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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ESUSONE 원문보기 글쓴이: 제이원
시편 12:1~8 안전한 지대 2020. 8. 12
1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2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4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7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8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시편 12편의 표제어입니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이 시편도 경건하고 가련한 자들이 악인들에 의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기에 탄식하며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그들을 안전한 지대에 두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안전한 지대’입니다. 이런 제목만 보면 우리도 안전한 지대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특히 홍수나 산사태로 인하여 살 근거지를 잃어버린 분들은 더욱 절박하게 안전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안전한 지대가 어디에 있습니까?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장마철이 되면 상습적으로 침수가 되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사람들이 그런 곳에 사는가 하겠지만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안전한 곳으로 이사 갈 능력이 없어서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누가 햇볕도 잘 들어오지 않는 반 지하에 살고 싶겠습니까? 그런 곳에는 홍수가 나면 가장 먼저 물에 잠깁니다. 이런 곳에서 더 안전한 곳으로 이사 가려고 열심히 일하면서 저축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하여도 부동산 투기꾼들에 의하여 몇 억씩 오르는 아파트 값을 가난한 자들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먹고 마시며 사고팔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을 하는 것도 더 안전한 삶을 원하여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를 위하여 열심히 살았지만 노아 시대에는 홍수로 세상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지금의 이 세상도 안전한 곳이라고는 없습니다. 지진, 홍수, 전염병,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환경파괴가 더욱 가속화 되고 있습니다. 지구를 몇 번이나 파괴하고도 남을 핵폭탄들이 지구에 가득합니다.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는 이 전기가 핵발전소에서 나옵니다. 핵발전소도 큰 지진이 일어나면 파괴됩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안전한 지대란 이 땅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안전한 지대에 옮겨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본문 1절을 봅니다. 여호와께 도와 달라고 합니다. ‘도우소서!’ 이 말이 구원하여 달라는 말입니다. 여호와께 구원을 요청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시편의 배경을 다윗의 고난 중에 나온 시로 본다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 갈 때에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놉 땅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서 도움을 받습니다. 떡도 받고 골리앗의 칼도 받아갑니다. 이 일을 사울의 목자장인 에돔 사람 도엑이 보고 사울에게 보고합니다. 이로 인하여 제사장 85명이 몰살을 당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제사장을 죽이기에 머뭇거리는데 고발한 에돔 사람 도엑이 제사장들을 죽입니다. 그 뿐 아니라 놉 땅의 남녀와 유아들과 젖먹이와 짐승들까지 죽여 버립니다. 이런 상황이 경건하고 신실한 자들이 끊어진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여호와여 구원하여 주소서!
2절입니다.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이런 상태가 된 것은 1절이 이유가 됩니다.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충실한 자들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사무엘상 21~22장으로 본다면-물론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인하여 오는 모든 환난과 핍박을 다 포함하지만-도엑은 사울 왕에게 충실한 부하의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엑은 그 당시 사울 왕에게 충실한 부하였는데 왜 이런 자가 아첨하는 입술이며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정죄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의 개념과 성경이 말하는 정의의 개념입니다.
전에 한두 번 말씀드린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다 봤습니다. 유대인을 학살하는 일에 수송의 일을 책임지고 집행한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살다가 이스라엘의 비밀경찰에 잡혀서 예루살렘의 정의의 집이라는 곳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아이히만은 15개의 죄목으로 고소를 받았는데 법정에서 자신이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하여도 법 앞에서는 무죄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독일 국가의 군인 공무원으로 일한 것이기에 불법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처형을 당하였지만 국가에 충성한 것이라고 하면서 당당하게 죽어갔다고 합니다. 이 재판을 취재한 한나 아렌트는 사고하지 않는 죄를 말하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하여 이 말이 유명하여졌습니다.
