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31. 수요합심기도예배 설교문【교회신앙의 달】-교회정립주간
제목: 십자가는 도전이이다. Cross is this.
본문: 마가복음 8: 33 ~ 34절
33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3But when he had turned about and looked on his disciples, he rebuked Peter, saying, Get thee behind me, Satan: for thou savourest not the things that be of God, but the things that be of men. 34And when he had called the people unto him with his disciples also, he said unto them, Whosoever will come after me, let him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찬양: 391장(통 446장) - 오 놀라운 구세주,
446장(통 500장) – 주 음성 외에는,
449장(통 377장) – 예수 따라가며,
453장(통 506장) - 예수 더 알기 원하네,
461장(통 519장) – 십자가를 질 수 있나.
할렐루야!!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은총이 교회 공동체여러분과 교회 공동체 여러분의 가정에 그리고 교회 공동체여러분의 사업과 가정 위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오늘은 교회 공동체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5월의 넷째주간인 교회 신앙정립주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주제: 십자가는 도전입니다.
설교(sermon)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이 있고 듣고 싶지 않은 말이 있습니다. ‘부자 되세요.’‘복 받으세요.’‘행복하게 사세요.’‘번창 하세요.’‘건강 하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만일 ‘불행하세요.’‘힘들게 사세요.’‘망하세요.’‘병 걸리세요.’‘죽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다면 불쾌한 정도가 아니라 화가 치밀어 싸운다든지 그보다 더한 말로 반응할 것입니다. 듣기 싫은 말보다 듣기 좋은 말을 해줄 때 서로 좋은 관계가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같은 내용을 가지고 말할 때 어떤 반응이 예상됩니까? 만일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잘되세요, 행복하세요, 건강하세요, 즐겁게 사세요라고 한다면 교회 잘왔다 혹은 그렇게 될 것이라고 아멘하며 대부분의 교회 공동체들이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오늘부터는 그물을 버리세요. 고난을 받으세요. 희생을 치르세요. 죽을 각오를 하세요라고 한다면, 좋은 반응을 보이기보다 무겁게 느끼며 긴장하는 교회 공동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가 풀어야할 문제는 좋은 말을 들으며 즐기는 인생이 아니라 냉혹한 말을 듣고 견뎌내야 할 인생에 대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려할 때 필연적 과정이며, 성숙한 믿음으로 향할 때 거쳐야 될 신앙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교회 공동체들이 아직 해결되지 않고 방황하는 문제가 바로 ‘어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어디로, 즉 어느 방향으로 가야 옳고 바른 길인가를 알아야 하는데, 방향을 몰라 망설이다가 결국 잘못된 길로 들어서 인생을 실패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그분을 따르며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뜨거운 욕조에 들어앉아 편안하고 늘어지며 번거롭고 여유롭게 행복감에 젖고 감각적으로 도취되는 느낌 정도(Packer,‘Hot Tub Religion’영국 신학자)로 오해하는 오늘의 한국교회 분위기는 더 이상 예수님과 동행할 수 없는 원인이 되고 있음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며 정신 차려야 합니다. 교회 안의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과 동행하려고 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하려고 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면서도 점점 마음과 몸은 교묘하게 피하고 싶어 하고, 어느 정도는 세상이라는 줄을 놓지 않으면서 붙잡고 가려고 하는 이중적 성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우리 교회 공동체들에게 찔림을 주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when he had called the people unto him with his disciples also, he said unto them, Whosoever will come after me, let him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34절. 이 말씀은 오늘의 현대 교회 공동체들에게 는 괴로운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이 말씀은 장미를 띄우고 아로미(aromg)향을 풀어놓은 욕조에 행복을 만끽하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욕조에 머리를 넣고 숨을 못 쉬도록 만드는 말씀입니다. 온전히 헌신된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세상 속에 세워져 있다고 해도 세상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고,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순임을 따르지 않으려면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려면 그 길을 가지 싫어도 가야하고, 몰라도 가야 되고, 할 수 없을 것 같아도 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사도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when he had called the people unto him with his disciples also, he said unto them, Whosoever will come after me, let him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34절.라는 말씀은 제자론의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하기까지의 과정이나 결과가 너무 엄청난 사건인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나를 누구라하느냐. Whom do men say that I am?막8:27~29절 27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27And Jesus went out, and his disciples, into the towns of Caesarea Philippi: and by the way he asked his disciples, saying unto them, Whom do men say that I am? 28And they answered, John the Baptist; but some say, Elias; and others, One of the prophets. 29And he saith unto them, But whom say ye that I am? And Peter answereth and saith unto him, Thou art the Christ.)과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막8:31절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And he began to teach them, that the Son of man must suffer many things, and be rejected of the elders, and of the chief priests, and scribes, and be killed, and after three days rise again.)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개인만이 아니라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제자들 그리고 추종자들 모두가 버리지 말고 들어야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특히 수제자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꾸짖으시면서 까지 하신 말씀이기에 더욱 놓칠 수 없이 중요한 말씀입니다. 또한 왜 사도 베드로가 실패했는지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에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교회 공동체들도 때로는 사도 베드로처럼 무너지는 때가 있고, 꾸짖음을 받을 삶의 순간이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 길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나의 시야를 좁혀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12제자들은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부르신 제자들에게 앞으로 제자로서의 기준이 되는 원칙에 대해 여러 차례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첫째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제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9:35절에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And he sat down, and called the twelve, and saith unto them, If any man desire to be first, the same shall be last of all, and servant of all.
