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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1 <예썰의 전당> [13회] 누구를 위하여 붓을 들었나 – 벨라스케스 '시녀들'. 2022년 07월 31일 방송 다시보기
✵ ‘예썰의 전당’ 열세 번째 주제는 수수께끼 같은 그림,
파블로 피카소, ‘시녀들(Las Meninas)’, 1957, 캔버스에 유채, 194x260cm,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_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뒤로 물러서 보면 눈으로 본 것과 똑같다"
-스페인 화가 안토니오 팔로미노(Antonio Palomino, 1653–1726)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의 시녀들(Las Meninas) 17세기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그림’이라고 불린다. 그림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냐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시녀들에는 화가 벨라스케스를 포함해 마르가리타 공주와 시녀들, 궁중광대, 펠리페 4세 국왕 부부 등 총 11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과연 이 많은 인물 중 시녀들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
"우리는 모두 이 작품(시녀들) 앞에서 무지하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 ‘시녀들(Las Meninas)’,
1656년, 캔버스에 유화, 316x276cm, 프라도 미술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 ‘시녀들(Las Meninas)’,
1656년, 캔버스에 유화, 316x276cm, 프라도 미술관/ 반전 시켜 놓은 작품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를 그렸다. 이 ‘시녀들’이라는 작품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은 처음에 마드리드 알카사르 왕궁에 있는 왕의 개인 집무실에 소장되었다가, 왕궁의 다른 공간으로 몇 번 이전된 후 19세기 초에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왕실 가족과 그 측근, 고위 성직자 등 소수의 인물들만이 볼 수 있었던 ‘시녀들’은 미술관에서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면서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 그림의 명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초상(Portrait of pope Innocent X), 1650년,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역대 초상화 가운데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 스페인)는 초상화를 그릴 때 대상을 미화시키거나 정형화시키지 않고, 사실적이고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캔버스로 옮겼는데, 이 작품에서도 특유의 화법이 잘 드러나고 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필립 4세 초상화(Philip IV), Prado Museum
필립 4세의 초상화에서는 왕의 포스보다는 유약함과 무능력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너무 사실적이어서 소름 끼친다. 왕의 체구가 앞에 난쟁이와는 다르게 건강하고 힘이 있어 보이지만 외모에서 풍기는 기운은 몸과 언발란스하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Las Meninas)’(1656) 공주 머리 위의 거울속에 펠리페 4세 왕과 왕비 모습
벨라스케스는 그림을 그릴 때 작품의 소재를 선택하는 방식이 남달랐으며 그림을 완성하고 난 다음에도 여러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아 하나의 그림에 여러 제목이 붙여져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그림들이 꽤 있다. '시녀들' 역시 그러한 작품들 중 하나로 처음에는 '벨라스케스의 초상화'라고 불렸다. 그림 속 거대한 캔버스 앞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가 벨라스케스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왕실소장 미술작품목록에는 '시녀들 및 여자난쟁이와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로 적혀있다. 그 다음 '펠리페4세의 가족초상화'로 불리다 19세기 프라도 미술관 작품집에서 '시녀들'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Arnolfini Portrait)>, 1434년, 오일에 패널,
82×60cm, 영국 내셜널갤러리. 아래 그림은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Arnolfini Portrait)> 사이의 거울 부분도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 네덜란드)는 1434년에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을 그렸다. 조반니 아르놀피니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브뤼헤에 정착한 부유한 상인으로 그의 아내 조반나 체나미와 결혼했다. 이 작품은 부부의 결혼계약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부부 초상화이다. 이 작품이 유명한 이유는 사실주의와 상징주의 때문이다.
부부가 입고 있는 옷으로 보아 그들은 상류계급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편은 창가 쪽과 부인은 안쪽에 있는 것은 ‘바깥 세상’과 ‘가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종교적 신성함을 더욱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침대 가까이에 있는 아내의 신발과 바깥쪽에 있는 남편의 신발이 놓인 위치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 당시에는 맨발로 땅을 밟는 것이 다산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부부의 사이에 개는 충성심과 세속적인 사랑을 상징한다. 조반나는 녹색은 다산을 상징하는 색이고 녹색 드레스는 당시 상류층에서 즐겨 입던 옷이었다. 조반나는 당시에 아름다움의 초점이 되었던 배를 강조하기 위해 임신한 듯 보이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과장되게 표현한 배는 다산과 미래의 임신을 상징한다.
