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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서의 패튼의 독특한 말과 행동
“조국을 위해 죽겠다고 말하지 마라. 어떤 놈이건 간에 전쟁에서 죽고 난 뒤에 조국을 위해 죽었노라고 하는 놈은 필요 없다. 적을 죽이고 그놈에게 조국을 위해 죽었노라고 하게 해라.”
"이제부터 누구든 각반, 철모, 타이가 없거나, 군화가 광나지 않고 복장을 단속하지 않는 놈이 보이면, 가죽을 벗겨버리겠다."- 아프리카 전선에 부임해 개판 5분전의 부대상황을 점검하고 나서...
* 1944년 12월 발지전투 당시 155mm 곡사포를 방열하고 있는 미 포병대
그날도 일상처럼 되어있는 패튼의 일선시찰 길, 찦차에서 걸어가고 있는 병사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패튼,
병사: "장군님! 어디 가십니까?" 패튼: "베를린! 내가 가서 사방에 얼굴이 도배된 개새끼(히틀러)를 직접 쏴죽일 거다!."
유럽 전선에서 지칠대로 지친 아군을 쉴 시간을 줄 것을 요구하던 대대장을 그 자리에서 교체하고 대신 대대참모인 소령에게 지휘권을 주면서 닥치고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차를 타고 떠날 때, 소령이 멀어져가는 패튼을 가리키며 "대대장님, 저 개새끼가 뒈져버리길 바라는 병사가 5만 명은 됩니다."라고 욕을 퍼붓자, 대대장이 아무 말 없이 무언의 공감을 표시합니다.
위의 전투 이후 미군이 이겼지만 사상자가 장난이 아니었기에 붕대와 피투성이로 미군 부상병들이 패튼의 곁을 지나면서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갑니다. 그리고 멀어져가는 그를 보고 미군 병사들이 "저기 보라구! 피와 배짱의 미친 장군이 나간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전선에서 한 농부가 당나귀들을 끌고 가다 다리 위에서 당나귀들이 말을 듣지 않아 미군의 진군이 지체됩니다. 그러자 패튼은 직접 가서 그 당나귀들을 전부 쏴죽이고 다리 아래로 떨어트립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패튼이 실제로 일으킨 실화이기도 합니다.
전사자가 가득한 전쟁터에 가서는 "하느님 용서하십시오. 저는 이렇게 피와 살이 튀는 전쟁이 너무 좋습니다.
"부관이었던 브래들리 장군(나중에 패튼의 상관이 됩니다)은 "선배님과 제가 다른 게 뭔지 아십니까? 전 훈련을 받아서 이 일을 하죠. 하지만 선배님은 전쟁이 즐거워서 전쟁을 하십니다."라고 일침을 놓는데, 패튼 장군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합니다.
그의 유족들은 이 영화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을 하지 않았으나, 패튼의 손자는 "이 영화를 통해서 할아버지를 알게 되었다."고 하고, 외손자는 "내가 어릴 적 뵈었던 외조부의 모습과 똑같다."고 말했습니다.
* 영화 소개
환생을 믿고 자신이 전생에 전쟁 영웅이었다고 믿으며 최후의 전투에서 마지막 총탄에 쓰러지는 것이야말로 직업 군인에게 어울리는 최후라고 생각하는 남자. 전투는 그에게 있어서 삶의 이유이며 전쟁터에서 사라져가는 병사들의 허무한 죽음도 그(패튼)에게는 승리를 위한 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비칠 뿐입니다.
또한 목표를 세우면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결코 타협하지 않고 전투의 짜릿함 자체를 사랑하는 전쟁광이기도 합니다. 그는 영웅들이 등장하는 마지막 전투라 할 수 있는 2차 대전의 굵직굵직한 전투를 이끌어가며 전쟁영웅에 등극합니다.
그러나 거침없는 입담과 다혈질적인 기질로 구설수에 오르며 결국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직업군인다운 죽음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영화는 20세기에 살고 있지만 머릿속은 16세기의 기사인 타고난 지휘관이자 위대한 시대착오자인 조지 패튼의 불꽃같은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조지 S. 패튼의 삶이 여러 번 영화화될 뻔 했지만 유족들의 반대로 좌절되었습니다. 병사 구타 사건 등 이런 저런 물의를 일으켰고 전쟁에 미친 사람으로 그려지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 한 이유라고 합니다.