세상의 법이라는 것 앞에서 아이히만은 무죄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각 국가들이 법을 만들고 공무원들은 그 법을 집행합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일합니다. 그런 국가의 일이라는 것이 전쟁도 일으킵니다. 다른 국가도 그렇게 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나라의 법이 가장 정의로운 법입니까?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한 법정을 정의의 집이라고 하였지만 유대인들을 독일이 집단적으로 처형하는 일에 누가 도움을 준지 아십니까? 독일이 점령한 지역의 유대인 위원회에서 협조를 하였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친일파와 같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독일인들이 집단적으로 유대인을 학살하는 일이 쉽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런 세상에서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경건하고 신실한 자들이 끊어지고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며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 자들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었다는 이런 탄식은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의 기준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기생 라합과 여부스 족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백 년을 살아온 자기의 고향땅을 이스라엘이라는 적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힘을 합하여 이스라엘을 물리치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런데 기생 라합은 적의 스파이들을 숨겨줍니다. 이것은 조국을 배반하는 겁니다. 그리고 여부스 족은 이스라엘을 대항하기 위한 연합전선에 가담하지 않고 이스라엘에게 항복을 합니다. 여리고 성 사람들이나 가나안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기생 라합이나 여부스 족이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경건한 자와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진다는 것이 단지 세상의 윤리 도덕적인 기준이나 국가의 법이 기준이 아닙니다.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하고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 것도 세상의 기준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은 온갖 거짓말로 힘 있는 자들에게 아첨하기에 늘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도 다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드러나는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의 말은 기름부음 받은 자의 등장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므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끊어내려고 하는 모든 말들이 다 심판을 받을 말입니다(시2편).
본문 3~4절입니다. “봉독”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신다고 합니다. 아첨 하는 혀와 자랑하는 혀는 도엑과 같은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고발하고 그를 도와준 자를 살해한 자의 입술이 아첨하는 입술이며 자기를 자랑하는 혀가 됩니다. 도엑만이 아니라 우리의 말도 상대방을 향하여 대 놓고 나쁜 말 못합니다. 상대가 힘이 있는 사람일수록 아첨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에 대하여는 자랑하는 말을 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에서 자기 자랑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설교하면서도 자기 자랑 질을 합니다. 이런 혀가 역사 속에서 끊어지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들이지만 끝까지 자기 혀가 자기 것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자들은 영원한 심판입니다.
시편 73:9~12절입니다. “9 그들의 입은 2)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한 대표적인 시편입니다. 악인은 아무리 악을 행하여도 어떤 재앙도 당하지 않으니 교만하여 져서 그 입이 하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이 어찌 알겠느냐고 합니다. 지존 자에게 지식이 있느냐고 합니다. 이 말을 할 정도로 담대하여진 것은 아무리 악을 행하여도 벌은커녕 항상 평안하며 재물은 더욱 불어나기에 그렇게 혀를 마음대로 놀립니다.
이어지는 13~15절입니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악인처럼 살지 않으려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손을 깨끗이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합니다. 그렇게 할수록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어서 그 악인들처럼 말하였다면 나도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서 악행을 행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고민 중에 성전에 나가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이 어떤지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5절입니다. “봉독” 1~4절은 악인들이 세상에 가득하기에 주를 의지하는 자들이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제 여호와의 응답이 나타났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인하여 그들을 구원하여 그들이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신다고 합니다. 1절에서 여호와의 ‘구하소서’라고 한 그 구원하여 달라는 말의 어원이 ‘안전한 지대’라는 말과 같습니다. 가련한 자들, 궁핍한 자들은 주의 기름부음이 있기에 아첨하는 말이나 두 마음으로 말을 할 수가 없어서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구원하여 주시는데 그 구원을 안전한 지대에 두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안전한 지대가 어디입니까?
