관람하지는 못하고 그저 광장 중심가 주위에 밀집해 있는 상가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예원 입구의 광장 중심가에 조성된 각양각색의 상점들. 왼편에 만두집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하늘에는 비구름이 잔뜩 끼인데다 날씨마저 쌀쌀하여 그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손은경 반장이 대표로 예쁜 옷을 사서 입고는 서둘러 버스에 올라 국내선 전용 공항인 홍치아오공항으로 이동하였다. 밤 11시에 동방항공 국내선에 몸을 싣고 사계절 봄의 도시인 곤명으로 날아갔다. 곤명공항에 도착하니 새벽 3시가 조금 넘었다. 숙소는 시내에 위치한 5성급의 ‘昆明陽光酒店’. 내일 투어 일정과 관련한 곤명 현지 가이드와의 시간조율이 여의치 않아 6시에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하고 7시 30분에 석림(石林) 투어를 시작하기로 하였기에 잘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세 시간 남짓. 이렇게 좋은 시설의 호텔에서 겨우 세 시간밖에 잘 수 없는데다 수면 부족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다음날의 여행 스케줄을 제대로 소화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까지 보태지니 내내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아침을 먹고 7시 반경에 2시간 반 거리의 석림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일행은 대부분 전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기에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였지만 화창하게 갠 하늘의 맑은 공기를 위안삼아 사진으로만 보았던 ‘돌 숲’의 웅장한 자태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표정만큼은 그런대로 밝아 보였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조인숙 선생님께서 마이크를 잡고 돌아가며 간단하게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작년 봄 강소성 양주(揚州) 여행 시 공히 당시반의 대표 가수임을 인정받았던 김성희 선생께서 예의 낭랑한 목소리로 한 곡조 뽑자 차안 분위기도 사뭇 화기애애해진 것 같았다. 드디어 석림(石林) 도착.
석림은 운남성 곤명시에서 120㎞ 거리의 석림이족자치현(石林彝族自治縣)에 있는 기암괴석과 특이한 봉우리, 거대한 돌기둥이 우뚝 솟아 숲을 이루고 있는 카르스트 지형으로 이루어진 국가급풍경명승구이다. 서쪽의 보초산(步哨山), 중앙의 대석림(大石林)과 소석림(小石林), 남쪽의 만년영지(萬年靈芝), 동쪽의 이자원정(李子園箐) 등 5개의 경구(景區)로 이루어졌으며, 2004년 UNESCO에 의해 세계지질공원(Geological Park), 2007년 5월 국가 66개 AAAAA級 여유경구(旅游景區)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상쾌한 공기를 맘껏 마시고 밝게 내리 비치는 햇살을 온몸으로 껴안은 채 깨끗하게 정비된 호수와 대로를 따라 대석림으로 들어갔다. 아득히 먼 옛날 바다 밑에서 융기한 바위들이 수 만년의 긴 세월 동안 비바람을 맞으며 빚어진 돌 숲의 壯觀!
[‘石林’이라 새겨진 표지석 앞에서.‘石林’두 글자 밑에 초록색으로‘天造奇觀’(자연이 빚어낸 기이한 장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네 글자야말로 石林의 진면목을 제대로 표현한 듯.]
[대석림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육각정에서 올려다보는 일행을 향해 한 컷. 지난밤 부족한 수면에도 불구하고 모두 화사한 표정을 연출해낼 수 있었던 것은 맑은 공기와 멋진 돌 숲의 풍광 때문인 듯.]
미로와도 같은 돌 숲 사이를 이리저리 비집고 다니다가 부근 일대의 돌 숲 전체 모습을 두루 조망할 수 있는 육각정에 오르자 일행은 연신 감탄사를 토해내며 어디로 눈길을 주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도심의 일상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자연의 조화로움이 펼쳐내는 환상적인 풍광에 순간적으로 오감이 멈추는 듯 무아의 경지에 빠져드는 느낌을 체험할 수 있었다.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대석림을 뒤로 한 채 두 대의 전동차에 나누어 타고 아기자기하게 꾸민 평원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소석림으로 이동하였다. 소석림은 대석림에 비해서 크기는 약 5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볼거리는 대석림에 못지않다. 소석림은 ‘생태석림’으로도 불릴 정도로 그 주변에 진귀한 고목과 식물들이 다양하게 자라는데, 특히 돌 사이를 비집고 나온 뿌리와 오랜 세월이 만들어낸 구불구불한 덩굴이 볼 만한 수령 천년의 홍두삼(紅豆杉, 주목의 일종)이 유명하다고 한다.