둘째는 소유를 버려야 재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14:33절에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So likewise, whosoever he be of you that forsaketh not all that he hath, he cannot be my disciple.
셋째는 열매를 많이 맺으면 제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15:8절에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Herein is my Father glorified, that ye bear much fruit; so shall ye be my disciples.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제자가 되어야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제자들에게는 낮아지고, 소유를 버리고, 열매를 맺는 것도 중요한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극도로 유념해야할 것으로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특히 공관복음서(Synoptic Gospeis,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저자의 공통적 시작 저술)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부름 받은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말씀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16: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Then said Jesus unto his disciples, If any man will come after me, let him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10:38절에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And he that taketh not his cross, and followeth after me, is not worthy of me.
마가복음8:34절에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And when he had called the people unto him with his disciples also, he said unto them, Whosoever will come after me, let him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누가복음14:27절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And whosoever doth not bear his cross, and come after me, cannot be my disciple,9:23절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And he said to them all, If any man will come after me, let him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daily, and follow me.
예수님은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제자, 예수님과 동행하는 제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그러면 자기 부인은 무엇입니까? 자기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면 예수님은 드러날 수 없는 원리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서 나타나는 길은 나 자신이 죽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은 죽고 예수는 사는 ‘자기 사망, 예수 실현’의 의식으로 날마다 주의 길을 따랐습니다.
<자기 사망>
고린도전서15: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I protest by your rejoicing which I have in Christ Jesus our LORD, I die daily.
<예수 실현>
고린도후서4:11절에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For we which live are alway delivered unto death for Jesus' sake, that the life also of Jesus might be made manifest in our mortal flesh.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를 잘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따른 것은 차이가 있고 조건이 따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영접하고 환영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 제자가 되는 것은 조건이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영접하고 환영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른 것, 제자가 되는 것은 조건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잘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는 믿음을 말하고 계십니다. 제자란 예수님을 따른 자인데 예수님과 동행하며 가려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내려놓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완전하게 죽이는 자기 사망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것을 날마다 실천해야 합니다. 어쨌든 자기 부인에 대한 말씀은 다음에 더욱 깊이 있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의 초점은 그 다음에 있게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의 중심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매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풀어보기 전에 십자가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도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믿는 십자가’가 있고, ‘지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믿는 십자가’는 우리 교회 공동체들의 죄와 연관된 것으로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구원의 질서-공의, 사랑, 지혜)과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성취(구원의 증거-흘리신 피)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속성>
로마서3:25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Whom God hath set forth to be a propitiation through faith in his blood, to declare his righteousness for the remission of sins that are past, through the forbearance of God;참조 로마서5:18절에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Therefore as by the offence of one judgment came upon all men to condemnation; even so by the righteousness of one the free gift came upon all men unto justification of life.
<예수님의 구원 징표>
골로새서1:20절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And, having made peace through the blood of his cross, by him to reconcile all things unto himself; by him, I say, whether they be things in earth, or things in heaven.
믿는 십자가는 구원과 필연적 관계로써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가장 축복된 사건이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십자가가 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할 때 조건으로 등장하는 십자가를 가리켜 예수님은 ‘지는 십자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적어도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을 따를 때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제자의 개념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교회에서 구원의 확신의 단계를 넘어선 사람들, 즉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의 부류가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려는 사람,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의 그룹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자기 십자가란 고난의 의미입니다.
