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
“아빠, 시위소찬이 머야? 장관 물러나라고 난리인 걸.” “옛날 중국에서는 제사지낼 때 조상의 혈통을 이은 어린아이를 조상의 신위에 앉혀 놓는 풍습이 있었걸랑. 영혼이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 마음껏 먹고 마시게 하려는 신앙에서 나온 풍습. 이 때 신위에 앉아 있는 아이가 시동이고. 시위尸位는 그 시동이 앉아 있는 자리. 소찬素餐은 맛없는 반찬. 아무것도 모르면서 남이 만들어 놓은 자리에 앉아 공짜 밥이나 먹고 있는 공무원 말하는 거야.” 조식(1501-1572). 본관 창녕. 조선시대 문과 107명, 무과 37명, 사마시 201명 과거 급제자 배출. 호 남명. “아빠, 남명南冥이 먼 뜻이야?” “북명이란 바다에 '곤'이란 물고기가 사는데 그 크기가 몇 천 리가 되는지 모른다. 그것이 변해 새가 되면 '붕'이라 하는데, 그 크기도 몇 천리인지 모른다. 성내어 날면 날개가 하늘에 구름이 드리운 것 같다. 해수가 움직이면 이 새는 남명으로 옮겨가는데, 남명이란 바다이다. 장자 왈. 남쪽의 큰 바다.” 남명은 평소에도 이런 검명이 새겨진 칼을 차고 다닌다. 의내명자경 義內明者敬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경이요, 외단자의 外斷者義 밖으로 시비를 결단하는 것은 의다. 경남 삼가현(三嘉縣, 지금의 합천) 토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5살 때 부친 조언형 장원급제. 가문의 영광. 부친 따라 서울행. 부친이 직접 사서오경을 가르친다.
18살 때 우리 시대의 선비 성수침에게서 큰 가르침을 받고 조광조의 제자가 된다. 성수침 이름이 낯설죠. 본관 창녕. 역시 성삼문을 배출한 명문가. 우계 성혼의 부친. 성수침이 돌아가시자 이이가 행장을, 기대승이 묘지명을, 이황이 묘갈명을 쓴다. 그의 위상을 아시겠죠. 다음 해 기묘사화. 조광조 사형. 머야 이거. 20살에 생원 1등, 진사 2등. 성수침 낙향. 나 벼슬 안 해.
뇌룡정. 경남 문화재자료 제129호. 주소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아빠, 생원이 머야?” “사서오경에 통달한 학생.” “진사는?” “문학도.” “그럼 남명선생은 두 개 다 잘한 거네.” “응.” 조정은 이미 당파 쌈으로 난리법석. 그제나 이제나. 그럼 나도 벼슬 안하겠다. 산으로 들어가 독서. 친구가 <성리대전>을 얻어 왔다. 송나라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70권짜리 전집. 원나라 허형(1209-1281)의 글이 가슴을 친다. “벼슬길에 나아가면 큰일을 해내고, 초야에 숨어살면 자신을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 “아빠, 성리학이 머야?” “어질고 예의를 지키며 살아가는 게 인간의 도리임을 가르치는 학설.” 좋다 어지러운 난세에 큰일을 욕심내다간 다칠게 뻔하고 그럼 난 처사가 되겠다. 22살에 남평 조씨 조수의 딸과 결혼. 처갓집은 당연히 김해의 만석꾼. 처사도 먹고 살아야 할 거 아니냐. “그럼 아빠도 의도적으로 돈 잘 버는 엄마랑 결혼한 거야?” “응.” “엄마한테 일러야지.”
1527년 부친상. 3년 시묘.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으로 이사. 쌀독이 바닥났으니. 30살 때 김해 신어산에 들어가 산해정山海亭 짓고 45살 때까지 안빈낙도. 난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큰 학문을 하겠다.
산해정
1609년 신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871년 훼철. 산해정만 중건. 경남 문화재자료 제 125호. 38살 때 당시 직제학이던 이언적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 “아빠, 제수除授가 머야?” “시험을 거치지 않고 왕이 직접 벼슬을 내리는 거. 학문이 높은 처사에 한해.” 머라 나보고 칼잡이 이방원의 능을 지키라고나. 미쳤냐. 1545년 을사사화. 친구들 전부 사형.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 이제 사림 전멸. 안 나가길 잘했군. 1548년 전생서(典牲暑 나라의 제사에 쓸 짐승을 기르던 관청) 주부(主簿 종 6품)에 제수. 머라 나보고 소나 키우라고나. “아빠, 왜 능 근처에 갈비집이 많은 거야?” “조선시대에는 소가 농사에 가장 중요한 농사기계라 함부로 잡을 수 없었걸랑. 함부로 소 잡으면 사형. 그래 왕이 능행길에 오르는 제사 때 능 근처에 가야 소갈비를 맛볼 수 있었걸랑. 태릉갈비집이나 가자.” 1551년 종부시(宗簿寺 왕실의 보첩을 관리하던 관청) 주부에 다시 제수. 됐걸랑요. 당시대의 거목 대사성 퇴계 열 받았다. 퇴계와 남명은 동기. 경상북도는 퇴계. 경상남도는 남명 땅.
