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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소망이신 주님의 등대 (로마서 5:1~6)
오늘도 주 안에서“성령 충만 하십시오! 신앙의 길을 잘 달리시길 바랍니다. 결코 물러서지 말고 이번 한 주간도 주 안에서 승리하셔서 하늘의 큰 면류관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뉴잉글랜드 동부 연안의 한 작은 어촌이 있었는데, 그 동네 남자들이 고기잡이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오후에 큰 폭풍우가 다가와서 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벼락이 치고 소나기가 쏟아지고 거센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저녁때면 돌아와야 될 어부들이 그날따라 한사람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온 어촌의 아낙네들이 모래사장에 모여서 통곡을 하면서 ‘하나님! 우리 남편과 아들들이 돌아오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한 밤중이 되어도 소식은 없고, 폭풍우는 점점 거세져 만 가는데 설상가상으로 어느 집에 불이 났습니다. 그러자 남자들이 없는 동네에 불이 나니까,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불길이 옮겨 붙어 온 동네가 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아낙네들은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이렇게 버리십니까? 폭풍우를 통해서 남자들은 다 바다에서 죽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인 집까지도 다 불타 버렸으니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라면서 땅을 치고 울면서 한탄을 합니다.
그렇게 밤새도록 통곡을 하고 울면서 아침을 맞으니 어느새 폭풍은 가라앉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기를 잡으러 나갔던 그 마을의 남자들이 모두 배를 타고 항구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러자 남자들은 항구에 내려서 기다리는 자기 부인들과 부모들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라고 기뻐하며 좋아했습니다.
그 이유인 즉은, 그들이 먼 바다로 나가 폭풍우를 만나고, 천지가 어두워져서 방향을 잃어버리고, 망망대해에서 표류할 때, 그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이제는 어디로 갈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날은 어두워 방향조차도 알 수가 없으니, 이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갈 길을 보여 주시옵소서!’라고 울부짖는데, 마침 저 먼 해안에서 불기둥 같은 화염의 광채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들 동네에 불이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부들은 그 불길을 바라보고, 방향을 잡아 결사적으로 항해를 계속해서 무사히 항구에 도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이나 온 동네가 다 불탄 것이 엄청난 손실인줄 알고, 절망하고 좌절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동네에 불을 나게 하신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집들이 불에 타 없어졌을지라도, 다시 지으면 되지만 사람은 목숨을 잃어 버리면 그것으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수 있다고 판단을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에 불이 나게 하시어 그 불기둥을 통해서 소망의 등대로 삼아 난파당한 어선들과 어부들이 돌아올 수 있게 비춰준 것이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오늘 날, 저와 여러분들도 항상 나 자신의 심령 속에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의 소망인 등대만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혼탁하고 불투명한 육신의 삶속에서는 끊임없이 우리가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소망의 등대를 가리 우는 세찬 비바람과 폭풍, 그리고 안개구름이 언제나 우리들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참 소망이신 하나님의 등대!’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깊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을 통하여 언제나 밝고, 투명한 소망의 등대. 즉 하나님의 광명의 빛이 항상 저와 여러분 곁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심령으로 은혜 받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소망을 가리는 비바람과 안개구름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이 육신의 삶을 살다보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늘 상, 일어나는 크고 작은‘미움과 분노’로 인하여 우리의 소망을 가리는 안개구름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그러한‘미움’이 들어오고, 폭풍 같은 격랑이 일어나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절망의 폭풍인 마귀 사단의 역사가 우리의 마음을 부추깁니다.
때문에 요한1서 2절로 11절에“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누구를 미워하거나 분노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속에 어두움을 즐기는 마귀 사단이 들어오게 되고, 사리를 분별 할 수 있는 눈이 멀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래서 무슨 일을 저지르고 나중에 후회 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눈이 멀었어! 내가 미쳤어!’하고 한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물을 쏟아버린 뒤인 것을요!
