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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앞으로 진행될 과거사 문제에서 박정희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에 대비하여 증언의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려는 목적 아래 쓰여지고 있습니다.글쓴이: 무궁화사랑)
과연 그는 왜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던가?
1937년 3월 25일,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해 4월 1일에 문경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발령받아 부임합니다. 갓 스물의 나이에 월급 45원을 받는 선생님이 되어 사회의 첫발을 내 딛게 되었으니 집안에서는 가난을 좀 면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고 구미일대에서는 개천에서 용났다는 소문이 일었습니다.
박교사는 45원의 월급을 받으면 하숙비 8원,가난한집 아이들의 월사금으로 2-3원(1인당 1원씩 2-3명)을 지출하고 본인의 용돈으로 10원,나머지 25원 가량은 집으로 송금했다고 합니다. 부임한지 1년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당시는 일본이 조선인에 대한 차별정책을 더욱 노골화시키고 있었던 때입니다.젊고 패기만만한 박정희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우는 말을 자주했다고 합니다.
그의 제자였던 이영태의 증언입니다.
"학생여러분 ! 전세계를 얻는다 할지라도 민족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죽는길밖에 없다.앞으로 10년이 지나면 20세기의 후반기가 된다. 우리는 남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라고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정순옥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과 일본인 교사 두분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일본인선생 한분이 조선여성은 예의가 없다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양동이를 이고 다니느니하며 우리나라 여자의 흉을 보았습니다. 이에 박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 저 말을 잘 새겨 들어라.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우리끼리 있을 때는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고 했을 때 우리는 철없이´조선말 쓰면 퇴학당하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반박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주영배의 증언입니다.
"19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 과목을 가르치며 박선생님께서는 ´이글을 잘 배워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박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가정실습때는 문경에서 12키로나 떨어진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습니다.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습니다."
전경숙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은 우리집으로 하숙집을 옮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어머니를 ´모친´이라고 불렀습니다. 식사는 가리는 것이 없었고 복장은 단정하였으며 출근은 빨랐습니다. 언제나 숙제를 내주시고 철저히 검사하여 평가를 해 주셨습니다. 월요일마다 공책을 점검하시고 글씨를 바르게 쓰도록 지도해 주시고 일기와 편지쓰기를 장려하셨습니다. 5학년 20명과 2학년 40명을 한 교실에서 복식수업을 하면서도 질서가 정연했습니다. 말은 간단명료하였으며 청소에 신경을 쓰고 유리창,천정의 거미줄,화장실 청소를 철저히 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청소도구를 왼비하여 가지런히 정리정돈되도록 하였으며 책상의 줄이 비뚤어지고 환경이 지저분 한 것을 매우 싫어 하셨습니다. 위인전 같은 이야기를 자주해 주시고´너희들도 이와같은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가을 소풍때 문경새재에 갔을 때는 제 1관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시고 점심을 싸오지 못한 학생은 선생님이 도시락을 나누어 주시던 일, 발목을 삐어 걸음이 곤란한 학생을 업고 산길을 내려 오시던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이영태의 증언입니다.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심청의 노래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 던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중에 오가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논쟁을 벌였습니다. 박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가 무어라 했다가 혼난 적도 있었습니다.
전도인의 증언입니다.
"하루는 박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습니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 와 "오이 !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 그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게 그런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해도 무례하기 그지 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사람이라면 나는 너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어서 나가봐 !"라고.
황광실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이 우리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조선어를 가르치셨습니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습니다. 박선생님이 일제 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합니다. 학생 한사람을 복도에 세워 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습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로 불려가 혼이 난 일이 있었습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박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별명은 호랑이 선생님이었으나 자주 부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졸업때 앨범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박정희의 제자였던 분들의 증언입니다.
당시만 해도 사범대학을 나온 지식인이 드물 때이기 때문에 박정희는 민족적 자각을 하고 있었던 것같고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이는 그에게 민족의식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1932년 4월 1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제 4기생을 입학합니다. 입학정원은 100명이었고 한국인은 90명 일본인 10명의 비율이었습니다. 입학당시 박정희는 총응시자 1,070명 중에 51등으로 합격합니다. 그는 구미보통학교의 11기생이었는데 이 학교가 생긴이래 대구사범에 합격하기는 박정희가 처음이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누님인 박재희의 증언입니다.
"동생 정희는 대구사범에 응시했습니다. 저희 집에서는 학비를 댈 엄두도 못내고 해서 내심으로는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고 있었어요. 구미보통학교의 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이 오히려 우리 부모님을 설득하여 시험을 치르도록 했습니다. 어머니는 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도록 빌었다고 해요. 합격하고 진학 못하면 한이 생긴다고 차라리 떨어지길 바란 거지요."