결국 부인이 타계한 후 겨우 만들어진 영화 <패튼 대전차군단)은 이런 우려를 극복하고 주연 조지 C. 스콧의 말 신들린 연기로 걸작으로 남았습니다. 영화는 잘 알려진 패튼의 에피소드들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으며 드넓은 대지에서 펼쳐지는 강철 전차들의 장엄한 전투 장면을 삽입, 가까이서 봤을 땐 참혹하지만 멀리서 봤을 땐 비장미가 흐르는 전투를 군더더기 없이 묘사했습니다.
또한 독일의 롬멜, 영국의 몽고메리를 비롯한 2차 대전 영웅들의 등장으로 다큐멘터리적인 리얼함을 살리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이는 라디슬라스 파라고의 패튼 전기와 브래들리 장군의 회고록을 기초로 <대부> 시리즈와 <지옥의 묵시록>을 감독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에드먼드 H. 노스가 탁월한 실력으로 각본을 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영화는 주로 스페인에서 스페인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촬영되었고 일부는 다른 국가에서 촬영되었는데 고대 카르타고의 도시로 등장하는 장면은 모로코의 고대 로마 도시인 볼루빌리스가 촬영지이며, 모로코의 군대와 국왕의 환영장면은 라바트의 왕궁에서 촬영되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남우주연상, 감독상, 작품상, 각본상, 편집상, 음향상, 미술상 등 7개 부문에 걸쳐 수상하였습니다. 그러나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스콧은 ‘영화계 상부구조 전체와 상을 가슴에 끌어안고 우는 배우들이 꼴보기 싫다’며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참고로 그 상은 현재 패튼 장군 기념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전에도 <허슬러〉로 후보 지명이 되었을 때도 이를 거부했었습니다. 스콧은 아카데미상 수상을 거부한 최초의 배우였으며, 나중에 말론 브랜도도 <대부〉(1972)로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을 때 수상을 거부한 적이 있습니다.
TV 연출가 출신으로 프랭클린 J 샤프너 감독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1967년 율 브리너 주연의 <더블맨>으로 47세에 늦깎이로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습니다. 이 영화를 찍은 직후 <혹성탈출>, <패튼 대전차군단>, <'빠삐용' 등의 역작을 남기며 영화감독으로 짧은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영화가 시작되면 패튼이 무대에 등장하면서 아래와 같이 일장 연설을 시작합니다. 그는 미국인의 호전성과 승리에 대한 집착, 군인이 가야 할 길과 독일군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증오를 퍼부은 후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어떤 놈이건 간에 전쟁에서 조국을 위해 죽은 놈은 없다. 누가 조국을 위해 죽었겠는가? 제군들! 미국이 싸우고 싶지 않고 전쟁에 개입 않겠다는 말은 순전히 개소리다. 미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싸우기를 좋아한다.
진짜 미국인들은 싸움의 열기를 사랑한다. 자네들은 어렸을 때 구슬놀이, 챔피온, 가장 빠른 육상 선수, 야구 선수 등 강인한 권투 선수들을 존경했다. 미국인들은 승자를 좋아하고 패자를 용납 못한다. 지고도 웃는 사람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 그러기에 미국인들은 져본 일이 없고 전쟁에서도 이길 거다. 왜냐하면 진다는 생각 자체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략) 30년 후쯤 제군들의 손자 녀석들이 할아버지는 2차 대전에서 뭘 했냐고 물으면 루이지아나에서 똥이나 치우고 있었다는 소리는 안해도 될거다. 좋다 제군들. 내 말 뜻 알겠지? 나는 자랑스럽다. 전장에서 자네들과 함께 있는 것이 언제, 어디서라도 말이다. 이상이다."
1943년 아프리카 튀니지아의 전략적 요충지 카세린. 롬멜 장군이 이끄는 최강의 독일군과 격렬한 공방전을 전개 중인 미국 제2군단에 패튼 장군이 부임해옵니다. 화력의 열세로 독일군에게 연패를 당하고 있던 이 군단을 재건해야 할 군단장으로서 유능한 부관 브래들리 소장과 함께...
