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 기대승 [高峰, 奇大升, 1527~1572]
흰소가 누운 모양을 닮았다하는 백우산 기슭에 기대승을 제향하는 월봉서원이 깃들어 있다.
기대승은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자 명언(明彦). 호 고봉(高峰) ·존재(存齋). 시호 문헌(文憲). 전남 나주(羅州) 출생으로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사관(史官)이 되었다. 156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주서(注書)를 거쳐 사정(司正)으로 있을 때,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영수(領袖)로 지목되어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삭직(削職)되었다가, 1567년(명종 22)에 복직되어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 해 선조가 즉위하자 집의(執義)가 되고, 이어 전한(典翰)이 되어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追贈)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우부승지로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다가, 1570년(선조 3) 대사성(大司成) 때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했다. 후에 대사성에 복직되었는데 이듬해 부제학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1572년 다시 대사간을 지내다가 병으로 그만두고 귀향하는 도중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여 문학에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고금에 통달하여 31세 때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발췌하여 《주자문록(朱子文錄)》(3권)을 편찬할 만큼 주자학에 정진하였다. 32세에 이황(李滉)의 제자가 되었으며,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등 호남의 석유(碩儒)들을 찾아가 토론하는 동안 선학(先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 바가 많았다. 특히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는 유명한데, 이것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변론 후 이황은 그의 학식을 존중하여 대등한 입장에서 대하였는데, 이 논변의 왕복서한은 《양 선생 사칠이기왕복설(兩先生四七理氣往復說)》 2권에 남아 있다.
또 서예에도 능했으며 사후 1590년(선조 23)에는 생전에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 3등(光國功臣三等)에 추록(追錄)되었고 덕원군(德原君)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주요저서에는 《고봉집(高峰集)》 《주자문록(朱子文錄)》 《논사록(論思錄)》 등이 있다.
◆ 사단칠정론쟁
사단 칠정이란 인성(人性)을 설명하는 성리학의 주요개념이다.
사단은 맹자 성선설의 근거가 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는데, 각각 인·의·예·지의 실마리가 된다. 칠정은 예기 禮記〉 예운(禮運)편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 등 사람이 가진 7가지 감정을 말한다.
사단과 칠정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 중요하게 취급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송대에 성리학이 성립하면서 부터이다. 그 이전까지 유교에서는 인간의 심성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교를 심성 수양의 도리로까지 확대하고 또 체계적이고 통일적인 세계관을 수립하려 했던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심성 문제에 대해서도 이론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성리학에서는 마음이 사물에 감촉되지 않은 상태, 즉 心의 미발(未發)을 性이라 하고, 마음이 사물에 이미 감촉된 상태 즉 心의 이발(已發)을 情이라 한다. 결국 미발의 성이 발한 것이 정이며, 사단과 칠정 모두 정을 가리키는 개념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런데 주희는 사단을 '이지발'(理之發)로, 칠정은 '기지발'(氣之發)로 설명하여 양자를 구분하기도 했으나, 사단과 칠정의 이기 분속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리학이 도입된 초기부터 16세기까지 사단과 칠정을 이기론으로 설명할 때 각각을 이(理)와 기(氣)에 분속시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단칠정논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정지운(鄭之雲 : 1509~61)의 〈천명도 天命圖〉에서도 사단의 발은 순리이며 칠정의 발은 기가 겸한 것이라고 했다. 이황(李滉 : 1501~70)도 역시 이 천명도를 수정하면서, 四端은 理에서 發한 것이고 七情은 氣에서 發한 것, 혹은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 하여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와 기에 분속하여 설명했다.
그러나 1559년(명종 14)에 기대승(奇大升 : 1527~72)이 이황의 사단칠정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이황이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면서 8년에 걸친 사단칠정논쟁이 이루어졌다. 사단칠정의 이기 분속 문제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커다란 철학적 문제로 대두하게 된 배경에는 이 시기 조선 성리학에 이제까지의 이기이원론과는 다른 이기일원의 이기론이 성립하기 시작했다는 사정이 있었다.
형이상학의 측면에서 이기이원론은 이를 기의 존재 근거로까지 인정하는 견해를 가리키며 이기일원론은 이를 기의 조리(條理)로만 인정하는 견해를 가리킨다. 이러한 차이가 사단칠정론에서는 기발과 함께 이발을 인정하는 견해와 기발만을 인정하는 견해로 나타난다. 이황은 이기이원론에 바탕을 두고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와 기에 분속하여 설명했다. 그러나 기대승은 이기일원론적인 견해에 바탕을 두고 사단과 칠정을 설명함으로써 사단과 칠정을 명확하게 이와 기에 분속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에 대해 이황은 이기의 관계가 비록 밀접해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단은 이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理發氣隨之)이고, 칠정은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氣發理乘之)이라 해도, 사단은 그것이 유래하는 바가 마음 속에 있는 본연지성이요, 칠정은 그 유래하는 바가 기질지성이며, 또 사단은 기가 따르는 것이지만 주로 하여 말하는 것(所主而言)이 이에 있고 칠정은 그것이 기에 있기 때문에 각각을 '이지발'과 '기지발'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사단칠정 문제에 대한 이황의 이러한 견해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이라 불린다.
