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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서계 선생 생전모습 및 생애
박세당(朴世堂) : 1629∼1703, 호는 서계(西溪). 조선조 실학파 학자.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博物學)의 학풍을 이룩하였으며 「색경」이라는 농사서적을 저술하였음. 유교경전 중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서경에 대한 주해서를 집필한 「사변록」을 저술, 주자의 사상과 대립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낙인찍혀 삭직, 유배를 가기도 했음. 저서로는 《사변록(思辨錄)》, 《색경(穡經)》, 《서계집(西溪集)》 등이 있음.
박세당(朴世堂)은 조선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수)·서계초수(西溪樵수)·서계(西溪) 등이다. 할아버지는 좌참찬 동선(東善)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 정(炡)이다. 어머니는 관찰사 윤안국(尹安國)의 딸인 양주 윤씨(楊州 尹氏)이다. 그는 1629년 8월 19일 아버지의 임지인 전라도 남원부 관아에서 출생하였다. 4살 때 아버지가 병사하였고 7살 때에는 큰 형인 세규(世圭)마저 요절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뒤이어 병자호란이 발생하면서 조모·모친·두 형과 함께 원주·청풍·안동을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청주·천안 등지로 옮겨다니며 곤궁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리하여 10살이 넘어서야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3살에 고모부인 정사무(鄭思武)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학문을 연마하였다. 1660년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제수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뒤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병조정랑·지평·홍문관교리·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함경북도병마평사 등의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일시 다녀왔지만 당쟁을 혐오하며 관직을 그만두고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났다. 한때 통진현감으로 나가 백성들의 구휼에 힘쓰기도 했으나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두 아들을 잃자 일체의 출사 권유를 물리치고 석천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몰두하였다. 1702년에는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에 송시열(宋時烈)을 낮추었다 하여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탄받기도 하였다. 송시열에 대한 비판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의 학문은 당시 통치이념이었던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의 학문 태도에서도 비껴 서있었다. 그는 당시의 학자들이 꺼려하였던 도가사상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노장서(老莊書)에 심취하는 자유로운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 재임시에는 시무책을 올려 양반 지배세력의 당쟁과 무위도식을 고발하고 정치·사회제도의 개혁과 민생 안정을 위한 요역·병역의 균등화를 주장하였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중국대륙의 세력변동에 주체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실리주의를 펼칠 것을 내세웠다. 숭명배청(崇明排淸) 의식이 지배했던 당시 사회에서 그는 민족의 현실적 생존과 안위를 위해 명분을 버리고 민족자존의 실리를 추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사서(四書) 는 물론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 장자(莊子) 의 연구를 통해 주자학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또한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훼손된 공맹(孔孟)의 본뜻을 밝힌다는 입장에서 사변록(思辨錄) 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학문 태도로 인해 그는 주자학에 경도된 당시의 지배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비난을 받았다. 그는 소론파의 거두였던 윤증, 같은 반남 박씨인 박세채(朴世采),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南九萬) 등과 교유하였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의 제자를 키워냈다. 양주 석천동에 기거하며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던 그는 1703년 8월 21일 7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그의 학문과 행적에 대한 논란은 사후에도 계속되어 1722년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다음 해 이는 문정(文貞)으로 고쳐졌다. 그의 저서로는 서계선생집(西溪先生集) 과 대학 · 논어 · 중용 · 상서 등의 해설서인 사변록(思辨錄) , 도가에 대한 연구서인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 가 있으며, 편저로는 농서인 색경(穡經) 이 전한다.
박세당(朴世堂)
1629(인조 7)∼1703(숙종 29).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馬)·서계초수(西溪樵馬)·서계(西溪). 응천(應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참찬 동선(東善)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정(炡)이며, 어머니는 양주 윤씨(楊州尹氏)로 관찰사 안국(安國)의 딸이다.
[관직 활동]
4살 때 아버지가 죽고 편모 밑에서 원주·안동·청주·천안 등지를 전전하다가 13세에 비로소 고모부인 정사무(鄭思武)에게 수학하였다. 1660년(현종 1)에 증광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고, 그 뒤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병조정랑·지평·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함경북도병마평사(兵馬評事)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왔지만 당쟁에 혐오를 느낀 나머지 관료 생활을 포기하고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났다. 그 뒤 한때 통진현감이 되어 흉년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맏아들 태유(泰維)와 둘째 아들 태보(泰輔)를 잃자 여러 차례에 걸친 출사 권유에도 불구하고 석천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그 뒤 죽을 때까지 집의·사간·홍문관부제학·이조참의·호조참판·공조판서·우참찬·대사헌·한성부판윤·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의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702년(숙종 28)에는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 송시열(宋時烈)을 낮게 평가했다 해서 노론(老論)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탄되기도 하였다.
