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기 어디 그런 쪽배 없소? / 손영일
원효대사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도중
어느 바위굴에서 잠을 자다 목이 말라
비몽사몽간에 옆에 있는 물을 마셨는데
깨고 보니 그 물그릇은 바로 해골바가지였다고 한다. 원효대사는 여기서 활연대오(豁然大悟: 크게 깨우침)을 얻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를 체득한 후
유학의 발길을 돌려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곤 미친 사람처럼 거지행세를 하며 “수허몰가부위작지천주(誰許沒柯斧爲斫支天柱: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줄 것인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네.” 라고
노래하며 동네방네 외치고 다녔는데
아무도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한편,
태종 무열왕이 그런 풍문을 듣고,
그 뜻을 알아차렸다.
무열왕이 말하기를 “원효가 아마
귀한 집 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구나. 아버지를 닮아
큰 인물이 태어나면 나라에 더 없는
큰 기둥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루 빠진 도끼는 과부를 뜻하고,
하늘을 받칠 기둥은 국가를 떠바칠
인재를 뜻한다고 했다.
그래서
원효에게 소개할 적당한 과부를 찾던
무열왕에게 좋은 묘안이 떠올랐다.
마침 오래전 백제와의 전쟁에서 장렬히 전사한
부마(사위)와 결혼한 지 한 달만에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둘째 딸 요석공주(瑤石公主)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원효는 워낙 박식하고 뛰어난 대사였던지라
무열왕이 자주 불러 조언을 구하곤 했으므로
원효와는 인연도 깊었고,
공주 또한
그를 흠모하는 눈치였다.
며칠 후 무열왕은
궁중 내관을 시켜 원효를 모셔 오게 했다.
원효는 내관이 자신을 찾아 나섰다는
소문을 미리 듣고 있었으므로 문천교(蚊川橋) 다리를 건널 때 내관이 다가오자
짐짓 발을 헛디딘 척하며 일부러 문천교 아래로 풍덩 빠져 버렸다.
헐레벌떡 뛰어온 내관이 물에 빠진
원효를 건져 올려 무열왕 앞으로 모시고 갔다.
무열왕은 온몸이 물에 젖은 원효를 보고 크게 놀라 요석공주를 불러
”대사님을 요석궁으로 모시고 가서 옷을
갈아입히고 저녁상을 차려 잘 뫼시라“고 명하였다.
요석궁으로 인도된 원효는 요석공주가 쓰던
향기 짙은 옥수(玉水)로 목욕을 하고, 요석공주가 건네준 비단옷으로
갈아입은 뒤 푸짐한 저녁상에 반주까지
곁들이게 되었다. 천사같이 예쁜 공주와 단둘이 앉아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어느새 원효는 요석공주의
아리따운 향취와 풍만한 육체에 현혹되어
불심이 흔들리게 되었다. 요석공주
또한 한 달간의 신혼생활이었지만 이미 사내와의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아는지라 원효대사의 늠름한
모습에 빠져들고 말았다.
원효대사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공주의 향기가
본능을 자극하자 요석공주(瑤石公主)가
과부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는데
자루 빠진 도끼가 어디 없을까요?
허허.” 그러자 요석공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 “대사님은 불심만 깊으신 줄 알았는데
목수 일도 잘 하시나 봐요? 호호”
원효대사가 대답했다.
“허허, 하지 않을 뿐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외다.”
“그럼 대사님께서도
음사(淫事)의 묘미(妙味)를 아신다는 말씀인가요?” 원효대사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옛말에 생지안행(生知安行)이란 말이 있지요.
인간은 태어나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행할 수 있는 본능적 행동이 있다는 말이지요.”
이 말을 들은 요석공주는 차츰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그러시다면 자루 빠진 도끼를 제가 빌려 드릴 수도~~. 호호“ 하며
요석공주가 원효대사의 품에 안기면서
온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이에 원효의
우람한 하초(下焦, 남근)가 공주의 옥문(玉門)을 열고 들어가자,
공주는 대사의 우람한 양물(陽物)에 요
석궁이 흔들리는 운우지락(雲雨之樂)의 극치를 느끼며 “대사님이 나를 속였군요.
극락을 읊으시면서 이토록 사람을 죽게 만들다니,
불심 깊으신
대사님이 어찌 이런 거짓말을. 아~,
이럴 수가~아~”하며
차오르는 기쁨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던가? 꿈같은
3일 밤낮이 지나고 나서
원효는 요석공주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하자 요석공주가
요염한 자태로 원효대사의 넓은 가슴을
어루만지며 “어딜 가시든 태산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깊은 이 가슴에 티끌보다
작은 소녀가 머물 곳을 꼭 남겨 주소서.”하며
흐느꼈다. 그렇게 요석공주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며 원효대사를 떠나보냈다
. 그 후 단 3일간의 사랑이었지만 요석공주는 배가 불러오고
열 달 만에 아들 설총(薛聰)을 낳았다.
후일 신라십현(新羅十賢) 중의 한 사람이며 우리의 고대 “이두(吏讀) 문자”를 완성시킨 설총이
바로 그렇게 태어난 원효의 아들이었다.
요석공주는 원효대사가 정진(正眞)하고 있었던 소요산 입구에 별궁을 짓고,
아들 설총과 함께 원효대사를 멀리서
연모하며 살았는데 그 터가 지금은
“요석공주 별궁지”로 남아있다.
동두천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별궁지 옆에
요석공원을 만들어 놓았고, 소요산(逍遙山)의
한 봉우리를 “공주봉”이라 부르며 기리고 있다.
하늘이 준 본능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위에서 보듯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이야기가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늦가을의
쓸쓸한 도끼자루가 강건너 운우정(雲雨亭)까지
태워다 줄 쪽배를 찾고 있소이다.
거기 어디 그런 쪽배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