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깊이 제4권 저자 서문
반경환
나는 낙천주의 사상가로서 우리 한국인들의 백만 두뇌를 양성하고 우리 한국인들을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으로 육성시키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다고 자부한다. 사상은 모든 학문의 열매이며, 예술은 모든 학문의 꽃이다. 우리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학문 연구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은 이처럼 예술을 꽃 피우고, 사상이라는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꽃 중의 꽃인 예술도 앎에의 의지의 소산이고, 열매 중의 열매인 사상도 앎에의 의지의 소산이다. 아름다운 꽃(예술)이 만발하는 지상낙원, 아름답고 풍요로운 열매(사상)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지상낙원----.
그렇다. 이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라다 보는 낙천주의자만이 우리 한국인들을 지상낙원으로 인도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왜, 우리 한국인들은 지난 수천 년 동안 단 한번도 주권국가의 주체적인 민족이 되어보지 못하고, 그처럼 오랫동안 당나라의 노예, 원나라의 노예, 명나라의 노예, 청나라의 노예, 일본의 노예, 미국의 노예들로 살아왔던 것일까? 그것은 작디 작은 영토의 문제이며, 우리 한국인들의 머리숫자의 문제였던 것일까? 적어도 한 국가의 위대함은 영토의 크기에 있지도 않고, 또한 그 나라의 국민의 머리숫자에 있지도 않다. 과연 우리 한국인들은 중국과 일본과 미국을 향해서 원한 맺힌 저주감정을 퍼부어 대고, 또한 그들을 그처럼 욕할 자격이나 있는 것일까? 우리 한국인들이 이민족의 노예가 된 것은 자기 땅과 자기 영토를 지키지 못한 나약함과 비천함에 있는 것이지, 이 제국주의자들의 야수와도 같은 공격성과 그 침략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문화선진국은 부처, 예수, 시바, 마호메트, 알렉산더, 나폴레옹, 호머, 셰익스피어, 괴테,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마르크스, 헤겔, 칸트처럼, 어떠한 사상가와 예술가들을 배출해 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상가와 예술가들은 새로운 앎(지식)들을 창출해 내고, 그 앎의 소유권을 통해서,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모든 전쟁이나 내란보다도 사상의 혁명이 먼저 일어나고, 모든 인간의 행동의 기원에는 사상의 혁명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상가와 예술가는 전제군주이며, 최초의 입법자와도 같다고 하지 않을수가 없다.
우리 한국인들이 지난 수천 년 동안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인간 이하의 짐승들처럼 살아온 것은 우리 한국인들이 주체적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주체적으로 우리의 언어(앎)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의 한글의 창제는 ‘세계적인 사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은 이 한글의 우수성마저도 영어와 중국어와 일본어에 종속시켜버리고, 우리들 스스로가 우리 한국어를 천민의 언어로 학대를 하고 짓밟아 버리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월드스타’, ‘BK’, ‘MB’, ‘스마트’, ‘갤럭시’, ‘트위터’, ‘웰빙’, ‘플러스’, ‘에듀팟’, ‘소프트 웨어’, ‘하드웨어’, ‘멘토’, ‘롤모델’, ‘자이언트’, ‘시크릿 가든’, 등----. 이처럼 외국어(외래어)의 홍수는 우리 한국어는 천민(노예)의 언어이며, 외국어는 귀족(주인)의 언어임을 뜻하게 된다. 만일 가까운 장래에, 한국의 마르크스, 한국의 칸트, 한국의 호머, 한국의 셰익스피어, 한국의 뉴턴, 한국의 아인시타인이 나온다면, 바로 그때에는 우리 한국어도 오늘날의 영어의 지위와도 같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한국어를 통하여 새로운 앎(지식)을 창출해 내야만 하고, 또한 그것을 사상과 이론으로 정립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최초의 사물, 최초의 사건, 최초의 지상낙원, 최초의 행복은 이 사상과 이론의 성과임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한국인들이 이 노예민족의 신분을 벗어버리고 진정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이 되는 지름길은 사색을 하고, 또 사색을 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이다.
‘나는 신성모독을 범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 고로 행복하다’라는 두 개의 명제를 우리 한국인들이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 때, 바로 그때에는 우리 한국인들이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 즉, ‘고급문화인의 민족’으로 그 출발선상에 서게 될 것이다.
나는 철학을 예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또한, 나는 예술을 철학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왜냐하면 철학은 지나치게 논리적(비감성적)이기 때문이고, 또한 예술은 지나치게 감성적(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과 예술을 상호보완적으로 결합시킨 ‘철학예술가’이며, 낙천주의의 사상가이다. 철학자는 철학예술가의 충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되고, 예술가는 또한 철학예술가의 충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1960년대 판 {탈무드}----지금은 비록, 그 낡고 다 헤진 그 책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에서 다음과도 같은 교훈을 읽고, 또 그것을 나의 수첩에다가 필사해 둔 적이 있었다.
1, 잘 배운다.
2, 잘 질문한다.
3, 모든 권위를 인정하지 말라.
4, 자기를 세계의 중심에 놓아라.
5, 폭넓은 지식을 가져라.
6,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7, 현실적이어야 한다.
8, 낙관적이어야 한다.
9, 풍부한 유우머를 가져라.
10, 대립을 두려워하지 말라.
11, 창조적 휴일을 보내라.
12, 가정을 중히 여기라.
----[탈무드의 마음]에서
나는 {탈무드}의 이 교훈을 수없이 되풀이 읽으면서 낙천주의 사상가로서 나의 ‘사색인의 십계명’을 명명해 보고 싶은 욕망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 결과, {행복의 깊이} 제3권----이 책은 {어느 철학자의 행복}(국학자료원, 2000년)으로 출간된 적이 있었다----- 제2장, [산책에 대하여]에서 ‘사색인의 십계명’을 명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사색인의 십계명’은 ‘탈무드의 마음’을 수용하고 그것을 철학예술가의 관점에서 변형시킨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나는 나의 정언적 명제들에게 그 육체와 살을 부여하고, 또 그것을 나의 사색인의 십계명으로 완성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색인의 십계명’은 세계 최초의 ‘사색인의 십계명’이며, 낙천주의 사상가로서 나의 ‘실천철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깊이 있게 배우는 법, 잘 질문하는 법, 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법, 사상의 신전을 짓고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는 법,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 보이는 법, 언제나 실패의 여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법, 역사의 감각이 마비되지 않는 법, 언제나 낙천적으로 생활하는 법, 더욱더 강력한 적을 찾아나서는 법, 그리고 언제나 성실하게 생활하는 법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간은 미래의 인간이며 신에 대한 예배는 그 미래의 인간(이상적 인간)에 대한 예배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계율은 잠언적이고 경구적인 문체로 나타나고, 그것은 인류 전체의 역사와 모든 미래의 역사가 압축되어, 돌부처의 내장 속을 뚫고 들어가 만인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상과 예술이 육체라면 계율은 그 육체에 피어난 꽃이다. 나의 철학예술은 열 개의 아름다운 꽃송이이며, 이처럼 모든 철학과 예술을 타고 올라가 어느 여름날의 능소화처럼 밝고 환하게 피어난 것이다. ‘만인대 일인의 싸움’, 그 일인의 위대함은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만큼 장중하고 깊이 있는 울림을 울리게 될 것이다.
오오,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우주여!
오오, 행복하고 또 행복한 낙천주의자의 삶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