여러분! 방울뱀은 무엇에게 쫓겨 코너에 몰리게 되면, 그 마음속에 상대를 미워하거나 분노하는 생각이 들어 반사적으로 자기 몸을 물어뜯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도 누구를 미워하거나 분노하게 되면, 상대방에게 고통을 가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물어뜯게 되고, 자기 자신의 삶을 물어뜯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몸에 자해를 가하기도 합니다.
즉, 누구를 미워하거나 분노하는 것은 상대보다도 자기에게 더 큰 손해를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속에서 역사하는‘미움과 분노’라는 마귀 사단은 우리의 소망과 희망조차도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잠언서 15장 18절에“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미움과 분노란? 파괴적이고, 종말적인 마귀 사단이 이용하는 대표적인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미움과 분노란? 하나님의 온전한 義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미움을 가지거나 분노를 들어내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파괴적이고, 종말적인 감정이 일어나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히틀러가 전쟁에 망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심령 속에 미움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히틀러는 머리가 명석하고, 관찰력이 깊고, 예리한 판단력과, 비상한 통치력을 갖고 있었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찌나 화를 잘 내는지, 자기의 비위를 조금만 거스려도 미움과 분노가 충천하므로, 그의 부하들은 사실조차도 제대로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국과 프랑스 등, 자유진영과 힘겨운 전쟁을 하면서도 일시적인 분노로 말미암아 주력부대를 빼돌려 지금의 러시아인 소련을 침공하게 되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그는 일생일대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부관은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을 감행하였을 때, 소련 쪽으로 향하던 기갑사단만 그쪽으로 돌렸다면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할 수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낮잠이 든 히틀러를 그 부관은 겁이 나서 깨우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깨웠다가는 벼락이 떨어질 테니까요! 이와 같이 히틀러는 사소한 일에도 항상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결국에는 히틀러가 한참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이미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완전히 상륙하여 진지를 구축한 뒤였고, 이로 인하여 독일은 결국 패망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히틀러의 개인적인 분노가 결국 독일제국을 패망에 이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미움과 분노’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불안과 공포에 쌓이게 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참 소망과 희망마저도 빼앗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미움과 분노’가 일어나면 자연히 불안과 공포에 엄습해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활력을 빼앗겨 매사에 하는 일마다 암담하게 만듭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고 할지라고 이를 억제하지 못하면 항상 불안과 두려움에 쌓이게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같이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공포에 눌리는데 무슨 활력이 생기겠습니까? 그저 암담한 따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 4장 18절에는“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말씀인 줄 아시겠습니까? 두려움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즉, 암을 두려워하면 암이 형벌로 오고, 가난을 두려워하면 가난이 형벌로 오고, 전쟁을 두려워하면 전쟁이 형벌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인정하시면 아멘 하세요!
또한, 저와 여러분들 마음속에 일어나는 슬픔, 이것도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서 소망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슬픔이란? 여름 장맛비처럼 가슴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갔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저와 여러분 마음속에 슬픔이 가득하면 이 육신의 삶과 믿음의 삶을 부정적으로 만들고, 희망과 소망을 빼앗아 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2장 23절에 보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했던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이 육신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도 결코 이 인생의 삶 속에서 슬픔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겉으로 웃으면서도 그 가슴속에는 슬픔이 빗물처럼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어떤 성도의 이야기)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께서는 이와 같이 교활한 마귀 사단이 이러한 슬픔과 분노가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참 소망과 희망을 빼앗아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그 어떠한 경우를 통하여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하면, 스스로 좌절하거나, 마음이 꺾이어 포기하지는 않으십니까?