[사상 형성의 배경]
그의 학문과 사상은 성장기의 고난과 청·장년기의 관리 생활을 통한 개혁 의식, 그리고 당쟁의 와중에서 겪은 가족의 수난과 어려운 농촌에서 지낸 경험 등을 통해서 형성된 사회 현실관의 반영이라 하겠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보기 드문 민족적 시련과 정치적 불안정 및 민생의 곤궁이 매우 심하였다. 즉 병자호란의 국치와 당쟁의 격화로 말미암아 국력은 약화되고 민생이 도탄에 허덕이던 시기인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외의 현실을 직시하며 국가를 보위하고 사회 개혁을 통한 민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는 사상적 자주 의식을 토대로 해서 학문과 경륜을 펼쳤던 것이다.
그의 근본 사상에 대해서는 유학의 근본 정신을 추구했다는 견해가 있고, 주자학은 물론 유학 자체에 회의해 노장학(老莊學)으로 흐른 경향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학문의 근본 입장은 당시 통치 이념인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적 학문 태도에 회의적이었다고 보는 데는 이론이 없다.
그 만이 아니라, 17세기 우리 나라의 사상계는 국내외적 시련에 대한 극복을 위해 사상적 자주 의식이 제기되어 이의 수정과 사회적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입장도 주자학에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반성이 싹튼 것은 16세기에 비롯했지만, 주자학에 대한 정면 도전이 표면화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 때문에 주자학의 열렬한 신봉자들인 송시열 등은 주자학 비판자들을 사문난적이라 하며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이러한 배척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그와 윤휴(尹鑴)·윤증(尹拯) 등이었다.
이들은 주자학 비판에 있어서는 공통적이었지만 학문 연구의 입장은 달라 대략 세 방향을 띠었다. 첫째는 고대의 유학, 특히 한(漢)나라 때의 유학을 빌어 통치 이념을 수정하려는 윤휴와 같은 남인(南人)계통의 학파이고, 둘째는 명나라 때 왕양명(王陽明)의 유학을 도입해 채용해보려는 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등 양명학파(陽明學派)이며, 셋째는 노장 사상을 도입해 새로운 시각을 모색하려는 박세당 계통이었다.
[현실 인식과 개혁 의식]
박세당은 당시의 학자들이 꺼려한 도가 사상(道家思想)에 깊은 관심을 보여 스스로 노장서(老莊書)에 탐닉하면 되돌아올 줄 모르고 심취하게 된다고 고백할 정도이었다. 그가 이러한 학문 경향을 지니게 된 배경에는 젊었을 때 지녔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개혁적 사고 때문이었고, 또 백성의 생활 안정과 국가 보위에 있어서 차별을 본질로 하는 유가 사상(儒家思想)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해서 지방(海西地方)의 암행어사와 함경북도병마평사를 역임한 뒤, 홍문관수찬으로 있으면서 응구언소(應求言疏)를 올린 적이 있다. 그 내용은 양반 지배 세력의 당쟁과 착취로 비참한 경지에 이른 백성들의 생활 안정책과 무위도식하고 있는 사대부(士大夫)에 대한 고발이었다.
그는 요역(法役)과 병역의 균등화를 주장했고, 모든 정치·사회 제도가 문란하므로 개혁하지 않을 수 없고 모든 법률이 쇠퇴했으므로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국민 가운데 공사천민(公私賤民)이 6할, 사대부 양반이 2할, 평민이 2할인데, 사대부 양반은 8∼9할이 놀고 먹으니 이는 봉록(俸錄)만 받아먹는 나라의 커다란 좀〔亘〕이라고 하였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중국 대륙의 세력 변동에 주체적으로 적응하는 실리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는 고대 삼국 가운데 국력이 가장 미약했던 신라가 당나라에게 망하지 않은 원인이 외교 정책의 현실주의적 실리 추구에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고려말 정몽주(鄭夢周)와 자기의 선조 박상충(朴尙衷)에 관한 평가도 고려에 대한 충절보다는 원나라·명나라 교체의 국제적 변동에 대처하려는 대외 정책으로 신흥 명나라를 섬기고 원을 배척할 것을 주장한 실리주의자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시대 분위기가 숭명배청(崇明排淸)이 풍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족의 현실적 생존과 국가의 보위를 위해 국제 사회에서의 주체적 적응이란 입장에서 존명사대(尊明事大)의 명분을 버리고 민족 자존의 실리를 위한 친청정책(親淸政策)을 주장했던 것이다.