부부는 서로의 손을 잡는 행위는 기독교 혼인예식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부부는 손을 잡고 혼인을 약속한다. 그 약속으로 두 사람은 하나가 된다. 남편은 선서를 하듯 오른손을 들고 있고, 아내는 왼손을 가슴에 모으고 남편의 오른손을 바라보고 있다.
붉은색 침대는 대를 잇는 것을 상징하고, 붉은색은 정렬적인 사랑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침대는 사람이 태어나는 공간이자 죽음을 맞이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곳에 쳐진 붉은 휘장은 그들의 정열적인 인생을 예견한다.
침대머리에는 용을 밟고 있는 마르가리타 성녀가 조각되어 있는데 출산의 수호성인이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용으로 변한 사탄이 성녀 마르가리타를 집어삼켰지만 마르가리타는 평소에 지니고 다녔던 십자가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십자가로 용의 배를 찢고 나와 상처 없이 탈출할 수 있었다.
거울 양쪽 옆으로 작은 빗자루와 묵주는 당시에 인기 있는 결혼선물이다. 이것은 기독교 수덕생활의 중심인 기도와 노동을 상징한다. 수정 묵주는 수정은 순결을, 묵주는 신부의 덕성과 남편에게 헌신해야 하는 의무를 상징한다.
샹들리에 위의 촛불이 하나만 타오르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의 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일곱 갈래 가지 중에서 단 하나의 촛불만 밝힌 샹들리에는 신부가 신랑에게 주는 전통적인 선물이다. 환하게 타고 있는 촛불은 하느님의 꺼지지 않는 빛을 의미한다.
창가에는 오렌지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의 에덴동산을 지배한 순수와 정결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렌지는 당시에는 부유층만 먹을 수 있었던 값비싼 과일로 풍요를 상징한다.
그런데 뒤쪽 벽의 볼록 거울과 그 위에 새겨진 문구는 이 그림을 푸는 열쇠가 된다.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 두 명의 사람이 더 보인다. 그래서 부부가 이 두 사람과 함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두 사람 중 하나는 아마도 화가 자신일 것이다. 왜냐하면 거울 위에 라틴어로 이렇게 쓰였기 때문이다.
“1434년에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가 이곳에 있었다.”
15세기에 혼인성사는 칠성사 중에서 사제가 참석하지 않아도 성립이 가능한 유일한 성사였다. 두 명의 증인만 있으면 결혼 당사자들끼리도 혼례를 올릴 수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두 사람을 볼 때, 이 그림은 사실상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을 증명하는 법적증명서인 셈이다. 그런데 거울 가장자리에 십자가의 길이 새겨져 있다. 십자가의 길을 포함시킨 것은 이 그림을 단순히 법적이고 사실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이고 영적인 측면에서도 해석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년경 ~ 1441년)는 플랑드르의 화가이다. 후베르트 반 에이크의 동생으로, 15세기 북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유화 기법을 사용한 최초의 미술가. 그가 색체 가루(안료)를 최초로 기름에 섞어서 사용, 자연에 대한 세심한 고찰, 정교한 세부 묘사 등으로 인하여 중요하게 여겨진다. 대표작은 어린 양에 대한 경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가 있다. 1422∼1424년 헤이그의 바이에른후(侯) 요한의 궁정화가, 이어 25년 이래 부르고뉴공(公) 필립[善公]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 예썰 하나. 시녀들의 주인공은 마르가리타 공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스페인의 국왕이였던 카를 5세
24살 많은 삼촌 펠리페 4세와 결혼한 마리아나 왕비
근친혼(近親婚:consanguineous marriage)으로 얼룩진 합스부르크가의 비극 시녀들 한가운데에서 홀로 빛을 받고 있는 어여쁜 소녀, 언뜻 봐도 그림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아이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르가리타 공주다. 당시 합스부르크가는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럽의 패권을 휘어잡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합스부르크가는 충격적인 선택까지 하고 만다. 그것은 바로 근친혼! 하지만 거듭되는 근친혼은 열성유전자를 강하게 만들었고, 합스부르크가는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린다. 마르가리타 공주의 아버지였던 펠리페 4세는 13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그중 7명이 근친혼의 부작용으로 한 살을 넘지 못했다. 또한 역대 합스부르크가 사람들의 초상화를 보면 턱이 심하게 돌출돼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역시 부작용 중 하나였다. 근친혼으로 얼룩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태어난 마르가리타 공주는 과연 이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까?
