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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줄 알고 알리라
본문: 시편 100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93편부터 우리는 여호와의 통치(다스리심)에 대한 일련의 시편을 살펴봤다. 93편은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강력한 선포로 시작하여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찬양했다. 94편은 그 하나님께서 세계를 심판하시고 또한 심판하실 것에 대한 확신을 표현했다. 특히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과 귀를 만드신 분이시라는 사실이 그 확신의 기초에 있었다.
95편은 이런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반응으로서 예배를 드릴 때 어떤 태도가 수반되는지를 강조했다. 두려움과 떨림이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96편은 그런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과 권능을 돌려야 하며, 그것은 일부의 사람들만 해야할 일이 아니라 ‘온 땅’이 해야할 일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모두가 이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97편은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결국 누군가에게는 심판의 소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구원의 소식이 됨을 말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악을 미워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자들이 결국은 구원을 경험할 자들이다.
98편은 특히 왕이신 하나님의 구원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실 뿐 아니라 구원을 알게 하시고 나타내셔서 세상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하신다. 그리고 시편 99편은 다시 한번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고 선포하면서 그 다스리심이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음을 강조한다. 여호와는 다르시기(거룩)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시편인 100편은 이 모든 것에 대한 결론이자 궁극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감사와 찬양의 예배다. 사실 이미 여러번 나왔던 내용이기도 하다. 이전의 시편(특히 95편)에서 사용되었던 표현과 개념이 시편 100편에서 다시 나온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사실을 말하면서 그에 대한 적용을 일부러 말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럽지는 않기 때문에 이전의 시편에서도 이미 이 결론적 적용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편 100편은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핵심 정리라고 할 수 있다.
(본문)
이 시편의 표제인 ‘감사의 시’는 시편에서 여기에서만 사용된 표현이다. ‘감사’는 99:3에서 설명했었던 ‘찬송하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야다’의 명사형인 ‘토다’를 번역한 것이다. 어떤 사실에 대한 인정이나 공적인 선포를 강조하는 단어로서 숨김 없이 말하다는 의미로 ‘고백하다’의 의미가 있다. 명사로서는 ‘감사제’나 ‘감사제물’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런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이 시편이 당연히 사용되었겠지만, 이 시편의 내용을 보면 그보다 더 광범위하고 제한 없이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고(인정) 그로 인해 기뻐하며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서 알리는 것이 이 시편의 내용이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얼마든지 사용되었을 것이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시편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내용도 길지 않고 복잡하지도 않다. 굳이 구성을 나눠보자면 1-3절과 4-5절로 나눠볼 수 있고, 각각은 예배로의 초청과 이유가 언급되어 있다. 제목을 달자면 1-3절은 기쁨의 예배로의 초청이고 4-5절은 감사의 예배로의 초청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내용상 차이가 강조되지는 않는다. 이 시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참되고 좋으신 여호와를 함께 예배하자고 초청하는 하나의 초대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초대에는 총 7개의 명령이 있다: “부를지어다”(1절), “섬기며”, “나아갈지어다”(2절), “알지어다”(3절), “들어가며”, “감사하며”, “송축할지어다”(4절). 이 명령 중에서 가운데 있는(3절) “알지어다”가 다른 명령들의 기초가 된다. 즉, 하나님을 알고, 그렇게 아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 이 시편의 핵심이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 바탕을 둔 올바른 예배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린다.
기쁨의 예배로의 초청(1-3절)
A. 초청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1절)
라틴어 성경에서 ‘유빌라테’(기뻐하라, 환호하라)로 시작되어 시편 100편의 별칭이 되기도 했다. 1절의 분위기는 시편 95:1-2와 같고 표현은 96:1; 98:4과 같다. 이 첫째 명령은 온 땅이, 즉 모든 사람들이, 좀 더 확대하면 모든 피조물이 여호와께 큰 소리를 내야한다고 강력하게 선언한다.