패튼은 우선 군기를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병사들에게 철모와 각반을 항시 착용하라는 엄명을 합니다. 심지어 병원에서 일하는 군의관까지 포함해서... 이 꼴통끼가 다분한 패튼과는 달리 동료인 오마 브래들리는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격으로 패튼과는 아주 대조적인 인물입니다.
* 오른쪽이 브래들리
패튼은 군단을 엄격한 훈련으로 강화하여 롬멜 군단을 분쇄합니다. 이어 그는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을 지원하기 위해 시칠리아 섬 침공을 담당하는 군 사령관으로 영전되어 이탈리아 전선으로 재배치됩니다. 패튼은 자신의 공만을 세우려는 몽고메리 장군을 지원하지 않고 독단적인 결정으로 팔레르모에 진격하여 가볍게 탈환합니다.
몽고메리 측에서는 패튼의 이러한 결정을 못마땅해 하며, 패튼이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메시나 탈환에는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러나 패튼은 무리한 강행군을 통해 부하들을 이끌며 몽고메리 장군보다 먼저 메시나를 탈환하면서 다시 한번 그의 위용을 과시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야전병원을 시찰하는 와중에 전쟁 공포증에 걸린 병사를 구타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병사의 폭행이 알려지면서 패튼은 한직으로 밀려나게 되고 공개사과까지 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문제가 생기자 아이젠하워는 그를 사령관직에서 해임시킵니다.
사실 아이젠하워는 그를 본국에 송환하려 했으나 워싱턴에 있는 조지 마셜 참모총장이 이를 반대, 결국 1년 가까이를 휘하부대 하나 없는 장군으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사이 자기 부관이었던 브래들리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나중에는 그를 상관으로 모시는 사태마저 벌어집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진행되면서 패튼은 자기가 빠질 수 없는 전투라고 생각하고 브래들리에게 자존심을 굽히고 전투에 참가시켜달라는 간청하는 모습은 안스럽기까지 합니다.
아이젠하워는 곤경에 빠진 패튼 장군을 극비리에 진행되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시 유령부대의 사령관으로 재임명하여 독일군의 눈을 돌리는 유인부대 역할을 맡게 합니다. 상륙작전이 끝난 후 아이젠하워는 패튼에게 제3군을 맡겨 본격적인 유럽 전투를 지시합니다. 패튼의 제3군은 이 후 엄청난 전과를 올리며 파죽지세로 유럽 남부를 휩쓸고 진격하면서 패튼의 전설을 남깁니다.
2차대전 막바지 히틀러의 도박이라고 일컬어지는 발지전투가 벌어집니다. 연합군은 당혹 속에서 고전을 치르면서 퇴각하고 있고, 특히 바스토뉴에서 미 공수사단이 독일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때 패튼이 자기가 이들을 구원하겠다고 나섭니다. 혹한 속에서 진격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패튼은 휘하의 제3군을 이끌고 밤낮없이 진격하여 바스토뉴를 탈환하면서 큰 공을 세웁니다.
2차 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후 대 나치정책과 관련하여 구설수에 오르고 소련을 자극하는 발언이 또 물의를 일으켜 실의 속에 지내다 자동차 사고로 죽습니다.
[ 전쟁의 달인이자 트러블 메이커였던 조지 패튼 이야기 ]
평생 줄리어스 시저를 존경하고 고대 로마군을 동경했던 사나이. 전쟁기간 내내 숙적 롬멜과의 중세기 기사들 같은 1:1 결투의 기회가 찾아오기를 염원했던 기인. 미국인이면서 전혀 미국인답지 않은 권위주의와 독재적인 성품. 수다스런 다변과 모진 독설.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 완고함. 전공에 대한 끝없는 탐욕...
이런 인간적인 약점들로 인해 그 누구보다 적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좋다고 할 만큼 그를 사랑했던 부하들은 더욱 많았던 인물-그 사람이 바로 이 미 육군사를 통털어 가장 위대했던 지휘관 중 한사람이었다고 평해지는 ‘’조지 S. 패튼‘ 장군이었습니다.
