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미실(美室)그는 어떤 여자인가★
신라를 말하는 `색공지신 미실
MBC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
진평왕 재위 28년째인 서기 606년 가을 7월, 신라 제7대 풍월주(風月主. 화랑 집단의 우두머리)인 설화랑(薛花郞)이 졸(卒)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화랑세기(花郞世記)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 때 미실궁주(美室宮主)가 기이한 병(奇病)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날 수 없었다. 공(公=설화랑)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시면서 미실의 병을 자기가 대신해 달라고 밤에는 반드시 기도하니 마침내 (설화랑이) 그 병을 대신했다." 이렇게 해서 진흥왕 재위 10년(549)에 태어난 설화랑은 그가 평생의 연인으로 생각했던 미실(美室)이라는 여인을 뒤로 하고 58세로 선화(仙化)했다.
한데 그 몇 달 뒤에 미실 또한 숨을 거뒀다.
이 대목을 화랑세기는 "(병에서) 일어나 (설화랑이 먼저 죽은 줄 알고는) 슬퍼하며, 자기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으니 그 때 나이 58세라고 하고 있다. 신기하게도 미실은 그가 생전에 색(色)으로 녹인 수많은 남자 중에서도 끝까지 신의를 배신하지 않은 설화랑과 생몰년이 모두 같다.
미실(美室). 이름부터가 묘하다.
실(室)이란 궁(宮)과 함께 여성의 성기를 암시하는 대표어. 그것이 아름답다 했으니 오죽 방중술(房中術)이 뛰어났을까.
화랑세기에 의하면 이 미실이라는 뛰어난 미모와 그것을 능가하는 가무(歌舞), 또 그것과 비견되는 천재 문학가였으며, 이런 무기들을 발판으로 진흥-진지-진평으로 이어지는 3대 왕과,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은 물론이고 6대 풍월주인 세종(世宗)과 7대 풍월주 설화랑과도 농밀한 육체적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그에게 첫 애인은 15,6세에 요절한 화랑 사다함이었다. 왕이나 태자는 당시 신라왕국에서는 더 이상 넘볼 곳이 없는 지존(至尊)들이니, 이들을 대상으로 삼은 미실의 섹스 행각을 화랑세기는 `색공"(色供)이라고 표현한다.
화랑세기 한 대목에는 미실이 31세 무렵, 진흥왕 손자인 진평이 13살로 즉위하자마자 어린 왕을 도(導)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끈다는 의미인 도(導)는 말할 것도 없이 도교신학에서 벽곡법(오곡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 식이요법)ㆍ도인술(導引術. 기체조)과 함께 불로장생을 위해 권장되는 육체 수련술 중 하나인 방중술, 즉, 섹솔로지(sexology)를 의미한다.
실제 그의 아들인 보종(寶宗)은 "콩죽을 즐겨 먹고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도교의학사에서 황제를 성교육하는 현녀(玄女)나 소녀(少女)가 그랬던 것처럼 미실은 어린 제왕이 성적 능력을 배양케 하는 개인교사였던 것이다.
이 개인교사의 수강생은 진평뿐만 아니라 그의 할아버지인 진흥, 그의 아버지인 동륜, 그의 삼촌인 진지도 예외가 되지 않았다. 방중술가로서 우뚝한 미실의 행적은 그와 밤을 보낸 세종이 다음날 휘청거리곤 했다는 대목에서 읽을 수 있다.
이런 미실에게 무엇이 주어졌을까?
말할 것도 없이 막강 권력이었다. 그의 이런 면모 중 하나로 진흥왕 말년, 풍병(약물 과다 복용에 따른 중독 증세)으로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해진 왕을 대신해 미실이 국사를 농단했다는 대목을 들 수 있다.
법흥왕-진흥왕 시대를 대표하는 훈신(勳臣)인 미진부(未珍夫)의 딸이며, 10세 풍월주인 미생(美生)의 한 살 위 누이이자, 11세 풍월주인 하종(夏宗)과 16세 풍월주인 보종(寶宗)의 어머니(이들 아들은 씨가 다 다르다)가 되며, 저 유명한 김유신에게는 처조모가 되는 미실.