별묘
“야, 좀 나와라. 나도 죽것다. 단성현감(지금의 산청군 단성면장) 해라.” “나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하늘의 물건인 관직을 훔쳐서야 되것습니까!” 머야 그럼 나보고 도둑놈이라는 거 아냐. 두고 보자. 남명은 그 유명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즉 ‘단성현감 사직상소’를 올렸다. 유서 작성해 놓고. 어차피 죽을 몸. 칼도 차고 있고. “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 대를 잇는 자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머라. 당 시대의 권력자 문정왕후 뒤집어 졌다. 그만 둘 거면 조용히 그만 둘 것이지. 불을 질러. 죽여라. 그럼 남명은 역사에 위대한 스타 선비가 될 텐디유. 벼슬도 없는 처사는 그냥 냅두는 게. 이황 더 열 받았다. 퇴계 왈. “뜻은 곧으나 말이 너무 거칠군.”
선생유적지 뒷산에 있다. 보기에도 명당이죠. 같은 해 모친상. 산에서 내려와 3년 시묘. 48살에 합천군 삼가현 토동마을에 뇌룡정雷龍亭 짓고 후학 양성에 나선다. “아빠, 뇌룡이 머야?” “시거이용현 尸居而龍見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연묵이뢰성 淵默而雷聲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뢰처럼 소리치겠다. 자고로 덕을 갖춘 사람은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묵묵히 있어도 그 덕의 교화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장자 왈.”
남명은 61살 되던 1561년 지리산 덕천동에 산천재山川齋 짓고 입산. “아빠, 산천은 또 머야?”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밖으로 빛을 드러내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 방에 좌우명을 걸었다. 용신용근 庸信庸謹 말은 떳떳하고 미덥게, 행동은 떳떳하고 신중하게, 한사존성 閑邪存誠 사악한 것은 막아야 하고, 정성스러움 간직해야 하네. 악립연충 岳立淵沖 산악처럼 우뚝하게, 연못처럼 깊게 하면, 엽엽춘영 燁燁春榮 찬란한 봄처럼, 피어나고 피어나리라. “아빠, 좌우명座右銘은 머야?” “늘 자리 옆에 갖추어 두고 가르침으로 삼는 말.”
덕천서원. 후손이 경전을 읽고 계시다. 선비정신은 아직 살아 있죠. 퇴계에게 편지를 띄웠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자루질하는 예절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 리를 말하
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합니다. 퇴계선생 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습니까?” 퇴계와 남명은 라이벌 의식으로 평생 단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선조가 다시 전화. 올라오시죠. 됐걸랑요. 그럼 5번째 벼슬 거절. 가족은 뭘 먹고 살았을까? 부인은 돈 꾸러 다니기 바빴을 것이고. 자녀들은 밥 굻기를 밥 먹듯이 했다. 1567년 선조가 전화를 했다. 좀 도와주라. 됐걸랑요. 1568년〈무진봉사戊辰封事 무진년에 밀봉해서 임금에게 올린 글)를 올렸다.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 전하 말단 공무원들이 까불고 다녀 백성들이 피곤하걸랑요. 1572년 72살 이제 갈 때가 됐다. 유언은 이렇다. “나 가걸랑 묘비에 처사라고 써라. 만약 이를 버리고 벼슬을 쓴다면 이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 “아빠, 처사處士가 머야?”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 한 선비가 남명선생을 찾았다. "○○(여성의 성기)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남명은 얼굴을 찌푸리며 상대하지 않았다. 선비가 다시 "××(남성의 성기)는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남명은 크게 화를 내며 제자들을 시켜 그를 내쫓았다. 내쫓긴 선비는 역시 명망 높은 퇴계 선생을 찾아가 같은 질문들을 내놨다. 그러자 퇴계 왈. "○○는 걸어다닐 때 숨어 있는 것으로 보배처럼 귀하지만 살 수는 없는 것이고, ××는 앉아있을 때 숨어 있는 것으로 사람을 찌르기는 하지만 죽이지는 않는다.” 성호 이익 왈. “퇴계는 바다, 남명은 산이다.”
뇌룡정. 인문학적인 건축은 터 잡으면 게임 끝이죠. 경남좌도인 퇴계는 “인仁”을 경남우도인 남명은 “의義”를 따라간다. 수제자 정인홍이 나선다. 스승을 넘어 서겠다. 왜 만날 숨어 지내야 되냐. 다치겠죠. 임진왜란을 막는 선봉에 서면서 정인홍 뜬다. 뜨면 떨어지는 계곡은 깊은 법. 스승이 그렇게 가르쳤음에도. 북인의 선봉에 서 남인의 선봉장 퇴계의 수제자 류성룡과 맞짱. 누가 이길까요. 류성룡 밀어 내고 정인홍은 영의정에 오르지만 인조반정으로 참형. 멸족. 자 보셨죠. 왜 은거해야 되는지. 정인홍 탓에 남명 조식은 평가를 제대로 못 받고 있다. 남명이 1564년 산천재에서 퇴계에게 보낸 편지 보자.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질하는 법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서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칩니다.”
경청해야죠. 지금의 정치가나 부모님들. 1576년 덕천서원 건립해 선생을 모신다. 1609년 사액서원. 1868년 훼철. 1927년 중건. 경남유형문화재 제89호.
주소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 222-3. 남명 조식 유적지는 사적 제305호. 선생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로 함축된다.‘경’은 내적 수양을 통해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해 근본을 세우는 것이고, ‘의’는 경을 근본으로 제반사를 대처함에 있어 과단성 있게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2004년 남명기념관 건립. 주소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468번지. 1572년 눈을 감았다. 향년 72세. 왕이 시호를 내렸다. 문정文貞. 지조가 곧은 선비임. 광해군 때 영의정 추증. [출처] 남명 조식|작성자 이용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