조지 패튼은 188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레이크 비니어드에서 태어났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해 온 그의 가문은 대대로 무인집안이었고 그의 탄생을 누구보다도 기뻐했던 할아버지 스미스 패튼은 남북전쟁 당시 남군 기병대의 대령으로 활약한 인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할아버지의 옛 부하인 퇴역 기병장교들 사이에서 성장했고, 남들이 사관학교에 들어가서야 배우게 되는 동서고금의 전쟁사와 군사적인 분위기를 일찌감치 온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부유한 사업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형식적인 학교 교육을 철저히 불신했지만 상류사회의 우아한 교양과 품위를 그에게 물려주었고, 이런 성장배경은 훗날 그가 다른 연합군 장성들로부터 '유럽의 진짜 귀족보다 더 귀족적인 인물'로 평가받게 되는 한가지 원인이 되었습니다.
12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학교에 들어갔지만 수학을 제외한 그의 학업성적은 항상 상위 클래스였습니다. 수학 과목의 부진으로 미 육군 사관학교 입학시험에서 한번 낙방한 것을 제외한다면 패튼의 유년시절에는 별다른 에피소드가 없습니다.
그만큼 유복한 환경 속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패튼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웨스트 포인트에 입교하고 나서 부터였습니다.
* 1차 대전 당시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했던 그는 웨스트 포인트에 입교 이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생 그를 따라 다녔던 비판-독재적이고 비타협적인 성격-은 이미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가 생도대장을 맡고 있던 졸업반의 어느 해에 강한 지진이 포토맥 강변을 덮쳤습니다. 막사가 흔들리고 땅이 꺼지자 사관학교는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온 생도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을 때 완벽한 예복 정장을 갖춘 패튼 생도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절도있는 걸음걸이로 그곳에 나타났습니다.
"생도대 차렷! 동요하지 말라. 지진은 곧 끝날 것이다."
그의 이런 선언이 주효했던지 지진은 곧 가라앉았고, 이 일을 두고 동료 생도들은 이렇게 킬킬거렸습니다. "패튼이 멈추라고 하면 지진도 멈춘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병장교로 임관한 패튼 소위는 퍼싱 장군(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총사령관)의 부관으로 멕시코로 파견됩니다. 당시 멕시코의 반군 지도자 판초빌라는 미군들로부터 산적으로 불리우고 있었고, 이 전투에서 패튼은 처음으로 소장하고 있던 리볼버 권총의 상아자루에다 눈금 하나-한 명을 사살했다는 표시-를 그려넣게 됩니다.
자신이 사살한 멕시코 반군의 시체를 자동차 앞 범퍼에다 매달고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며 부대로 돌아온 그를 보고 퍼싱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진짜 산적은 우리 부대 안에 있었군, 그래"
패튼이 초급장교이던 시절, 미 육군의 기병대는 근대적인 전차부대로 개편되는 전환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1차 대전 막바지이던 1918년, 소령으로 진급한 패튼은 전차대대를 이끌고 프랑스의 '생 미엘'에서 최초의 전차전을 경험하면서 큰 부상을 입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를 통해 장차 미래의 지상전을 좌우할 가장 핵심적인 병기는 바로 전차이며, 미 육군이 당면한 최대 과제는 현대적인 기계화부대의 확충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됩니다.
패튼과 같은 인물은 평화 시에는 주목을 끌지 못하는 법입니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시기에 패튼은 그저 곧잘 험담가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문제가 많은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미 육군의 실력자 드램 장군에게는 사사건건 대드는 시건방진 부하였고, 부하 장교들에게는 무자비하고 엄격한 상관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패튼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제2군단장으로서 북아프리카 전선에 모습을 나타내면서부터였고, 그 이후 시실리 전투와 제3군사령관으로서 유럽 본토 전선에서의 활약은 그를 단숨에 미국의 영웅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아이젠하워와...