근간 `색공지신(色供之臣) 미실"(푸른역사)에서 서강대 사학과 이종욱 교수는 화랑세기에는 거의 전면에 노출돼 있으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기존 문헌에는 전혀 종적이 남아있지 않은 미실의 행적을 추적하고 정리한다.
왜 하필 미실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미실 자체가 신라로 들어가는 열쇠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일생을 통해 신라왕실의 권력 작동 시스템이라든가 그 왕조를 지탱한 사회구조가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종욱 교수, 미실의 행적 추적해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치맛자락 하나로 천하를 뒤덮은 경국지색 미실
※ MBC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우악공주가 마야부인로 나옴
진흥왕 중반기에서 진지왕 대를 거쳐 진평왕 초기 10년까지 약 40여 년간의 신라 정치는 미실이라는 한 여자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미실이라는 여자는 어떤 과정을 거쳐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을까?
그 배경엔 신라의 특이한 문화와 신라 여성네들의 독특한 삶, 그리고 미실의 남다른 성장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미실은 제2세 풍월주 미진부의 딸이다. 미진부의 아버지는 아시공이며 어머니는 법흥왕과 소지왕의 후궁 벽화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삼엽 궁주이다. 법흥왕은 정비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후비 옥진궁주에게서 아들 비대를 얻었는데 그는 비대에게 왕위를 계승하려 했다.
하지만 법흥왕의 정비 소생의 딸 지소 부인은 비대의 어머니 옥진이 골품이 없기 때문에 비대는 태자가 될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아시공과 삼엽 궁주가 지소 부인을 지지하고 옥진의 아버지 위화랑이 또한 지소를 지지함으로써 비대의 왕위 계승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대신 지소 부인과 입종(법흥왕의 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삼맥종(진흥왕)이 왕위를 이엇다.
진흥왕이 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지소 부인은 섭정으로서 정권을 장악했다. 더불어 진흥왕의 즉위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아시공과 삼엽은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
또한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미진부 역시 16세의 어린 나이로 태후의 폐신(총애를 받는 신하)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미진부는 법흥왕과 백제 동성왕의 딸 보과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남모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초대 원화인 준정이 자기가 차지해야 할 원화 자리가 남모에게 넘어가는 것을 질투하여 남모를 물에 빠뜨려 죽이는 바람에 아내를 잃었다.
그후 미진부는 한동안 아내를 맞이하지 않았다. 미진부는 법흥왕의 후궁이며 위화랑의 손녀인 묘도와 몰래 사통하고 있었다. 지소 태후가 그 사실을 알고 묘도를 미진부에게 시집보냈다. 그들 사이에 1남1녀가 생겼는데 미실과 남동생 미생이 그들이다.
미실이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한 후 처음으로 만난 남자는 세종이었다. 세종은 지소태후와 박이사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데, 지소태후는 세종이 성장하자 미녀들을 뽑아 궁중에 모아 두고 세종에게 마음에 드는 여자를 선택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세종은 미실을 택했다.
하지만 지소 태후는 미실을 꺼렸다. 지소 태후는 법흥왕의 명령으로 방영실을 계부로 맞아들였는데 지소 태후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태자가 없던 법흥왕은 원래 영실을 부군으로 삼아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 일 이후 지소 태후는 영실을 몹시 싫어했다. 법흥왕이 그를 계부로 삼으라고 하자 더욱 싫어했다.
그런데 미실이 박영실과 인천 관계였으니 지소 태후가 그녀를 꺼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사부의 충고로 미실을 받아들여 세종의 아내로 삼았다.
그런데 이때 지소 태후는 자신과 이사부 사이에서 태어난 숙명을 진흥왕의 왕비로 삼고 정비 사도부인 박씨를 내?으려 했다. 사도 또한 박영실의 딸이어서 그녀와 미실은 인척 관계였다.
그래서 지소태후는 사도 부인에 대한 미움이 미실에게까지 연계했고 결국 미실을 궁에서 내치기에 이르렀다.
궁궐에서 ?겨난 미실은 또 한 명의 남자를 만나는데, 유명한 화랑 사다함이다.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이며 비량의 손자이다. 비량은 위화랑의 누나 벽화를 사랑했는데 당시 벽화는 소지왕이 죽은 뒤에 법흥왕의 후궁이 되어 있었다.