만약에 그러한 생각을 하시거나 마음에 두고 있다면 이 시간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다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좌절과 포기를 통해서 여러분의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기 위한 마귀 사단의 역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이 육신의 삶속에서 그 어떠한 힘든 인생의 고난을 당한다고 할 찌라도,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온전히 섬기고 따르는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라도 우리를 이와 같이 어렵고, 힘든 좌절 속에서 일으켜 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저와 여러분들이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고, 하나님 안에서의 참 소망과 새로운 희망을 소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서 세계 역사상 교회 음악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 났다고 할 수 있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생애는 한때,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요!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바하는 10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아내는 결혼한 지 13년째 되던 해에 죽음을 당하였고, 그 후 그는 다시 재혼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낳은 자녀 한명은 정신박약아였습니다. 또한, 그는 노년에 앞을 보지 못해 눈이 어두워졌음을 물론이고, 업치고 덮친 격으로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많은 작곡을 쉬지 않고 계속해 나갔습니다. 결국에는 수많은 그의 작품은 사람들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음악으로서 불후의 명작들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는‘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라는 글자를 항상 적어 넣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는 온전한 사람도 감히 할 수도 없는 엄청난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우리 하나님께서 그의 온전한 믿음을 기뻐 받으시고, 끝내는 그에게 삶의 희망과 놀라운 영감으로 불후의 명작을 만들게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결국 고통과 좌절이라는 시련은 아무리 강력한 마귀 사단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온전히 의지하는 성도에게는 절대로 그 소망과 희망을 빼앗아 가거나 꺾어 버릴 수가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문에 그러한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고, 희망의 불길을 태우면 그 좌절이 오히려 위대하고, 상상할 수 없는 깊이 있는 희망이 넘치는 이 육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 그의 소설에 푹 빠진 팬이기도 하였던 유명한 미국 태생의 소설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서 경건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로써 평생 동안 선교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분이었고,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어 그를 믿음으로 키우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성장하면서부터 신앙 안에서 벗어났으며, 급기야는 하나님 없이 마음대로 살다가 결국에는 자살로 이 세상의 삶을 등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는‘무기야 잘있거라!’,‘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등 불후의 명작을 썼던 타고난 작가였습니다.
특히,‘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으로는 1954년도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던 자였으나, 결국 자살로 인하여 지옥의 유황불을 택하고 말았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믿는 자들의 자살)
또한, 그는 이 육신의 세상에서 명예와 인기, 그리고 많은 물질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결코 평탄치 않아 세 번이나 결혼에 실패를 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결혼을 하여 아프리카 여행 도중에 두 번이나 비행기 추락사고로 부상을 당해도 그는 하나님의 경고와 부르심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의 성격 또한, 재치가 있고 쾌활한 반면에 성미가 급하고, 호탕하고, 이기적이고, 개방적이고, 쾌락적이며, 술을 즐기면서 부모의 기도와는 반대로 하나님을 떠나 이 육신의 삶을 마음껏 즐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육적인 성공 뒤에는 항상 마귀 사단이 역사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정신병원에서 전기 쇼크치료까지 받았으나, 1961년 엽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죽음을 의식한 듯이 자실하기 직전에 남긴 글에서‘나는 전지약이 다 떨어져 소리가 나지 않는 라디오처럼,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진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전구처럼 공허하다.’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와 같이 이 육신의 세상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부귀와 영광을 누렸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모르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문에 아직도 주변에 이 육신의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와 공명과 쾌락을 다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의 마음은 공허하기 짝이 없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공명과, 쾌락은 마치 바닷물과도 같습니다. 목이 마른 사람이 출렁이는 바닷물을 마시면 시원할 것 같으나,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소금기가 목에 붙어 더 목이 타서 나중에는 죽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육신의 세상은 결코 저와 여러분들의 갈증을 채워 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들에게 결코 변치 않는 하늘의 소망과 희망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육신의 세상 것을 추구한 사람들은 마음의 허무와 무의미를 채울 수 없어 종국에는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자살을 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는지 조차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항상 사로잡혀 마음에 허무와 무의미를 채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이 육신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그 어떠한 고난과 고통, 그리고 우리들 앞에 가리운 안개와 비바람이 몰아치더라도 이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하여 잘 헤쳐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께서는 과연 나에게 항상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어떠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수많은 믿음의 성도들도 환란과 절망에 빠지면, ‘하나님! 과연 나에게 관심이 계신가요? 나는 이렇게 육신의 삶이 절망적인데,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고 내게도 관심이 있으십니까?’그렇게들 외칩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선진인 사도 바울도 그러한 고백을 했었습니다. 우리 고린도후서 1장 8절로 9절의 말씀을 찾아서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아멘!
