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희 시인의 시집 『아화』
시인의 말
다섯 번째 시조집 『아화』는 발표작, 미발표작
반반인 단시조집으로 묶었다.
보이는 게 너무 많아 말이라도 줄이기로 했다.
2024년 5월
윤경희
약력
경주에서 태어나 2003년 《중앙일보》 지상백일장 월 장원과 함께 시조에 입문, 2003년 종합 문예지 《생각과 느낌》 수필 등단, 2006년 만해사상실천선양회 《유심신인문학상》 시조로 등단했다. 시조집 『사막의 등을 보았다』 『태양의 혀』 『붉은 편지』 『비의 시간』, 시선집 『도시 민들레』가 있다. 이영도시조문학상신인상, 대구예술상, 대구문학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지독한 변명
자른 뿔이 솟네 자르지 말걸 후회하며
굳이 자르지 않아도 썩어 문드러질 일
까칠한 혓바닥의 돌기 솟았다가 가라앉았다가
아화
꽃이 핀 듯 아니 핀 듯 당신 얼굴 같은
봄이 온 듯 아니 온 듯 당신 기척 같은
오늘도 엊그제 같네, 꽃비 내리는 붉은 언덕
아화 2
물뱀이 스쳐갔다, 흠뻑 젖은 운동화가
잠시 마르는 동안 감나무도 스러졌다
문패도 없는 하늘가 뭇별들은 흩어지고
달의 문
나는 너의 내면을 도무지 읽지 못한다, 문밖에 있는
시간 못내 까마득하여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빈 허공을 지운다
아화 3
-꿈
손 내밀면 산나리꽃 두런두런 피는데
황소 등에 앉은 저녁 슬렁슬렁 지는데
막차를 타고 온 어둠살 허둥지둥 가는데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두고 간 전단지 속엔 머리 잘린 세일천국
보이지 않는 혁명
서로 밟아야 사는
추락의 끝은 어디쯤일까, 푸른 날개가 찢어졌다
추천사
단시조는 응축이 생명이다. 무한히 펼쳐지는 자연의 변화와 인간사의 파랑을 3장 6구에 담아내는 고도의 압축미학에 창조의 열쇠가 담겼다. 윤경희 시인의 시야에는 다양한 체험의 단층이 인생의 축도로 다가온다. 구름 뒤로 번지는 달무리의 음영이 첫사랑 사내아이의 아련한 촉감으로 다가오고, 사루비아꽃 피고 지는 순환에서 가고 오지않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체감한다. 뒤축이 닳은 신에서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아버지의 발소리를 연상한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사에서 생의 진실을 떠올리는 장면은 참으로 절묘하다. 붕어빵 굽던 여인이 사라진 자리에 붕어빵 같은 목련이 피어난다고 상상하거나, 드라이플라워를 통해 빛바랜 시간 위에 눈물이 마르도록 그리움을 삭이는 사랑의 진실을 표현한다든가, 저녁 식탁에 놓인 두부 한 모를 무두질과 담금질을 거쳐 오롯이 마련된 반듯한 음식으로 전환하는 방법 등이 그러하다. 그중에도 나는 특히 「무심사」의 운율과 미학을 사랑한다. "변방에 긴 머리 푼 노숙의 구름"을 "한여름/이승과 저승 사이//덩그렁 적막 한 채"로 표현한 압축미학의 정점에 경의를 표한다.
- 이숭원 李崇源, 문학평론가. 서울여대 명예교수
해설
본질적 진실과 만나는 리듬
김남규(시인)
윤경희 시인의 이번 단시조들은 어떤 힘 또는 미학이 있는가. 이번 시집에서 군더더기 없이 계절의 경계 혹은 계절감만 충일하게 보여주기 위해 시인이 단시조를 전략적으로 선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집에서는 특히, 계절의 경계에 대한 시인의 예민한 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으며 적당히 분절되지도 않는다. 흔히 말하는 3월, 7월, 9월, 11월 등의 월령으로 4계절의 시작과 끝을 나누기도 마땅치 않다. 더욱이 기후위기로 인해 비정상적인 날씨가 자주 나타나며 봄과 가을 또한 무척 짧아지고 있다. 그러나, 시는 계절을 나누는 동시에 계절의 경계를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으니, 이제부터 시인을'계절의 경계를 나누는 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윤경희 시인은 현실로부터 이념 혹은 관념을 획득하기 위해 사실주의가 아닌 알레고리를 선택한다. 이때 시로 촉발된 사물과 그에 따라 구성된 시 - 세계는 모두 윤경희 시인만의 리듬이자 낭만적 이데아일 것이다.
윤경희 시인은 하나의 사물과 단어로 계절의 경계를 나누고, 감각-환유의 방식으로 상상력에 근거한 환상 세계를 보여주면서, 삶의 비극성과 시대정신을 표출하는 알레고리를 시집 곳곳에 배치해두었다. 그러나 이때, 윤경희 시인은 우주를 한 면에 담는 거울이 아니라, 개별 삶을 비추는 거울 조각들을 시집 전체에 펼쳐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