학교생활은 일본인과의 차별이 심했습니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방학때는 집에까지 고등계 형사들이 수시로 찾아와서 독서경향이나 언동까지 조사하여 가혹한 통제와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급식도 일본인 학생은 쌀밥에 잡곡을 약간 섞는 정도이고 조선인은 잡곡에 고구마를 섞어 주는 급식을 하였고 졸업 후의 봉급도 일본인에게는 60%를 더 주는 차별정책을 썼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그와같은 민족적 차별을 체험했던 박정희로서는 자연스럽게 민족감정이 싹트고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을 터입니다.
박정희는 일본인 상급생에게 경례도 잘 하지 않고 졸업할 때 사진첩에도 일본의 연호를 쓰지 않고 단기연호인 4270년을 쓰다가 말썽이 되기도 했습니다.
1930년대는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이므로 교련과목이 심하게 부과되었고 학생들은 준사관생도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현역 대좌(대령)이 교련 책임자로 왔는데 그의 이름은 아리카와엿습니다. 아리카와는 박정희를 좋아했던 모양으로 후일에 박정희가 교장과 싸우고 아리카와를 찾아 만주로 가서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는 단초를 제공한 인물입니다.
(본 글은 앞으로 진행될 과거사 문제에서 박정희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에 대비하여 증언의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려는 목적 아래 쓰여지고 있습니다.글쓴이: 무궁화사랑)
일본인 교장을 때린 박정희.
박정희는 어릴 때 이순신과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고 군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대구사범에 가서도 일관된 그의 희망이었고 박정희가 교련 과목에서 출중한 두곽을 나타내자 아리가와대좌가 박정희를 좋아하게 되고 서로 서신왕래를 하는 사이로 발전합니다.
박교사는 학교 바로 아래있는 김순아라고 하는 아주머니집에서 하숙을 합니다.
남편을 잃고 임창발이라는 아들과 하숙을 치며 사는 여인인데 인정이 많고 호방한 여자였다고 합니다. 하숙을 정한 다음 달 문경군청의 농회(農會)기사인 허동식이 하숙생으로 들어 옵니다. 두사람은 한집에서 친하게 지내며 퇴근 후 술친구가 되었답니다.
다음은 당시 생활에 대한 허동식의 증언입니다.
"나는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왔다. 박교사의 첫인상은 꾀죄죄했는데 눈빛만은 빛나고 다부진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곧 친숙한 사이가 되었고 매일 집에서 술을 마신 것 같다. 술마신 것이 기억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걸리를 동이로 받아와서 쪽박을 띄워놓고 허연 배추 속과 된장을 안주삼아 밤새도록 마셔댔다. 하숙집 주인도 가끔 끼어들고 했는데 박정희는 평소엔 말이 없다가 술만 한잔 들어가면 [왜놈들][왜놈들]하면서 일본인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리하여 이순신이나 나폴레옹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호탕하게 웃기도 했다. 노래는 황성옛터가 십 팔 번이고 방학때도 집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한 줄은 전혀 몰랐다.(이때 박정희는 아버지의 종용으로 김호남씨와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집안 이야기는 도통 꺼내지 않았다. 그는 늘 스파이크를 가지고 다니며 애지중지했고 아침 6시에는 학교 운동장에 올라가 어김없이 나팔을 불었다. 시계가 없던 시절에 이 나팔소리가 들리면 문경사람들은 ´야,박선생 나팔소리다.이제 일어날 시간이다.´하고 일어날 정도였다.
박교사는 누구보다도 대일감정이 좋지 않앗다. 말끝마다 [왜놈들]이 튀어 나왔으며 의식적으로 일본말을 회피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한번은 무슨일인지는 몰라도´그 새기 대려죽이려다 놔주었다.왜놈이면 다여 !´하면서 아리마 교장을 패주고 와서는 씩씩거리는 것을 보았다."
박정희의 머리 속에는 하나의 지워지지 않는 신천지가 있었으니 그것이 곧 만주땅입니다. 그가 만주땅을 처음 밟아 본 것은 1935년 5월의 4학년 수학여행 때였습니다.학생들은 2주간에 걸쳐 봉천,대련,여순,신경,하얼빈,길림,무순지방을 기차로 여행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평야와 지평선 뒤로 떨어지는 장엄한 석양은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박정희는 어려서부터 군인이 되기를 희망했고 언젠가 고향의 선배인 강재호가 만주군 장교의 계급장을 달고 박정희앞에 나타나자 만주군관학교에 대해 자세히 묻기도 했습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강화되면서 박정희교사의 마음은 울분과 갈등으로 끝없는 방황이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동료교사로서 박정희의 교사시절을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던 권상하의 증언입니다.