비량과 벽화는 서로 사랑하여 몰래 사통하였는데 그들은 늘 벽화궁의 뒷간에서 만나 정을 통하였다. 그래서 낳은 아들을 구리지라 했으니 이는 '구린 데서 낳은 아이'라는 뜻이다. 구리지는 위화랑의 둘째 딸 금진과 결혼하여 토함.새달.사다함을 낳았다.
사다함은 열두 살에 화랑도에 입문하여 문노에게 격검과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561년에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가야 정벌 전쟁에 출전하여 큰 공을 세우고 제5세 풍월주가 되었다.
미실과 사다함이 사랑에 빠진 것은 사다함이 가야 정벌 전쟁에 출전하기 직전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흠모하며 사통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미실을 잃은 세종은 모후의 명령으로 진종의 딸 융명과 결혼했으나 마음을 잡지 못했다. 그는 융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늘 미실만 동경하였다. 그 무렵 미실과 사다함의 사라은 더욱 깊어져 마침내 서로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미실은 진흥왕을 찾아가 사다함과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결국 허락을 받아 냈다.
그런 상황에서 사다함이 전쟁에 나가게 되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사다함은 용명이 뛰어나고 무술이 탁월하여 귀당비장에 임명되어 출전했다. 전장으로 떠나는 사다함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미실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바람이 불어도 임 앞엔 불지 마오.
물결이 쳐도 임 앞엔 치지 마오.
어서 돌아와 다시 만나 안고 보오.
아아,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떼라니요.
하지만 그것이 정말 영영 이별의 노래가 될 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미실과 사다함이 서로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세종은 식음을 전폐하고 미실의 이름만 불러 댔다.
결국 아들의 건강을 염려한 지소태후가 미실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그 명령이 떨어지자 세종은 미친 듯이 좋아하며 미실의 숙소로 달려갔다. 그러나 미실은 세종과의 관계를 거부했다. 이미 세종이 정식으로 융명을 아내로 맞이한 터라 미실은 첩의 신분으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미실은 첩이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색공에 응하지 않았다.
세종은 지소 태후에게 달려가 미실을 부인으로 삼도록 해 달라고 졸랐다. 지소태후는 별수없이 미실을 정부인으로 삼고 융명을 후부인으로 삼았다. 그러자 융명이 불만을 표시하며 궁을 나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지소 태후는 미실에게 향후에라도 세종을 배반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은 다음 융명을 궁 밖에 나가 살도록 허락했다.
그 얼마 뒤에 사다함은 승전보를 안고 돌아왔다. 그는 미실과 결혼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돌아와 보니 미실은 다시 세종의 부인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사다함은 그 슬픔을 이렇게 노래했다.
파랑새여 파랑새여 저 구름 위의 파랑새여
어이하여 내 콩밭에 내렸는가
파랑새여 파랑새여 내 콩밭의 파랑새여
어이하여 다시 날아 구름 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며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왜 왔는가
공연히 눈물 짓게 하고 상심하여 여윈 끝에 죽게 하려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이 될까. 나는 죽어 신병이 되리
그래서 그대에게 날아들어 수호신이 되어
아침 저녁으로 전군부처(세종과 미실) 보호하리
만년 천년 죽지 않도록
사다함은 그녀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를 잃은 슬픔이 뼈와 살에 사무쳐 그 상심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날로 여위더니 7일 만에 죽어 버렸다. 사다함이 죽은 뒤에 미실의 남편 세종이 화랑도의 풍월주가 되었다.
한편 미실은 사다함의 사망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그래서 천주사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었는데 그날 밤 미실의 꿈에 사다함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와 네가 부부가 되길 원하였으니, 나는 너의 배를 빌려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 뒤로 미실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으니 그가 제11세 풍월주 하종이다.
사람들은 미실이 입궁하기 전에 이미 사다함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고 했다. 사다함이 죽은 뒤에 미실은 변하기 시작했다. 이미 사랑을 잃은 그녀에겐 더 이상 순정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색정과 권력욕 뿐이었다.