소석림 안에는 이족(彝族)의 한 갈래인 사니인[撒尼人]의 선남선녀 아헤이[阿黑]와 아스마[阿詩瑪]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담긴 ‘아스마석[阿詩瑪石]’이 있다. 아스마가 비록 돌기둥으로 변했지만 그녀의 자태와 아름다움이 그대로 아스마석에 나타나는 까닭에 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명소가 되었지만 우리 일행이 이번 여행에서 이곳을 놓치고 못 본 것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스마의 전설을 소재로 지은 이족의 장편 서사시 <아스마>는 중국은 물론 외국에서도 주목받고 있으며, 이미 10여 개의 외국어로도 역될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나다.
[소석림에서 최고의 포토존. 이 사진은 중국인 사진사가 우리의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찍고는 현장에서 즉석으로 인화하여 한 장에 20元을 받고 판매하였다. 일행 중 몇 분이 사진을 구입하였지만 그 사진사가 팔고 남은 사진을 몇 장 들고 있기에, 슬쩍 옆으로 가서 우리가 떠나고 나면 그 사진은 아무런 효용 가치가 없으니 그냥 나에게 넘겨주면 안되겠느냐고 물어보니“그렇게는 할 수 없다”(不要)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런 풍속도는 여행 내내 이어졌으니, 중국인의 상술은 과히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석림 관광을 마치고 오후 일정으로 잡힌 구향동굴(九鄕洞窟)로의 이동을 위해 석림 풍경구 안에 있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로 약 1시간 반 거리의 구향으로 이동하였다. 부족한 잠에다 점심까지 먹은 뒤라 모두 차안에서 잠을 자며 잠시나마 노곤함을 달랠 수 있었다. 구향동굴은 곤명시에서 대략 9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중국 3대 종유굴의 하나로 유명하다.
[구향동굴풍경구 입구에서.‘九鄕’은 곤명시 동쪽 의량현(宜良縣) 경내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아홉 개의 부족이 하나의 마을을 형성한 곳이라고 한다.]
구향동굴은 1984년에 발견되었고 1994년에 국가지정 풍경명승구로 지정되었으며, 총 66개의 동굴 중 일부만 관광객에게 공개하고 있으며 관람객을 압도하는 웅장한 카르스트 지형이 매력적이다. 동굴은 협곡 구간, 동굴 구간, 로프웨이 구간으로 나뉘는데, 1km의 협곡 구간은 음취협(蔭翠峽)이라고 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이동한 뒤 배를 이용하여 구경하는 코스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지금은 배를 이용할 수 없는 기간이라 하여 부득이 걸어서 협곡 구간과 동굴 구간을 볼 수밖에 없었다. 동굴 구간 안에는 석순과 종유석이 가득하며 곳곳에 화려한 색채의 조명으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세찬 수압으로 높이 30m에서 떨어져 내리는 자웅폭포(雌雄瀑布)와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계단식 논 모양의 신전(神田)은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낼 정도였다.
[동굴 안을 관람하기 위해 수 없이 많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니 보니 모두 다리에 힘이 다 빠졌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동굴의 출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 지역 소수민족인 이족이 공연하는 동굴 공연장인 이가채(彝家寨)에는 몇 명의 가마꾼이 다리에 힘이 빠진 여행객을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었다.]
[소규모의 동굴 음악회가 열렸다는 웅사대청(雄獅大廳). 왼편의 커피점에서 몇 잔의 커피를 사서 나눠 마셨는데 의외로 맛이 괜찮았다.]
[약 1시간 정도의 동굴 탐사 후 지친 발걸음을 달래기 위해 리프트를 타고 다시 동굴 입구로 이동하는 중.]