"나는 그때 상주에서 보통학교교사로 있었는데 군은 달라도 박정희가 근무하던 문경보통학교까지는 4킬로밖에 떨어지지 않았다.일요일만 되면 서로 하숙집을 오가며 만났다.1939년의 10월인가 11월경인데 그가 나한테 놀라왔다 간지 며칠 안된 화요일인가 수요일이었다.내가 6학년의 오후수업을 하고 있는데 누가 복도에서 창을 똑똑 두드려 나가보니 박정희였다. 국민복을 입은 채 멀쑥하게 서 있는 그의 신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나도 얼른 말을 못하고 멍멍히 서 있었다. "수업이 언제 끝나는가 !" "한 30분있으면 되네." "그런 내가 저기 운동장 나무 밑에서 기다림세." "그러게.마치고 곧 감세."수업을 마치고 나무아래로 가니 그가 들고온 가방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박정희는 사표를 내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그와 함께 하숙집으로 와서 또 밤새도록 술을 들이 마셨다.
박정희는 그때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교사들은 군대식으로 머리를 빡빡깎게 되어 있었는데 그는 장발이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도전이요 반발이었다. 이틀전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는 연구수업에 대한 발표가 있었고 도에서 데라도(寺戶) 시학(장학사)이 시찰을 나왔던 것이다. 그는 강평하는 자리에서"아직도 총력정신이 결여된 교사가 있다.이것은 황민화의 정책에 순응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다."하고 박교사를 겨냥하여 비판했다.
그날밤 아리마 교장의 사택에서 시학을 위한 술자리가 있었다. 물론 교사들도 초대되었다. 그자리에서 또 박교사의 두발 문제를 거론하자 그는 시학과 교장을 상대로 언쟁을 벌이다가 술잔을 던지는 등 소란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리마교장은 박교사를 교장실로 불러 질책을 한 다음 데라도시학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던 것이다.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한 박교사는 모욕감을 참을 수 없어 울컥하고 말았다. [조선인]주제에 너무 건방지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교사의 주먹이 아리마 교장의 면상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평소에 쌓이고 쌓인 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만 것이다.
그리곤 사표를 써던지고 곧장 나를 찾아 왔던 것이다. "그래 !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막막하이.부모님한테는 이야기 할 수도 없고...그런데 전에 우리학교 배속장교인 아리가와(有川)대좌 알지?" "응." "실은 졸업 후에도 편지왕래가 가끔 있었어.그분은 지금 만주 관동군부대의 지휘관으로 있는데 거기로 한번 가볼까 해." "아리가와가 널 무척 사랑했지."
이렇게 해서 박정희는 약 3년 동안의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마감하고 스스로 군인의 길을 찾아 북만주로 향했습니다.
만주군관학교로 일본육사로 독립군으로 한국육사로 한평생을 군인의 길을 걸어온 박정희의 군인에 대한 집념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최상천이나 이부영은 박정희를 변신의 천재니 달인이니 하지만 그는 숙명과 같이 오로지 군인 한길을 걸어왔고 평생을 군인이 되는 길을 찾아 갔습니다.
민족적 울분에 일본인 교장을 대책없이 패주고는 그길로 만주로 갔던 것이지 무슨 기회를 노려서 변신을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김구가 일본인 순사를 죽이고 만주로 갔던 것과 같은 동기로 박정희도 일본인 교장을 때리고는 만주로 가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일본인 교장을 때리고 상주에서 권상하와 헤어진 박정희는 잠시 고향집에 들러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곧바로 만주에 도착하여 아리가와 대좌를 찾아 갑니다. 박정희를 반갑게 맞이한 그는 "왜 왔느냐?"고 묻습니다.학교에 사표를 던졌으며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하고 싶다는 뜻을 밝힙니다. 아리가와는 "넌 군인이 돼야 해."라면서 입학시험에 필요한 추천서등을 써주었고 다른 것은 선배인 강재호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1940년 봄, 박정희는 2기생으로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합니다. 총입교인원 470명,그중에 일본인 240명,만주족(한족과 몽고족)228명, 조선인 12명이었고 박정희의 입학성적은 470명중 15등이었습니다.
일본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독립국을 세웁니다. 청왕조가 무너지자 일본은 청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를 만주국황제로 삼아 고뢰국을 만들었습니다.