이기호발설에 대해 기대승과 그후의 이이(李珥 : 1536~84)는 사단과 칠정은 모두 기질지성 속에 갖추어 있는 이가 기를 타고 발한다는 점에서 그 유래하는 바가 같으며, 다만 발해서 순선한 것만을 가리켜 사단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들은 이황의 견해 가운데에서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만을 인정하고 그것으로 사단과 칠정이 유래하는 바를 모두 설명했으며, 칠정 이외에 따로 사단의 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칠정 가운데 사단이 포함되는 것이라고 했다. 기대승과 이이의 이러한 견해는 이기겸발설(理氣兼發設)로 불려진다.
1572년(선조 5)에 성혼(成渾 : 1535~98)은 사람의 마음을 형기(刑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기는 인심(人心)과 성명(性命)의 정리에 근원하는 도심(道心)으로 구분할 수 있듯이 성이 발하는 것도 사단과 칠정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사단은 이에서 발한 것으로 칠정은 기에서 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성혼과 이이 사이에 다시 사단칠정논쟁이 벌어졌다. 성혼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이이는 인심·도심의 구분과 사단칠정의 구분은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사단칠정을 각각 이기에 분속하는 이황과 성혼의 견해를 비판했다. 16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호발설과 겸발설로 정리된 사단칠정의 이기론적 해석은 그후에도 우리나라 성리학의 중요한 이론적 탐구 대상으로 남아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고, 성리학 이해에 깊이를 더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 가운데 이황의 호발설을 지지하는 견해를 주리론(主理論)이라 하고, 이이의 겸발설을 지지하는 견해를 주기론(主氣論)이라 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의 양대 흐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요약하면 '사단'은 맹자가 인간의 본성으로 제시한 인의예지(仁義禮智)이고, '칠정'은 예기에서 제시한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을 말한다. 사단 칠정론의 핵심은 인간의 본성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이황은 '이기 이원론'에 입각하여, 사단은 도심(道心=理)이고 칠정은 인심(人心=氣)이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은 둘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기대승은 '이기 일원론'에 기초하여 사단과 칠정은 분리할 수 없고 사단이 칠정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단 칠정논쟁은 조선후기의 성리학을 주리파와 주기파로 나누는 계기가 됐다. 처음 사단칠정론을 편 사람이 이황이다. 12년 동안의 기대승과 이황의 서한 중에 8년이 사단칠정론에 대한 논쟁이었으니 논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기대승이 이황을 스승으로 존경하며 서신을 주고받았음에 틀림없다. 실제로 32세 때 이황의 제자가 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주리론 혹은 이기일원론의 개념은 4단은 '이'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7정은 '기'에서 나오는 마음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에 '이'와'기'가 함께 있긴하더라도 마음의 작용은 '이'에서 생겨나는것과 '기'에서 생겨나는것 두가지인 것이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인 4단은 "이'에서 생겨나는것에 속하므로 이것이 사람마다 성(性)이 다르고 기질이 다른것과 같다는 주장이다. 주기론, 이기일원론은 기대승과 이이 등이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수있지만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선 구분할수 없는 것이라며 '이기공발설'을 내세운 것이다. '이이'의 '이기이원론적 일원론'과도 들어맞는 부분이 많다.
