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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면 멸망, 현실이면 구원/렘 5:1-31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사실이면 멸망, 현실이면 구원’이라는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사실이면 멸망, 현실이면 구원.
다시 말하면 천국이 있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사실입니까? 현실입니까?
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여러분에게 사실입니까? 현실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조차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이 있다는 말이 많은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망상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것이 또 현재 형편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 얘기는 하지 맙시다. 그런 사람들 마주 대하고 대꾸하며 기독교의 진리를 그렇게 피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스스로 물어보는 겁니다.
천국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지요. 그런데 현실은 아니지요.
사실과 현실 차이 뭐가 다를까요?
먼저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미국 대통령의 관저가 백악관이다. 사실입니다. 인도의 갠지스 강이 있다. 사실이구요. 그리고 천국이 있다. 사실입니다. 다를 게 없습니다.
백악관이 미국에 있고 그리고 인도에 갠지스 강이 있다는 것이 천국이 있다는 것과 별반 차이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사실, 갠지스 강이 있다는 사실 이렇게 사실이라는 얘기를 하지만, 우리가 내 가정의 사실 이렇게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
내 직장의 사실. 직장에도 사실이 있어요. 예를 들어 김영철씨가 부장님이라는 것, 홍길동씨가 사장님이라는 것 이게 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직장의 사실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전부 내 직장의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내 가정의 형편이 사실이 아니에요. 내 가정의 형편은 다 현실입니다. 내 가정의 사실 이렇게 얘기하지 않고 내 가정 형편, 내 자녀가 당한 사실 이렇게 얘기하지 않고 내 자녀가 당한 현실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럼, 이 사실과 현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내 마음을 주느냐 내 마음을 주고 있느냐에 따라서 사실과 현실에 차이가 나타납니다.
사실 어떠한 사실이라도 내가 그것에 마음을 줍니다. 관심 내 마음이 연관이 됩니다. 그러며 그것이 현실이 됩니다.
인도의 갠지스 강이 있다는 사실에는 내 마음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내 아들이 대학교에서 갠지스 강을 탐사하러 간다고 해서 갠지스 강에 갔습니다.
그러면 갠지스 강이 갑자기 사실에서부터 현실로 탈바꿈합니다. 왜요? 내 아들이 거기 가 있기 때문에 갠지스 강이라고 하는 사실에 내 마음을 두게 됩니다.
여러분, 천국이 현실입니까? 사실입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사실입니까? 현실입니까?
현실감이 곧 믿음이에요.
내 가정 형편이 내 가정 현실로 이야기 되잖아요. 그러면 내 가정을 믿는 겁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전능하시고 힘이 센 분을 믿는 그 믿음이 믿음이 아니라 내 마음을 주는 게 믿음이에요.
여러분, 언젠가도 말씀 드렸어요. 우리가 사도신경이라고 하잖아요. 우리의 신앙고백을 말합니다. 그런데 신앙을 총정리한 그 사도신경을 라틴어로 크레도(Credo)라고 합니다. 이 뜻은 ‘내가 나의 심장을 준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을 준다는 뜻이에요.
그러므로 신앙고백, 믿음이란 무엇이냐? 마음을 주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실에든지 마음을 주는 거예요. 사실이 아닌 것에 마음을 주는 법은 없어요. 어떤 사실이든지 내가 마음을 주게 되는 거 그게 Credo 신앙을 표현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 가정 형편이 내 가정 현실 내 자녀 현실이라고 그러면 나는 내 자녀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고 마음을 주기 때문에 나는 자녀를 믿는 것입니다. 자녀의 형편에 마음을 줘서 자녀의 형편이 현실로 느껴지는 가운데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주고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자녀에게 주는 것이지요.
이러한 현실과 사실에 차이. 마음을 주면 현실이 되고 마음을 주지 않으면 사실로 남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실이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멸망합니다.
바로 이러한 인식 하에서 오늘 예레미야서 5장의 내용이 전개되어 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선민 특별히 남왕국 유다의 죄악상에 대해서 말을 하는데 5장 1절을 보시면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하나님께서 작정하셨을 때 아브라함과 대화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의인 다섯 명을 찾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예루살렘, 예루살렘이 뭐에요? 소돔과 고모라가 아닙니다. 이방 민족의 땅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입니다.