구향동굴 투어를 마지막으로 둘째 날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다시 2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곤명으로 이동하였다. 온 종일 발품으로 하루를 보낸 힘든 일정이였는데다 또 밤 열차를 타고 다음 행선지인 대리(大理)로 이동해야하기에 우선 곤명 역사(驛舍)에서 가까운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열차에 오르기 전 발마사지를 받기로 하였다. 남자들 방에서 종사하는 여성 마사지사와 몇 마디 얘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중국이 참으로 많이 변화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으니,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의 세 여성 중 두 사람은 두 명의 자녀를, 그리고 한 사람은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고 하여 적잖이 놀랐다. 그들 모두가 한족이기도 하거니와 곤명 또한 한 성의 성회(省會; 우리의 행정구역으로는 도청소재지에 해당)이기에, 도시에 살고 있는 한족의 ‘한 가구 한 자녀 정책’도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나름 정성을 다한 발마사지였기에 모두들 만족해하며 밤 열차를 타기위해 발걸음을 재촉하여 곤명역으로 달려갔다. 생각보다 그리 분비지 않은 역사 안에서 한참 동안 줄을 써서 객차 안으로 들어갔는데, 예상한 것보다는 차간(車間)이 비좁을 뿐 아니라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아 고생을 좀 각오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4인실의 침대열차[軟臥]로 아래 두 칸은 두 분 선생님께서 주무시고 위 칸의 왼편이 내가 누울 공간이었는데, 맞은편에는 젊은 중국 청년이 이미 자리를 잡고 비스듬히 누워서 휴대폰의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이미 11시가 넘은 시각이라 불을 좀 껐으면 좋겠는데 이 청년은 도무지 잠잘 생각은 하지 않고 내내 불을 켜둔 채 휴대폰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소등을 좀 했으면 좋겠다고 한 마디 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냥 내가 안대를 하고 자야겠다고 마음먹고 가방에서 안대를 꺼내 쓰려고 하니 그제야 이 친구가 눈치를 채고는 휴대폰을 끄고 불을 꺼주었다. 속으로 그래도 개념은 있는 젊은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잠을 청하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젊은이는 눕자마자 바로 코를 골기 시작하는데, 차라리 불 켜고 휴대폰이나 계속 보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가뜩이나 코고는 소리에 잠을 잘 수 없는데다 무슨 열차가 이리 자주 경적을 울리는지. 게다가 또 얼마나 느리게 가는지. 역이란 역은 죄다 정차하고 몸이 흔들거릴 정도로 덜컥거리기까지 하고. 복합적인 고통 속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 못 이루다 머리맡의 휴대폰을 보니 어느덧 새벽 4시. 조금 지나자 누군가가 밖에서 큰 소리로 곧 대리에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고 깨우기에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내릴 준비를 하였다. 비좁은 통로에서 하차 준비를 하는 일행들의 표정을 슬쩍슬쩍 훔쳐보니 모두들 힘든 밤을 보낸 것 같아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열차에서 내려 대리의 싸늘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버스에 올라 미리 정해둔 호텔로 향하였다. 이 호텔은 잠시 스쳐지나가는 여사(旅舍)! 이곳에서는 그저 아침 식사만 하고 바로 대리 투어를 시작해야 하였기에, 화장실을 사용하고 세수며 머리 감는 일은 고스란히 호텔의 일층 로비에 있는 공용 화장실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지만 참으로 일행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아침 식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해준 대리의 호텔. 우리 일행을 위해서 1시간 정도 일찍 조식을 준비해주는가 하면 따뜻하게 담소할 수 있는 장소도 제공해주었기에 비록 투숙은 못했지만 무척 고마운 호텔로 기억될 듯하다.]
비교적 넉넉한 아침 식사 시간을 가지고 나서 곧바로 버스를 타고 여행의 셋째 날이자 대리에서의 첫 코스인 숭성사(崇聖寺) 삼탑(三塔)으로 향하였다. 30분 후 주차장에 도착하니 거대한 대찰(大刹)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눈 내린 창산(蒼山)이 잔월(殘月)을 떠받든 채 아침 햇살을 받아 신비로운 형상을 자아내었다. 전동차를 타고 위쪽에 위치한 숭성사 본절부터 구경하고 다시 내려오는 길에 삼탑을 보기로 하였다. 숭성사는 남조국(南詔國)의 7대 소성왕(昭成王: 재위 823∼859)이 창건한 사찰로서 큰 규모와 삼탑으로 불리는 초대형 석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후 남조국과 대리국(大理國)의 왕가 사원으로 사용되어 총 9명의 대리국 왕이 이곳에서 출가하여 수행하였다고 한다.
[숭성사의 본당인 대웅보전(大雄寶殿) 앞에서. 눈 덮인 창산(蒼山)과 대웅보전의 지붕 위에 걸린 잔월(殘月)의 형상이 웅장한 건물과 어우러져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있다.]
사찰 중앙에 69.13m의 사각 13층탑을 세우고 차례로 42m 높이의 팔각 10층탑을 2개 더 세웠으니, 이것이 유명한 숭성사 삼탑이다. 과거에는 정사각형 모양의 사원으로 한 변의 길이가 약 3km이고 약 11,400존의 불상과 약 890칸의 건축물이 들어서 있었으나, 전쟁과 자연재해 등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이후 사원 터에 삼탑만 남아 있던 것을 1983년 사찰만 더하여 복원하였는데, 운남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티베트불교와 중원불교를 혼합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약 1km 떨어진 곳에 ‘삼탑도영공원(三塔倒影公園)’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일몰 무렵이면 작은 호수에 삼탑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세 개의 흰색 탑은 대리시 어디에서나 잘 보이며, 맑은 날에는 도시를 둘러싼 창산과 3개 탑·흰 구름이 얼하이호[洱海]에 비쳐 장관을 이룬다.
[숭성사 삼탑을 배경으로 하여. 중앙의 4각 13층탑과 왼편의 8각 10층탑은 선명하게 보이나 오른편의 10층탑은 탑첨만 살짝 보인다. 눈 덮인 창산(점창산(點蒼山)으로도 불리며 대리석이 많이 나는 곳으로 유명함)과 희미하게 보이는 잔월이 푸른빛의 나무색과 더없는 조화를 이룬다.]