제자가 되는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확실하게 가르쳐 주신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33절에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But when he had turned about and looked on his disciples, he rebuked Peter, saying, Get thee behind me, Satan: for thou savourest not the things that be of God, but the things that be of men.라는 정말 끔찍한 말씀을 사도 베드로는 들었습니다. “너는 사탄이다.” 이런 말은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될 말입니다. 특히 제자가 될 사람이 이런 말을 듣는다면, 이미 그는 더 이상 제자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 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려는 본질은 사도 베드로를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사도 베드로가 정말 사탄이라면, 죽이든지 몰아내든지 지하철장에 가두어야 합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예수님도 사탄 방 조직에 해당됩니다. 사탄은 예수님과 적입니다. 그런데 적과 동침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를 꾸짖어.rebuked Pete.r33절라는 것을 놓칠 수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훈련을 시키시는데 호통을 치시고 가장 심하게 야단을 치십니다. 그것이 사탄입니다. 아무에게나 이런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파는 자에게 저 속에 마귀가 들어갔다.Devil came for my batch.고 했을 때, 가룟 유다에게 사용했던 그 말씀입니다(요13:2절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And supper being ended, the devil having now put into the heart of Judas Iscariot, Simon's son, to betray him;).그런데 왜 예수님은 사도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은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에 사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앞의 31~32절을 보셔야 합니다. 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1And he began to teach them, that the Son of man must suffer many things, and be rejected of the elders, and of the chief priests, and scribes, and be killed, and after three days rise again. 32And he spake that saying openly. And Peter took him, and began to rebuke him.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는다고 했을 때 예수님을 붙들고 강하게 항변했습니다. 그러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고 죽는 일이 있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따라온 것이, 앞으로 가는 길이 그런 길이라면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망을 넘어 절망이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는 비극이기에 강하게 예수님께 대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르면서 생각한 것은, 유명하고 큰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러한 사도 베드로의 심중을 파헤치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22:24~27절에 24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4And there was also a strife among them, which of them should be accounted the greatest. 25And he said unto them, The kings of the Gentiles exercise lordship over them; and they that exercise authority upon them are called benefactors. 26But ye shall not be so: but he that is greatest among you, let him be as the younger; and he that is chief, as he that doth serve. 27For whether is greater, he that sitteth at meat, or he that serveth? is not he that sitteth at meat? but I am among you as he that serveth.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준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를 지거나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십자가를 말하면 ‘지는 십자가’가 아니라 ‘피하는 십자가’ 즉 고통이나, 고난이나, 시련이나, 긴장감이나. 짊어지는 것이 없이 가는 것을 원했습니다. 또한 ‘무거운 십자가’는 싫고 ‘가벼운 십자가’가 좋았습니다.
어깨 위에 앉힌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면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가볍게 살고 싶었습니다. 웃으면서 즐기면서 순탄하게 평안하게 스트레스나 압박감 없이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제자가 되는 것임을 몰랐습니다. 고난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고난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고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자신이 쓴 베드로전서에서 그의 핵심단어를 ‘고난’(무려 15회 사용)으로 계속해서 반복했습니다. 그 만큼 고난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배웠기에 자신도 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1:11절에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Searching what, or what manner of time the Spirit of Christ which was in them did signify, when it testified beforehand the sufferings of Christ, and the glory that should follow,2:19~20절에 19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19For this is thankworthy, if a man for conscience toward God endure grief, suffering wrongfully. 20For what glory is it, if, when ye be buffeted for your faults, ye shall take it patiently? but if, when ye do well, and suffer for it, ye take it patiently, this is acceptable with God,3:14,17절에 14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7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4But and if ye suffer for righteousness' sake, happy are ye: and be not afraid of their terror, neither be troubled; 17 For it is better, if the will of God be so, that ye suffer for well doing, than for evil doing,4:1,13,16절에 1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13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6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Forasmuch then as Christ hath suffered for us in the flesh, arm yourselves likewise with the same mind: for he that hath suffered in the flesh hath ceased from sin; 13But rejoice, inasmuch as ye are partakers of Christ's sufferings; that, when his glory shall be revealed, ye may be glad also with exceeding joy. 16Yet if any man suffer as a Christian, let him not be ashamed; but let him glorify God on this behalf.
어쩌면 사도 베드로 는 예수님 이후의 제2의 고난의 종으로 살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정말 되고 싶은 모습입니다. 그는 고난이 아름답다고, 복 있는 자라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갑옷이라고, 즐거워하라고, 영광이라고 말하며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고 싶어 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들이 예수님과 원하는 것보다 사람이 원하는 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나 뜻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영광은 고난이 있어야 오는 것입니다(벧전1:11절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Searching what, or what manner of time the Spirit of Christ which was in them did signify, when it testified beforehand the sufferings of Christ, and the glory that should follow.).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불편함이 없는, 고통이 없어야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다면 그는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아직 변화되기 전의 사도 베드로입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지발적인 마음에서 지셔야 합니다(willing heart). 그리고 매일 십자가를 지는 개인적 경험을 해야 합니다(individual experience). 그 경험은 다른 어떤 경험보다 소중한 경험입니다.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갖고, 개인적으로 경험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최고의 아름다움입니다. 자기 십자가란 고난을 짊어지는 것입니다(히13:12~13절 12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2Wherefore Jesus also, that he might sanctify the people with his own blood, suffered without the gate. 13Let us go forth therefore unto him without the camp, bearing his reproach.).