그는 근본적으로 평화 시의 관리업무보다는 전투에서, 또 방어업무보다는 공격임무에서 더욱 빛을 발휘하는 지휘관이었습니다. "나는 정말 전쟁이 미치도록 좋다. 전쟁에 비한다면 인류의 다른 업적은 모두 티끌처럼 미미할 뿐이다." 이런 파격적인 발언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전통적으로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영웅상-억세고 강하며, 다소는 쇼맨쉽도 겸비한-을 모두 다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명령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전화선을 일부러 끊어버리고 나서 그런 명령을 받은 바 없다고 딱 잡아 떼었고, 항상 자기식으로 작전을 밀어부쳐 버리는 패튼의 버릇은 직속상관 아이젠하워 장군의 골머리를 앓게 만들었지만, 아이젠하워는 그를 책망할 수가 없었습니다. 패튼의 판단은 대부분 옳았고, 설령 틀렸다 하더라도 번번이 그 특유의 돌파력으로 어떻게든 자신의 몫을 완수해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애견 윌리와...오른쪽이 한국전에 참전했던 워커 장군
"패튼은 능력만큼이나 운도 기막히게 좋은 친구다. 나는 패튼이 정말 자신의 능력으로 전쟁을 이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승리가 번번히 기막힌 행운에 의한 것인지 혼란스럽다. 하여간 분명한 것은 패튼에게 그 일을 맡기면 반드시 완수되었다는 것이다." 아이젠하워의 말입니다.
그는 시실리 전투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 바람에 군복을 벗게 될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최전방에서 지휘를 하고는, 돌아오는 길에 야전병원에 들러 부상당한 병사들을 위로하곤 하였습니다.
하루는 들렸던 야전병원에서 전투 공포증에 걸려 침대에 앉아 훌쩍거리고 있던 병사 하나를 발견하고 겁쟁이라고 욕을 퍼 부우면서 따귀를 갈겼는데 이를 담당의사가 보고 기자들에게 발설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져 버렸습니다.
그는 따귀를 때린 병사가 속해 있는 사단의 전 병력을 연병장에 모아 놓고 사과를 하는 수모도 겪었지만 미국의 매스컴들이 연일 떠들어대면서 그의 군인 인생은 거의 끝나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 영화에서 폭행하는 패튼
그동안 여러 가지 구설수에 오를 때마다 감싸주던 아이젠하워도 이제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시실리 전투가 끝난 후 아이젠하워는 패튼의 옷을 벗기는 대신 직책을 주지 않고 그를 독일군을 기만하는데 써먹습니다. 그를 이름뿐인 제3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영국에서 여기저기 어슬렁거리게 하였습니다.
마치 대륙침공의 선봉부대 사령관인양 독일군을 기만하였는데 여기에 독일군은 완전히 속아 넘어가 버렸습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이 성공적으로 끝났을 때에도 독일군은 패튼이 이끄는 미 제3군이 도버 해협을 건너 깔레 근처로 상륙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1944년 6월 6일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그 이후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 때문에 연합군은 간신히 두달에 걸친 격전을 겪고 난 후에야 겨우 노르망디 반도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프랑스 깊숙이 진격할 차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때 패튼의 진짜 제3군이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연합군 주력의 남쪽을 담당한 패튼의 제3군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독일군을 유린하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독일국경을 향하여 질풍처럼 내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전차부대가 너무 적진 깊숙이 달려 들어감에 따라 보급선이 길게 연장되고, 그로 인해 측면이 위협받게 되는 것을 염려한 부하들이 그런 의견을 제시하기라도 하면 패튼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측면? 그건 독일 놈들이 결정할 문제일 뿐이다. 자네들은 가솔린이 있는 한 앞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돼. 가솔린이 떨어지면 전차에서 내려서 뛰어가!"
패튼의 신화는 지휘관으로서 그가 보여준 여러 가지 장점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그가 보여준 솔선수범과 대담무쌍함입니다. 그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한시도 안전한 후방의 지휘소에 머무른 적이 없었고, 항상 최전방에서 직접 부대를 지휘했습니다.