만주국의 건국이념은 명목상 일본족,한족,조선족,만주족,몽고족의 다섯민족을 화합시켜 지상의 낙토를 건설한다는 것이나 사실은 일본의 대륙침략 전초기지였습니다. 1940년에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폴란드,노르웨이,덴마크,네덜란드를 거쳐 프랑스를 점령했고 일본은 중국대륙을 휩쓸고 불령인도지나로 진격하던 때였습니다. 다음해에는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2차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만주군관학교 시험 당시를 이재기는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1939년 10월,만주국 목단강성의 관구 사령부에서 나는 시험을 보았다. 과목은 수학,일본어,작문,신체검사의 네가지였는데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에 국민복을 입은 자그마한 청년이 만군 대위와 함께 들어오기에 시험감독관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청년이 박정희였고 그 장교가 강재호였다. 강재호는 대단한 민족주의자였으며 박정희도 아마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만주군관학교는 2년의 예과에 해당하며 윤리,법학,철학,역사와 중국어를 가르쳤습니다.
아침 6시 기상 오후 10시 취침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고 이때에도 역시 일본인은 우대합니다.
1기생들은 기강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구타를 가하고 조선인 선배들은 중국인과 일본인에게 지지말라고 격려성 구타를 가합니다. 그런 1기생으로는 박항임,최창륜,이기건,방원철등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정열적이고 민족정신이 투철했으며 인간적인 매력도 있었다고 합니다.
방원철의 증언입니다.
"나도 후배들의 군기를 잡는다고 박정희를 주먹으로 때린 일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턱을 맞으면 휘청휘청하는데 박정희는 딱 버티고 서서 차돌같이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
맞아서 몸이 밀리면 금방 제자리로 와서 다음 주먹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지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것을 몰랐다."
이재기의 증언입니다.
"우리는 동기생이기 때문에 친하게 지냈다. 학과수업을 받으러 갈 때는 모두 기숙사의 책상서랍을 열어놓고 가게 되어 있었다. 그때 박정희의 서랍을 보면 책이나 문구류가 그렇게 깔금하게 정돈되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교칙위반을 하고 있었다. 외출을 나가면 줄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그때는 여자,술,담배의 3금을 위반하면 무조건 퇴학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치솔질을 하고 담배냄새를 없애려고 애를 썼다. 일본인 교장과 싸우고 군관학교에 들어왔다는 말을 했으며,나이가 너댓살 아래인 1기생 선배들로부터 구타등의 수모를 받으면서도 과묵한 인내심으로 소화하는 것을 보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또한 정의감이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때 홍사익중장(일본육사 26기졸업,일본육군대학졸업,조선인으로서 일본군 중장,관동군 군사학교부교장역임,2차대전후 전범자로 처형됨.)이 만주군관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조선인 생도들만 별실로 불러모아놓고 "민족적 차별대우의 비통함을 극복하여 조선민족의 우수함을 과시해야 한다."는 요지의 훈시를 했다. 그리고 박정희생도가 답사를 했는데 평소에 과묵하던 그가 감동적인 열변을 토하는 바람에 우리는 모두 놀랐던 것이다."
이기건의 증언입니다.
(만주신경군관학교 1기 졸업,만군중위,육군준장예편(사단장),인민군 소좌로 있다가 6.25때 국군으로 전향함.) ´내가 처음 박정희를 만났을 때 "왜 여기왔느냐?"고 물으니 그는 당돌하게 "왜놈보기 싫어서 왔다."고 하더라. 나는 그때 왜놈이란 말을 처음 들어 보았다. 우리 북한 사람들은 일본놈이라고 하지 왜놈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정일권의 증언입니다.
"나는 그때 만주 상위(대위)로 신경에 근무하고 있었다. 박정희생도는 일요일이 되면 나를 찾아와 놀다 가곤 했다. 그는 담배와 술을 좋아 했고 말수가 적었으며 성실한 청년이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더러 했는데 나도 똑같은 환경에서 컸기 때문에 대화의 공감대가 있어 각별히 친하게 지냈다. 난 술을 별로 좋아 하지 않았으나 그가 오면 배급표를 정종으로 바꿔 대작하곤 했다. 그는 당시 일본이 멀지 않아 망하고 조선이 독립하고야 말 것이라는 말을 했다."
박기병의 증언입니다.
"나는 당시 만주국의 만군 헌병사령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박정희등의 생도를 불러내어 가끔 저녁을 사주곤 했다. 박정희생도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벌떡 일어나 독립군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선배님들 이 노래를 모르시죠 !"하면서 주먹질을 하며 부르는데 우리는 그때 어안이 벙벙했다."
이상에서 보듯이 만주군관학교는 일제의 충복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 하더라고 조선인과 중국인이 고분고분 따라간 것은 아니고 만주국의 국시가 5족화합이었기 때문에 일본인의 우월성만을 부각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일본의 지식인이나 청년장교중에는 일본의 팽창주의에 부정적인 사람도 있었고 다른민족의 독립을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환경하에서 박정희는 나름대로 민족정신에 대해 자각해 나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17년 11월 14일생인 박정희.