이게 기대승과 이황이 죽은뒤에도 200년 동안 논쟁이 계속됐다. 그러면서 영남학파 VS 기호학파, 더 나아가 동인 VS 서인으로 까지 학파분쟁. 당파분쟁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내가 보건데 이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이다. 이기호발설에서 다시 이이와 기대승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즉 이이는 이(즉 영혼)가 있어야만, 기(육체)가 생긴다고 본 것이고, 기대승은 기(육체)가 있어야 이(영혼)가 있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의견의 구별법은 자연이 영혼과 육체의 문제로 전가되는데, 영혼이 理, 육체가 氣라면, 영혼이 있어 육체가 있는 것이냐(이이)? 아니면 육체가 있어 영혼이 있는것이냐(기대승)? 의문제 인것이다. 현대의 흐름으로 보자면 기대승의 의견이 지지를 받을 것이다. 현재는 경험주의 철학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월봉서원 묘정비 병서 조선조 명종ㆍ선조 연간에 문운(文運)이 빈빈(彬彬)하고 사류(士類)가 성(盛)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전대(前代)에 겪은 사화(士禍)의 남은 불씨가 아직도 척신(戚臣)과 간인(奸人) 사이에 남아 있어서 은밀히 선비를 해치는 재앙을 빚고 있기도 했다. 이런 때를 당해 힘써 독류(毒流)를 배척하고 청의(淸議)를 끌어당기며 의리를 밝혀 학문이 이룩되고 도가 높아 우뚝하게 유종(儒宗)이 된 분이 바로 고봉(高峯) 기 선생이시다. 일찍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천하의 일에 옳고 그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밝힌 뒤에야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고 정부의 명령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대저 옳고 그름은 비단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상 천리(天理)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때 비록 가리고 베어내 버린다 하더라도 그 옳고 그름을 아는 본심(本心)은 끝내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언론 창달(言論暢達)은 국가의 중대한 일입니다. 언로(言路)가 열려 있으면 국가가 평안하고 언로가 막혀 있으면 국가가 위태롭습니다.” 하였으며, 또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道)를 논하기를 “학교 교육을 밝게 닦아 인재를 양성해서 그 성취도에 따라 뽑아 등용할 것이며, 능히 국가의 치란(治亂)과 백성의 기쁨ㆍ슬픔을 헤아려 아는 자와 더불어 정치를 하면 묵은 병폐(病弊)를 개혁하고 앞사람들이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치를 논하고 주장을 세움에 있어서 도를 지키지 않음이 없었다. 상세한 것은 《논사록(論思錄)》에 실려 있다.
미묘를 정밀하게 연구하니 / 精究微妙 도체를 꿰뚫었네 / 道體透洞 널리 보고 조예가 뛰어나서 / 博覽超詣 탐구하고 토의해 종합하고 분석하였네 / 探討約綜 주대한 말씀은 / 奏對之辭 논사록으로 외우고 / 論思以誦 사칠이기설은 / 四七之說 철학의 지표라 칭송하네 / 指南以頌 법도 지키기를 준엄하게 하니 / 典則峻嚴 예학에도 달통하였네 / 禮學達通 많은 선비 추앙해 / 多士追仰 사당 세워 받들고 / 建祠供奉 백세의 모범 되니 / 百世矜式 월봉이라 사액하였다네 / 賜額月峯 경과 의 함께 세웠으니 / 敬義偕立 길이 뒤를 따르리 / 永年隨踵 서기 1998년 무인 5월 상한(上澣)에 성균관장(成均館長) 후학(後學) 경주(慶州) 최근덕(崔根德)은 삼가 짓고 번역하다.
◆ 조선 성리학자 기대승에 얽힌 천자문 일화
천자문은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 한편의 대서사시로서 또는 동양의 文․史․哲을 담은 인문종합교양서로 만만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기초교재가 아니다. 문제는 천자문에 대한 오해와 무지가 천 수백 년을 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이다. 천자문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와 무지를 들어보면, ‘어린 아이들이 배우는 단순한 글’이라며 무시해왔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조선시대의 선비들이나 시중에 나돌고 있는 천자문 해설서의 저자들이 천자문의 인문종합교양서로서 또는 저자의 일생을 담은 ‘一章의 대서사시’로서의 의미와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천 개의 글자를 어떤 방식으로든 훈과 음을 외우게 하기만 하면 마치 천자문공부를 다 시켰다고 인식하고 있다. 