* 근친혼(近親婚:consanguineous marriage) 혼인의 상대가 친가, 외가 모두 가까운 친척인 결혼을 말한다. 그림의 1st Cousins는 사촌, 2nd Cousins는 육촌을 의미한다. inbred level은 근친도 정도로 높을수록 유전병 등의 발현 확률이 높다. 3촌 간 근친혼은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왕가가 가장 유명한데, 펠리페 1세 이후 단절까지 무려 3번이나 일어났다.
✵ 예썰 둘. 시녀들의 주인공을 찾는 비밀의 열쇠?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 스페인),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Infanta Margarita Teresa in a White Dress)’, 1656년경, 캔버스에 유화, 105.0×88.0㎝, 빈미술사박물관
그림 속 ‘거울’과 ‘빨간 십자가’의 의미! 시녀들의 주인공이 작은 ‘거울’ 안에 그려진 펠리페 4세 국왕 부부라는 주장도 있다. 그 근거는 시녀들 속 벨라스케스 앞에 놓인 캔버스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가려진 캔버스에는 국왕 부부가 그려지고 있고, 캔버스의 그림은 뒤에 있는 거울에 비쳤다는 것. 시녀들 그림 한가운데에 있는 마르가리타 공주는 그저 부모의 초상화 작업을 보러 온 구경꾼일 뿐이라는 말이다. 만약 펠리페 4세가 시녀들의 주인공이라면, 화가 벨라스케스는 왜 왕을 작은 거울 안에 그렸을까. 또한 펠리페 4세는 이 그림을 마음에 들어 했을까? 반면, 국왕 부부와 달리 화가인 벨라스케스 자신은 그림에서 가장 크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눈에 띄는 건 그의 가슴팍에 그려진 빨간 십자가! 이 문장은 귀족만 들어갈 수 있다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상징이다. 벨라스케스는 순수한 귀족 출신은 아니었지만, 시녀들을 완성하고 3년이 지난 후 기사단에 입단한다. 그렇다면 시녀들이 처음 그려질 당시에는 십자가가 없었다는 의미인데…. 시녀들이 완성된 후에 뒤늦게 추가된 빨간 십자가가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빛과 어둠의 대비에 능한 벨라스케스의 그림답게 창문을 통해 햇빛이 스며들어 방을 비추며 치밀한 원근법과 세밀한 묘사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해석을 남기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다.
그림 속에는 11명의 등장인물이 있다. 벨라스케스는 사실화로 디테일하게 그림을 그렸고 그림속 인물들은 실존인물들이다. 그림 중앙에는 5세의 어린 공주와 시녀 두 명이 있고 오른편 아래에는 두 난쟁이가 있다. 그 시대의 왕실초상화에서는 왕족들의 고귀함과 품위 있는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나타내고자 난쟁이들을 종종 등장시키기도 하였다 한다.
화면의 왼쪽에는 거대한 캔버스와 그 옆에 화가가 서 있다. 공주의 뒤쪽으로 보이는 두명의 궁인은 왕비의 시종으로 추정되며 그림의 후경 열려진 문으로 왕비의 경호원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들어서며 방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문 바로 왼쪽 거울에는 펠리페 4세 부부의 모습이 비치고 있다. 이들 중 이 그림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림의 후경에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문 옆에 거울을 통해 캔버스 너머에 또다른 공간이 있음을 보여준다. 캔버스를 중심으로 캔버스 앞의 공간과 빛이 비치는 뒤의 공간으로 공간이 확장되면서 그림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으며 주인공이 달라질 수 있다.
화가의 지위가 낮았던 유럽사회에서 왕의 가족들이 화가의 방(벨라스케스의 방은 펠리페4세가 죽은 아들의 방을 화실로 내어 주었다. 왕이 얼마나 벨라스케스를 총애하였는 지 알 수 있다)을 직접 방문한 것을 그려 왕과의 친밀함을 부각시키며 화가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화가로서의 자신감과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벨라스케스의 가슴에 그려진 십자가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귀족표시문양이며 그림을 완성하고 2년 뒤 그가 죽고 난 다음 펠리페4세에 의해 그려 넣어졌다. 펠리페4세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기 때문에 이 문양은 펠리페4세가 직접 그렸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화가는 천장까지 닿을 듯한 거대한 캔버스에 국왕부부를 그리고 있다. 즉 국왕부부는 그림의 모델로 이 그림의 바깥인 관람자측에 서 있어 거울에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국왕부부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방에 공주가 시녀들을 데리고 놀러 온 장면을 그렸다고도 해석을 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관람자측의 국왕부부 뒤쪽에도 거울이 있어 그 거울에 비친 공주와 하인들, 그리고 국왕부부의 초상화를 그리는 자신의 모습까지 그린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반면 국왕부부는 실제 그 자리에 없고 거울에 비친 것은 캔버스에 그린 그림이라는 연구도 있다.