당시는 이미 나라를 빼았겨 조선이란 나라는 없을 때이고 무엇을 하든 일본의 행정체계 아래가 아니면 불가능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그가 만주군관학교를 갔다는 사실만으로 친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그것이 과연 그의 잘못인지,또 그런 환경 아래서 그나마 민족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이 폄훼되고 무시되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못이라면 나라를 잃은 무능한 선조들의 잘못이고 나랏말이나 성씨조차 지키지 못한 못난 조선왕조와 조선인들 모두의 잘못일 것입니다.
(본 글은 앞으로 진행될 과거사 문제에서 박정희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에 대비하여 증언의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려는 목적 아래 쓰여지고 있습니다.글쓴이: 무궁화사랑)
독립을 위해 싸운 박정희.
일제는 조선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하여 조선의 말과 글을 빼았고 역사를 식민사관에 기초해 왜곡합니다. 그리고 조선 사람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합니다. 소위 창씨개명으로 1940년부터 일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학교에 입학허가도 내주지 않았고 배급도 주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자의든 타의든 창씨개명을 하게 됩니다.
도요다니 시게미쓰 구니오니 하는 이름들은 그런 시대의 산물입니다.
박정희도 그같은 제도에 따라 일제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던 해인 1941년에는 일본명으로 오카모도 미노루(岡本 實), 혹은 다가키 마사오(高木 正雄)로 불리게 됩니다.
박정희는 2년간의 군관학교 생활에서 검도, 유도,승마,교련은 물론 모든 과목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입니다. 1942년 3월 군관학교를 450여명 졸업생 가운데 1등으로 졸업하여 만주국황제의 금시계를 상으로 받았고 일본육군 사관학교(제 57기)로 진학할 수 있는 특전을 받습니다.
박정희가 졸업생대표로 재학생대표의 송사에 답사를 하는 장면이 뉴스영화로 촬영되어 극장에서 상영되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고무되어 군관학교에 들어 간 사람중에 하나가 강문봉입니다.강문봉은 만군소위를 거쳐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한국)군사령관을 지낸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합니다.
당시 졸업성적이 우수하여 일본육사 3학년에 편입된 사람은 박정희와 이한림,이섭준,김재풍등이 있습니다.
이섭준의 증언입니다.
´일본육사 교육은 만주군관학교보다 더 정신적으로 쥐어 짜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여기서도 모범생이었다. 그는 도무지 말이 없었기 때문에 한문 선생이 "박정희의 작문에는 뭔가 숨어 있는데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의 일기장을 검열한 교관도 같은 말을 했다. 그때 나는 거의 일본인이 다 되어 있었는데 박정희는 좀 달랐다. 일본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2.26사건]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았다. 박정희가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군사학 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 "독립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니 "독립이란 혼자 사는 것이다.남의 간섭 안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었다. 자유시간에는 혼자서 운동장을 거닐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가끔 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냐?"하면 귀찮게 굴지 말라고 하더군. 그래서 대통령이 된 뒤에 내가 "너 그때부터 혁명할 꿈을 꾸었지? 명치유신,손문혁명, 그리고 터키의 게말 파샤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하고 농담을 한적도 있다."
김종길의 증언입니다.
"박정희와 나는 대구사범 동기생이다. 그가 일본 육사에 다니고 있을 때 나는 일본 중앙대에서 공부했다. 사범학교 시절부터 친근한 사이라 그는 나의 하숙방에 자주 놀러왔다.
술.담배 좋아하는 버릇은 여전하여 늘 술타령이었다. 하루는 술을 잔뜩 마시고 귀교가 늦어져 외출금지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그의 일본육사시절은 가장 흥겨웠던 때가 아닌가 한다. 그의 작은 누님(박재희)이 동경에 살면서 뒷바라지를 잘했고 그의 자형 한정봉도 처남을 무척 사랑했다. 이섭준의 누이동생이 일본에서 자취를 하면서 여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식량사정이 어려울 때라 일요일의 외출 시에는 도시락에 밥을 꽉꽉 담아와서 그의 동생에게 갖다 주기도 했다. 방학때는 고향에 가지 않고 일본의 전국을 유람하면서 여유있는 시간을 보냈던 것도 일본육군사관학교 시절이다."
1944년에 박정희는 일본육사를 3등으로 졸업합니다. 졸업과 동시에 곧 소.만 국경지대인 지지하르에 있는 관동군 635부대에 배속됩니다. 이때부터 해방될 때까지 약 1년동안 박정희는 본격적인 군인의 길에 들어서 만주에 산재해 있던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합니다.
만주군 소위가 된 박정희는 지지하르에서 화북지방의 열하성으로 이동배치되어 만주군 보병 제 8단에 배속됩니다.