일례로 예전의 서당훈장은 변변한 교본 하나 없이 자신의 지식 범위 내에서 천자문을 가르쳤고, 학동들은 뜻도 모른 채 밤낮 무조건 외우기만 해야 했다. 학동들은 급기야 “하늘천 따지 가마솥에 누룽지 박박 긁어서 선생님은 말구유, 나는 밥사발, 선생님은 똥가래, 나는 숟가락…” 하면서 훈장을 조롱하기까지 하였다. 천자문을 무조건 암기하라는 지시에 대한 반발이다. 조선시대 최고 학자 중의 한 분인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선생과 관련된 일화(逸話)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기대승선생이 다섯 살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맨 첫 문장인 ‘천지현황(天地玄黃)’을 가지고 일곱 살까지 배웠지만 모른다는 것이다. 화가 난 서당선생은 소를 끌어다 기대승 앞에 세워놓고 고삐를 세게 잡아 위로 쳐들며 ‘하늘 천’ 하고, 아래로 세게 잡아 내리며 ‘따 지’ 하기를 몇 번 한 뒤에 고삐에서 손을 떼고 나서, ‘하늘 천’ 하니까 소가 머리를 위로 올리고, ‘따 지’ 하니까 머리를 아래로 내리는 것이다. 훈장이 기대승에게 말하기를 “이것 보아라! 소 같은 짐승도 몇 번 가르치지 않아서 ‘하늘 천’하면 머리를 하늘로 올리고 ‘따 지’하면 머리를 땅으로 내리지 않느냐. 그런데 너는 사람이면서 '천지현황'을 삼 년이나 가르쳤는데도 모르고 있으니 소만도 못하구나” 라며 꾸짖었다. 그러자 기대승은 ‘천지현황을 삼년독(天地玄黃, 三年讀)하니, 언재호야(焉哉乎也)를 하시독(何時讀)고’ 하며 글을 읊는 것이었다. 천자문의 첫 글귀가 ‘天 地 玄 黃’ 네 글자이고 맨 끝줄이 ‘焉 哉 乎 也’이다. 즉 천자문의 첫 번째 줄 ‘천지현황’을 삼년 읽었으니 맨 끝의 ‘언재호야를 어느 때나 읽을고’라는 뜻이다. 기대승은 이미 천자를 다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글방 선생은 기대승이 글 읊는 소리를 듣고 그제서야 “아, 너는 벌써 천자를 다 읽고 있었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너를 소만도 못하다고 하였구나” 하며 미안하게 여겼다고 한다. 왜 기대승이 천자를 다 읽고 있으면서 천지현황에 대하여 3년 동안이나 그토록 모른다고 했을까? 어린 나이에 천자문을 배우면서 천지현황에 담긴 뜻을 알고자 했던 것이다. 이 천지현황은 비록 네 글자이지만 글을 많이 배운 어른도 알기 어렵다. 무조건 외우는데 그치지 않고 깊은 이치를 알려고 했던 어린 기대승이야말로 공부하는 자세가 바로 되었고, 그러하기에 뒷날 훌륭한 학자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어느 나라든 철학책이나 종합교양서를 이치나 원리 또는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지도 않은 채 무조건 외우게 하지 않는다. 문제는 외우기만 하는 천자문 교육방식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대부분의 책들이 본뜻과는 동떨어진 채 흥밋거리로 뜻글자를 희화화하였고, 한자급수시험이라고 하여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도 모를 낱글자들을 외우게 하여 시험 보게 하는 제도는 잘못된 교육방식의 대표적인 본보기이다.
1571년 3월 21일 고봉 기대승은 제자들과 같이 무등산 규봉에 올랐다. 그날은 퇴계 이황의 장례날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이 시를 짓는다.
느낌이 있어 짓다.
선생은 세상이 싫어 백운향에 가셨는데 / 先生厭世白雲鄕 천한 제자 슬픔 머금고 이곳에 있네 / 賤子含哀在一方 멀리 생각하니 오늘도 무덤에 묻히시어 / 遙想佳城今日掩 사산의 궂은 안개 점점 망망하리라 / 四山氛霧轉茫茫
한 기운 유유하게 갔다 또 돌아오니 / 一氣悠悠往又回 화옥에서 천대로 떨어짐 견디겠는가 / 可堪華屋落泉臺 산머리에서 저도 몰래 속마음 아프니 / 山頭不覺中心痛 백발된 여생 외로이 왔노이다 / 衰白餘生踽踽來
병 많아 근년에는 괄랑을 본받으니 / 多病年來效括囊 우연히 봄빛 따라 선방에 이르렀네 / 偶隨春色到禪房 우리 도학 땅에 떨어짐 상심하노니 / 傷心吾道今墜地 공경히 누구를 위해 다시 향기 기를꼬 / 敬爲何人更畜香
융경(隆慶) 신미 1571년 3월 21에 고봉 기대승은 무등산(無等山) 규봉(圭峯)의 문수암(文殊菴)에서 쓰다. 이날 퇴계 선생의 장례가 있었다. 느끼는 바가 있어서 우연히 이 시를 썼다. 아래 두 수는 회암운(晦菴韻)을 쓴 것이다. [주D-001]선생은 …… 가셨는데 : 선생은 퇴계를 말하고 백운향(白雲鄕)은 신선이 사는 곳으로 퇴계가 돌아가심을 말함.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저 흰구름 타고 상제의 고을에 놀리라.[乘彼白雲 遊乎帝鄕]” 하였음. [주D-002]화옥(華屋)에서 …… 견디겠는가 : 화옥은 화려한 집으로 영화로운 삶을 뜻하고 천대는 땅 속으로 죽음을 뜻함. [주D-003]괄랑(括囊) : 주머니를 졸라매는 것으로 곧 말을 조심한다는 뜻임. 《周易 坤卦》 [출처] ◈고봉 기대승 [高峰, 奇大升, 1527~1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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