아침 햇살에 아름답게 비친 숭성사 삼탑을 뒤로 한 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대리의 또 하나의 명승 ‘얼하이호[洱海]’로 이동하였다. 얼하이호는 면적 249㎢, 길이 40km, 동서 평균넓이 7∼8km, 호수면 해발 1,973m, 최대수심 20.7m의 운남성에서 두 번째로 큰 인공호수로서, 창산 동쪽 기슭의 해발고도 약 2,000m 지점에 있다. 옛 명칭은 엽유택(葉楡澤)이며, ‘洱海’는 모양이 귀를 닮았다고 하여 그렇게 명명하였다. 얼하이호는 중국의 55개의 소수민족 중 백족(白族)의 본거지로서, 전국시대 이후 남조국과 대리국의 국도인 대리를 품고 있다. 드넓은 얼하이호의 수면을 가르는 유람선에 몸을 싣고 시원한 바람을 맞기에는 30분이면 충분하였다.
[얼하이호의 수면을 가르는 유람선 난간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비슷한 시각임에도 창산의 서편은 눈으로 덮여 있는 데 반해 동편은 그저 푸른색의 나무들로 빼곡한 게 신기하기만 하다.]
[얼하이호의 유람선을 타기 위해 선창으로 들어가는 상점가에서 무척이나 순박하게 보이는 노파의 강권에 못 이겨 김성희 선생께서 4元을 주고 산 생화로 만든 화환. 돌아가면서 한 번씩 써보고는 모두들 파인대소. 4元이 400元 이상의 웃음을 선사하였다.]
오후의 대리고성(大理古城)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고성으로 들어가는 도중 이 지역의 중심 소수민족인 백족(白族)이 공연하는 ‘대리삼도차쇼(大理三道茶Show)’를 관람하기 위해 별로 크지 않은 주택 형태의 공연장에 들렀다. 심도차는 대리의 명물로서, 백족의 대표적 음식문화 중 하나이다. 인생의 세 가지 맛―쓴 맛, 단 맛, 복합적인 맛―을 담아 늘 삶의 진리를 음미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먼저 나이 지긋한 남녀 두 분이 여행객을 환영한다는 내용을 마치 ‘상성(相聲)’―우리의 만담과 비슷한 형태―과 유사한 형식으로 신명나게 연출한 다음 세 종류의 차를 내어 대접하기 때문에 이를 삼도차라고 한다. 그러고 나서 대여섯 명의 젊은 백족 남녀가 차례로 나와 그들의 전통춤을 보여주는데, 춤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반복적인 손동작 위주의 율동이었다. 이러한 형태의 공연이 그들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낮선 이국의 여행객들에게 무슨 감흥을 줄 수 있겠으며 경쟁력 또한 얼마나 있을까하는 생각에 잠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삼도차쇼는 백족이 그들 문화에 스며들어 있는 일정한 스토리를 춤으로 표현한 공연으로, 어깨를 흔들거나 가벼운 율동을 반복하는 정도였다.]
공연을 보고 난 뒤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은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대리의 ‘옛 마을[古城]’로 입성하였다. 대리고성은 엽유성(葉楡城)·자금성(紫禁城)·중화진(中和鎭) 등으로도 불리며, 동쪽으로 얼하이호, 서쪽으로 창산과 접해 있으며 성 밖으로는 호성하(護城河)가 흐르고 성 안으로는 동서남북으로 길게 길이 뻗어 있다. 마을 길이는 대략 6km이며 예로부터 중국 서쪽지역 상업무역교류의 중심이 되었다. 송나라 때 대리국이 이곳을 도읍지로 삼아 성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는데, 도시 전체가 성으로 둘러싸인 형태였지만 지금은 성벽의 일부와 남문·북문이 남아 있고 남문에는 중국 신시기 저명한 학자이자 소설가인 곽말약(郭沫若: 1892∼1978)이 쓴 ‘大理’라는 두 글자가 돌에 새겨져 있다. 가이드가 남문에서 약 1시간 반의 자유 시간을 주고는 북쪽 끝까지 형성된 상점을 구경하며 필요한 물건을 사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로 이곳의 물건보다는 내일 가게 될 ‘여강고성(麗江古城)’의 상점에서 파는 물건이 더 좋다고 하면서 굳이 여기에서 살 필요는 없다고 아리송하게 말을 하였다.
[대리고성의 남문. 위쪽에‘문헌명방(文獻名邦)’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 글씨는 청나라 강희 연간에 운남제독(雲南提督)을 지낸 편도(偏圖)가 쓴 글씨이다.‘文’은 ‘전적(典籍)’즉‘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문헌’을, 獻’은 ‘명망이 높은 인물’을 가리키며, ‘名邦’은 ‘이름난 지역’을 의미한다. 이 사진은 정호선 선생님께서 찍었다.]