선민의 나라의 도성이고 그리고 그 도성 안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임재 장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의롭게 살고 있는 단 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각하고 아예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예루살렘에서 없어져 버렸느냐? 아니에요.
2절에 보면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라는 말이 나와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두고 맹세까지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의롭게 산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단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이게 뭘 말하는 겁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이 사실에 머물고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은 선민의 나라 안에서의 맹세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맹세가 됩니다. 가장 확실한 보장이 됩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누구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맹세한다고 해서 더 credit을 주지 않는 거예요.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는데 내가 당신에게 돈을 갚겠어.”
그렇게 얘기하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살아계신 하나님은 무슨 놈의 살아계신 하나님.” 이렇게 얘기가 되고 있다는 겁니다.
다 알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다 거짓이라는 걸 다 알아요.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물어봐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사실입니까?” “아! 사실이지요.” 그런데 정의롭게 살지 못합니다. 왜요?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다윗이 밧세바를 범할 때 밧세바와 연관된 이야기가 기록되는 사무엘서를 읽어보면 단 한마디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당시에 누가 가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사실이냐고 물어보면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겠습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이 현실이 아닌 게 되어 버린거에요. 어떻게 그 순간에 그럴 수가 있겠느냐 싶지만 그게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요. 그러니까 정의롭게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제사장과 선지자와 선민 백성 모두에게 마찬가지였다는 겁니다.
제사장이라고 하면 좀더 나을 것 같지 않습니까? 성전에서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었고,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표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과 선지자는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의 현실 앞에서 백성들이 살기 위한 쌍방의 방향을 하나씩 맡고 있었던 사람들이에요.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표해서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고,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분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제사장이라고 해서 좀더 낫지 않겠느냐 라는 기대를 해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선지자라고 해서 좀더 일반 백성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생각해보지만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일단 하나님이 현실이 되지 않을 때는 그 죄악이 나타날 때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완전히 사회가 파괴되어져 가는 거예요. 모든 선이 다 망가지는 거예요.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이 사살로 머물 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4절 보세요.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누가요? 선민이. 알지 못해서 알지 못합니까? 율법조항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 율법이 내가 이루어야 될 현실이 아닌 겁니다.
예를 들어, 바닷가에서 천막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안경비대가 와서 조금 뒤에 쓰나미가 몰려오니까 천막을 거두고 피해라 그러면 그 말을 듣고 행하지 않을 자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현실이니까. 나의 죽고 사는 일이 연결된 현실이니까 천막을 옮겨놉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그게 하나님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리고 제사장이고 선지자고 백성이고 너나 할 것 없이 아무도 이 땅에서 하나님을 현실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지금 선민 안에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바깥은 말할 것도 없지요.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레미야서가 끊임없이 죄악을 이야기합니다. 지루할 것 같아요. 그렇죠? 죄악에 대해서 듣는 것도 지긋지긋해요.
그러나 이러한 죄악의 모습을 알때라야 주님의 십자가가 진정으로 복음이 되는 겁니다.
날마다 예레미야서를 한 장씩 읽어가면서 우리가 오늘의 번제를 드릴 때 우선 내 죄악을 여기서 보는 거예요. 내가 지금 하나님을 현실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현실로 생각합니까?
그럼, 한번 물어봐요. 내 자녀의 현실, 내 가정의 경제현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천국이 있다는 현실. 진짜 어느 게 현실이에요?
현실감을 어느 것에 대핵서 더 강하게 느낍니까? 내 가정의 경제현실에 대해서 더 강하게 느끼잖아요. 왜 자꾸 딴 생각을 하세요.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요. 그러나 사실이지 않습니까. 천국이 있다는 것과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에 오바마 대통령이 머물고 있다는 것과 나에게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인도에 갠지스 강이 있다는 사실과 천국이 있다는 사실이 지금 현재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다른 게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암이라도 걸려서 죽기 직전에 가서야 천국을 바라보지요. 이 삶의 현장에서 있는 동안에 누가 천국을 현실로 느끼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날 십자가에서 죽으라고 하면 이런 얘기 물어보지 않습니까?
“삶의 현실 속에 뛰어 들어가서 어떻게 그러고 사느냐?”
삶의 현실이 현실인 거예요.
여러분, 믿음이 뭔지 아십니까?
credo입니다. 마음을 주는 대상이 곧 믿음의 대상이고 마음을 주는 행위가 믿음입니다. 마음을 주게 되면 현실이 됩니다.
