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지도 않는 일.
/1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미련하고, 바보 같아서 내가 다 쪽팔릴 지경이다. 수비적인 생각에 절여져 있다는 비방을 들어도 난 바보들에게 용기 있게 동참할 수는 없다. 바보는 어쩌면 과격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행위는 최선책으로 인식될지도 모른다. 뭐가 어찌 되었던 그들이 맹렬히 준비하는 저 의식은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규모와 인원과 장소의 명성을 생각하며 망상 속 자기 위로나 해대는 놈들은 본인들의 행동 도리에 대한 깊은 생각 따위 사치로 여길 것이다. 자신이 무슨 길을 가고 있는 지도 모른 체, 무엇을 위해 모인지도 모른 체, 뭘 말하는 지도 모른 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길바닥에 앉은 사람은 격양되어 환장한 무대 위에 선 사람들을 모르고. 누가 누군지, 뭐가 뭔지도 모르고 마이크를 잡고 소리를 지르던, 앞사람 머리카락에 침 튀기며 소리를 지르던 하여튼 참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이 짧은 시간이 끝나고 한참동안 조리 돌려질 저 망극을 보면 벌써 한숨이 나온다. 어디 쥐구멍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일 지경이다. 오우, 이 쪽팔림이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모이 쪼아먹는 닭새끼들처럼 고개를 땅에 처 박았다, 올렸다 하는 사람이 과연 무엇을 위해 자신이 짐승처럼 보여질 정도의 희생을 하는지 알기나 할까. 애초에 자신들만 모르는 코미디 무대의 광신도 연기자, 시대의 혐오자로써 희생되는 불쌍한 처지를 인식이라도 할 수 있을까. 광신도가 되어 시대의 혐오자가 된다는 그 무개를 이해하며, 이 둘을 판단할 저울을 과연 잘 마련해 두었는가. 무엇이 옳은 지 판단하고 있나, 젠장 할 군중과 젠장 할 세뇌에 절여져 있는가. 세상은 바뀌었다는 것은 모르는, 노망난 노인들을 보고 있으면 정색이 된다.
“아멘.” 하고 한 도시를 울리는 두 글자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믿습니다.” 하는 뜻의 그 단어는 그들에게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누구를 믿고서는, 누구의 이름을 걸고, 그 두 글자를 무슨 집회에 가져다 붙이고 있는거란 말인가.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2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지들이 따르는 진리에 대하여는 한없이 엄격하고, 유행에 뒤쳐지는 것이 제일로 두려운 수비적인 버러지들의 속에서부터 우려 나오는 불안 섞인 표정을 보고 있으면 참 웃기지도 않는 감상이 든다. 진리를 확신하지도 못하면서 진리라 말하고, 세속을 섬기길 원하면서 성경을 붙잡는 저 두 부류에 끼고 싶어 환장한 모두의 반역자의 추한 변명과 자신은 다르다는 이상한 자만심의 행동은 거의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
이도저도 아니면서 최대한 사람들이 편하게 보는 쪽에 거하고 싶어 하는 줏대도, 도전 정신도, 본인의 가치도 없는 미련한 선민의식자는 오만하고, 미련하여 자신이 누구보다 군중의 말에 따라 의식 없이 사는 존재인지 모른다. 사실은 어떤 행위의 찬의 입장도, 반의 입장도 잘 아는 것 하나 없지만 것으로 봐서 조금 더 자료가 있던 쪽, 조금 더 사람이 많은 쪽의 편을 들고는 귀를 막으니 답이 없다. 그러면서도 아직 손에 쥔 신앙의 끈을 놓치기 싫어하는 그 태도는 얼토당토않다. 분명 부서지고 말 것인데, 이상한 타협으로 진리를 휘집고 다니는 무지한 저 행동이 그나마 광신도가 아닌 지성 있는 종교인으로 세상에 비출까 두려워 진다. 이런 시덥잖은 것이, 또한 저렇게 무지한 인간들의 발언이 본질과 진리의 평판을 흐릴까 걱정하는 이 현상이 웃기지도 않다.
/3 웃기지도 않는 고민들과 싸움들이다. 저리 우매한 자들이 도대체 무얼 헤아릴수나 있을까. 이건 영적 싸움에 최전선이다. 무너진 다음 세대를, 부패해 썩어가는 미래를 구하는 하나 뿐인 길이다. 오, 200만명이란다! 오, 마지막 기회이다. 한국 교회의 마지막 기회이다. 멋지게 양복을 빼입고, 광낸 구두를 신고 저 무대 위에서 바라볼 영광의 풍경을 상상해 보며 가볍게 기도를 올린다. 당연히 이 기도는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이 뜻한 말씀을 따라가는 이 집회를 위한 기도는 결코 실패할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차별 아니다, 혐오가 아니다, 정죄가 아니다. 이상한 핀트를 잡고 늘어지는 논쟁은 더럽다.
잘 아는 것은 하나 없는 이들이, 진심이라고는 조금이라도 찾아 볼 수 없는 놈들이, 관련 지식을 유투브 영상과 조금의 기사로 한 두 번 읽어 생각하고 만 것들이 무얼 안다고 자기만 깨달은 채 말할까. 중요한 것은 이 역사적인 모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멈출 수 없다. 끊을 수 없다. 곧 다가올 것은 역사적인 순간이다. 회복과 부흥의 역사이다. 오, 당신의 뜻을 위하여 일하는 우리를 축복하소서.