큰 소리는 의미 없는 소음이거나 혹은 반대하는 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소리는 “즐거운” 소리다.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하는 소리다. 98:6이 말하는 것처럼 나팔과 호각 소리로 왕이신 여호와를 맞이하며 그 왕권을 인정하고 그로 인해 환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마땅한 것이기도 하고 또한 지금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주어지는 명령이자 초청이기도 하다. 2절에도 비슷한 초청이 이어진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2절)
둘째 명령은 여호와를 섬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어떤 일로) 섬긴다”는 식의 표현은 자주 사용해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표현은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해서 “저 교회 다녀요”라고는 말해도 “저는 하나님을 섬겨요”라고 말하는 일도 드물다. 사실 ‘섬긴다’는 말 자체가 본래의 의미로 사용되는 일은 오늘날에는 거의 없다. 과거에는 부모님을 섬긴다, 선생님을 섬긴다, 웃어른을 섬긴다, 상사를 섬긴다는 말들을 사용했지만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다.
다른 이유들이 있을 수 있지만, 아마도 가장 큰 것은 사회에서 그런 수직적인 질서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은 누가 누구보다 높아서 섬김을 받거나 혹은 반대로 섬기거나 하는 개념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우리도 성경적인 개념에서의 ‘섬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게 된 것 같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그냥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아서 한다는 말을 의미하기 전에, 하나님이 왕이시고 나는 하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나는 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장면 중 하나는 여호수아 24장이다. 여호수아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온 이스라엘 지파를 모으고 이렇게 도전했다.
수 24:14–15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즉,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다는 의미이고 삶에 있어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여호와를 섬기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다 치워버려야 한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 두는 것,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종이 주인을 위해 살 듯,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를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강제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가끔 그렇게 누군가를 힘으로 굴복 시켜서 자신을 섬기게 만드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그런 경우도 진정한 섬김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겉보기에는 종이 된 것 같지만 그 마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도 여호와를 섬기라고 말하면서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말했다. 겉으로 보이는 무언가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모세도 비슷하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고 말했었다(신 10:12). 시편 기자가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의미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죄악된 본성에 반대되는 일이지만, 그것을 기쁨으로, 진실함으로, 사랑으로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섬김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는 가끔 그렇게 주인을 섬긴 종들이 주인을 위해 죽으면서 “주인님을 섬길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라는 식의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살기에 하나님을 위해 죽는 것도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에서 ‘섬기다’는 단어와 ‘예배하다’는 단어는 큰 차이 없이 교환되어 사용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섬김은 삶과 좀 더 관계되어 있고 예배는 예식과 관계되어 있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앞서 말한 그런 섬김의 태도가 예배를 통해 드러난다. 반대로 예배는 더욱 그런 섬김의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래서 때로는 섬김이 예배를 의미하기도 하고 예배가 섬김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라”는 이 명령은 시편 100편의 문맥에서는 참된 예배에 대한 명령에 더 가깝겠지만, 시편기자는 “섬기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예배자의 삶이 어떠해야하는지도 놓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기쁨으로 여호와 앞에 나와서 예배하는 자는 또한 그런 삶을 사는 자이기도 한 것이다.
셋째 명령은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공적인 예배에 대한 명령을 분명히 한다고 할 수 있다. 여호와 앞에 나아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성소로 나아가서 예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2절에 기록된 예배에 대한 세 명령에는 우리의 각 지체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선포하는 즐거운 찬송에는 우리의 입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의 섬김에는 우리의 손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쁜 노래로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아갈 때는 우리의 발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는 우리 마음에는 기쁨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명령이자 초대다. 시편 기자는 “온 땅”에게 이렇게 해야할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그렇게 “온 땅”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편 기자와 함께 초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우리는 세상에게,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여호와께 즐겁게 예배하라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나에게 와서 정말 좋은 약이 있는데 먹어 보라고 권한다고 가정해 보자. 먹기만 하면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체중이 정상을 찾아가고 겨울이든 여름이든 감기 한번 걸리지 않는다고 그 사람은 주장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심각한 비만에 연신 기침을 하며 가래를 뱉어내고 있다면 그 사람의 말을 듣겠는가.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뭐라고 말하든, 그 약은 그런 효능이 없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약이 진짜 효능이 있다면 그 사람이 먼저 먹었을 것이고, 그 효과를 보았을 것이다.