천국이 있다는 게 사실입니다. 사실 단계에 머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천국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삼년 뒤에 입주하게 될 아파트를 새로 청약을 해도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낡고 후줄근해도 불편한 모든 것을 참고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천국이 현실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현실인 사람에게 있어서 이 땅에서 그 사람을 괴롭게 하고 슬프게 하고 불행하게 할 수 있는 이 땅의 사건이 무엇이겠습니까? 없다는 거에요.
어떻게 순교가 가능합니까? 우리는 순교가 아니라 박해받아서 죽는 게 아니라 지금 늙어서 죽는 게 아쉬운데 사자밥이 되고 불에 타 죽고 나만 죽는 게 아니라 내 아내 남편이 죽고 내 부모님들이 죽고 내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내 어린 자식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죽습니다.
그런데도 순교가 가능한 것은 내 자녀가 죽는다는 그 형편보다도 천국의 형편이 더 현실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순교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어떻게 현실로 느껴졌을까요?
마음을 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선민 아니라 제사장 아니라 선지자라도 마음을 하나님에게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현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보면 하나님이 징계를 해도 하나님이 징계를 하시는지를 몰라요. 하나님이 현실이 아니니까 내가 지금 징계를 받아서 내 삶에 재난이 임하고 환란이 임했는데도 그게 하나님이 주신 거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는 얘기에요.
여러분, 어떻게 하면 우리의 마음을 천국에 드릴 수 있을까요?
천국을 현실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예수님 한번 보실까요?
풍랑 만난 배. 제가 너무 좋아하는 장면이에요.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제자들과 예수님을 한번 보세요. 현실과 사실이 여기서 나타납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현실은 풍랑이에요. 예수님에게 있어서 풍랑 만난 그 형편은 사실입니다. 거기다 마음을 안 두는 거예요. 예수님에게서 현실은 아버지의 손입니다. 아버지의 손 안에 붙잡혀 있고 천국입니다. 천국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풍랑 만나 배 위에서 주님은 주무시는 거예요. 왜? 천국이 현실이니까.
풍랑 마난 제자들은 두려워 떨고 난리가 납니다. 왜? 풍랑 만난 그것이 곧 현실이니까.
현실과 사실! 지금도 미국은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럼 내가 대한민국 땅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가정에서 생활을 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사살입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찾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전부 이름 뿐인 하나님입니다. 왜? 그 하나님의 존재에 내가 마음을 드려본 적이 없으니까. 전부 내 마음은 가정의 현실, 내 자녀의 현실, 내 건강의 현실과 같이 마음을 전부 딴 곳에 두고 있으니까.
여러분, 현실감이 곧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도 찬양합니다. 감옥은 사실이 된 것이고 천국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 내일 아침에 목이 잘립니다. 그런데도 감옥에서 깊이 잠이 듭니다. 왜? 천국이 현실이니까. 감옥에 있다가 내일 목이 잘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정해진 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베스도 총독 앞에서 사도바울이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거지같은 형편에서 감히 왕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왕이 누리고 있는 모든 이 땅의 모든 부귀영화는 사도 바울에게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는 천국이 현실입니다. 천국의 금은보화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지을 수 없는 천국이 마음에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온갖 세상의 진귀한 것으로 치장하고 있는 왕이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게 믿음이라는 겁니다.
이 땅에서 잘 살자고 믿은 거 아니잖아요. 왜 믿어요? 이 땅의 현실이 사실로 바뀌고 천국이 있다는 사실이 현실로 바뀌기 위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이 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믿어져야 돼요.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하나님이 현실이 되는 거예요.
이 지구와 우주 전체를 지으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이 현실로 바뀔 때 우리는 지구를 드는 거예요. 내 새끼손가락으로 지구를 드는 겁니다.
내게 돈이 들어오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현실이 되면 되는 거고 천국이 현실이 되면 되는 겁니다.
왜 지금의 가정 형편에 바보처럼 살고 계십니까? 천국 현실 안에서 살면 되지. 왜 지금의 경제 형편에 쫄쫄 매여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현실이 되면 되는 거지.
하나님이 사랑하신대요. 맨날 하나님이 사랑을 얘기해요. 그게 다 사실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계시던 하나님의 사랑이 사실이에요. 독생자까지 주셨으니까 사실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현실로 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면 현실이 됩니까?
예를 하나 들어봐요.