[사상과 학문적 특성]
대내외 정책에 대한 개혁 의식을 가졌던 그는 관직을 버린 뒤 ≪논어≫·≪맹자≫·≪대학≫·≪중용≫ 등 사서와 ≪도덕경 道德經≫ 및 장자(莊子)의 연구를 통해 주자학적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려는 학문적 지향을 취하였다.
그는 육경(六經)의 글은 그 생각이 깊고 취지가 심원(深遠)해 본 뜻을 흐트러뜨릴 수 없는 것인데, 후대의 유학자들이 훼손했으므로 이를 바로잡아 공맹(孔孟)의 본지(本旨)를 밝혀야 한다는 뜻에서 ≪사변록 思辨錄≫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자유분방하고 매우 독창적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유가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인(仁)에 대해, 공자가 말하는‘인’이란 인간과 동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 조화(自然調和)의 심정이 아니라 동물에 대한 인간 중심적인 사랑이며, 사람과 동물에 차별을 두지 않는 순수한 사랑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맹자의 인에 대하여도, 맹자의 차마 할 수 없는 심정인 불인지심(不忍之心)으로서의 ‘인’이란 도살장과 부엌을 멀리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고작일 뿐, 역시 살생을 배격하지 않는 잔인성을 그대로 말한 것이라고 꼬집는다. 또한, 맹자가 ‘왕도(王道)’란 민심을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했지만, 민심을 얻는 데만 뜻을 먼저 둔다면 이는 패자(覇者)의 행위이고 왕도는 아닐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는 주자가 제왕권체제(帝王權體制)를 강화하기 위해 설정한 모든 만물의 근원적 원인자(原因者)로서의 태극(太極)에 대한 이해에도 이의를 제기하였다. 주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현실적 차별이 이러한 현상에 앞선 원인자인 태극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해, 인간이 제왕권(帝王權)에 복종하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당연한 도리라고 보았다. 또 인간이 감각적 욕구를 추구하는 것은 인욕(人欲) 또는 인심(人心)으로서 악행(惡行)이라고 피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태극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함께 감각적 욕구를 작용시키는 감성(感性)도 인간의 불가피한 기능임을 지적하였다. 그는 도심(道心) 못지않게 인욕의 충족도 중요시했던 것이다. 이는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명분론보다도 의식주와 직결되는 실질적인 학문이 필요하다는 그의 실학사상을 나타낸 것이라 보겠다.
그는 도를 밝히는 것은 지식과 언어에 있지 않고 실천에 있으며, 백성들이 실질을 떠나서 허위의 비현실적인 가치관만을 배우게 되면 이는 다스리려 해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백성의 생활 가치를 신장시키는 것에 학문의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이단시되던 노장학까지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노장학도 본질 면에서 보면 세상을 바로잡는 길에 보탬이 되고 버릴 것이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도가 사상이 차별 사상이 아니고 민중 중심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인의 지배 욕구의 포기를 근본으로 하는 것이 ≪도덕경≫의 정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노자의 무위(無爲)란 일하지 않는 불사(不事)가 아니라, 사사로운 욕구에 얽매이지 않는 무욕(無欲)의 정치 태도라고 보았다. 장자의 무위자연도 자연을 벗 삼아 사는 것이 아니라 치자(治者)에게 과도한 지배 욕구를 버리고 백성들의 생활권을 신장시키는 데 힘쓸 것을 요청한 무욕의 뜻이라고 이해한 것이었다.
[교유 관계와 저작]
그는 스스로 무욕을 실천하는 생애를 보냈지만 정치와 사회 현실에 전연 무관심하지 않고, 비교적 혁신적 사고를 지녔던 소론파(少論派)와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그는 소론의 거두인 윤증을 비롯해 같은 반남 박씨로 곤궁할 때 도움을 준 박세채(朴世采),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을 비롯한 수십 인의 제자를 키우기도 하였다. 그의 학문과 행적에 대한 변론은 계속되어 그가 죽은 지 약 20년이 지난 1722년(경종 2)에야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다음해에 문정(文貞) 이라는 시호가 내려짐
저서로는 ≪서계선생집 西溪先生集≫과 ≪대학≫·≪중용≫·≪논어≫·≪상서≫·≪시경≫ 등의 해설서인 ≪사변록≫, 그리고 도가에 대한 연구서인 ≪신주도덕경 新註道德經≫ 1책과 ≪남화경주해산보 南華經註解刪補≫ 6책이 전한다. 편저로는 농서(農書)인 ≪색경 穡經≫이 전한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景宗實錄, 朝野輯要, 西溪集, 朴西溪와 反朱子學的 思想(李丙燾, 大東文化硏究 3, 1960), 朴世堂의 實學思想에 관한 硏究(尹絲淳, 亞細亞硏究 15-2, 1972), 西溪 朴世堂의 政治思想(金萬圭, 國學紀要 1, 1978).