여기서 과연 박정희는 독립군과 싸웠던 것일까요?
제8단의 주요임무는 모택동의 팔로군을 토벌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당시 공산주의를 위험하게 보고 적대시하고 있었고 공산주의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정희도 일찍부터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당시 만주군 제 8단에서 팔로군을 상대로 같이 싸웠던 중국인 친구 고인경은 박정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박정희소위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뚝뚝한 것 같았으나 내심은 퍽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우리가 평천진(平泉鎭)이란 곳에 있을 때 어느 날 조선인과 중국인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분 ! 일본과 공비들은 모두 우리의 적이다. 언젠가 이를 배격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국가와 민족의 자유를 기대하기 어렵다.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으니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당시 군장교로서 군사전략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전황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패망을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투철한 민족주의적 자각으로는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억측일 뿐만 아니라 제8단의 임무도 아니었습니다.
팔로군이라는 공산당과 싸웠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국내 항일 지도자 였던 박승환은 여운형과의 긴밀한 연락하에 중국및 만주지역내의 조선출신 일본군 장교들을 규합하여 독립군과 연계, 국내에 진공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 장교중에는 박정희가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독립군을 토벌한 것이 아니라 독립을 위해 싸울 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학규의 밀명을 받은 박정희
김규식박사의 비서실장이었던 송남헌은 그의 저서 해방 3년사(1권 26쪽.1990년 까치사 간행.)에서 한국 국적의 일본군인의 국내 진공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박승환은 국내 항일 지도자로서 여운형과 긴밀한 유대와 연락을 가지면서 군사활동을 전개하는 한편,일본군의 조선출신 장교로서는 당시 최고 계급이던 일본군 육군 중장 홍사익(남방전선으로 전출되기 전까지)과 상호 긴밀한 유대를 견지하고 만주국에 군적을 둔 조선출신 장교를 상당수(60-70) 규합하여 만주 일대에 산재한 독립군과의 연계를 도모하였다.
그런 한편 그는 일본 관동군의 주력부대가 남방전선으로 이동하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패전이 결정적으로 예견된 1944년부터 위에서 말한 조선출신 장교와의 연계를 한층 강화하는 동시에 일본군의 기밀작전 지도를 탈취하여 엄밀한 계획을 수립한 후 한달에 한번씩 비밀회합을 가지면서 관동군의 주력이 남방으로 이동한 허점을 이용하여 만주에 산재한 독립군과의 결합과 인근주재 부대의 통합으로 약 1개 사단병력을 편성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군사편성을 모의하고 1945년 8월 29일 국치일을 기하여 국내진공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일본의 항복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어 만주에서의 박승환을 중심으로 한 조선출신 군인의 국내 진공계획은 유감스럽게도 좌절되고 말았다.
이 국내진공에 관한 비밀 거사에 참여한 바가 있었던 조선출신 군인 가운데는 박정희 전대통령도 있으며 그는 북경에 있던 광복군 제3지대 김학규부대에 편입하여 1946년 귀국하였고 8.15해방 즉시 귀국하여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한 장교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당시 여운형(독립운동가,정치가,중국 금릉대학에서 영문학 전공, 1945년 일본이 망할 것을 예상하여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위원장이 됨. 해방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음.암살당함.)은 박승환과 상의하여 군사행동을 계획했다.
우선 만주에서 유격대를 조직하여 백두산을 넘어 국내로 진입할 계획을 세우고,당시 중국 연안에 있던 무정(함북출생,중국하남군관학교 졸업,192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중일전쟁중 팔로군 포병사령관,북한인민군 창설에 참가,6.25뒤 숙청됨.)과 연락하여 그로 하여금 만주의 전체 유격대를 총지휘케함이 좋으리란 점에 대체적인 합치를 보았다.
1945년 4월말 여운형은 중국 연안의 조선의용군과 협동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박승환을 건국동맹 대표로 메시지를 지참시켜 연안에 파견하였다.
그해 6월에는 국내정세 보고서,통계등 기밀자료를 박승환의 아내 김순자에게 맡겨 북경의 이영선을 경유하여 연안으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이영선이 연안으로 가는 도중에 8.15해방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상의 기록에서 보는 바와같이 박정희는 비록 만주군의 장교계급장을 달고 있었지만 민족적 양심을 지닌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국내진공계획에 참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박승환은 1918년 경기도 파주군 월룡면에서 지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제2고보(경복고)를 나와 1937년 봉천 군관학교에 들어갑니다. 박정희가 대구사범을 나왔기 때문에 박승환이 박정희보다 한살 어렸으나 군관학교는 3년 선배가 됩니다.