/4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교회의 영광을 되찾을 때다!” 교회에서 무슨 영광을 찾는 것일까? 저 탐욕스럽고 교활한 뱀놈들이. 자신들이 일궈논 기만과 가식과 비리와 물란으로부타 무슨 찾을 것이 있다고 말할까. 죄와 반성이면 모를까, 영광? 웃기지도 않는 말이다. 그딴 이유가 이번 집회의 목적과 과열되는 이유라 한다면 난 침을 뱉고 돌아서겠다. 핀트를 잘못 잡은 건 저들이다. 혐오가 아니다, 정죄가 아니다 하는 꼬라지를 봐라. 또, 또 저 입에 꿀발린말. 아니면 혹시 정말 혐오와 정죄가 아닐지 모른다. 그런쪽의 문제를 전혀 신경쓰지 않을 수도 있다. 무엇이 진리인지, 진리를 위해서 어떤 발언을 하고 사람들을 설득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저들이 관심있는 것은 힘있는 교회, 정치적으로 금전적으로 사회적으로 힘있는 교회 건물에 불과하다.
웃기지도 않는데 저 무대 위에 올라 미소를 한가득 품고있는 위선자들을 봐라. 무엇을 보고 쳐 웃고 있는 것일까. 다음 세대의 희망? 그렇다면 그 희망은 무엇인가. 건물을 1층이라도 높게 올릴 희망일 것이다. 바리세인 중 바리세인이 되어 버린 성경의 반복이 이런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니 웃을 일이 없다.
/2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이렇게 하면 정치 집회이고, 저렇게 하면 광신도들의 말 안 통하는 예배 집회이다. 이렇게 하면 개신교의 색깔을 잃고, 저렇게 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 법의 반대가 진리라고 믿은 순간 나아갈 수 밖에 없다. 헌데 이리해도, 저리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벗어던질 수가 없다. 어쩌면 이건 이난 몇십년간의 교회를 향한 사람들의 결론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할 말이 없을 수도 있다. 아, 그렇지만 멈출 수 없다. 멈춰서는 안된다. 추월 당하고 말것이다. 수많은 가치들과 진리들이 땅속에, 옛 것이라는 명패가 달려 묻혀버릴 것이다. 강하고 빠르게, 그렇게 우리는 서울에 모여야 한다. 어쩌면 선택지 따위는 없다. 지금 나서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며 만약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하더라도 후대가 보았을 때 우리가 무엇으로 보일까 두렵다. 손익을 따지는 것은 신앙인으로써 사치이며, 진리를 위해 부르짖고 모이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진리 앞에서 취해야할 예의가 아니다.
개탄스럽다. 교회를 향한 신뢰와 종교에 대한 존중은 우리의 손으로 뭉개버렸다. 그중에 가장 도두라졌던 비판요소는 정치이다. 그러니 결코 정치목적이 되서는 안된다. 우리의 가치관은 현장에서 여러 포스터와 용지로써 전하고 모임자체는 예배의 형식을 띄운다. 이것이 최선책이다. 이 예배 형식을 비신자들이 어떻게 받아드릴지는 어쩌면 뻔할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다. 예배는 부끄럽게 여기거나, 파협할 요소는 아니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그저 종교 행사였단다. 역시 이렇게 언론을 형성할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였던 법에 대한 반대의 소리나 그 개념들은 저 뒤안길로 사라져버리고 그저 예배라는 키워드만이 남았다. 미개하게 보인단다, 혼잡된 시내를 만들었다며 민폐라면 말한다. 이 인식이 과거의 문제일까? 조금더 구성된 말씀들이 소극적이었다면, 설명하는 식의 설교였다면 어땠을까. 애초에 예배 형식이 아닌 반대 집회를 열었으면 어땠을까. 논리력이 부족했나, 비신자들을 향한 배려가 부족했나? 그렇게 다 부족한 부분을 매꾸고 나면 과연 그것은 예배이긴 한 것인가, 개신교로써의 무엇이 남는가. 우리는 성경과 예수로 인하여 말하는데 이런 방식으로 집회를 꾸린다면 그저 평범한 악법 반대 집회가 되지 않겠는가?
/4 웃기지도 않는 접근이다. 만약 진실로 성경과 예수로 인하여 이 집회가, 우리의 진리가 외쳐진다면 다시 생각하여 접근 할 필요가 있다. 예수라면 어찌했을까? 비하 되고 제일 많이 정죄 되는 자 편에 서지 않았겠는가? 아하,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영향력에 대해서이다. 그저 진리를 위한 최선책이 머리 수로 밀어붙인 다음 모인 인원을 보고 자기 위로나 해대는 것인가? 100만명이던, 200만명이던 몇 백 만이 모이던 한국에 통산 1000만명이 개신교인데 각자의 위치에서 일하면 영향력이 얼마인가. “서울을 매웠다.” 이 문장에 왜 이렇게 젠장 할 환장을 하는 것인가. 결국 글의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과격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다. 역시 ‘만약 예수라면…’이라는 가정으로 생각해 과격한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2 웃기지도 않는 변론이다. 우리도 그들의 편에, 소외되고 정죄 되는 자 편에 서서 정죄하지 않는다. 다만 죄는 죄로써 언급되어야 하며 우리는 그 점을 꼬집는다. 당신들만 착한 척하면서 뒤로 발 빼지 마라 어리석게 전쟁의 최전선에서 적의 편에 서지 마라. 예수가 같이 지냈던 세리도, 과부도 결국 극복해야 할 악의 문제 아니었는가? 이 문제의 격양기에 그런 식으로 수비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후대에 무슨 말로 고개를 들겠는가?
/1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난 내 자녀에게 그 집회에 가지 않은 부모로 기억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