둘째, 자기 십자가란 비용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선물을 받으면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는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은사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즉 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비용을 지불해야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고 도망을 간다면 그는 결코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도망을 간 전범자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면서 도망을 갔습니다(마26:31~35절 31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31Then saith Jesus unto them, All ye shall be offended because of me this night: for it is written, I will smite the shepherd, and the sheep of the flock shall be scattered abroad. 32But after I am risen again, I will go before you into Galilee. 33Peter answered and said unto him, Though all men shall be offended because of thee, yet will I never be offended. 34Jesus said unto him, Verily I say unto thee, That this night, before the cock crow, thou shalt deny me thrice. 35Peter said unto him, Though I should die with thee, yet will I not deny thee. Likewise also said all the disciples,막14:27~31절 27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27And Jesus saith unto them, All ye shall be offended because of me this night: for it is written, I will smite the shepherd, and the sheep shall be scattered. 28But after that I am risen, I will go before you into Galilee. 29But Peter said unto him, Although all shall be offended, yet will not I. 30And Jesus saith unto him, Verily I say unto thee, That this day, even in this night, before the cock crow twice, thou shalt deny me thrice. 31But he spake the more vehemently, If I should die with thee, I will not deny thee in any wise. Likewise also said they all,눅22:34절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And he said, I tell thee, Peter, the cock shall not crow this day, before that thou shalt thrice deny that thou knowest me,요13:36~38절 36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6Simon Peter said unto him, Lord, whither goest thou? Jesus answered him, Whither I go, thou canst not follow me now; but thou shalt follow me afterwards. 37Peter said unto him, Lord, why cannot I follow thee now? I will lay down my life for thy sake. 38Jesus answered him, Wilt thou lay down thy life for my sake? Verily, verily, I say unto thee, The cock shall not crow, till thou hast denied me thrice.). 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해야 했습니까? 십자가의 비용, 즉 예수님을 따르려면 불가피하게 지불해야 될 것을 생각하니 베드로 사도는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비용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제자훈련을 받는 사람들에게 비용지불을 배우기 위해서 열심을 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잘 따라가서 안락하고 잘되고 즐겁고 편안하고 보호받고 건강하고 번영하는 것을 기대하고 갑니까? 교회 공동체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기 십자가는 비용의 지불 없이는 ‘나를 따를 수 없다.I can not follow me.’는 말씀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희생입니다. 자기 십자가란 희생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면서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14:26~30절입니다.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26If any man come to me, and hate not his father, and mother, and wife, and children, and brethren, and sisters, yea, and his own life also, he cannot be my disciple. 27And whosoever doth not bear his cross, and come after me, cannot be my disciple. 28For which of you, intending to build a tower, sitteth not down first, and counteth the cost, whether he have sufficient to finish it? 29Lest haply, after he hath laid the foundation, and is not able to finish it, all that behold it begin to mock him, 30Saying, This man began to build, and was not able to finish.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비용을 계산하지 않고 망대를 지으려는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사를 시작하고 완공하지 못하면 수치가 되고 비웃음을 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비용 계산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가 되는 것,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왜 비용 계산을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반장이 되고 동장이 되고 국회위원이 되고 장관이 되고 의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판사가 되고 CEO가 되고 등등. 이 세상에 하찮은 것을 하려해도 비용을 계산하고 덤벼들면서,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위해서는 무작정, 무비용으로 호기심만 가지고 자신의 목적만을 추구하기 위해서 쉽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져야할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몸, 시간, 물질, 가정, 직장, 친구, 인생의 즐거움, 자신의 재능, 자신의 소원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날 수치를 당하고 비웃음을 당하게 되는 날이 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교활하게 자신을 포장하여 예수님을 따르면서 삶의 향상과 하려한 날의 꽃을 받는 흥분이 아닙니다. 예수임을 따른 것은 부와 행복을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거절이며 포기이며 희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것은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먹는 것처럼 골라잡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는 동행은 자기 십자가를 희생의 즐거움으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
셋째, 자기 십자가란 제거의 의미입니다.