이렇다보니 다양한 제목이 붙여졌으며 많은 화가들이 패러디하기도 하였다. 피카소가 그 대표적 화가로 '시녀들'을 연작으로 작업하기도 하였다.
미셸 푸코는 문화인류학적으로 보편에 대해 사유하는 철학자이다. 당연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인간언어의 본질로서 당연한 것은 서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며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인식되지 않는 무의식적인 공식인 것으로 본다.
보편성은 특정시대 특정인들에 의해 구성된 것에 불과 한 것으로 각 사회마다 각 시대마다 다 다르며 보편성을 고정시켜 버리면 변화시키려는 것을 막아버리므로, 변화하려면 보편성을 파괴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푸코는 인간과학이라고 불리는 학문이 선포한, 인간을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진리 선언이 얼마나 부당하고 오류에 찬 것인가를 정밀하게 파헤친 그의 저서 '말과 사물(부재:인간과학에 대한 고고학)'의 첫장에 스페인 바로크 시대의 대표화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18페이지에 걸쳐 해석 해 놓았다.
벨라스케스는 이 작품 하나의 화면에 모델, 화가, 관객까지 다 담아내려했다. 하지만 누가 주인공이고 모델인지 알 수가 없다. 푸코는 이 그림에서 '인간 주체의 부재'를 보았다. 화면 속 9명의 인물들이 바라보고 있는 왕과 왕비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로 등장하면서 화면 속에 그려진 인물들 중 가장 작고 희미하게 나타난다.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의 자리에 왕과 왕비를 자리시킴으로서 거울속에서도 관람자의 자리에서도 관객은 배제되어 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 또한 화가로서 드러나는 것은 그리기를 그만 두었을 때이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왼쪽 캔버스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즉 화가로서의 주체를 지워야만 자신의 그림에 드러나는 것이다.
그림 밖의 관찰자들인 공주와 시녀들 역시 그림에 재현되면서 관찰자의 자리에서는 사라진다. 벨라스케스는 거울의 기묘한 역할을 통해 모든 시선을 벗어나 그 바깥에 머무는 것까지 나타낸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이중적인 연결이다. 화가는 화폭에 모든 것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주체는 사라진다. 사라져야 만이 나타내고자 한 것이 드러난다. 그러면서 거울 옆 현관에 막 발을 들여 놓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뒤를 이어 또 누가 들어올 지도 모른다. 여기서 푸코는 모든 것을 나타내고자 했던 고전시대에도 주체의 생략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즉 정신적인 것 추상적인 형식들 마저 나타낸다. 하지만 나타내고자하는 주체는 사라진다.
