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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잠언 제7강
집을 세우는 자와 허무는 자
말씀 / 잠언 14,15장
요절 / 잠언 14:1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사람들은 인생을 집 짓는 데에 비유합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집을 지으며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은 집을 세우는 것을 주제로 합니다. 인생의 집을 세우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세운 집을 허무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세운 집을 내 손으로 허물고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우리가 오늘 말씀을 잘 듣고 집을 허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견고하고 멋진 인생의 집을 세워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4:1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어떤 사람이 자기 집을 세웁니까?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반면, 미련한 사람은 자기 손으로 세운 집도 허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미련한 사람일까요?
첫째, 바른길을 걷는 사람이 집을 세우고 패역한 사람이 집을 허뭅니다. 14:2절을 보십시오.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하느니라.” ‘정직하게 행한다’라는 것은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바른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외하지만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멸한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바른길을 걷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길,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멸하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그릇된 길로 걷습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은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과 지혜와 능력을 덧입어 이웃과의 관계도 잘 만들어 갑니다. 또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입술로 자기를 보전합니다(14:3). 이런 사람의 입술은 겸손한 입술로, 상대방을 생각하여 신중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말하는 것도 남다릅니다. 그러나 패역한 사람,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은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 아니라 자기 눈에 보기에 좋은 길로 걸어갑니다. 14:12절을 보십시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나의 눈으로 볼 때 이 길은 바른길처럼 보입니다. 성공을 보장한 길 같습니다. 내 집을 잘 세워줄 것 같은 길입니다. 하지만 필경 그 길 끝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짐승이 많아져 함께 있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먼저 롯에게 제안합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창13:9).” 이때 롯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까? 기도했습니까? 아닙니다. 자기 눈을 들어 바라보았습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소돔 땅이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처럼 풍요로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얼른 그 땅을 선택해 그곳으로 갔습니다. 이것은 롯이 볼 때 지혜로운 선택이고 바른길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그가 택한 소돔 땅은 너무나 타락해 하나님이 유황 심판으로 멸하실 곳이었습니다. 필경 사망의 길이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롯은 자기 가진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롯의 아내는 소유에 미련을 두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합니까? 아브라함과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견고하게 세운 것 같았던 자기 집을 자기 손으로 허문 꼴이 되었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약속의 땅에 거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동서남북의 모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바른길을 걸을 때 자기 집을 믿음의 가문으로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14:11절도 보십시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패역하게 행하는 자’, ‘그릇된 길을 걷는 자’, 여기 ‘악한 자’는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이런 사람의 집은 허물어지고 결국 망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경멸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27편 1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우리 집을 세워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건축가가 되셔서 우리 각자 인생의 집을 지어주십니다. 그런데 내 집을 지어주시는 하나님을 경멸한다면 그 집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폭삭 망하게 됩니다. 아무리 자기 힘으로만 세우려고 용써봐도 그 수고는 헛됩니다. 반면,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의 장막은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흥하게 됩니다. 번성하고 풍요롭고 잘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바른길을 걸을 때 번성하게 되고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고 흥겨운 즐거움이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14:11절을 다시 보면, 악한 사람이 거하는 곳은 집으로 되어 있고 정직한 사람이 거하는 곳은 ‘장막’으로 되어 있습니다. 집은 견고하게 지어진 곳, 정착하고 안정적인 곳입니다. 반면 장막은 이동식 텐트입니다.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같이 집이 중요한 시대에 크고 넓고 세련된 집에 사는 것이 얼마나 좋아 보입니까? 그래서 악한 사람들이 걷는 방법으로 돈을 벌어보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거기엔 흥이 없습니다. 15:16,17절을 보십시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좋은 집에서 지낼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악한 사람들은 매일 같이 번뇌합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번뇌한다’가 ‘재산이 많아서 다투며 산다’입니다. 요즘 비건주의자들이 채식 위주의 식사를 많이 하는데 옛날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식사가 그러했습니다. 살진 소를 잡는 것은 큰 부자나 할 수 있었고 고기는 사치였습니다. 그런데 매일 소고기를 먹고 한우 갈비를 뜯으면서도 서로 물어뜯고 싸우고 미워하는데 어떤 흥이 있겠습니까? 그런 집은 허물어지는 집입니다. 반면 텐트에 거할지라도, 악한 자들에 비해 가진 것이 적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더 낫습니다. 채소를 먹을지라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 말은 좋은 집에서 살고 날마다 소고기 먹으며 사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어떤 집에 살고 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사는지에 따라 흥망성쇠가 결정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근본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 살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대학생 때 교회 형제들과 자취를 한 적이 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지지고 볶으면서도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라면만 같이 끓여 먹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항상 흥이 넘쳤습니다. 함께 일용할 양식을 먹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양들을 초청해 비빔밥, 볶음밥 만들어 같이 먹으며 기쁨이 넘쳤습니다. 보일러 기름이 떨어져 약간 추울지라도, 먹을 것 별로 없어 채소만 먹을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교회와 양들을 함께 섬기는 형제들이 모여 지내는 것이 좋았습니다. 이 자취방은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텐트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견고한 궁궐과도 같은 곳입니다. 고린도후서 5:1절을 보십시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대로 바른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이미 하나님이 지으신 집,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푯대 삼아 살아가는 삶이 내 인생의 집을 올바르게 세우는 삶입니다. 더 나아가 나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 공동체를 견고하게 세워나가는 삶입니다.