일행 몇 분과 여유롭게 남문에서 출발하여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에 몸을 맡긴 채 양쪽으로 조성된 상점을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백족의 전통 염색 기법인 짜란[扎染]으로 만든 천을 흥정해보기도 하고, 길 한복판에서 예쁘게 단장한 아가씨가 걸친 망토 비슷한 옷을 사기도 하고, 또 시원한 사탕수수즙을 사서 마시기도 하면서 그렇게 대리고성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지난 이틀간의 수면부족을 보충할 요량으로 조금이라도 일찍 여강에 도착하여 이른 저녁을 먹고 바로 숙소에 몸을 눕히기 위해 오후 4시 즈음 버스에 몸을 맡긴 채 약 2시간 반을 이동하여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인 여강에 도착하였다. 여행 내내 조금은 느끼한 맛의 중국 현지식을 먹었기에 이 날 저녁 메뉴는 한국식당에 가서 삼겹살과 된장국을 먹기로 하였다. 고기를 싸는 상추가 엄청 큰 것 말고는 삼겹살도 맛있고 김치된장국도 한국에서 먹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 넉넉하게 배를 채운 후 곧바로 숙소인 ‘麗江開元曼居酒店(여강뉴센추리호텔)’으로 투숙하였다. 현지 시각 8시 30분. 내일의 일정은 비교적 여유가 있으니 아침 8시 30분에 옥룡설산으로 출발할 준비를 하라는 가이드의 반가운 말에 적어도 10시간은 잘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여강에서 이틀간 묵게 될 숙소인‘麗江開元曼居酒店(여강뉴센추리호텔)’ 1층 로비에 설치된 말 형상의 조형물 앞의 차탁(茶桌)에 앉아. 이 호텔은 2017년 5월에 오픈한 신축 건물로, 절강성 항주(杭州)에 본사를 둔 뉴센추리호텔그룹 계열의 최신식 호텔이다.]
정신없이 단잠을 잔 후 좀 일찍 일어나 호텔 6층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창밖으로 옥룡설산을 바라보며 맛있는 아침을 먹고는 버스로 30여 분 거리의 첫 코스인 옥룡설산으로 향하였다.
[창문 밖으로 또렷하게 옥룡설산에 보이는 호텔 6층의 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며. 이날 아침 옥룡설산으로 가기 위해 짐을 방에 그대로 둔 채 침대 머리맡에 小費[팁]로 인민폐 10元을 두고 나왔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저녁에 방으로 돌아와 보니 복무원(服務員)이 침대 머리맡에 작은 종이에 직접 볼펜으로 “謝謝您! 祝您旅游愉快!”(고맙습니다. 즐거운 여행되세요!)라고 적은 메모를 남겨 두었다. 지금껏 적잖이 중국을 여행하면서 10元의 팁에 이렇게 감사의 메모를 남긴 복무원은 없었다. 10元의 행복감이 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녹여주는 듯했다.]
옥룡설산은 운남성 여강시 옥룡나시족자치현[玉龍納西族自治縣]에 위치한 설산으로 산 정상에 쌓인 만년설이 거대한 용이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옥룡(玉龍)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주봉인 편자두(扇子陡)는 해발 5,596m로 매리설산(梅里雪山)에 이어 운남성에서 두 번째로 높다. 옥룡설산은 여강고성, 장강 상류의 협곡인 호도협(虎跳峽) 및 영랑이족자치현(寧蒗彝族自治縣) 경내의 루꾸호[瀘沽湖]와 더불어 2007년 5월 국가AAAAA級 여유경구(旅游景區)로 지정된 옥룡설산 경구를 구성하고 있다. 이 중 여강고성은 UNESCO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루꾸호 지역의 마사인(摩梭人)은 지금까지도 모계사회의 전통을 유지하며 나시족 지역의 동파문화(東巴文化)가 보존되고 있다.
설산을 지척에서 보기 위해 우선 케이블카를 타고 운삼평(雲杉坪)으로 향하였다. 운삼평은 옥룡설산 풍경구에 위치한 초습지로 태고의 원시림과 초원, 구름과 안개, 그리고 옥룡설산의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삼나무 빽빽한 나뭇길을 한참 동안 걷다보면 평평한 초습지가 나타나니 그 곳이 바로 운삼평!
[운삼평으로 가는 나뭇길에서 여강의 현지 가이드 이수철 선생과 함께.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도움을 준 두 사람은 맑은 날씨와 가이드 이수철 선생.
이틀간의 여강 투어 중 내내 조금의 피곤한 기색도 없이 시종일관 진솔한 마음
씀씀이로 우리들에게 기분 좋은 웃음을 선사하였다. 감사드린다.]