‘제거한다’(remove)는 것은 교회에서 잘 사용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말할 때 반드시 이해해야 될 용어입니다. 제거한다는 말은 단호하게 없앤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에게 돌아올 모든 갈채와 자랑과 명예와 영광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길과 하나님의 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자기의 몫과 하나님의 몫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몫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하고 도망간 후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 갈릴리바다의 고기잡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도 베드로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21:15~19절입니다.
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15So when they had dined, Jesus saiph to Simon Peter, Simon, son of Jonas,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He saith unto him, Yea, Lord; thou knowest that I love thee. He saith unto him, Feed my lambs. 16He saith to him again the second time, Simon, son of Jonas, lovest thou me? He saith unto him, Yea, Lord; thou knowest that I love thee. He saith unto him, Feed my sheep. 17He saith unto him the third time, Simon,son of Jonas, lovest thou me? Peter was grieved because he said unto him the third time, Lovest thou me? And he said unto him, Lord, thou knowest all things; thou knowest that I love thee. Jesus saith unto him, Feed my sheep. 18Verily, verily, I say unto thee, When thou wast young, thou girdest thyself, and walkedst whither thou wouldest: but when thou shalt be old, thou shalt stretch forth thy hands, and another shall gird thee, and carry thee whither thou wouldest not. 19This spake he, signifying by what death he should glorify God. And when he had spoken this, he saith unto him, Follow me.
사도 베드로에게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은 간단했습니다. ‘누구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하는가? Must you live for whose glory?’입니다(19절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This spake he, signifying by what death he should glorify God. And when he had spoken this, he saith unto him, Follow me.).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인가에 대해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려면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거하고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는 십자가를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죽는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그 십자가를 져야겠다는 생각보다 자기의 생각을 내세우며 다시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의 인물이 있습니다. 보잘 것 없었던 사람이며 무명인으로 예수님 앞에 나타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행하실 때 너무 힘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억지로 지웠습니다. 마가복음15:21절에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And they compel one Simon a Cyrenian, who passed by, coming out of the country, the father of Alexander and Rufus, to bear his cross.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제자이면서도 자신의 길로 가버렸지만 시골에서 올라온 그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고, 예수님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예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사도 베드로의 길이 아니라 그레네 시몬의 길입니다.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면 십자가가 무엇인지 느끼게 되는 것이고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왜 성경에 단 한 줄이지만 그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를 통해 주려고 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자신의 모든 것을 제거해야만 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란 제자가 되기 전의 삶의 습관과 생활 방식, 익숙한 삶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 식으로 표현하면 ‘그물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물을 버리고 따르는 것입니다. 만일 그물을 버리지 않고 따르면, 어느 날 다시 그물의 생각에 사로잡혀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게 됩니다.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곧 그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마4:20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And they straightway left their nets, and followed him.-그때 완전히 버리는 것).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첫째, 고난의 관점으로 의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둘째, 희생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셋째 자기십자가란 제거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항상 십자가를 지고 가는 평생의 길입니다. 그런데 유혹이 찾아옵니다. 고난이라는 것, 무거운 짐이라는 것, 감당하기 힘이 든다는 것 때문에 잠시 내려놓고 싶어 핮ㅂ니다. 그러다가 닭이 우는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아파하며 다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연약한 우리 교회 공동체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동행을 하는데 우리 교회 공동체들에게 십자가가 있습니까? 내려놓으려고 하지도 말고, 다른 이에게 지우려고 하지도 말고,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그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십자가는 결코 슬픔이나 아픔이 아니라 사랑이며 기쁨이며 영광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가야합니다(그물을 보지마세요). 십자가를 붙들고 가야 합니다(십자가를 놓치지 마세요). 십자가를 지고 가여 합니다(억지로라도 지고 가세요). 십자가를 질 때 비로소 십자가의 능력이 임하게 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의 도전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도전입니다. 이 도전은 최고의 도전이며 가장 위대한 도전입니다.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도전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벧전4:13절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But rejoice, inasmuch as ye are partakers of Christ's sufferings; that, when his glory shall be revealed, ye may be glad also with exceeding joy.). 아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 공동체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고난의 관점으로 의식을 바꾸는 것과, 희생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자기 십자가린 제거의 의미임으로, 부르심의 기회를 응답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시어 나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가 나의 주님과 구세주와 그리스도임을 전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침기도: 지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우리교회 공동체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고난의 관점으로 의식을 바꾸는 것과, 희생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란 제거의 의미임으로, 부르심의 기회를 응답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시어 나의 죄를 회개하고,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과 구세주요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전파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