둘째, 겸손한 사람이 집을 세우고 교만한 사람이 집을 허뭅니다. 14:3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 미련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교만입니다. 또 교만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함부로 말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어떤 말일까요? 15:1,2,4절을 보십시오. ‘과격한 말’이라고 했고 ‘미련한 것을 쏟아낸다’라고 했습니다. 또 ‘패역한 혀로 마음을 상하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들은 결국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매로 돌아옵니다. 회초리가 되는 것입니다. 화를 당하게 됩니다. 결국 자기 집을 허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15:25절도 보십시오.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교만한 사람의 집은 하나님이 헐어버리십니다. 하지만 과부의 지계는 정해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과부가 사는 땅의 경계선은 튼튼히 세워주신다’라는 말입니다. ‘과부’는 연약하고 의지할 데 없어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하나님이 겸손한 사람의 땅 경계선을 튼튼히 세워주시기에 겸손한 사람은 견고한 집을 세워갈 수 있습니다. 또 지혜로운 사람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한다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입술은 ‘겸손한 입술’입니다. 유순한 대답이고 온순한 혀입니다. 이런 겸손한 입술은 자기를 지켜냅니다. 자기 인생의 집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세워지게 지켜줍니다. 15:4절에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은 결국 패역한 혀입니다. 교만한 말입니다. 이런 말들로 인해 결국 자기 집이 무너지게 됩니다.
하지만 온순한 혀는 생명나무라고 했습니다. 여기 ‘온순함’은 원문에 보면 ‘라파’로 되어 있는데 ‘치료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지난주 말씀 12:18절의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에서 ‘양약’과도 같은 말입니다. 온순한 혀가 결국 치료제, 양약이라는 말입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이 사람을 치료하고 살립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로 인해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 받기도 쉬운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유순한 말, 온순한 혀, 겸손한 말, 생명나무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잠언에서 말에 대해 숱하게 20% 가까이나 강조하지만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말이 우리 내면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마음을 상하고 병들게 하는 교만한 말들을 버리고 영혼을 살리고 치료하는 겸손의 말, 온순한 혀가 되어 내 인생의 집과 내가 속한 공동체를 견고하게 세워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부지런함이 집을 세우고 게으름이 집을 허뭅니다. 14:4절을 보십시오. “소가 없으면 구유가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어린 시절, 고향집에서는 소들을 키웠습니다. 저는 학교 다녀오면 종종 아버지를 도와 소 구유와 외양간을 치우고 청소했습니다. 치우고 청소할 때마다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소들이 얼마나 먹고 싸는지 배설물을 삽으로 퍼 담아 논밭으로 몇 번을 실어 날라야 했는지 모릅니다. 그때 드는 생각은 ‘소는 왜 키워서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 아버지와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기억해 보면 어미 소 한 마리가 일 년 두 학기 대학 등록금이라고 했습니다. 소가 없으면 구유와 외양간은 깨끗합니다. 냄새도 안 납니다. 청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소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더 많은 것들을 잃게 됩니다. 이스라엘 당시 소는 농사짓는 데 필수였습니다. 밭을 갈아주고 수레를 끌어주었습니다. 오늘날의 농기계와 1.5톤 포터 트럭 역할을 다한 것입니다. 또 소의 배설물은 퇴비로 쓰게 되고 어미 소가 송아지를 낳아 기르면 부가 증폭됩니다. 소는 한우 갈비로도 먹게 하고 소가죽으로 만든 제품들은 상당히 비쌉니다. 그런데 구유와 외양간을 치우기 싫다고 소를 없애버리는 것은 농사를 짓지 않겠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 굶어야 합니다. 집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작은 것을 희생해 큰 유익과 기쁨을 얻습니다. 청소 안 해도 되는 작은 유익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우리도 열심히 일하다 보면 여기저기 크고 작은 문제들이 생깁니다. 힘들다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가만히 있어 버리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열정을 가지고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을 격려하고 힘을 실어주어야 그 집안이 바로 세워져 갑니다. 여러분!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습니까? 소탐대실하겠습니까?