[운삼평으로 가는 연도에 설치된 표지판. “請沿棧道行走”은 “잔도―널판지길―를 따라 걸어가세요!”정도로 번역하면 될 것을 “좀변두리걸어가고있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대략난감! 이외에도 “請勿穿越叢林”은“수풀을 넘지 마세요!”로 번역해야 할 것을 “좀물입을수록덤불임했다”라고 하니 漸入佳境!]
[운삼평에서 옥룡설산을 배경으로. 옥룡설산의 주봉인 편자두(扇子陡)는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은 처녀봉. 높아서 오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토양이 단단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한다.]
[운삼평에서 최적의 포토존. 보기 좋은 한 쌍의 중국 젊은이에게‘接吻’을 주문하고 사진을 찍어 준 다음 그 대가로 그들이 우리 일행에게 찍어준 멋진 사진.]
새하얗게 눈 덮인 설산에 안받침 되어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이 코앞에 펼쳐지는 풍광을 자아낸 운삼평을 가슴에 담고 내려오는 길에 장예모(張藝謀) 감독이 기획하고 중국의 10개 소수 민족 500명이 출연하는 가무극 ‘인상여강(印象麗江)’의 야외 공연장 주변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 가무극은 전문 배우가 아니라 이 지역에 사는 농부와 학생들이 출연하며, 소수민족의 삶과 사랑 그리고 신앙의 이야기를 춤과 노래로 풀어내는데, 옥룡설산 기슭 12층 높이의 야외 공연장에서 설산을 배경으로 귓전을 꽝꽝 울리는 음악에 맞춰 500명이 일사분란하게 펼쳐지는 공연으로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여행에서 이 멋진 공연을 보지 못한 것 또한 큰 아쉬움으로 남을 듯하다. 우리는 이 아쉬움을 고단백 식품으로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을 함유하고 있어 당뇨병과 빈혈 그리고 면역력 증강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진 만병통치약 ‘스피루리나(spirulina)’로 대체해야만 했다.
점심을 먹은 후 버스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옥룡설산의 눈이 녹아 흘러내려 만들어낸 에메랄드빛 인공호수 백수하(白水河)를 찾았다. 백수하는 석회암 지형인 백수대(白水臺)를 본 떠 계단식 인공 폭포를 만들어 놓은 곳으로 만년 설산의 협곡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빙하수가 옥빛을 띠며 흐르고 있어 마냥 신비롭게 보이며, 마치 사천성(四川省)의 구채구(九寨溝)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소구채구(小九寨溝)’로도 불린다.
[백수하는 만년 설산의 협곡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빙하수가 온통 옥빛을 띠며 흐르고 있어 매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은 구채구라고 불리는 이곳에서 석회질로 인해 옥빛을 띠고 있는 호수 물을 배경으로.]
오후의 주요 일정인 여강고성으로 가는 도중에 나시족의 종교 성지인 옥수채(玉水寨)에 들렀다. 옥수채는 고대 나시족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옥룡설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맑은 물이 공급되는 식수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옥 같은 물이 흐르는 곳이라 하여 옥수채라 이름이 붙었으며, 국가AAAA級 여유경구(旅游景區)로 지정된 곳이다.
[동파교성지(東巴敎聖地) 옥수채라고 새긴 표지석. 바위의 왼편에는 그들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동파문자가 새겨져 있다.]
[자연신천(自然神泉)인 ‘여강원(麗江源)’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진 바위. 옥수채 경구의 규정에 의하면 일단 옥수채로 들어온 여행객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해야만 한다고 하였으니, 첫째,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해해야 하고”(了解人與自然關係), 둘째, “나시말 한 마디를 배워서 할 줄 알아야 하며”(學會講一句納西話), 셋째, “동파문자 한 자를 배워서 쓸 줄 알아야 한다”(學會寫一個東巴字)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들의 문화적 자긍심을 엿볼 수 있다.]
옥수채의 중앙은 세 단계의 조성된 연못물이 흐르고, 물 안에는 1급수에서만 산다는 무지개송어와 검은 빛깔의 물고기가 자유롭게 노닐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 한 켠에는 단단한 코뚜레로 코를 한껏 댕겨놓아 애처롭기까지 한 두 마리의 얼룩무늬 야크가 여행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 중 두 분이 10元의 비용을 들여 야크 등 위에 올라타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였다. 옥수채는 나시족의 종교 성지이어서 인지는 몰라도 왠지 고요하면서도 평화로운 분위기가 주위를 감돌고 있는 듯하였다. 하기야 중국 땅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중 한족(漢族)과 전쟁을 치르지 않은 유일한 민족이 나시족이라고 하니 이곳의 안온한 분위기의 연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였다.