미실은 당시 진흥왕의 태자였던 동륜 태자와 사통하였는데 이는 동륜의 어머니 사도 왕비가 주선한 일이었다. 사도 왕비는 지소 태후가 자신의 딸 만호와 동륜 태자를 시키려 하자 미실을 동륜에게 붙여 그 마음을 빼앗고자 했던 것이다.
사도 왕비는 미실에게 자식을 잉태하면 태자비가 되게 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하였다. 미실은 크게 기뻐하며 기꺼이 동륜과 가까이 했다. 그리고 마침내 임신을 하였다.
그런데 진흥왕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미실을 불러 자신을 섬기도록 명령했다.
미실은 음사에 매우 능하고 음악과 춤에도 뛰어났기 때문에 진흥왕은 그녀에게 쉽게 빠져들었다. 덕분에 그녀는 황후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사도 왕비가 원한 일이었다. 사도 왕비는 자신은 물론이고 미실과 보명 등 여러 여자를 동원하여 진흥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흥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게 된 미실의 힘은 어느덧 남편인 세종을 능가하게 되었다.
그쯤 되자, 그녀는 세종이 부담스러워졌다. 그래서 진흥왕을 움직여 세종을 전장에 내보내 버렸다. 세종이 떠난 뒤, 미실은 진흥왕에게 원화제도를 부활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원화는 화랑도가 생기기 전에 풍월주의 위치에 있었던 여자를 지칭하는데, 미실은 스스로 원화의 자리에 오르고자 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풍월주는 없어지고 원화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진흥왕은 미실의 요청대로 풍월주를 폐지하고 원화를 복원하였다. 그리고 그녀를 원화로 삼았다.
이에 전장에 나가 있던 세종의 낭도들이 크게 반발하자 세종은 미실을 생각하여 그 낭도들을 이렇게 타일렀다.
"새로운 원화는 나의 옛 부인다. 너희들은 불평하지 말고 잘 섬기도록 하라."
그 뒤로 낭도들이 그녀에게 순종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궁궐에선 왕후의 권력을 얻었고 궁 밖에선 풍월주의 권력을 얻었다. 이때가 진흥왕 재위 29년(568년)으로 미실의 나이 스무 살 무렵이었다.
원화가 된 미실은 설원랑과 미생을 봉사랑으로 삼았다. 설월랑은 후에 제7세 풍월주가 되는 설화랑인데 위화랑의 차녀 금진이 설성이라는 낭도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이다. 또한 미생은 미실의 친동생이다. 미실은 설원랑은 물론이고 친동생인 미생과도 정을 통하고 있었다.
거기다 미실은 동륜 태자와도 계속 관계를 갖고 있었다. 미실은 동륜을 원하지 않았지만 동륜은 미실과 관계를 가진 뒤로 그녀를 잊지 못하고 늘 합궁할 기회만 노렸다.
미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진흥왕이 알게 될까 염려하여 동륜을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륜은 무턱대고 찾아와 요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동륜의 요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미실은 자기가 거느린 유화 중에 미인들을 골라 동륜에게 붙여 줬다. 그러자 동륜은 색광이 되어 툭하면 궁궐 밖으로 나가 미생과 어울러 다니며 황음을 일삼았다. 색정에 사로잡힌 동륜은 미인이라는 미인은 모두 찾아다니며 색을 즐겼고, 그러다가 진흥왕의 후궁인 보명 궁주까지 넘보게 되었다.
보명은 미실 때문에 그를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으나 동륜은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결국 관계를 허락했는데 그 뒤로 동륜은 출입이 잦았다.
하루는 동륜이 홀로 보명궁의 담을 넘었는데 그것이 죽음을 재촉한 일이었다. 큰 개들이 보명궁의 담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동륜이 월담을 하다가 개에게 물려 죽은 것이다. 이때가 572년이었다.
이일로 궁궐은 발칵 뒤집혔고 진흥왕은 노발대발하며 사건의 진상을 캐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동륜이 낭도들과 어울러 황음을 일삼는 행각들이 들춰졌고 그 낭도들은 대개 미실의 수하들임이 밝혀졌다.