학창시절부터 스케이트,수영선수로 활약했고 훤칠한 키에 힘이 세고 미남인 동시에 정열적이었다고 합니다. 군관학교시절에는 교관 간노 히로시와 친했고 졸업후에는 봉천비행대에 근무하면서 김순자와 결혼합니다. 그 중매를 홍사익(당시 관동군 군사학교 부교장)이 합니다.
여운형의 신봉자이던 박승환이 봉천비행대에 있으면서 홍사익장군의 비호아래 만주군 내의 조선인 장교및 하사관들을 상대로 개별적인 의식화 작업을 벌였습니다. 본래 김순자는 친일파의 딸이었으나 박승환과 결혼한 이후 열렬한 조선독립운동가로 변신합니다.
박승환과 접선된 사람으로는 박정희,문용채(만군대위,군사영어학교,부군단장,육군중장예편) 최남근, 최창륜,양국진(만주신경대 졸업,만군대위,군단장,육군중장예편.) 이기건, 박임항(만주신경군관학교 1기 졸업,만군대위,군사령관,육군중장예편.), 김백일,이상열,박준호,박동균,등 수십명에 달했습니다.
문용채의 증언입니다.
"1945년 4월 박승환,박준호,이상열,최창륜과 나는 [조선건국동맹 만주분맹 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때 봉천비행단에는 박임항과 최창륜이 있었는데 최창륜이 2기 대표로 박정희를 추천했다. 나의 계급은 만군대위였고 그는 소위 시절이다.
박정희는 반벽산(半壁山)에서 근무했고 나는 그곳에서 가까운 금주헌병대에 있었기 때문에 몇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신랄히 비판하며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조국광복의 방략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역땅에서 향수를 되씹으며 서로의 회포를 털어 놓았다.
그는 만군 제 8단의 일본인 장교들의 감시를 피해가며 조국광복운동에 참여했다.
박정희가 만군에 있을때 조선의 독립군과 연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고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는 모양이나 그당시 우리는 비밀활동을 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것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국내파 독립운동단체이다.
1945년 2월 9일,만주군 제 8단을 위문하기 위하여 [신태양 악극단]이 찾아왔다.
단장은 김이태이고 단원들은 손목인,김준영,윤난성등 십여명의 가수와 연기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때 신태양악극단의 잡부로 가장해서 따라 다닌 사람이 이용기인데 그는 광복군 화북지구의 특파원으로 광복군 지대장 김학규의 지령을 받고 왔던 것이다.
위문공연이 끝난 뒤 박정희와 이용기는 술자리에 함께 있었고 그들은 은밀히 만나기도 했다. 이용기는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장군의 커다란 도장이 찍힌 자신의 신분증을 확인해 보였다. 그뒤 박정희에게 떨어진 지령은 조선건국동맹이 추진하는 작전계획에 협조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박정희는 광복군의 밀명을 받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박명근의 증언입니다.
"박승환은 나의 삼촌이다. 삼촌이 요절한 뒤 나는 삼촌의 동지들을 자주 찾아갔다.
내가 심계원에 근무할 때 1군 참모장이던 박정희장군을 찾아 갔더니 삼촌의 이야기를 하면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삼촌의 딸 정근이 해운대로 피서를 갔다가 익사했을 때는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있던 박장군이 시체수습등 여러가지 편리를 봐주었다. 내가 청와대 근무를 한 것도, 또 지역구 의원후보 공천을 받을 때 삼촌이 사상적으로 불온했다는 모략을 받았으나 박대통령께서는 그것을 막아 주셨다. 그분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라는 점을 분명히 했고,자신도 한때 그와같은 오해를 받아 군에서 홍역을 치른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광복군 제 2중대장 박정희.
박정희가 만주군 소위로 임관해서 해방을 맞을 때까지의 시간은 1년 남짓입니다. 그가 속해 있던 만주군 제 8단은 열하성 반벽산에 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은 북경으로부터 동북쪽의 산악지대로 만리장성의 북쪽 변경입니다.
제8단의 병력은 약 3,000명으로 연대 규모의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고 공산 게릴라들과 싸웠기 때문에 중국인 사병과 현지 중국농민들의 인심을 얻는 것이 전투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제 8단의 단장은 당제영(唐際榮)상교(대령)이 맡았고 사병은 전원이 중국인, 장교도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일본인 20여명,조선인 4명이었습니다. 4명의 조선인 장교가 신현준,이주일,방원철,박정희였습니다. 박정희는 당시 단장의 부관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과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 천하의 명운을 놓고 사상전을 전개하면서도 일본이라는 외세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대처하는 연합전선을 펴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중국의 늪에 빠진 일본은 전쟁수행능력에 한계를 드러내면서 제 8단도 종전이 된 줄도 모르고 산악지대를 헤메고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4일.