이와 같이 사도 바울도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과 환난은 우리가 감히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로 심했습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전도 중에 붙잡혀 원형 운동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생사를 걸고 짐승과 격투를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한, 선교 중에 수차례에 걸쳐 배가 파선을 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였고, 또 육체의 가시인 병으로 인하여 극도로 절망한 상태에서도 하루하루를 그는 하나님께만 의지를 하였습니다.
마치 그의 삶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 같이 셀 수 없는 많은 시련과 환란을 겪었지만, 그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서 그 모든 고난과 환란을 극복하여 결국에는 온전한 믿음으로 승리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믿는 자들로서 여러분들도 꼭 아셔야 할 매우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이 육신의 삶을 경건하고, 신령한 생활을 한다고 해서 고난과 환란이 닥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온전한 믿음으로 경건하고, 신령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에게도 고난과 환란이 닥치겠지만, 그 어떠한 고난과 환란 중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모든 것들을 잘 극복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의 육신의 삶은 춘하추동과 같고 변화무쌍한 기상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봄이 왔는가 하면 여름이 되고, 여름을 붙잡아 놓고자 해도 벌써 가을이 오고, 가을에 매달리고 있어도, 또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날씨를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좌지우지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이 육신의 삶을 살아갈 동안에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내 운명을 내가 좌지우지할 수가 없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어느 누가 우리 인간들에게 다가오는 희노애락(喜怒哀樂)과 시련, 그리고 고통과, 괴로움을 어떻게 좌지우지 할 수가 있겠으며, 그 누가 그것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다가오는 운명은 마치 춘하추동(春夏秋冬)과 같고, 변덕스러운 기상의 변화와 같아서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변화시킬 수도 자지우지 할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14절에 보면,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잠언서 27장 1절에서도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하였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육신의 삶에 있어 매사를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인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기대해야 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코, 하나님 외에는 우리의 모든 삶을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습니다. 변화무쌍한 환경을 바라고 웃고, 울면서 발버둥을 치면, 나중에는 파탄에 이르러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들의 운명과 환경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도 내 마음의 자세와 태도, 그리고 환경과 조건을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 마음을 붙잡으실 분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깨달아 온전한 믿음으로 그 분들의 말씀대로 행하고 의지할 때, 참된 소망의 등대로 저와 여러분들을 인도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소망의 등대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은 환경과 조건, 그리고 운명의 변화를 따라서 울거나, 웃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앞에 있는 참 소망의 등대이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탄 호화로운 요트가 바다를 항해하고, 영국의 해안을 향해서 캄캄한 밤에 돌아오는데, 그 앞에 환한 불빛이 비취었습니다. 그런데 여왕이 탄 요트이기 때문에 그 권위가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선장이 ‘그 앞에 누구냐? 불을 켜고 오는 배는 항로를 비켜라!’고 마이크를 통해 명령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쪽에서 ‘우리는 항로를 비킬 수 없으니 너희가 비켜가라!’는 답변이 왔습니다.