그 사건으로 분노한 진흥왕은 미실을 궁궐에서 내?고 원화의 직위에서도 해임시킨 뒤, 세종을 불러 다시 풍월주에 앉혔다. 하지만 미실은 세종이 다시 풍월주의 자리에 앉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고 그에게 풍월주에게 물러나라고 종용했다.
미실은 자기의 정부인 설원랑이 풍월주가 되길 원했던 것이다. 세종은 미실의 강압에 못 이겨 설원랑에게 풍월주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미실이 굴궐에서 내?기자 이번에는 진흥왕의 둘째 아들 금륜(진지왕)이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미실은 금륜을 꼬드겨 그가 왕위에 오르면 자신을 다시 궁궐로 불러 줄 것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흥왕이 다시 미실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진흥왕은 그녀의 뛰어난 색사를 잊지 못했던 것이다.
그 무렵, 진흥왕은 지나친 정력 소비로 몸이 극도로 약해진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다시 미실과 색사를 즐기게 되자, 더 이상 몸이 버티지 못하고 풍질에 걸렸다.
진흥왕이 중풍에 걸린 뒤로 왕권은 사도 부인과 미실이 장악했고 조정의 인사도 그녀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리고 진흥왕은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576년에 마흔세 살의 나이로 죽었다.
왕이 죽었지만 사도부인과 미실은 그 사실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 그들은 일단 권력을 안정시킨 뒤에 진흥왕의 죽음을 알릴 심산이었다.
그래서 우선 세종.미실.설원랑.노리부 등을 불러 조정을 안정시킨뒤, 금륜을 찾아갔다. 그들은 금륜에게 왕위에 오르더라도 자기들을 저버리지 않을 것과 미실을 왕후로 삼을 것을 약속받은 뒤에야 진흥왕의 죽음을 알렸다.
그러나 금륜(진지왕)은 왕위에 오른 뒤 그들과의 약속을 저버렸다. 미실을 왕후로 삼지도 않았고 그들의 말에 순종하지도 않았다. 진지왕은 오직 궁궐 밖을 휘젓고 다니며 황음을 일삼았고 민가의 처자들을 함부로 범하는 추태를 보였다.
그러자 미실과 사도 태후는 그를 폐위하기로 결정하고 세종을 불러 은밀히 대책을 논의하였다.
문제는 문노의 낭도들이었다.
당시 화랑도는 크게 미실파와 문노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런데 미실의 사주를 받고 세종이 주도하여 진지왕을 폐위할 경우 문노파의 반발이 예상되었다.
만약 문노가 반발하여 내전이 일어나면 큰 혼란이 야기될 게 뻔했다. 미실과 사도 태후는 이런 혼란을 미연에 방지할 요량으로 한가지 계책을 마련했다.
원화제도를 복원하여 미실을 원화로 삼고 세종과 문노의 낭도를 합쳐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종을 상선, 문노를 아선, 설원랑과 비보랑을 좌우봉사화랑, 미생을 전방봉사화랑으로 삼았다. 당시 문노의 낭도들은 평민 출신이 많았는데 이대의 조치로 신분의 제약을 뛰어넘어 고관에 발탁된 인사가 많았다.
이렇듯 사전 작업을 한 뒤 사도 태후는 자기 오빠인 박노리부를 시켜 거사를 감행하도록 했다. 물론 거사에 앞장선 세력은 세종과 그 낭도들이었다.
반정이 일어나자 진지왕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허무하게 포박되었다. 그리고 별궁에 잠시 유페되었다가 곧 죽음을 당했다. 진지왕을 죽인 사도 태후는 자기의 손자 백정(진평왕)을 왕위에 앉혔다.
당시 진평왕은 열세 살의 어린 나이였는데 사도 태후는 진흥왕의 후궁이었던 보명과 미실로 하여금 진평왕과 관계하도록 하였다.
미실은 당시 서른이 넘은 나이였고 보명보다 골품이 낮은 터라 보명에게 양보했다. 하지만 보명은 임신 중이었기에 사양하였다. 덕분에 미실은 열세 살의 어린 소년 진평왕에게 첫 경험을 안겨다 주는 영광을 얻었다.