인간과학은 르네상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보편적인 학문이 아니라 19세기에 형성된 근대적 에피스테메의 손산에 불과하다. 적어도 르네상스와 고전 시대에 인간은 독자적이고 고유한 분석의 대상이 아니었고 오히려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사성 체계의 부분으로, 고전시대에는 분류와 질서 체계의 부분으로만 존재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지식의 중심으로 설정하는 근대적 에피스테메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학적 잠"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고는 19세기에 형성된 근대적 에피스테메(특정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지는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된 인식의 테두리)의 소산인 것으로 근대적 에피스테메가 다른 에피스테메로 대체되는 변환이 도래하게 되면 근대 인간과학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정신분석학, 문화인류학, 구조언어학 등의 학문들은 인간의 의식적 행위 너머에 존재하는 무의식적 '구조'를 공통적으로 다루는 것들로, 곧 주체적 의식의 소유자로서 인간의 존재를 부정했다.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중에서 - 하상복
16세기 유럽 문화라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와 지리적으로 제한 된 범위로 국한한다고 해도 인간이 최근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물과 사물의 질서에 관한 지식, 동일성, 차이, 특성, 등가성, 낱말에 관한 지식에 영향을 미친 모든 변화들, 즉 동일자의 심청적 역사에 관한 모든 국면들 중에서 150년 전에 시작되어 현재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 국면만이 인간의 형상을 출현하게 했다. 인간은 우리의 고고학적 사유가 쉽게 밝힐 수 있는 최근의 발명품이다. 아마도 고고학은 다가올 인간의 종말에 대해서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말과 사물-부재:인간과학에 대한 고고학 / 미셸 푸코>
✵ 예썰 셋. 시녀들은 모두를 위한 그림?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난쟁이의 초상화(The Buffoon El Primo)’, Prado Museum
중세 시대부터 유럽 왕족들은 궁정에서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처럼, 난쟁이를 두는 것이 인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궁정화가인 벨라스케스에게 난쟁이의 초상화 연작을 그리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프라도에 전시되어 있는 벨라스케스의 난쟁이 초상화를 보고 있으면 남 다른 포스가 느껴진다. 조물주가 말하는 난쟁이는 누구일까...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광대로 알려진 파블로를 그림 초상’a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시녀들(Las Meninas)’(1656)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시녀들(Las Meninas)’(1656)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화’, 1650년
신분차별 없이 있는 그대로를 그려낸 화가 벨라스케스 시녀들에는 왕가 사람들 외에도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바로 궁중광대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광대는 다른 화가들이 그린 것과 달랐다. 당시 여러 유럽왕실에는 왜소증인 광대를 마치 왕실의 장신구처럼 그리는 전통이 있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이 틀에서 벗어나 광대를 하나의 인격체로 그렸다. 신체적 특징이 부각되지 않게 앉은 자세를 그렸고, 얼굴과 시선에 집중해 그들의 개성이 드러나도록 표현한 것이다. 약자를 동등한 피사체로 그렸던 벨라스케스의 특징은 다른 그림에도 나타난다. 왕과 같이 당당한 자세를 하고 있는 초상화 속 한 남자. 사실 이 남자의 신분은 노예로, 벨라스케스는 그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주기까지 한다. 신분의 높고 낮음이 극에 달했던 절대왕정의 시대, 다양한 신분의 사람이 등장하는 시녀들을 통해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리고자 했던 인간상을 알아본다.
피터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은하수의 기원(The origin of the Milky way)', 1636-1639년
-역사, 신화, 종교를 주제로 한 회화
"저는 아직 초상화를 제대로 그린 화가를 본 적이 없습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디에고 벨라스케스, '계란을 부치는 노파', 1618년, 캔버스에 유화, 100.5x119.5cm
후안 데 파레하(Juan de Pareja), '성 마테오의 소명', 1661년
"내가 뛰어넘고 싶은 유일한 화가"
-파블로 피카소
✺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 초상화
벨라스케스의 초상화들을 보고 있자면 인물 내면의 감정 묘사가 참으로 뛰어나다. 빨려 들어갈 거 같다. 그 묘사가 단지 멋있는 초상화 그 이상의 우아하고 아주 품격 있는 인간의 고귀함을 드러내 주고 있다는 점이다. 벨라스케의 작품은 그 어떤 화가 보다 한마디로 품위가 있다. 귀족적인 세련됨과 화려함에서 전해지는 품위를 넘어 인간 존중에서 우러나오는 품위의 작품이다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1599~1660)는 스페인의 화가이다. 대개 디에고 벨라스케스로 불린다. 바로크 시대 펠리페 4세(Felipe IV) 궁정을 주도하던 화가였으며 초상화에 유능한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1629년에서 1631년의 1년 반동안 미술 공부와 여행을 위해 이탈리아에서 살았다. 1649년 그는 다시 이태리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스페인 왕족 중 다수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유명한 유럽 의원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을 그렸다. 그 작품의 절정은 그의 걸작 중의 걸작인 '시녀들(Las Meninas)'(1656)이다.
19세기의 초반 동안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다른 모든 인상주의 화가들과 사실주의 화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마네 또한 그들 중 한 명이다.
