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결혼한 지 벌써 십여년이 훌쩍 지났다. 지금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니었다.
저녁을 먹을 때도 대화는 많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면 나는 거실에서 뉴스를 봤고, 아내는
안방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주말도 비슷했다. 함께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싸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웃지도 않았다.
그저 오래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그렇듯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아직도 부부인 걸까. 아니면 그저 한집에 사는 동거인일까.'
그러던 어느 날, 감기약을 사려고 동네 약국에 들렀다. 약국 간판은 예전 그대로였는데,
아래 작은 글씨 하나가 새로 붙어 있었다.
'권태기 전문' 장난인 줄 알았다. 약사는 젊은 여자였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나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아내랑 권태기인 것 같습니다."
약사는 놀라지도 않았다. "흔한 증상이네요." 작은 약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하루에 한 알씩, 저녁 식사 전에 드세요."
"무슨 약입니까?" "처음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약입니다."
"부작용은요?" 약사는 미소를 지었다. "약효가 끝나면 현실로 돌아옵니다."
이상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별생각 없이 약을 받아 왔다.
그날 저녁. 식탁에 마주 앉은 순간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십삼 년 전 소개팅 자리에서 처음 마주 앉았던 바로 그 여자가 내 앞에 있었다.
아내가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예뻤다.
뜨거운 국을 식힐 때 후후 부는 버릇도, 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습관도, 모든 것이
처음 보는 것처럼 사랑스러웠다.
그날 밤, 아내가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나는 얼버무렸다. "그냥… 예뻐 보여." 아내는 피식 웃었다. "이 사람 오늘 이상하네."
오랫동안 잊고 있던 두근거림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며칠 동안은 행복했다. 퇴근길이 기다려졌다. 문자만 와도 미소가 지어졌다.
주말에는 손을 잡고 영화를 보러 갔다. 결혼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아내가 말했다.
"생각보다 별로였어." "왜?" "요즘은 이런 이야기가 좀 답답해."
나는 걸음을 멈췄다. '요즘은?' 예전의 아내는 이런 영화를 좋아했었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설렘은 되살려 놓았지만, 십여 년 동안 바뀐 아내의 생각까지
되돌려 놓지는 못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은, 그때 그 사람이면서도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 달쯤 지나자 약효는 조금씩 약해졌다. 손을 잡아도 예전처럼 심장이 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아내가 갑자기 열이 났다.
나는 허둥지둥 약을 찾고, 죽을 끓이고, 병원 예약을 하고,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 주었다.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그날 밤, 나는 문득 깨달았다.
하루 종일 단 한 번도 설레지 않았다. 그런데도 단 한 번도 귀찮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며칠 뒤 나는 다시 약국을 찾았다. "약효가 떨어졌습니다."
약사는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나는 아내가 아팠던 이야기를 했다. 약사는 잠시 듣고 있다가 물었다.
"그날 설레셨습니까?" "아니요."
"귀찮으셨습니까?" "아니요." "그럼 왜 밤새 곁에 계셨습니까?"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 사람이 아프니까. 내 사람이니까.
그 이유 말고는, 다른 게 필요하지 않았다.
약사는 찻잔 하나를 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오래 써서 조금 손때가 묻은 찻잔이었다.
"새 찻잔은 예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손에 가장 잘 맞는 건 오래 함께한 찻잔입니다."
잠시 찻잔을 바라보던 약사가 조용히 말했다.
"설렘은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언어입니다."
"..." "오래 함께한 사람에게는 다른 언어가 생기지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약국을 나와 천천히 걸었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아내를 파란색을 좋아하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멜로 영화를 좋아하던 사람. 매운 음식을 못 먹던 사람.
하지만 그건 처녀때의 아내였다. 지금의 아내는 달라져 있었다.
좋아하는 음식도, 좋아하는 색도,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도.
변한 것은 아내였는데,
나는 기억 속의 사람만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아내가 물었다. "오늘 저녁 뭐 먹을까?"
나는 웃으며 되물었다. "당신은 요즘 뭐가 제일 먹고 싶어?"
아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잠시 생각하더니 웃었다.
"글쎄… 요즘은 된장찌개가 제일 좋더라." 나는 따라 웃었다.
별것 아닌 대화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십이 년 전의 설렘보다 지금의 그 웃음이 더 편안했다.
그날 이후 나는 약국을 다시 찾지 않았다.
대신 찬장 구석에 넣어 두고 잊고 있던 낡은 찻잔 두 개를 꺼냈다.
신혼 때부터 쓰다가 얼마전 새것으로 바꾸며 치워 둔 것들이었다. 아내와 나는 그날부터
그 찻잔으로 차를 마셨다. 새 찻잔은 보기 좋았다. 하지만 오래된 찻잔은 손에 익어 있었다.
설렘은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아내가 소파에서 잠들면 나는 말없이 담요를 덮어 준다.
우리는 예전처럼 사랑한다고 자주 말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의 하루를 조용히 챙긴다.
사랑은 한 번의 만남을 오래 붙잡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조금씩 변해 가는 같은 사람을 끝없이 다시 맞이하는 일이었다.
<오늘의 팝송> You've Got a Friend / Carole King
You've Got a Friend는 Carole King이 작곡한 곡으로 1971년 James Taylor가 싱글로 처음 발표했다.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처음 이 곡을 메리홉킨스에게 주려고 했는데 싫다고 해서 친구인 제임스 타일러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캐롤 킹(Carole King)은 1942년 뉴욕에서 태어난 미국의 싱어송라이터다. 1971년 발표한 앨범 'Tapestry'는 올해의 앨범을 포
함해 4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다.https://youtu.be/0S3epT87rN4
첫댓글
기발한 아이디어로 글을 쓰셨습니다.
이런 약이 있다면 얼마나 잘 팔렸을까?
이런 마음들이 유행병으로 번졌으면 좋겠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시니방장님. 좋은 하루되세요.
오늘도 주신 동화로 마음 씻었습니다.
이 좋은 글을 많은 어른들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자리님.
행복한 주말되세요...
한마디로 부부사이의 권태기는
사랑의 종착역이 아니라,
더욱 성숙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겠군요.
그러면 좋겠지요...
권태기를 잘 극복하면 더 좋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영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