이후 진평왕은 보명과 미실을 좌우 후로 삼았고 미실은 어린 진평왕을 끼고 정사를 좌지우지 했다. 진평왕이 즉위한 579년부터 미실이 죽은 607년까지 20여 년간은 미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흥왕 즉위 10년 - 지소태후의 시대
진평왕 즉위 20년 - 미실의 시대
진평왕이 즉위한 후 미실은 원화로 있으면서 화랑도를 원격 조정했다. 당시 화랑도는 최대의 군대 조직이자 인재양성기관이었기에 미실은 실질적으로 왕권을 장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미실은 후궁들을 모두 다스리고 있던 터라, 왕 주변의 여자들은 미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심지어 진평왕의 모후 만호 부인이나 왕비 마야 부인도 그녀의 영향력 아래 있어야 할 정도였다.
이렇듯 40년 동안 신라 조정을 손 안에 쥐고 흔들었던 미실은 607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몇 달 동안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 그녀였지만 세월 앞에선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60줄의 나이에 접어든 그녀에게 여전히 순애보를 간직한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설원랑이다. 설원랑은 10대의 어린 나이에 미실을 만나 섬겼고 그후로 그녀의 수족이 되어 입 안의 혀처럼 움직였다. 그는 그녀가 풍월주가 되라고 하면 풍월주가 되었고 풍월주의 자리를 내놓고 문노를 스승을 섬기라고 하면 거기에도 순종했다. 미실이 죽을 병에 걸려 드러눕자, 그녀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낮없이 병석을 지켰다. 그러다 그는 오히려 그녀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했다. 40년동안의 순애보는 그렇게 끝났다.
설원랑이 죽자, 미실은 아픈 몸을 일으켜 슬퍼하며 울었다. 그리고 자기의 속옷을 설원랑의 관에 함께 넣어 장사지내도록 했다. 마침내 미실도 그의 사랑을 받아들여 구천에서나마 부부애를 맺자는 언약을 한 것이다.
사다함을 보낸 이후 한번도 열리지 않았던 그녀의 순정이 마침내 40년 동안 지극 정성으로 자신을 보필한 설원랑에 의해 열린 것이다. 그 며칠 뒤 그녀도 설원랑을 따라 구천으로 갔다. 동생 미생의 친구 설원랑이 죽을 당시에 58살이었으니 그녀는 예순 살쯤 되었으리라.
******************************************<출처: 한권으로 읽는 신라실록>
화랑세기
1989년 필사본 공개…진위논쟁 계속
'神國의 道’로 근친혼도 정당화
미실 얘기의 바탕이 된 ‘화랑세기 ’는 현재까지 필사본만 공개됐는데, 학계에선 아직 진위논쟁을 벌이고 있다.
‘화랑세기 ’는 신라의 김대문(金大問)이 신문왕 1년(681)에서 7년 사이에 저술한 책으로 ‘삼국사기 ’보다 무려 460여년이나 앞선다.현재 공개된 필사본은 일본 궁내성 도서과 촉탁을 지낸 박창화가 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9년 필사본이 처음 공개됐을 때 위작 논쟁이 벌어진 이유 중의 하나는 근친상간도 서슴지 않는 난잡한(?) 남녀관계였다. 그러나 ‘화랑세기 ’는 이런 근친혼을 ‘신국(神國)의 도(道)’라는 고유한 개념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22세 풍월주 양도는 이복누이와의 결혼을 권유하는 어머니 양명공주에게 “중국 풍습이 아니라 신라의 풍습을 따르겠다 ”며 수락하는데 이에 대해 양명공주는 “참으로 나의 아들이다. 신국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어찌 중국의 도로써 하겠느냐 ”라고 칭찬한다.
진흥왕은 미실의 군주(君主·일종의 후궁)임명을 기념해 큰 잔치를 베풀고, 이를 기념해 연호를 대창(大昌)이라고 고쳤다. 당시 신라인들은 중국에서 전래된 유학이 아니라 신라 고유의 ‘신국의 도 ’를 신봉했던 것이다. 현대인들은 ‘신국의 도 ’라는 프리즘을 통해야 미실과 신라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
첫댓글 좋은정보자료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