✵ 어린시절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세비야에서 1599년 6월 6일 태어나 세례를 받았다. 그는 포르투갈계 유태인 출신의 변호사였던 아버지 후안 로드리게스 데 실비아와 스페인의 하급귀족(Hidalgo) 출신인 헤로니마 벨라스케즈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페인에서는 어머니의 혈통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장남이 어머니의 성을 함께 쓰도록 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부모로부터 신을 경외할 것과 유능한 직업을 갖도록 교육 받았으며 특별히 언어학과 철학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어렸을 적부터 미술에 대한 재능을 보였고 이탈리아의 화풍을 거부했던 프란시스코 데 에레라(Francisco de Herrera) 아래서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다. 벨라스케즈는 1년 동안 그와 함께 공부했으며 아마도 어린 벨라스케스는 에레라로부터 긴 털로 된 붓을 쓰는 법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12살이 되던 해 첫 스승을 떠나면서 벨라스케스는 세비야의 예술가이자 교사였던 프란시스코 파체코 아래서 견습생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파체코의 교실에 5년 동안 공부하였고 그곳에서 세비야의 화풍과 비례와 원근법 등에 대해 배웠다.
✵ 마드리드로
디에고 벨라스케스, '동방박사의 경배’, 1619년, 캔버스에 유화, 204x126.5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1620년대 초 세비야에서 그는 서서히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1618년 그는 스승이었던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딸인 후안나 파체코(Juana Pacheco 1602년 6월 1일-1660년 8월 10일)와 결혼하였다. 그 즈음에 그는 두 딸을 낳은 것으로 보이는데 두 딸이 알려진 바로는 유일한 그의 혈육이다. 막내였던 이그나시아 데 실비아 벨라스케스 이 파체코(Ignacia de Silva Velázquez y Pacheco)는 어려서 죽고 말았고 맏딸이었던 프랑시스카 데 실비아 발레스케스 이 파체코(Francisca de Silva Velázquez y Pacheco, 1619-1658)는 1633년 8월 21일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교회의 화가였던 후안 바우티스타 마르티네스 델 마소(Juan Bautista Martínez del Mazo)와 결혼하였다. 딸이 결혼하던 즈음에 벨라스케스는 그의 걸작들을 그렸다. 동방박사의 경배(스페인어: TAdoración de los ReyesThe Adoration of the Magi)에서는 성스러운 배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 마드리드와 펠리페 4세
벨라스케스는 1622년 4월 초에 왕의 사제였던 후안 데 폰세카의 추천서를 받고 마드리드로 향한다. 파체코는 벨라스케스가 시인 공고라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였다. 그는 월계수 왕관을 쓴 공고라를 그렸는데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 이후에 그의 그림이 다시 칠해졌다.
1622년 12월 왕이 가장 좋아하던 궁정 화가인 로드리고 데 비얀드란도가 죽게 된다. 이에 돈 후안 데 폰세카(Don Juan de Fonseca)가 벨라스케스를 궁정으로 오도록 명령하였다. 폰세카는 벨라스케스에게 50더컷(2005년 유로화 기준 2000유로)를 주었고 젊은 화가가 그의 집에 함께 머물도록 했다. 그림이 완성되자 폰세카의 초상화는 왕궁에 걸리게 된다. 이후 왕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1623년 8월 16일 펠리페 4세는 그의 앞에 앉아있었다. 하루 만에 완성된 초상화는 단지 두상 부분을 그린 것 뿐이었지만 왕과 다른 사람들 모두 그의 그림에 만족하였다. 그중 한 사람이었던 올리바레스(Olivares)는 벨라스케스의 가족 모두 마드리드로 이사할 것을 명했다. 조건은 다른 어떤 화가도 왕을 그릴 수 없다는 것과 모든 그림이 궁정에 보관되리라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1624년 그는 왕으로부터 300두카트를 받고 마드리드로 이사온다. 이곳은 그가 죽기 전까지 머물던 장소가 된다.
말을 탄 왕의 모습이 1623년 그려졌다. 당시 벨라스케스는 매달 20더컷의 월급을 받았으며 의료비, 집세와 다른 기타 그림에 대한 수입을 보장받았다. 이 그림은 펠리페 4세가 산책하던 곳에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프라도 박물관에 1670년, 1671년 그려진 벨라스케스의 왕을 그린 초상화가 남아 있다. 그의 그림은 스페인의 화풍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펠리페 2세를 그린 네덜란드 출신 화가 안토니오 모르를 상시시킨다. 체감이 아주 잘 드러나게 묘사되었다. 같은 해 훗날 찰스 1세가 된 웨일스 공이 스페인 궁정을 방문하였고 벨라스케스가 왕자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하지만 이 그림 또한 사라졌다.