오늘 본문의 1-2절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혹시 그와 같지 않은지 점검해 봐야 한다. 나는 별로 하나님을 왕으로서 인정하고 있지도 않고, 왕으로서 섬기고 있지도 않고, 왕으로서 예배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내가 원하는대로 살고 주일에는 끌려나온 사람처럼 예배당에 앉아 있다가 “이상으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라는 말만 기다린 사람처럼 끝나자마다 예배당을 빠져나간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즐거운 찬송을 부르고 기쁨으로 섬기고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 내가 그러한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어쩌면 나는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한 적이 없을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 나의 어떤 죄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내가 짓눌려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하다보면 내가 지금 ‘기뻐하는 것’이 괜찮은가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한다. 1-2절의 명령들도 다시 주목해서 보라. 이 명령들에 어떤 조건이나 상황이 주어져있지 않다. 상황이 좋을 때, 기뻐할 수 있을 때,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고 그 앞에 나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가 기뻐해야할 것을 말한다. 기뻐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할 때 기쁨이 있는 것이다. 이 명령들은 상황에 관계없이 주어진 명령들이다. 3절에서 말하는 이 명령들의 이유를 보면 이 사실이 더 분명해 진다.
B. 이유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3절)
개역개정이 왜 “우리 하나님”이라고 번역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95:7의 영향일지, 맥락 상 임의로 추가한 것인지 모르겠다. 다른 대부분의 번역본들을 보면 모두 “우리”가 빠져있다. 원문에 없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온 땅이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 이유로서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을 말했을 뿐이다. 즉, 여호와만이 참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인정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기쁨으로 예배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어떤 감정이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이고 올바른 지식이 올바른 예배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은 어찌됐든 무엇을 예배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라는 이름의 예배가 될 수도 있고 혹은 다른 형태의 예배가 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다들 무언가를 예배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예배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예배하냐다.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예배하지 않는 모든 예배는 거짓 예배이고 헛된 예배이고 우상 숭배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 만이 참된 신이시기 때문이다.
온 땅에게 여호와를 예배하라고 할 때, 그들은 당연히 “왜”라고 반문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들에게 그렇게 말할 때, 그들은 전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너희 신이 좋으면 너희만 예배하면 되지 왜 내가 그렇게 해야하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혹은, 나도 너처럼 여호와를 예배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까지 예배해 온 이 신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지금도 이와 동일한 대답을 우리는 듣고 어쩌면 우리 속에서도 이런 마음이 생겨날 수도 있다.
그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답이 이것이다.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정해야 한다. 확신해야 한다. 따라서, 다른 누구 혹은 무엇도 하나님이 아니기에 그것을 하나님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그것을 섬기면 안된다. 예배하면 안된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목사, 스포츠 선수, 가수, 배우, 작가, 정치인이 하나님이 아니다. 자녀가 하나님이 아니고 부모님이 하나님이 아니다. 돈이 하나님이 아니다. 힘이 하나님이 아니다. 건강이 하나님이 아니다. 좋은 성적이나 대학이 하나님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아무리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도, 여호와가 하나님이시고 다른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만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이 예배의 명령에 대한 합당한 이유라면, 예배의 태도인 ‘기쁨’에 대한 명령에 합당한 이유는 이렇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절)
여기서 시편 기자는 일반적인 사실에서 점차 관계적이고 친밀한 사실을 언급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이고 특히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양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하나님의 창조하심 뿐 아니라 구원하심을 경험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저 왕이며 재판관이시기만 하다면, 하나님을 두려움 가운데 경외하는 예배를 드릴 수는 있겠지만, 기쁨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멀리 계신 하나님이 하시는 나와 관계 없어 보이는 일에 기뻐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앞선 시편들, 특히 98편과 99편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와 관계 없이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위해 스스로 낮추시는 분이시다.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것이 되어 주신다. 무엇에도 제한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소유격을 붙여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줄 알아야 하고, 그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신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라고 말할 때, 그 안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라. 많은 아버지, 어머니가 있지만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만이 중요하다. 많은 집이 중요한게 아니라 우리 집이 중요하다. 많은 교회가 있지만 우리 교회가 중요하다. 자칭 하나님인 것들이 세상에 많지만, 참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구원 받은 자들은 도마처럼 하나님을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윗처럼 나의 목자라고 부를 수 있다. 나의 반석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우리 생각의 순서는 이래야 한다. 우리가 그의 것인 것이 먼저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 먼저다. 이것을 잊어서 우리가 왕이신 하나님을 마치 나의 종처럼 끌어내려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스스로 낮추시는 분이시지 우리가 낮춰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높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것이 되어 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 보이셔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예배에 기쁨이 있는 이유다. 좋은 일이 있어서 기쁨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 놀라운 사실로 인해서 기쁨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과 관게없이 우리에게는 언제나 기쁨의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이 사실이 변하지 않는 한, 혹은 우리가 이 사실을 잊지 않는 한, 우리 예배에 기쁨이 사라질 수는 없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예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또한 세상 가운데 알리게 된다. 이것이 이어지는 4-5절의 내용이다.