그때, 여왕을 태운 요트의 선장이 마이크를 통해 ‘이놈아! 무슨 말을 하는거냐? 이 배는 영국 여왕께서 타고 계신 요트다. 대영제국의 여왕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항로를 비켜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쪽에서 대답하기를 ‘우리는 수 백년 전부터 이 자리에 서있는 영국의 해안 등대다. 아무리 여왕이 탄 요트라도 우리를 향해 들어오면 산산조각이 난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그러자 선장은 불이 나게 요트를 돌려서 항로를 바꿨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등대를 잃어버리면 어떤 배도 침몰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등대의 빛을 보고 피해가야지 등대를 비키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빅토 프랭크 박사는 그가 쓴‘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이라는 책에 나치 하에 6백만 유대인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죽어갈 때, 독일의 죄악상과 유대인 생존자를 연구한 결과론에 보면, ‘마음에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심신이 최악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는 사람은 살아남았다. 나아가 절망하는 동료들에게 소망을 갖도록 격려하던 사람은 모진 고문에도 몸과 마음이 건강하여 생존해 나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저와 여러분들도 자신의 마음속에 소망을 잃어버리면, 아무리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아도 그 마음은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에게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참된 소망이 있으면, 아무리 환경과 조건이 고통스럽고, 고달프더라도 이를 능히 이겨 나갈 수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장 1절에 보면,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등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시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된 소망의 등대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 같이 육신의 삶을 사시면서 엄청난 고난과 모든 역경을 다 겪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굶기도 하셨으며, 추위에 떨기도 하셨으며, 슬피 울기도 하셨으며, 거처할 집도 없이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풍찬노숙을 하시면서 한 때는 칭찬을 받으셨는가 하면, 욕도 얻어먹고, 사랑도 받으셨지만, 손가락질과 비웃음과 미움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러한 모든 인생의 삶에 대한 고통과 고초를 다 겪으시고, 나중에는 처참하게 발가벗겨 진체,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몸을 찢기시고,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때문에 저와 여러분의 죽을 수밖에 없는 죄 값을 대신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영원한 참된 소망의 등대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라도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만을 쳐다봅시다. 우리가 찢기고, 좌절하며, 피곤하고, 절망에 처하여 누더기 같은 인생의 삶이 될지라도, 우리 모두의 참된 소망의 등대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게 될 때, 예수님 안에서 용서와 義와 영광의 빛이 비춰 옴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온전한 믿음으로 앞만 쳐다보면, 예수님께로부터 거룩함과 성령 충만의 놀라운 은총의 참된 소망의 등대불이 비춰 옴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치료와 건강의 등대불이 비춰 옴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형통과 축복의 등대불이 비춰 옴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과 영생, 그리고 천국의 참된 소망의 등불이 비춰 옴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쳐다봄으로 말미암아 캄캄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저와 여러분들은 찬란한 소망의 등불을 얻을 수가 있으며, 육신의 삶에 대한 방향을 잡아 나갈 수 있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조건과 환경에 배반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분다고 할지라도,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의 등대를 저와 여러분 모두는 오로지 앞만 보고 힘차게 바라봅시다.
그렇게 될 때, 그 곳에 힘없이 매달려 찢어져 죽으신 그 예수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그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참된 소망의 참 빛을 비춰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우리 예수님께서는‘용서함을 받고 의로움을 얻으라! 거룩함을 받고 성령을 받으라! 치료를 받고 건강을 얻으라! 축복을 받고 형통을 받으라! 부활을 얻고 영생천국에 들어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내가 너를 구출하는 참된 소망의 손길이요! 참된 등불이라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들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이 시간 축원을 드립니다.
이와 같이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저와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얻어진 새로운 신분을 직접 체험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에서 특별히 저와 여러분들을 택하여 주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나온 저 자신을 생각해 보아도 도저히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도 언감생심인데 왜? 나 같이 못난 자요! 나같이 죄 많은 자를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셨는지 저는 그 분의 은혜와 은총에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당신의 주권으로서 나를 택하여 주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 주신 까닭을 알게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삼으셔서, 여러분 심령 속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거하시게 하시고, 저와 여러분을 다스려 그 분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아 주셨음에 감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9절의 말씀대로“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대로 참된 소망의 등대를 바라보며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은 예외 없이 이 육신의 세상을 살아가면서,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버림받은 심정과 고독감, 그리고 좌절감과 절망감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웃고 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다 눈물이 그 사람들 가슴을 적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삶인 것입니다.
때문에 아담과 같이 오늘날까지도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삶을 반복해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다고 할지라도 결코 예외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항상 바라보아야 될 것은, 우리의 참된 소망의 등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한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오늘 본문인 로마서 5장 3절로 5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아멘!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소망의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서, 우리 모두의 믿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신 참된 소망의 등불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저와 여러분 모두의 마음속에 넘치도록 부어 주심으로 항상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과 의(義), 또한 평강과 희락과 위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항상 울어도 웃을 수 있고,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고, 상처를 입어도 치료 받을 수 있고, 패배를 하여도 극복할 수 있는 참된 소망의 등대인 천국 길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음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