1628년 루벤스의 권고로 로마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베네치아파의 영향을 받아 빛의 효과를 표현하는 절묘한 기법을 습득하였다. 정확한 사실적 묘사와 섬세한 색채를 바탕으로 한 인상주의적 경향이 특색이다. 대표 작품으로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 <시녀들> <주정뱅이들>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 <블레더의 개성(開城)> 등이 있다.
✵ 대표작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마리아의 대관식’, 1645년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불카누스의 대장간(The Forge of Vulcan)’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사슴 머리(Head of a Deer)'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실잣는 사람들(The Spinners, or the Fable of Arachne)
브레다 성의 항복(The Surrender of Breda) 왕의 별궁의 ‘여러 왕국의 사이’라는 큰 홀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진 전승화(戰勝畵). 1625년, 네덜란드 남부의 요새 브레다에 대한 스페인군의 승리를 기념하여 제작한 것으로, 패배한 브레다 수비대 지휘관 유스티누스 (오라녜 공 빌럼 1세의 서자)가 승자인 스페인측의 총사령관 암브로시오 스피놀라에게 성문의 열쇠를 넘겨주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런 종류의 전승화에서는 패군의 장군은 지면에 무릎을 꿇고 승자는 그것을 말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가 보통이지만, 이‘브레다 성의 항복’은 패자 유스티누스와 승자 스피놀라는 같은 지면에서 대등한 위치에 서있다. 온화한 표정인 스피놀라는, 마치 오래 사귄 친구를 대하듯이 패자 유스티누스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 스피놀라의 옆에 크게 그려진 말은, 그가 패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일부러 말에서 내린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 같은 승자 쪽의 관대함을 이중 삼중으로 강조한 표현은 패자의 명예있는 철퇴를 용서한 스페인의 기사도정신의 승리를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도 말해지고 있다.
✵ 교황 인노첸시오 (이노센트) 10세(Portrait of Pope Innocent X) 1649년, 벨라스케스는 2번째로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 로마에 2년 정도 머무르게 된다. 이 사이에 그려진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은 가톨릭 최고 위치에 있는 성직자의 초상이라기보다는, 신경질적이며 교활한 한 사람의 노인의 초상처럼 묘사되어 있다. 국왕, 교황에서 익살꾼까지 어떤 모델도 냉철하게 바라보며, 인물의 내면까지 표현하는 필력은 벨라스케스의 장점이다. 후에, 프랜시스 베이컨이 이 초상화를 모티브로 한, 하나의 작품을 제작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비너스의 단장(The Toilet of Venus)’, 1647-1651년경, 캔버스에 유화, 177x122.5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 비너스의 단장(Rokeby Venus) 위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가톨릭의 전통이 강한 당시의 스페인에서는 드문 벌거벗은 여자 그림이다. 1914년, 폭한에 의해 등 부분 에서부터 엉덩이 부분까지 걸쳐서 7군데가 나이프로 손상을 입었다. 현재도 희미하게 복원의 흔적이 보인다.
✵ 시녀들(Las Meninas)
펠리페 4세의 왕녀 마르가리타를 중심으로 시녀, 당시의 궁전에서 일하고 있던 소녀 등이 그려져 있고, 화면이 향해있는 왼쪽에는 거대한 캔버스 앞에서 제작중인 벨라스케스 자신의 모습이 자랑스럽게 그려져 있다. 중심에 있는 왕녀 마르가리타를 포함해 그림 속의 인물은 감상하는 사람 쪽으로 시선이 향해져 있으며, 뭔가를 깨달아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춘듯한 포즈로 그려져 있다. 그‘뭔가’는 그림 속의 벽에 그려져있는 거울에 암시되어 있다. 이 작은 거울에 어렴풋이 비추는 것은 국왕 펠리페 4세 부부의 모습이며, 이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의 위치에 서서 그림 속의 인물들을 보고 있는 사람은 국왕이다.
이 그림은 국왕의 여름의 집무소 사실에 걸려져 있었다라고 전해진다. 그림속의 벨라스케스의 검은 의상의 가슴부분에는 붉은 십자문장이 그려져있다. 이것은 산티아고 기사단의 문장으로 벨라스케스가 국왕의 특별한 조치로 기사단에 가입하게 되어, 귀족에 봉해진 1659년(벨라스케스가 죽기 일 년 전)에 덧붙여 그려진 것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이 그려진 1928년 스페인 50페세타 지폐의 도안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 [13회] 누구를 위하여 붓을 들었나 – 벨라스케스 '시녀들', Daum·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