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상을 해봅시다. 여러분은 지금 고막을 찢을 듯이 강렬한 테크노 음악이 흘러나오는 나이트클럽에 들어갔습니다. 언뜻 단조롭지만 들을수록 심장 박동을 빠르게 만드는 음악과 현란한 조명, 주위 어떤 것에도 신경쓰지 않고 음악에 맞춰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 이곳엔 어떤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감돕니다. 세상사 모든 근심을 잊고 무아지경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도 서서히 분위기에 젖어듭니다. 이때 누군가 당신에게 다가와 속삭입니다.
“난 널 지금보다 100배쯤 더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 단, 매력적인 만큼 난 위험한 면이 있지. 네 인생이 파멸될 수도 있거든. 어때? 내 몸을 빌어 극락(極樂)을 경험해보지 않을래?”
여러분들은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지난 9일 서울 용산경찰서에 붙잡혀온 19명의 내·외국인은 이런 ‘악마의 유혹’에 ‘Yes’라고 답한 사람들입니다. 홍대앞 테크노바를 주무대로 ‘엑스타시’와 ‘해쉬쉬’를 대량 유통하고 투약해 온 혐의를 받고 있는 이들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자유로운 ‘해외파’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미국인 대학교수, 전 주한미군, 학원 영어강사 등 영미권 외국인 5명, 외국인학교 고등학생, 유학생 등 교포 7명, 대학생 등 국내인 7명으로, 이중 13명이 구속되고 나머지는 불구속 입건됐습니다.
이들은 한 인터넷 사이트에 명문 K대학생 고모(여·18)씨가 올린 글로 덜미가 잡혔습니다. 교포들이 주로 이용한다는 이 사이트에 고씨는 “엑스타시를 복용해 지금 기분이 최고다”란 내용의 글을 올렸고, 그녀를 시작으로 줄줄이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9일 오전 용산경찰서 마약반에는 이들로부터 압수한 해쉬쉬 500g과 엑스타시 169정이 전시돼 있었고, 잠시 후 수갑을 차고 옷으로 얼굴을 감싼 10여명의 피의자들이 마약반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린 우리 젊은이들과 달리, 외국인들은 간간히 옷 사이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이며 저희 취재진들을 ‘구경’하더군요. 이방인들의 눈에는 그 좁은 마약반에 몰려들어 난리법석을 피우는 저희들이 무척 신기했나 봅니다.
이들중 각 신문과 방송에서 대표적으로 소개된 사람은 국내 S대 영어교수인 R(42·미국)씨입니다. 그는 투약과 함께 지난해 7월부터 총 4000여만원에 구입한 엑스타시 500정과 해쉬쉬 1700g을 시중에 판매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마약판매가 부업인 셈이었죠. R씨와 더불어 주요 피의자로 꼽히는 같은 대학 교수 A(36·미국)씨와 M(30·서울 모 초등학교 영어강사·캐나다)씨는 R씨로부터 구입한 마약을 투약·판매해 온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R씨의 얼굴에서 죄의식이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엔 자신이 즐기기 위해 D라는 이름의 미국인으로부터 엑스타시와 해쉬쉬를 구입했고, 나중에 “돈 좀 벌어보라”는 D의 제의로 판매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제자들에겐 마약을 권하지도, 팔지도 않았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도덕성을 입증하려는 듯 말입니다. “왜 마약을 했냐”고 묻자,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기 위해서였다”고 답했습니다.
신원이 노출되면 안된다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던 A씨는 그러나 한번 말문이 열리자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매우 억울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미국, 네덜란드, 스페인 등 세계 곳곳을 다녀봐도 엑스타시와 해쉬쉬 투약이 문제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어째서 이 나라에서는 범죄가 되느냐는 항변이었죠. 그러나 그의 어색한 고무신이 말해주듯, 여긴 엄연히 마약 소지만으로 범죄가 성립되는 나라였습니다.
그는 이어 술이 엑스타시보다 더 위험하다는 논리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술에 취해 사람들에게 난동부리고 음주운전 하는 것보단 혼자 즐기는 걸로 끝나는 엑스타시가 사회적으로 폐해가 더 적다 , 따라서 국가는 엑스타시 단속에 앞서 음주부터 단속해야 한다, 그런데 음주는 용인하면서 엑스타시 투약은 문제삼다니, 이건 말도 안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자신의 윤리 기준에 따르면, 술은 하지 않고 마약만 한 그는 도덕적으로 크게 문제될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엑스타시 구하기 쉬웠냐”는 질문에, 그는 “누구나, 어디서나 구할 수 있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신촌, 압구정, 홍대를 거명하며 엑스타시 없는 곳은 없다고 단정짓더군요. 순간, 그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다는 엑스타시 한 알 지금껏 구경 못한 제 자신이 과연 기자로서의 자질이 있나 싶어 자책감마저 들었습니다.
“엑스타시와 해쉬쉬 중에 무엇이 더 좋았냐”고 묻자, A씨는 “둘다 좋다”고 쉽게 말하더군요. 그에겐 마치 두가지 음식을 두고 어떤 음식이 더 좋냐는 질문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제게 “엑스타시 해본 적 없냐”고 묻더군요. “없다”고 답하자 “좋은 경험이다. 한번 해보라”고 웃으며 권유했습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지만 그의 말을 같았습니다.
미국 거주 경험이 있는 명문 Y대생 이모(20)씨는 언어·문화적 차이가 없어 테크노바에서 만난 외국인과 쉽게 교류하게 됐고, 그들로부터 엑스타시와 해쉬쉬를 구했다고 말했습니다. 마약이 삶의 활력소 역할을 했다는 그는 짜증스러움이 역력한 표정으로 기자들의 질문에 마지못해 대답했습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나의 어떠한 행동도 정당하다”고 굳게 믿는 이 ‘확신범’들 앞에서 저희 취재진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어느 유명 작가의 말을 떠올리며 1시간 남짓한 취재를 마치고 자리를 떴습니다. 국내에 마약이 퍼지고 있는 추세로 보아 앞으로도 이런 ‘확신범’을 자주 만나게 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윤슬기드림 cupidmo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