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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언어] Amor fati(아모르 파티)
이제는 어느 트로트 가수의 노래로 더 잘 알려진 “Amor fati(아모르 파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라틴어로 철학자 니체가 강조한 개념입니다. 신앙 안에서 “운명”이라는 개념은 “하느님의 섭리(Providentia Dei)”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Amor fati”는 단순히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삶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삶 속에서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주하게 되는 시련과 고난, 상처들도 결국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 안에서 선으로 열매 맺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에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완전한 사랑을 받아들이는 태도였습니다.
“Amor fati”를 운명론자의 외침으로 남겨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신뢰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신앙인의 모습으로 만들어가기를 희망합니다.
[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피정은 무엇인가요?
연일 이어지는 무더위 가운데 8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미 다녀오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여름이 되면 많은 분들이 휴가 계획을 세우며 더위를 피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혹시 편안히 쉬려고 떠났던 휴가에서 오히려 더 피곤함만 안은 채 일상으로 돌아온 경험이 있지는 않으신가요?
분주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작은 쉼표가 필요합니다. 기계조차도 오랜 가동 후에는 멈춤의 시간이 필요하듯,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인간은 하던 일을 내려놓고 쉬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예수님의 말씀처럼 외딴곳으로 가서 쉬는 방법으로, 가톨릭교회 안에는 ‘피정’이 있습니다. 피정은 ‘피세정념(避世靜念)’ 또는 ‘피속추정(避俗追靜)’의 준말로, 신자들이 영성 생활에서 중요한 결정이나 새로운 쇄신을 위하여 일상에서 벗어나 고요한 곳에서 묵상과 성찰, 기도 등 종교적 수련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멈추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고, 쉬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기에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매년 의무적으로 피정을 해야 합니다.(교회법 제276조, 제663조 참조) 일상을 벗어나 외딴곳에서 쉬어가며 주님과 함께하는 피정의 시간이 꼭 필요한데, 이는 사실 하느님 백성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언제나 기도하셨습니다.(마태 26,36-46; 마르 1,35; 루카 6,12 참조)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헤아리셨고, 그 뜻을 실천할 힘과 용기를 청하셨습니다. 피정은 내면의 결핍을 채워주실 수 있는 하느님 안에 깊이 머무는 시간이며,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됩니다.
8월의 첫날을 축일로 지내는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성인은 주님과의 만남을 바라는 이들에게 다음의 말을 남겼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오라(Intrate Toti), 홀로 머물러라(Manete Soli), 다른 사람이 되어 나가라.(Exite Alii)”
진정한 쉼을 원하신다면, 영혼의 힘을 되찾고 회복할 수 있는 ‘피정’을 해보시길 초대합니다. 내 앞에 놓인 많은 일과 고민에만 매이지 않고, 참된 휴식을 건네시는 주님 안에 온전히 머물러 다시금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고, 희망의 발걸음을 내딛으시길 기도드립니다.
[가톨릭 신학] 가톨릭교회가 하느님 말씀의 기준입니다
한국인은 종교성이 매우 풍부한 민족입니다. 예전엔 작은 마을에도 사당, 성황당 등이 있었고, 무당의 역할은 그 마을 길흉화복의 중심에 서서 굿판을 열거나 점을 치는 것은 물론, 사람들 마음을 치유하고, 때론 상담자 역할이나 정보 공유의 중심이었습니다. 예전 그 자리엔 오늘날 빨간색 십자가가 자리합니다. 작은 마을이라도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들이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고, 대부분 긍정적 역할을 담당합니다. 천주교는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습니다. 성당에는 상주 사제가 있어야 하는데, 사제 숫자가 넉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심성이 강한 우리나라 사람에게 종교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오늘날 이단들과 사이비 종교들이 활개를 칩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고학력인 우리 사회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아마도 삶이 편리해지고 윤택해졌지만, 더 행복해지거나 더 만족스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소외감, 즉 다른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외롭고 힘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이단의 손길과 유혹은 아주 달콤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실 이단의 유혹자가 철저한 준비와 작정을 하고 다가온다면 한 개인이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 악에는 함부로 맞서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회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고, 문제가 생기면 교회와 사목자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이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 평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요한 20,31 말씀처럼,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공동번역)입니다. 예수께서 하느님 아들이고 구세주이심을 믿고, 오직 그분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그리스도교입니다. 만일 누군가 예수님이 하느님이 아닌 것처럼 주장한다면, 예를 들어 예수님의 구원 사업이 실패해서 보혜사 성령이 자신을 보냈다고 주장하거나, 성경이나 신앙의 내용을 맘대로 해석하거나, 성경의 특정한 내용을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 등은 이단입니다.
지금 당장 세상을 바꾸고, 자신의 처지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강한 사람은 이단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동시에 주어진 현실의 삶을 부정하고 죽은 다음의 영생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도 이단에 빠질 위험이 높습니다. 구원을 지나치게 현세화하거나 지나치게 내세화하는 것이 이단의 특징입니다. 구원은 인간 맘대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 뜻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합니다.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몸엔 이롭고, 바른말은 귀엔 거슬리지만 삶엔 이롭다는 격언처럼, 달콤한 유혹의 말을 피하고, 삶에 진정 유익이 되는 말, 특히 교회의 가르침에 귀와 마음을 향해야 합니다.