본문 6~7절입니다. “봉독” 안전한 지대란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합니다.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다고 합니다. 일곱이란 완전함을 말하기에 은을 연단하기 위하여 완전하게 연단하여 불순물을 다 제거한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안전한 지대에 두신다는 것은 여호와의 순결한 말씀을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께서 피하여 들어간다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믿는 겁니다. 이러한 자들을 지키시는데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신다고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피하여 들어가는 자들이 영원한 안전지대에 들어갑니다.
이 안전한 지대를 율법을 먼저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나라만이 영원한 안전한 지대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남 북으로 나누어지고 북은 앗수르에 남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하였습니다. 성전도 파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다시 성전을 재건하면서 율법에 열심을 냅니다. 율법지킴으로 안전한 나라 강한 나라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이 참으로 안전한 지대, 곧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한 안전한 지대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안전한 지대입니다.
요한복음 1:1~5절입니다. “1 태초에 1)말씀이 계시니라 이 1)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2)깨닫지 못하더라” 오늘 본문을 보면서 여호와의 말씀이 안전한 지대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사람들의 생명이며 빛이지만 어둠에 갇힌 인생들은 그 빛을 알지 못하기에 요한이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원한 안전지대에 거하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할 정도의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까?
고린도전서 1:18~24절입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ㄱ)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2)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이 세상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힘으로 스스로 안전한 지대를 만들려고 합니다. 각 개인들마다 안전한 지대를 원합니다. 개인이 안전하려면 국가가 튼튼해야 합니다. 그래서 각 국가들마다 경제전쟁을 합니다. 국방력경쟁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이런 지혜로는 결코 십자가의 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주의가 추구한 것도 결국은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렇게 하여 자기들만의 강력한 국가가 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력으로 로마를 대적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새마을 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사셨습니다. 그 결국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눈에는 거리끼는 것이며 이방인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겁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기에 안전한 지대로 보입니다.
고린도후서 4:3~6절입니다.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ㄱ)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복음이 가려진 이유가 이 세상의 신이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눈에 보이는 안전한 지대를 추구하게 만들기에 십자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에 빛이 비치라고 하신 그 창조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피로 재 창조하셔야 안전한 지대가 무언지 보입니다.
골로새서 1:20~23절입니다.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3)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그의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복음이 성도의 영원한 안전한 지대입니다. 이 터를 이루신 예수님이 반석이시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구약에서도 안전한 지대 곧 구원을 주시는 분이 메시아임을 주의 영으로 인하여 미리 내다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온갖 악인들의 아첨의 말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 자들의 위협과 협박 속에서도 주의 구원을 맛보았기에 그 안전한 지대에 두셨다고 합니다. 이 모든 말씀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안전한 지대를 완성하셨지만 아직도 이 역사 속에서는 비열함이 인생 중에서 높임을 받고 있습니다. 비열하게 하여 권력을 가지고 금력을 가지고 세상의 힘을 가진 자들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높여줍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십자가로 악인을 심판하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안전지대에 세워진 것입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2:18~21절입니다. “18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 이는 ㄴ)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ㄷ)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이른 곳은 구약의 시내산이 아니라고 합니다. 시내산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산입니다. 그곳에 불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가 나기에 두려워 벌벌 떤 곳입니다.
이어지는 22~24절입니다.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은 시내산이 아니라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물론 구약의 성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장자들의 총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이런 자들은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진동하여 무너져 내려도 안전한 지대인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이어지는 25~27절입니다. “25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ㄹ)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2)은혜를 3)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진동하지 않을 나라는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내신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받은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난리의 소문이 들릴 때 마다 성도는 더욱더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나라 곧 십자가로 이루신 그 안전한 지대를 말씀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다면 더욱 은혜를 받자고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사람들이 말하는 안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다 사라져도 흔들리지 아니할 안전한 나라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은혜를 받는 겁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았다는 말도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고 불에 탈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신 그 나라를 알게 되고 믿게 되고 사모하게 되는 것을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안전한 지대에 옮겨진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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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ESUSONE 원문보기 글쓴이: 제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