전철에서 여고생이 전화를 합니다. 옆에 할아버지가 앉아 계시고 옆에 아줌마가 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걸면서 웃었다가 화를 냈다가 깔깔댔다가 난리가 났습니다.
옆에 할아버지 앉아 계시고 아줌마 앉아 계시고 앞에 대학생 오빠 서 있고 이게 다 사실입니다.
지하철이라는 이 현장을 이 사실을 전화하면서 마음이 떠나버린 거예요. 무선 전화 연결을 통해서 마음이 빠져나가버린 겁니다. 현실이 지금 상대 쪽에서 지금 저화를 걸고 있는 자기 친구가 현실이에요.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내 앞에 펼쳐지는 자녀의 형편을 마음이 떠나서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이 현실이 되느냐?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떠나야 되는 거지요. 그 여고생의 마음이 지하철 현장을 떠나버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로 하여금 내 눈 앞에 펼쳐지는 형편을 떠나게 해주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눈 앞에 보이는 자녀에게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구나 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자녀가 있는 그 형편 옆에 아저씨가 앉아 있고 할아버지가 앉아 있고 아줌마가 앉아 있던 지하철 현장을 떠나는 것처럼 자식이 있다고 하는 현장을 내 마음이 죽었다함을 고백하는 동시에 떠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거에요.
이 일이 매사에 반복되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하나님이 현실이 되고 천국이 현실이 되면서 모든 게 다 사실로 바뀌어버립니다.
이제는 내 가정이 사실이 되어 버려요. 이제는 내 가정 형편이 내 가정의 현실이 아니라 내 가정의 사실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내 자녀의 사실이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사실로 바뀔 때 비로소 내 삶에서 내가 떠난 모든 자리가 다 천국의 자리가 되고 하나님이 임재하는 자리가 됩니다.
그래서 내가 사실로 바꾸어서 마음을 떠나보냈던 이 삶의 현장이 하나님에게 현실이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현실이 된다는 겁니다. 내 가정이 하나님이 현실이 되고, 내 자녀가 하나님이 현실이 되고.
어떨 때? 내가 그것이 사실로 바뀔 때. 오직 하나님만이 현실이 되고 천국이 현실이 될 때.
그렇잖아요. 내 마음 안에서 천국이 현실이 될 때 내 자녀는 천국을 만날 것 아닙니까? 내 자녀문제 때문에 내가 걱정하고 고민해봐야 이 세상에서 배운 가치관이 내 안에서 작용하면서 걱정하는 것이니까 세상을 만날 뿐이에요.
그러나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내 자녀를 떠납니다. 내 자녀에 대해서 죽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보내서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현실이 되면 내 자녀는 하나님이 만나게 되는 거예요. 내 마음에서 천국이 현실이 되면 내 배우자는 천국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가정 형편, 여러분의 건강 형편, 여러분의 직장 상황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떠남을 통해 사실로 바꿔버리세요. 그게 현실로 남아 있으면 안 돼요. 그러면 chaos가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이 얘기에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내게 주어지는 모든 이 땅에서의 형편을 사실로 바꿔버립니다. 마음을 주지 않는 거예요.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게 아닙니다.
내 자녀의 성적이 바닥을 쳤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실로 받아들이지 마요. 내 현실은 하나님이 현실이고 천국이 현실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이 땅의 형편에 대해 죽을 때에 하나님이 점점 더 현실로 느껴지고 천국이 현실로 느껴지고 천국이 내 것이 되어 버립니다. 천국을 소유한 자로서 이 땅을 살아갈 때에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내 마음이 천국이 현실일 때라야 천국을 만나는 거예요. 하나님이 현실일 때라야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구요.
사실이면 망합니다. 현실이라야 구원을 얻습니다.
뭐가요? 하나님이 계신 것이.
그리고 거꾸로 말하면 이 땅이 현실이면 내 삶의 형편이 현실이면 망합니다. 내 땅의 현실은 사실이라야 합니다. 내 땅의 형편은 사실이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기존의 사실과 현실이 뒤바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과 천국이 현실이 되어 내 마음 안에서 현실감으로 느껴지게 하시고 이 땅의 모든 형편들이 사실이 될 때 이 땅의 사실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천국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주변이 하나님의 현실에 부딪치면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변화하는 역사를 오늘도 마음껏 보게 되는 복된 가나안의 삶이 이루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