[저는 믿나이다] (39)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분
누군가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르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귀를 막으십시오. 그분은 다윗의 후손이시고 마리아에게서 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먹고 마시셨으며 참으로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수난 하시고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것들이 보는 앞에서 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아버지께서 그분을 일으키셨으니 예수님은 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졌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분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그분을 통하여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분을 떠나서 우리는 참 생명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무신론자, 곧 믿지 않는 이들은 그분이 수난하신 것은 가현(假現)일 뿐이라고 말하는데 실상 가현적인 사람은 바로 그들입니다. (⋯) 정말 그렇다면 저는 헛되이 죽는 것이고 주님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트랄레스인들에게 보낸 편지」 9―10장, 박미경 역주, 교부 문헌 총서 13 「일곱 편지」, 분도출판사)
“여러분은 예수 가현 이단자들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가능하다면 만나는 일조차 없도록 하십시오. 다만 저들이 어떻게든 회개하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이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만, 우리의 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 안에서는 될 수 있습니다. (⋯) 저들은 우리에 관해서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저를 칭찬한다 할지라도 나의 주님께서 육신을 지니셨음을 인정하지 않고 그분을 모독한다면, 그것이 저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지요? 예수께서 육신을 지니셨음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완전히 그분을 부인하는 자이니, 오히려 그야말로 주검을 지니고 다니는 자에 불과합니다. (⋯) 예수 가현 이단자들은 성체와 기도를 멀리합니다. 저들은 성체가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살임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성체야말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수난 하신 그리스도의 살이요, 아버지께서 자애로이 일으키신 그리스도의 살인데도 말입니다.”(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스미르나인들에게 보낸 편지」 4―7장, 같은 책)
시리아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는 예수님은 인간으로 강생하지 않고 단지 인간처럼 보이게 육신을 빌려왔을 뿐이며, 그가 겪은 십자가 수난의 고통 역시 가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가현론자들에 맞서 성 클레멘스 1세 교황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신 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 에보디우스에 이어 제3대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사목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그가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고, 요한 사도의 직제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불렀고, 교회 역사상 최초로 ‘가톨릭교회’라는 표현을 쓴 인물입니다. 그는 105~135년 사이에 로마에서 맹수들의 먹이가 되어 순교합니다. 그는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다”(콜로 2,9)는 교회의 신앙 고백을 순교로 증언했습니다.
바오로와 요한 사도의 영향을 받은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예수님을 “육신이 되신 하느님”이라 표현하며 ‘참인간’이심을 단호하게 증언합니다. 그는 참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고자 인간 본성을 취하시어 ‘강생’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에게 있어 가현론자들처럼 하느님의 강생을 부인하는 것은 구원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더욱 공고히하기 위해 “아버지와 우리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서두 인사에서)라 고백하면서 그리스도께 완전한 신성을 부여합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으로부터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분이시며 마지막 날에 오실 분이라고 밝힙니다.(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마그네시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6,1 참조, 같은 책)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강조하기 위해 ‘삼위일체 하느님’을 언급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간과 공간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신다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성부·성자·성령을 언급합니다.
이러한 성 이냐시오의 가르침은 가현론자뿐 아니라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에우티케스주의나 인성만을 강조하는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단죄하고, 예수 그리스도 한 위격(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이 구별 없이 동일하게 결합돼 있다는 칼케돈 공의회의 신앙 고백문에 결정적 영향을 끼칩니다.
성경은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찬양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생활교리] ‘사랑’으로 충만한 전능하신 하느님?
믿는 이들은 어떤 이유로 간절한 바람과 지향을 모아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는가?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즐겨 들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탈출 3,9), 무엇보다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가톨릭 교회 교리서』 268)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이 아니시라면, 어찌 그분을 믿고, 어찌 그분께 무엇을 바라고 청할 수 있겠는가? 다만,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전능’은 독단적이고 무소불위한 권력으로 억압하거나 지배하는 힘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면, 사도신경에서 하느님의 속성 가운데 유일하게 언급되는 ‘전능’은, 반드시 사랑과 자비, 자유와 같은 다른 속성과 함께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교리서』 271).
그렇다면 하느님의 전능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사랑 자체이시며(1요한 4,16),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는]”(요한 3,16) 하느님 아버지로서 드러나는 “사랑으로 충만한 전능”(『교리서』 268)이다. 유비적으로 표현하자면, 산모와 갓난아기 중 단 한 사람의 생명만 살릴 수 있다면, 산모는 아기의 생명을 선택할 것이다. 이는 자신의 생명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기를 향한 깊고 충만한 사랑 때문이다.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혹여 어머니가 “자기의 젖먹이”, “자기가 낳은 아이”(공동번역 이사 49,15)를 잊는다 해도,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가 늙고 백발이 되어도, 당신께서 우리를 만드셨기에 끝까지 지켜주시고, 돌보시며, 구해주신다(이사 46,4).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느님’이란 신앙 고백은, 우리를 위해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으며]”(욥 42,2), “뜻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이루[시는]”(시편 115,3) 하느님의 영원하고 변치 않는 사랑에 대한 확신에 찬 고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여정 안에서,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느님의 ‘전능’은 때로 우리의 현실 안에서는 ‘무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뜻밖의 시련이나 고통 앞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의문을 품는다. 전능하신 하느님이라면, 왜 나에게 이런 고통스럽고 비참한 상황을 허락하셨는가? 왜 무고한 이들이 전쟁과 같은 참혹한 현실 속에서 희생되어야만 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최종적이고 완전한 답은 오직 하느님의 몫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전능을 “오직 신앙만으로”(『교리서』 273)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신앙의 본보기였던 아브라함과 모세를 비롯한 구약의 인물들은, 생전에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히브 11장). 이는 그들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전능하신 분임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한 신학자는 하느님을 “‘구조’ 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로널드 롤하이저)이라고 고백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크고 작은 모든 어려움에서 언제나 즉각적으로 구조해 주시지는 않을 수 있지만, 결국에는 당신께서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끝내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고]”(푸시킨), 사랑으로 전능을 일으키시는 하느님께 이렇게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욥 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