패튼의 이런 행동에 대해 군사령관급의 고위 지휘관으로서는 무모하고 무책임한 만용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여지껏 모든 연합군 지휘관 중에서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패튼은 쉴새없이 전선의 이곳저곳을 휘젓고 돌아다니며 특유의 걸쭉한 입담으로 부하들을 독려하고 몰아세웠습니다. 3성 장군(나중에 그는 대장이 됩니다)이 지휘봉을 휘둘러대며 몸소 전선을 뛰어다니는 패튼의 이런 지휘방식은 부하들의 사기를 크게 고무시켰다는 점 이외에 몇가지 실제적인 잇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최전방에 나가있던 그로서는 적군의 배치상태나 전황의 진전에 따라 기회가 포착되었을 때, 날카로운 매처럼 부릅뜬 그의 두눈은 결코 그것을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패튼은 즉석에서 사전에 계획된 작전을 대폭 수정해서라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태에 유연하게 대처했고, 또 휘하의 부대장들에게도 그런 식의 재량권을 폭넓게 인정해 주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패튼과 제3군이 전 연합군의 사기를 크게 고무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지난 몇 달간에 걸친 혈전을 치르면서 겨우 수키로 미터도 전진하지 못했던 뼈저린 경험을 가지고 있던 연합군 장병들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전과야 어찌되었던 간에 하루에도 수십 키로를 질풍처럼 달려 나가는 아군의 전차대는 그야말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신바람이 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종군기자 제임스 윌라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전쟁이 돌연 신바람 나는 축제, 혹은 흥미진진한 스포츠 경기와도 비슷한 것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승리의 무드가 고조되고, 이제 곧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병사들이 많아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치의 땅에 며칠씩이나 못 박혀 있던 지지부진한 악전고투를 생각하면 그 어느 쪽이 진정한 전쟁의 모습인지 아리송할 지경이었다."
공세적인 성격만큼 정치적으로 능란하게 처세하는 데는 서툴렀던 패튼은 종전이 가까워짐에 따라 점점 더 정치적인 접촉의 필요성이 늘어난 소련군과의 관계에서 번번히 불화를 빚었습니다. 그는 거의 병적일 정도로 공산주의를 싫어했고 그런 속마음을 굳이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베를린 점령을 소련군에 양보하고 미 제3군의 전선을 체코국경에서 멈추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분통을 터뜨렸고, 소련군과의 마찰을 빚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는 상관들의 당부에는 이런 극언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우리 미국처럼 위대한 나라는 그따위 사소한 문제로 골치를 썩지 않아도 될 권리가 있다. 소련놈들이 정 그렇게 무서우면 소련도 점령해 버리면 될 게 아닌가? 나에게 2개군을 맡겨주면 당장에 점령해 보이겠다.” 패튼의 말이었습니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능란하게 처신하는 데 서투를 뿐 아니라 공산주의를 극도로 혐오하고, 또 귀족적이고 고압적인 패튼의 성격을 나타내주는 좋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제3군이 오스트리아의 왕립기마학교를 점령했을 때 부하들이 그곳에서 기르고 있던 종마 ‘리피츠아너’를 전리품으로 패튼 앞에 끌고 왔습니다.
전 세계인의 승마인이라면 모두가 탐을 내던 이 명마에 걸맞는 암말이 수백킬로나 떨어진 소련군의 점령지역 안에 있다는 말을 들은 패튼은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냉큼 달려가서 무조건 끌고 왓!!” 그것이 소련군을 자극하게 될 미묘한 정치적 사안이라는 사실같은 것은 이 단순한 무인에게 있어 그저 복잡하고 골치아픈 일일뿐이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자 이 철두철미한 군인은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게다가 군인이라기보다는 정치인에 더 가까운 독일 남부의 바바리아 지구 군정 사령관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이 시기에 그는 정치적으로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치명적인 실언을 하고야 맙니다.
“나치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던 사람들이다. 그것이 옳은 것이든 혹은 그른 것이든, 나는 이처럼 자신의 이념에 충실한 사람들을 존경한다.”
“전후 독일의 빠른 재건과 치안 회복을 위해서는 행정 경험이 있는 구 나치당 관료들은 다시 중용하는 것도 나름대로 현명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의 이런 발언들은 20세기의 인간이라기보다는 로마시대의 전사에 가까웠던 그의 개인적인 성품으로써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지만, 나치의 가공스런 악행과 유태인 대학살을 지켜보았던 전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을 분노시켜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처럼 거듭되는 실언으로 인해 그를 아끼던 아이젠하워 장군도 더 이상 패튼을 감싸주는데 한계가 있었고, 마침내 군정사령관직을 박탈당하고 사냥으로 우울한 심경을 달래고 있던 이 전쟁 영웅의 최후는 의외로 빨리 다가왔습니다.