옥수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산기슭에 위치한 ‘동파만신원(東巴萬神園)’을 찾았다. 이곳은 나시족들이 신들을 모셔 놓은 성지로서 수많은 벽화와 상형문자로 가득한데, 나시족의 문자는 동파문자로 1,300여개의 상형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의 신로(神路)는 신들이 다니는 길로 기이한 형상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신로의 왼편은 나쁜 귀신 오른편은 좋은 신이라고 한다.
[동파만신원의 입구. 계단 위의 있는 전통 복장을 한 두 명의 젊은 나시족 청년이 여행객의 방문을 환영한다는 의미의 몸동작을 하고 있다. 계단을 오르면 신로(神路)가 길게 뻗어 있는데, 우리 일행은 신로 끝자락에 있는 육각 정자인 동파영동(東巴靈洞)까지 걸어갔다. 내려오는 동안 길 양편에 꽃망울을 틔운 홍매화의 향기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여강고성으로 들어갔다. 이번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게 될 장소인지라 한껏 들뜬 기분에 막연한 기대감으로 충만하였다. 여강고성은 여강을 끼고 옥룡설산 밑 해발 2,400m에 위치하며 면적은 3.8㎢이다. 고원 계절풍 날씨로 여름에도 너무 덥지 않고 겨울에도 크게 춥지 않으니, 산과 주변의 자연환경을 이용해서 서북의 차가운 바람을 피하고 동남의 햇빛을 충분히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을 북쪽의 상산(象山) 아래에서 강물이 세 줄기로 나누어져 마을 안으로 흘러 들어와 모든 집 앞에 냇물이 흐른다. 이곳에 사는 나시족은 세 갈래의 냇물 중 가장 윗 줄기는 마시는 물로, 중간 줄기는 밥하는 물로, 가장 아래에 있는 줄기는 빨랫물로 사용한다고 한다. 마을에는 총 300여 개 돌로 만든 다리가 있으며, 다리·냇물·초록색의 나무·오래된 거리와 오래 된 집들이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마을 풍경을 만들어내는 까닭에 ‘동방의 베니스(Venice)’라고 불린다.
마을의 중심인 사방가(四方街)는 명청(明淸)시대부터 서북의 차 상업무역의 중심지였다. 사방가의 길바닥은 붉은색의 오화석(五花石)이 깔려 있는데 비가 와도 발에 흙이 묻지 않고 돌의 무늬로 인해 거리의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인다. 마을의 건물은 한족(漢族)·장족(藏族)·백족(白族) 등 여러 민족의 전통양식을 융합한 나시족의 독특한 양식으로 형성되었으며, 1997년에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중앙에 흐르는 냇물 양편의 상점으로 연결된 나무다리 위에서.]
우리 일행이 길 양편의 상점을 뚫고 사방가에 이르렀을 때는 마침 나시족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전통 가무를 공연하고 있는 중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한참동안 그들이 연출해내는 건강하고 생동감 넘치는 율동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였다.
[마을의 중심인 사방가(四方街)에서 전통 가무를 공연하고 있는 나시족 젊은이들. 공연의 말미에 구성원들이 큰 소리로 함께 노래를 부르며 크게 원을 그리자 구경하던 관객들도 하나둘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서로 어우러지는 흥겹게 뛰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시족 젊은이들의 가무 공연이 끝나자 가이드 선생이 대략 1시간 반의 시간을 주며 자유롭게 구경도 하고 필요한 물건도 사라고 하였다. 일행 중 일부는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상점 쪽으로 향하고 일부는 여강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기에 나는 후자를 택하였다. 양편의 상점을 끼고 돌계단을 따라 한참을 오르자 사자산(獅子山) 만고루(萬古樓)라는 누대가 나타났다. 그곳에 들어가면 여강시를 한 눈에 볼 수 있다고는 하나 입장권을 끊어야 한다기에 차라리 그럴 바엔 전망 좋은 2층 찻집으로 가서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자고 의견을 모으고 가까이에 있는 2층 찻집으로 올라갔다. 보이차 두 통을 주문하여 나누어 마시면서 한편으로 담소를 나누고 한편으로 독특한 형태의 여강시를 굽어보니 왠지 모를 쓸쓸함이 마음 한 구석을 조금씩 채우고 있는 듯하였다. 아마도 끝이 보이는 여행의 아쉬움 때문이리라.
[전망 좋은 2층 찻집에서 따뜻한 보이차를 나누어 마시며.]
[2층 찻집에서 굽어보이는 여강시 전경(全景).]
찻집에서 다시 왔던 계단을 되돌아 내려와 집결지에 이르자 일행들이 속속 약속된 시간 안에 모여들었다. 각자 짐을 챙기고는 다시 고성의 사방가에서 한참을 걸어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흑룡담(黑龍潭) 공원으로 이동하였다. 사실 흑룡담은 원래 예정된 일정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숙소인 호텔로 가는 도중에 있기 때문에 보너스로 들른 곳이기도 했다.