박정희는 구산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방원철중위가 지휘하는 부대로 전화를 겁니다.
"형님 수고 많습니다. 지금부터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말을 쓰겠습니다.
소련군이 침공,전면전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제 8단은 명령에 따라 외몽고의 다륜으로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훈련은 중지하시고 장비를 최대한 가볍게 하여 내일 새벽까지 본부로 돌아오십시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방원철은 박정희의 전화를 받고 반벽산으로 되돌아 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행군로는 험하고 여러 계곡과 절벽을 지나야만 했습니다. 15일부터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인마는 비에 젖어 무겁고 긴 행렬을 이루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5년에 걸친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4년에 걸친 대륙침략도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36년간의 식민통치도 막을 내려 광복을 맞았습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만주와 북중국,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힘의 공백상태를 가져옵니다. 만주에는 소련군,일본군,민주군,장개석군,모택동군이 어지럽게 뒤엉켜 살벌한 분위기가 고조 되었고,제 8단의 조선인 장교 4명도 무장해제 당한 채 부대안에서 손님대접을 받으며 며칠을 보냈습니다.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묘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이때가 박정희가 중위로 진급한지 한달 되는 때였습니다.
이들 4명의 조선인에게 당면한 과제는 고향으로의 무사귀환이었습니다. 철도의 마비,대중교통수단이 전무하고 공권력이 없는 무법천지에서 오로지 적자생존의 힘의 논리만이 있었습니다.
잡다한 무장집단들 틈에서의 무사귀환은 또다른 전투였습니다. 방원철은 아내가 기다리는 봉천으로 가고 박정희,이주일,신현준은 북경으로 갑니다. 8월 29일에 북경에 도착하여 덕경루를 찾았습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으로 다음에 북경 동북쪽의 제지공장으로 옮깁니다.
이곳은 임시정부가 보낸 최용덕(중국육군대학졸업,중앙군대좌,광복군참장,공군중장예편,공군참모총장,장개석의 전용기를 조종했음.)장군이 이곳을 숙영지로 마련했던 것입니다.
당시 임시정부는 독립에 대비하여 군대조직을 만들고 있었고 장개석군이나 팔로군을 포함하여 학병으로 끌려갔던 젊은이들과 일본군,만주군에서 근무했던 젊은 장교나 하사관들을 모두 광복군으로 편성하여 고국에 돌아간다는 게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모인 약 400명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김학규가 지휘하는 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시켰고 이들은 제 1대대에 배속되었습니다. 제 1대대장은 신현준이,그밑의 제 1중대장은 이주일,제 2중대장은 박정희,제 3중대장은 학병출신의 윤영구가 맡았습니다.
그들은 소총 기관총등 기본무장을 갖췄고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매일 훈련에 몰입합니다. 제일 큰 문제는 먹는 문제로 간부들이 식량조달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고 광복군채를 발행하기도 했지만 굶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무렵 박정희가 부르던 노래입니다. "조팝 깡다리에 소금국만 먹어도 광복군 정신만은 씩씩하게 살아있다."
신현준의 증언입니다.
"그 당시 혼란상은 말로서는 다 할 수 없다. 일본이 망해 버리니 만주군 제 8단도 장개석에 붙어야 할지 모택동에 붙어야 할지 갈팡지팡하고 광복군 안에서도 부대원들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상문제로 밤새워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정희는 부대안에서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어갔다. 만주군관학교 1등졸업,일본육사 졸업이라고 하는 군인으로서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나이도 그들보다 월등히 많았다. 말이 없으면서도 두주불사하는 호방한 성품인데다가 사사로운 욕심을 갖지 않았다. 여운형을 줏대있는 지도자라고 했으며,어느 사람이 박정희에게 [중대장 동무]라고 하자"동무가 뭔가? 내가 자네 동무란 말인가 !"하고 핀잔을 준일도 있다."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중국정부와 미 군정당국에 대하여 교섭을 활발히 벌였으나 지금 당장은 어렵다는 말뿐이고 특히 부대단위의 집단입국이나 [광복군]의 명칭으로는 입국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전승국도 패전국도 아닌 묘한 입장에서 10개월을 허송세월한 후 1946년 5월 6일 미 해군 수송선을 타고 천진을 떠나 5월 8일 부산항에 도착합니다.박정희와 신현준은 기차편으로 서울까지 올라와 피난민 수용소에서 며칠을 보내다가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 갑니다.
------------------------------------ 아유 .. 읽으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박사모 최고 회원으로 추천합니다. 감사합니다.박사모 홧팅.......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잙 읽었슴니다. 저도 추천합니다. 박사모 최고위원으로...
정말 읽고 또 읽어도 감동입니다
매우 깊이있는 자료이군요. 좋은글 잘읽었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