<김만규>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서계박세당의 생애와 사상
본관은 반남(潘南),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 서계(西溪), 서계초수, 서계 전수, 시호는 문정이다. 좌참찬 동선(東善)의 손자이며, 이조참판 정炡)의 아들로 인조7년(1629)년 태어나 숙종 29년(1703)년에 75세로 생을 마쳤다.
4세 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원주, 안동, 청주, 천안 등지를 전전하다가, 14세 때 비로소 고모부인 정사무(鄭思武)에게 수학하였다. 현종1년(1660년) 32세 때에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정6품 성균관 전적에 제수 되었고,이어서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병조정랑,지평,홍문관 교리겸경연시독관, 함경북도 병마평사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지만 붕당정치에 혐오를 느낀 나머지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났다. 그 후 한때 통진현감이 되어 흉년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휼하는데 힘쓰기도 하였으나, 관리였던 맏아들 태유(泰維)가 격지 근무 중 병사하고, 둘째아들 태보(태보)가 인현왕후폐위를 반대하다 고문 끝에 진도로 유배도중 노량진에서 죽자, 여러 차례의 출사 권유에도 불구하고 석천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만 힘썼다.
그 후 사망할 때까지 집의,사간,홍문관부제학,이조참의,호조참판, 공조판서,대사헌,한성판윤,예조판서이조판서,우참찬 등이 주어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그의 생애 등을 통해서 형성된 사회현실관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곧 성장기의 고난과 장년기의 관리생활을 통한 개혁의식 그리고 붕당정치의 와중에서 겪은 가족의 수난과 어려운 농촌생활로 얻은 경험 등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보기 드문 민족적 시련과 정치적 불안정 및 민생의 곤궁이 매우 심하였던 시기였다. 정묘 및 병자호란의 국치와 붕당정치의 격화로 말미암아 국력은 약화되고 민생은 도탄에 허덕거리던 시기였다.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의 현실을 직시하여 국가보위와 사회개혁을 통한 민생구제를 목표로 삼아서 사상
적인 자주의식을 토대로 그의 학문과 경륜을 펼쳐 나갔다.
그의 학문의 근본입장은 중국 중심의 학문적 태도에 회의적 이어서 당시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주자학(朱子學)을 비판 하였다. 이 때문에 주자학의 열열한 신봉자였던 송시열 등은 주자학 비판자들을 교리에 어긋나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그가 이러한 학문적 경향을 지니게 된 데에는 젊었을 때 지녔던 그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개혁적 사고 때문이었다. 또 백성의 생활안정과 국가를 보위하는데 인간의 사회적 차별을 본질로 하는 유가사상 (儒家思想)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홍문관 재직 때 '응구언소(應求言疏)'를 임금께 올렸는데 그 내용은 양반 지배세력의 붕당정치로 인한 폐해와 그들의 착취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된 백성들의 생활안정책, 그리고 무위도식하고 있는 사대부들을 고발한 것이었다.
그는 요역(요役)과 병역의 균등화, 문란한 모든 정치사회제도의 개혁 및 낡고 쇠퇴한 법률을 현실에 맞게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당시 백성 가운데 공사천민(公私賤民)이 60%, 평민이 20% 사대부 양반이 20%인데 사대부 양반들은 80-90%가 놀고먹으니 이는 봉록(俸祿)만 받아먹는 나라의 좀도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대외정책에서는 중국대륙의 세력변동에 주체적으로 적응하는 실리주의를 주장하였다. 신라가 당(唐)나라에게 망하지 않은 원인은 외교 정책의 현실주의적 실리추구에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정몽주(鄭夢周) 나 자기 선조 박상충(朴尙衷)이 원(元)나라와 명(明)나라의 정권 교체기에 신흥 명나라를 섬기고 원나라를 배척하였던 실리주의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또 숭명배청(崇明排淸)이 풍미하던 시대였음 에도 민족의 생존과 국가보위를 위해 존명사대(尊明事大)의 명분을 버리고 민족자존의 실리를 추구해 친청정책(親淸政策)을 주장 하였다.