[여강고성에서 흑룡담으로 가는 도중 멀리 설산이 석양빛을 받아 냇물에 비친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옥천(玉泉)이라고도 알려진 흑룡담은 옥룡설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이 고인 호수 공원으로, 공원 안에 있는 건축물들은 그 연원이 명청(明靑)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유명한 오봉루(五鳳樓, 1601)는 복국사(福國寺)로부터 일부를 옮겨와 조성한 것으로, 운남성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마침 우리가 흑룡담에 도착한 때는 석양이 막 질 무렵이라 한결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호수의 맑은 물에 비친 옥룡설산과 하늘의 모습이 멋진 장관을 이루는 흑룡담에서.]
흑룡담의 외길을 따라 걸어 나오니 바로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와 연결된 큰 길로 이어졌다. 숙소로 들어가기 전 근처의 한 식당에 들러 저녁을 먹었다. 이날은 마침 장윤기 부이사장님의 생신인지라 어제 저녁 호텔 측에 미리 부탁하여 준비한 생일 케익을 가지고 와서 축하 노래를 부르며 케익을 자르고 와인까지 한 잔씩 돌리며 축하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낮선 이국에서 생일을 맞이한 장윤기 부이사장님과 장현숙 사모님. 이번 여행에는 빠듯한 일정 때문에 일행이 한 자리에 모여 담소를 나눌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는데, 이러한 조촐한 세레모니 덕분에 잠시나마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비교적 긴 시간 동안 저녁을 함께 한 후 일행 중 반은 일찌감치 숙소에 들어가서 쉬고 나머지 반은 가이드의 지인이 경영하는 보이차 전문점을 다녀오기로 하였다. 시장통을 끼고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상점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각양각색의 보이차가 진열되어 있었다. 주인인 조선족 아주머니께서 몇 종류의 보이차와 홍차를 끓여 내놓고는 보이차에 대한 각종 상식과 궁금증을 꼼꼼하게 설명해주어 차 공부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일행들은 각자 필요한 만큼의 차를 구입하고는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여강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짐을 다 정리하고 6층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후 8시 경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호도협(虎跳峽)으로 향하였다. 버스로 대략 2시간 남짓한 거리에 위치한 호도협은 샹그릴라[香格里拉] 접경을 지나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세찬 칼바람으로 우리를 맞이하였다. 이 협곡의 길은 먼 옛날부터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일부였으며, 운남성에서 티베트로 향하는 차마고도는 서상판납(西雙版納)에서 보이시(普洱市)를 지나 대리·여강·샹그릴라를 거쳐 라싸[拉薩]에 이르는데, 여강에서 샹그릴라로 향하는 길목에 호도협이 자리 잡고 있다. 호랑이가 건너뛰는 협곡이라는 뜻의 호도협은 강의 상류와 하류의 낙차가 170m에 이르며,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협곡 중의 하나이다.
[칼바람을 맞으며 10분 넘게 계단을 내려온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호도협의 호랑이 형상의 조형물. 과연 장강의 최상류답게 협곡은 좁고 물살은 거세었다.]
이번 여행의 최북단인 샹그릴라의 호도협을 뒤로 하고 가까운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은 후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여강공항으로 이동하였다. 오후 5시 20분 여강을 출발하여 한 시간이 지난 6시 반 경에 곤명에 도착한 후 잠시 비행기에서 내려 한 시간 가량 대합실에서 휴식을 취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7시 반에 곤명을 출발하여 상해로 가는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밤 11시 경에 상해 홍치아오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 부근의 린진호텔에서 쪽잠을 잔 후 오전 8시 10분 상해발 대구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5시 30분에 체크아웃을 하고 푸동공항으로 이동하여 동방항공 M5053 항편으로 11시 경 대구공항에 도착하였다. 각자 짐을 찾은 후 간단하게 해단을 하고 아쉬움을 달래며 헤어졌다. 빠듯한 일정과 다소의 준비 미흡으로 적잖이 힘이 들었을 터인데도 불평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여행을 마무리해준 모든 일행 분들께 그저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다. 즐거움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는 있을는지...
사흘을 쉬고 난 후 중국에 있을 때 미리 약속한 뒤풀이 모임을 정현숙 사모님의 주관 하에 한식당 비원에서 가지게 되었다. 사흘을 푹 쉬어서 그런 지 모두들 여행 때보다는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나셨기에 가만히 안도의 숨을 쉬며 또 다음 여행을 머리에 그려 보았다.
[비원 한정식당에서의 뒤풀이]
첫댓글 아주 소상해서 마치 읽는 사람이 함께 여행을 하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