* 종전 후 잠시 귀국시 뉴욕에서의 퍼레이드
1945년 11월의 어느 날, 패튼은 자신의 쓸쓸한 심정을 이렇게 일기에 남기고 있습니다. "봉급 받는 만큼 하는 일이 없다는 건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60세의 생일을 맞은 1945년 12월 9일 아침, 그는 운전병과 부관을 데리고 독일 도시 만하임으로 사냥을 떠났습니다. 길가에는 폭격으로 부서진 폐허가 즐비했고, 운전병 우드링크 일병은 장군이 그것을 바라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증언합니다.
"저것 보게. 처참한 광경 아닌가? 저 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깔려 죽었을까?"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전쟁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위대한 활동"이라고 찬미하던 장군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자신의 운명을 예견했기 때문이라고 우드링크는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 룩셈부르크에 있는 패튼 묘지, 부하들과 함께...
이날 아침, 고속도로 위에서 패튼이 탄 자동차는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중상을 입은 장군은 열흘 뒤인 12월 21일 하이델베르크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우쭐한 영웅 심리와 이기적인 독선을 빼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자"라는 혹평과 "미국 역사를 통털어 가장 위대한 군인 중의 한 사람"이라는 칭송의 극단을 오가던 한 인간의 죽음이었습니다.
* 애견 윌리, 주인의 소지품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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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다 읽고 나니 영화의 몇 장면이 떠오르네요. 77-78 년도에 제가 US Army 로 Texas Fort Hood 에서 복무 했을때 Patton 장군의 아들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Patton 장군의 아들도 장군이 되어서 그 곳의 기갑부대의 사령관으로 지휘를했는데 운전병 없이 직접 Jeep 을 몰고 다니며 사병들의 근무 상태를 점검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닮은 듯 하네요.
LA 거사님! 오랫만입니다. 잘 지내시지요? 틈틈이 용두열 난을 통하여 접하고 있습니다만...
패튼이 그 지랄같은 성격만 조금 아니었어도(허긴 그것도 한편으로는 그의 장점이기도 헀지만),
브래들리 대신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중심인물이 되어 훨씬 빨리 노르망디 반도에서 벗어나
독일군을 궤멸시키고 서부유럽을 해방시키고 종전을 빨리 단축시켰을텐데 하는 아쉬움이...그
러면 스탈린이 동유럽을 모두 석권하기는 곤란했을 것이고 나아가 세계 역사의 지평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봅니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하기도 하지만...
계속...미국이 신속히 히틀러를 제압하고 이어서 태평양전쟁으로 전력을 돌려 좀더 일찍 일본을
압박했다면? 그때 중국에서 미국의 OSS(CIA 전신)하에서 훈련중이던 우리 광복군 특별부대가
한반도로 침투해서 일본과 맞장을 떴다면? 우리가 한반도의 주인이 되면서(38선은 물론 김일성
도 등장하지 못했겠지요), 아울러 전승국으로써 당당히 국제사회에 등록을 하면서 도꾜 전범재
판에 참여하여 일본 천왕도 끌어내렸다면? 지금 저렇게 아베를 비롯한 일본의 극익 인간들이 설치
지 않았을텐데하는 생각까지... 이것도 부질없는 역사의 가정이지만...하하하... 잘 지내시기 바래요.
구구절절이 맞는 말씀이네요. 고선생님 가정대로 되었다면 우리의 상황도 달랐겠지요.
어떤 때는 역사의 가정이 현실이 되기도해서 모두를 놀라게도 하지요.
만약에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하고 가정을 했는데...
위에서 한 얘기하고 중복이 되지만...패튼이 시칠리아에서 병사 따귀만 안 때렸어도
노르망디 상륙을 지휘(아이젠하워는 뒤에서 영국군과 미군을 조율하는 총사령관 역
할)하면서 유럽대륙을 전광석화처럼 유린하고 그대로 베를린까지...실제 브래들리와
몽고메리가 노르망디 반도에서 너무 버벅거리는 바람에 시간을 많이 허비했지요. 패
튼같았으면 뭔가 돌파구를 마련했을거라는 전문가들의 얘기가...화딱지 나더라도 시
칠리아에서 그날 좀 참았으면 역사가...어휴!! 럭비공 트럼프는 지금 그동안 잃은 점
수를 만회하려고 뭔가 큰거 한건 할려고 하는 것 같은데...기다려 봅시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