감사의 예배로의 초청(4-5절)
A. 초청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4절)
여기 첫번째 명령은 “들어가며… 들어가서”다. 2절의 “나아갈지어다”와 같은 단어가 조금 다르게 번역된 것이다. 여기서는 “그의 문”과 “그의 궁정”이 언급되어서 더 명확하게 성소에 들어가서 예배할 것를 말한다.
시편 기자는 마치 성소에 들어가 예배하기 위해서는 감사와 찬송이라는 열쇠를 가지고 가야하는 것처럼 이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 열쇠를 가지지 않고는 그 문을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된다. 감사를 가지고 들어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찬송을 가지고 들어가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해야 한다.
감사는 지난 시간과 오늘 말씀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정하는 것, 고백하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말한 그리고 뒤에서 말할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렇게 알리는 것이 감사다. 여호와 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 만이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심을 알리는 것이다. 막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 구원을 언급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찬송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높여야 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특히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그렇게 할 것을 말하는데, 5절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속성)이 어떠한지를 말한다.
B. 이유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5절)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서 “선하심”을 언급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너무나 그 의미가 풍성한 단어다. 하지만 특히 사람들과 관련지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좋은 것을 의미한다. 삶에서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선하시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했던 사람들은 많다. 사실 모든 사람이 거기에 포함된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날 때, 기대와는 다른 상황을 갑자기 마주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 선하신가 의심한다. 그래도 이렇게는 하지 않으시겠지 생각했던 일이 현실이 될 때 그런 의심을 한다. 우리를 슬프게 하고 좌절하게 하는 일들을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 때로는 ‘악’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일도 허락하신다. 그럴 때 하나님이 정말 선하신지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이 부정된 적은 없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이유가 없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게 편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삶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더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신 사랑은 변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결혼 서약을 한 남편과 아내는 그 서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노력하는 것이다. 완벽할 수 없지만, 그 노력 자체가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신다. 영원히 그렇게 하신다. 변함없이 그렇게 하신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신다. 그렇게 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제외한 누구도 이렇게 할 수 없다. 우리에게 누구도 이렇게 할 수 없다.
그러니, 그런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감사함과 찬송함으로 나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것을 말하고 알리고 싶어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앨런 로스는 이 구절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온전히 믿을 수 있는 분이다. 그분은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시고, 자신이 세운 계획을 이루시며, 절대 실패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충분히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로스, 211).
우리가 이 사실을 충분히 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영원한 사랑을 어떻게 충분히 말하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영원히 감사하는 것이다. 하늘나라 가서 그렇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영원까지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유대 랍비들의 성경 주석이라고 할 수 있는 미드라쉬 문헌에는 이런 말이 있다. “언젠가 모든 제사가 그칠 때, 감사제는 예외가 될 것이다. 그것은 절대 그치지 않는다. 모든 기도가 그칠 때, 감사의 기도는 예외가 될 것이다. 그것은 절대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치지 않는 감사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우리만 그렇게 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는 또한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우리의 예배가 그런 전도와 선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먼저 하나님을 안 자들의 특권이며 책임이다.
도전
결국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우리가 아는 하나님을 알린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우리가 삶으로 드리는 예배와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결국 예배이고 그 예배가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먼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성경은 지식적인 앎과 경험적인 앎도 딱히 구분하지 않는다. 둘 다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은 올바른 지식이 없으면 잘못된 경험이 될 수 있고, 지식만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피상적인 것이 되기 쉽다. 따라서 둘 다를 추구해야 한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바로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할 수 있다.
그런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신다. 우리는 그런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우리 주변에 소개한다. 나의 부모에게, 자녀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혹은 아주 모르는 사람에게도 소개한다. 우리의 참된 감사와 찬송을 통해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신 줄 알고 있는가. 하나님이 유일한 왕이심을 알고 있는가. 그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에 우리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며 그분께서 기르시는 양임을 알고 있는가. 그 하나님이 선하셔서 영원히 변함없이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시는 분이심을 알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를 통해 그 하나님을 알리자.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