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 장판부터 반도체의 절연지까지
한지 위에 태어났다는 표현은 한지로 만든 장판지 위에서 생을 시작했다는 의미이며, 그 속에서 산다는 것은 한지 벽지와 문창호지에 싸여 생활함을 말한다. 만진다는 것은 한지 위에 쓰이고 인쇄된 서책을 가까이함이요, 그것에 싸여 간다는 것은 죽음을 맞이할 때 염습(殮襲)을 위해 한지에 싸여 땅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과연 세계 어느 민족 중에 우리 같은 이들이 있을까. 방바닥에 장판지라는 노란 종이를 깔고 종이옷을 입으며 살아 본 적이 있겠는가! 비바람 몰아치는 황야에 유둔지(油芚紙)로 군용 천막을 만들고, 전시에는 갑의지(甲衣紙)로 조총이나 화살을 막는 종이 갑옷을 제작해 입었다.
이동 중 가마 안에서 사용했던 종이 요강, 종이 신, 종이 우의, 종이 옷장, 종이 책장, 종이로 만든 촛대, 종이 수통 등 모든 생활용품을 종이로 만들어 쓴 민족은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종이 위에 쓰고, 색칠한다. 끝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꾸미어 물건을 포장해 평면 혹은 입체를 만들어 사용한다. 그러나 종이에 대해서 좀 더 깊이있게 생각하고 접근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단지 있기 때문에 사용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전자시대가 도래하여 종이의 존재가 사라질지 모른다고들 하나 현재 종이의 존재는 우리 문화 생활이나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요 불가결한 재료이다. 첨단 소재인 반도체 안에도 절연지라는 특수용도의 종이가 사용되며 이 소재가 없으면 반도체를 만들 수 없다. 이때 사용되는 종이의 재질도 한지와 같다. 이와 같이 새로운 용도의 개발에 따라서 한지는 후대까지도 이어져 나갈 수 있는 우리의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역사적 전통을 가진 한지, 현대사회 속에서 사라져
종이는 각 나라마다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제작 방법 또한 천차만별이다. 역사적 배경과 문화 안에서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 종이 제작과 종류에 차이가 생긴다. 원래 종이는 동양에서 처음 발견되어 서양으로 전파되었다가, 다시금 기계화를 통해 대량 생산화 돼 서양에서 동양으로 전해진 동서 문화의 화합체이다.
우리나라에서 한지가 만들어진 시기가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삼국시대부터 종이가 있었으며, 그것이 통일신라시대 ‘무구정광다라니경’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과 함께 한지의 존재가 입증됐다. 한지는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이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왔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한지는 쓰임새와 용도, 제작방법, 크기, 원료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누어진다. 『세종실록지리지』, 『산림경제』, 『임원십육지』 등의 문헌에 나오는 조선시대 한지의 종류는 100가지 이상 된다.
우리에게는 모든 시대마다 그 당시를 대표하는 우수한 지질의 종이 유물이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그 유물들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우리의 한지문화가 현재 우리 생활 속에서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무관심과 방치 속에 수백 년간 이어온 우수한 한지문화가 단절돼 유물만이 존재하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우수한 한지 문화를 지니고 있는 우리 자신이 한지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나 소중함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우수한 한지
현재 한지의 사용처는 서화용지 정도다. 세계가 인정한 우수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도 그것을 유지할 시장이 없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우수한 문화 중 하나인 전통 한지의 시장은 없는 것일까? 오히려 한지의 발전 가능성은 무한하다. 그 예가 일본의 전통 화지 상품화다. 일본은 우리에게 배운 제지술을 수백 년 동안 독특한 방식으로 자기화하고 발전시켜 현대에 맞는 여러 시장을 확보하고 있으며 세계에서도 그 품질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우리의 한지는 일본 한지보다 뛰어나다. 다만 더 깊게 발전되지 않았을 뿐, 그 가능성은 일본의 화지(和紙)를 능가한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수백 가지 한지 종류를 보면 전통 한지의 가능성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특히 전통문양이 들어가 있는 자연염색한지의 아름다움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모자람이 없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 종이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기 힘들만큼 다양한 종이 유물을 가지고 있다. 또한 우리만이 지니고 있는 외발뜨기라는 독특한 전통 초지법을 갖고 있다. 이는 한지 틀(나무로 만든 발)을 한 개의 줄에 매달아 장인이 앞뒤, 좌우로 흔들어 닥섬유가 엇갈리게 결합하는 제조법이다. 뿐만 아니라 후처리 과정인 도침이라는 독특한 지류 가공법도 보유하고 있다. 도침은 나무로 종이를 두드리는 것으로 한지의 장점인 매끈 하고 윤기 나는 표면을 완성하는 공정이다. 이처럼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한지의 전통 제조 기술 방법도 살려 나가야 하는 시점이다.
우리는 미지의 광맥을 더듬어 광석을 캐내듯 선조들이 물려준 전통문화를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연의 산물인 한지를 더욱 발전시켜 후손들에게 전달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모든 문화는 ‘만드는 사람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쓰고 즐기는 사람의 것이며 그래야만 그 문화가 생활 속에 남아 있을 수 있고 좀 더 발전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가 고유의 우리 것을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고 써야만 우수한 한지 문화가 후대에까지 남을 수 있고, 나아가 새로운 한지 문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이승철(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