소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깨끗한 것을 좋아해서라기보다는 결국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소 키우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소 구유와 외양간을 청소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일하기 싫어서 깨끗함을 핑계 대고 있는 것입니다. 14:23절도 보십시오.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 여기 ‘모든 수고’는 영어로 ‘all hard work’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이익을 얻게 됩니다. 또 ‘입술의 말’은 말이 많은 것입니다. 하드 워킹하기 싫어서 말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말이 많아집니다. 핑계가 많기 때문입니다. 잠언 26:13,14절에 보면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했습니다. 동물원 말고 길거리에서 사자 보신 분 있습니까? 사자가 동네 길고양이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돌아다니지는 않습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도는 것처럼 게으른 사람은 침대에 드러누워 있고만 싶기 때문입니다. 나가기 싫고 일하기 싫고 침대에만 붙어 뒹굴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이 많고 핑계가 많으면 어떻게 됩니까? 궁핍을 이룰 뿐입니다. 가난하게 됩니다. 14:24절을 보면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 했습니다. 여기, 지혜로운 사람은 열심히 하드 워킹해서 부요하게 된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재물도 면류관처럼 영광스럽게 씁니다. 반면, 미련한 사람은 자기 소유일지라도 미련하게 사용합니다. 제가 말로만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위해 수고하겠노라 하지 않고 실제 수고하고 재물로도 헌신하므로 진정으로 지혜롭고 영광스러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5:19절도 보십시오.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의 길은 가시덤불로 덮여 있는 것 같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길은 확 트인 큰길과 같다.” 여기 ‘정직한 자’는 ‘부지런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게으른 사람의 앞길은 가시덤불로 덮여 있습니다. 치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참 고달프고 막막합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길은 확 트여 있습니다. 대로입니다. 형통하다는 말입니다. 치우고 길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형통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의 집을 세워가는 데 있어 슬기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14:8,9절을 보십시오.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슬기로운 사람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길을 걷고 겸손하며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하나님이 걸어가라고 나에게 가르쳐주신 길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죄를 심상히 여깁니다. 심상히 여긴다는 것은 ‘mock’로 죄를 우습게 여기고 무시하고 가볍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과 신앙, 또 가정과 교회 공동체의 집을 지어갈 때 가장 큰 장애물은 죄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죄를 가볍게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 데 죄짓는 게 대수인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집이 완전히 파괴되고 허물어집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얼마나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는지 잘 압니다. 그래서 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설령 죄를 지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회개하고 돌이키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15:8,9,29절을 보십시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악인의 제사보다도 정직한 사람의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악인의 길은 미워하셔도 공의를 따라가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불꽃 같은 두 눈으로 어디서든 악인과 의인을 감찰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집과 교회 공동체를 잘 경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5:22절을 보십시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지혜로운 조언자가 많을수록 일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습니다. 지혜자들의 집단 지성의 힘을 사용할 때 한 사람의 지도자보다 더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사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개인은 여러 가지 한계 속에서 살기에 반드시 지혜자들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의논과 경영이 필요한 데 거기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때에 맞는 말입니다. 15:23절을 보십시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여기 ‘때에 맞는 말’은 시간과 상황에 맞는 시의적절한 말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상황은 늘 변하기에 거기에 합당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을 의뢰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어떤 복이 주어진다고 했습니까? 14:26,2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어 그의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습니다. 견고한 의뢰는 ‘secure fortress’로 ‘안전한 요새’입니다. 요새에 숨어있으면 적들이 아무리 맹렬하게 활과 창과 투석기로 공격해 와도 안전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들에게까지도 피난처를 제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생명샘입니다. 생명샘은 ‘a fountain of life’로 ‘생명이 분수처럼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생명력을 공급받습니다. 이 생명의 샘물로 말미암아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의 집을 잘 짓고 세우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함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과 공동체의 집이 어디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까? 결론적으로 15:3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면 지혜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과 바른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 존귀를 얻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집을 견고하게 잘 지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겸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내 생각과 의지를 주장하기보다 하나님의 훈계에 순종해야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오늘 잠언에서 말씀하듯 언어생활부터 유순합니다. 치료하고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합니다. 온 세상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길을 걷고 겸손하며 부지런하게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내 인생과 가정, 교회, 내가 속한 공동체 가운데 멋지고 견고한 집을 세워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