그가 숙종 28년(1702)에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을 때, 이경석이 청나라와 강화를 위해 굴욕적인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짓지 않을 수 없었던 불가피한 입장을 옹호한 것도 그와 같은 사상의 연장이다. 이로 인해 송시열(宋時烈)일파로 부터 완론자(緩論者)로 몰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대내외 정책에 대한 개혁의식을 가졌던 그는 관직을 버린 뒤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도덕경' '장자' 등 육경(六經)의 글은 그 뜻이 깊고 심원(深遠)하여 그 본뜻은 흐트러뜨릴 수 없는 것인데도 , 후대의 유학자들이 제 나름대로 훼손하였음으로 이를 바로잡아 공맹의 본지(本旨)를 밝혀야 한다는 뜻에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였는데 이 또한 그를 이단시 하는 유생들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리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서계 박세당 연보
__연도__________주요사항_____
1629(인조7) 8.19 부친 박정(朴炡)의 임지 남원부(南原府) 관아에서 출생
1632. 6월 부친 弘文館 副提學 충숙공(忠肅公) 박정(朴炡) 병사 (4세)
1639 병자호란으로 가족과 함께 원주(原州),청풍(淸風)안동(安東) 등지로 피난생활 (8세)
1639 중형 박세견(朴世堅)에게 수학 (11세)
1642 고모부 정사무(鄭思武)에게 수학 (14세)
1645 의령남씨 남일성(南一星)의 딸과 혼인 (17세)
1648 중형 박세견의 임지인 흡곡으로 가며 동행습낭(東行拾囊)을 저술. 장자 태유(泰維) 출생 (20세)
1649 어머니 남원윤씨(南原尹氏) 별세 (21세)
1654 2자 태보(泰輔) 출생(26세)
1657 중형 박세견(朴世堅)의 임지인 청풍으로 가며 동호록(東湖錄)을 저술 (29세)
1660(현종1) 증광 문과에서 장원으로 합격, 관직생활 시작 (32세)
1664 병조좌랑, 홍문관교리 역임. 공의(公義)사의(私義) 논쟁에서 서필원을 옹호함 (36세)
1665 11월 문례관(問禮官)으로 의주에 다녀옴 (37세)
1666 서울 양덕방(陽德坊)에 거주를 마련함. 6월 부인 의령남씨 사망. 8월 북평사에 임명되어 경성으로 가며 북정록(北征錄)을 지음 (38세)
1667 수찬, 부교리, 교리를 역임. 광주정씨 정시무(鄭時武)의 딸과 혼인.(39세)
1668 정월. 벼슬을 버리고 양주 수락산 석천동(石泉洞)에 은거함. 10월 성절사 사행시 사연록(使燕錄),연행일기(燕行日記)를 저술 (40세)
1669 3월 연행을 마치고 석천으로 돌아옴 (41세)
1670 이조좌랑등에 임명 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음.8월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1년간 재임 (42세)
1671 8월 헌납에 임명되었으나 석천으로 돌아옴 (43세)
1672 수찬, 사간원사간, 홍문과부응교등에 임명됨 (44세)
1673 3자 태한(泰翰) 출생. 10월 병을 핑계로 물러나 석천동으로 돌아옴 (45세).
1674 사간, 사성, 보덕, 집의에 임명 (46세)
1675(숙종1) 응교, 집의에 임명됨 (47세)
1677 수찬, 응교, 집의, 사간, 교리에 임명됨. 10월 2자 태보가 선천으로 귀양감 (49세).
1678 사간, 밀양부사, 집의 교리에 임명됨. 부인 광주정씨 사망 (50세).
1679 관란정(觀瀾亭), 궤산정을 짓고 강학함 (51세)
1680 고신선곡(古神仙曲)을 저술. 대학사변록(大學思辯錄)을 저술 (52세)
1681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주(註)를 닮(新註道德經) (53세)
1682 장자(莊子) 주해 (54세)
1687 中庸思辨錄 저술 (59세)
1688 論語思辨錄 저술 (60세)
1689 孟子思辨錄 저술 (61세)
1691 尙書思辨錄 저술 (63세)
1693 건강악화, 詩經註解 중단 (65세)
1703 李景奭 신도비문 찬술, 노론으로부터 탄핵 유배령 내림. 고령과 노환으로 유배집행 정지. 8월 21일 석천동(현 의정부시 장암동)에서 별세 (75세)
1722 文節이라는 시호 내려짐.
1722 시호 文貞으로 다시 내려 짐
[출처]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작성자 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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