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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서 발견한 선조들의 지혜_ 借景
한규설 대감가 안채
족자 (1)
글˚임석재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창 스스로 풍경이 되다
창과 문은 액자만 만들지 않는다. 스스로 풍경요소가 되기도 한다. 창이 특히 그렇다. 미닫이창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을 때가 대표적인 경우다. 문짝이 창틀 안쪽으로 밀고 들어와 풍경을 가릴 경우 이 부분을 액자로 볼지 풍경요소로 볼지의 문제가 생긴다. 열쇠는 창호지가 쥐고 있다. 창호지가 빛을 받아 반투명 막이 되고 창살문양이 드러나면 창은 액자로만 머물지 못하고 그 자체가 풍경요소가 된다. 마치 두 장의 풍경을 겹쳐놓은 것처럼 보인다.
창이 밀고 들어오는 정도와 방향에 따라 풍경작용의 분위기는 달라진다. 그 정도가 충분하지 않을 때에는 양쪽으로 분산되는 것보다 한쪽으로 몰아주는 편이 낫다. 한쪽은 닫아놓고 다른 한쪽만 여는 경우다. 이때는 창 스스로 풍경이 되는 장면이 하나만 만들어지기 때문에 바깥 풍경요소와 일대일 대응이 일어난다. 바깥 풍경요소가 자연물일 때에는 언뜻 보기에 인공요소인 창과 대립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한옥 특유의 어울림이 그만큼 강하게 나타난다.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큰 장면 두 개가 어울리기 때문이다.
수애당 사랑채
‘창 스스로 풍경이 되다’는 창이 풍경에 틀 짜기를 가하고 풍경을 재단하는 일을 하다 풍경에 취해 스스로 풍경이 되어버린 형국이다. 창 스스로가 하나의 풍경요소, 즉 인공적 풍경요소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창살문양과 창호지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창살문양은 창을 풍경요소로 둔갑시키는 일차적 역할을 한다. 문양 자체가 강한 조형형식을 띠면서 액자 이상의 기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액자의 기능은 틀 짜기를 통한 풍경장면의 정리가 기본인데 이것을 넘어서 풍경요소의 기능인 조형 형식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창호지 - 창살문양에 감성을 실어 감상 대상으로 만들다
창살문양이 풍경요소가 되기 위해서는 정리 기능 같은 형식미를 발동하는 주체에서 벗어나 감상의 대상으로 변모해야 한다. 감상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창 혹은 창살문양이 하나의 ‘보기 좋은 장면’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마음에 감흥이 일어나는 감성작용이 실려야 되는데 이것을 해주는 것이 창호지다. 창호지는 중성적 건축형식인 창살문양을 마음의 감성작용에 대응시켜 심미 요소로 둔갑시킨다. 인공 형식미에 온기를 실어 생활 속 일상가치를 상징하게 만든다.
창호지는 반투명이기 때문에 빛을 받으면 창살문양의 인공 조형성을 잘 드러낸다. 불투명하면 벽의 연장으로 읽힐 뿐 스스로 풍경요소로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풍경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유리처럼 투명하면 바깥 풍경요소 위에 셀로판지를 붙여놓은 것처럼 보일 뿐 스스로 조형 형식을 갖추지 못한다. 창살문양은 풍경요소가 되지 못하고 바깥 풍경요소 위에 묻은 얼룩처럼 느껴진다. 풍경이 되기에는 과하다. 반투명인 상태에서 창살문양은 온전히 스스로 풍경이 될 수 있다. 창살문양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딱 적당한 상태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제 모습을 드러내면서 바깥의 바깥 풍경요소 위에 겹쳐지지 않고 병렬을 이룸으로써 스스로 풍경이 될 수 있다.
하루 시간의 흐름, 날씨, 계절 등이 기준이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해보자. 창살문양의 풍경작용은 먼동의 청회색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인공 조형형식을 드러내면서 하루 일과의 시작을 알린다. 창살문양이 갖는 질서정리의 상징성을 깨우쳐 인간 활동의 의무와 의미를 알린다. 어스름 속에서 창살문양의 인공 조형형식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색조가 하필 청회색이다. 밤의 색 회색에서 빛의 색 청색으로의 전이를 통해 박동을 걸어 생명을 깨운다. 창은 스스로 풍경이 되면서 생명작용의 잉태를 선물한다.
날이 맑아 대낮에 직사광선을 받으면 창호지는 뽀얀 우윳빛으로 밝게 빛난다. 창과 문양은 자신에 차 풍경요소가 된다. 창의 인공성은 확신을 심어준다. 활기차게 하루 일과를 진행할 수 있다. 창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햇빛을 선사하는데 그 방식이 직접적이지 않고 은유적이고 간접적이다. ‘뽀얀 우윳빛’이라는 방식을 통해서다. 이 말은 햇빛이 인공 조형형식을 통해 인공화되었다는 의미로서 창 스스로 풍경이 되게 하는 일차적 조건이기도 하다.
‘뽀얀 우윳빛’을 볼 때 일어나는 감성작용이 중요하다. 나는 이런 창호지를 볼 때면 어릴 적 안기던 어머니 젖무덤이 생각나 견딜 수가 없다. 어머니의 속살 색이다. 이런 속살 색을 만들어내는 맑은 대낮의 햇빛은 일 년 중, 하루 중 생명작용이 가장 활발할 때의 자연 상태다. 생명작용의 절정을 상징한다. 어머니의 젖무덤과 속살도 젖먹이를 기른다는 점에서 이에 뒤지지 않는 생명작용의 상징성을 갖는다. 모태와 모성의 상징성이다. 창호지란 결국 생명작용의 시작이자 끝인 햇빛을 모태와 모성과 일치시켜 상징해내는 작용을 한다. 창은 스스로 풍경이 되면서 어머니 속살에 대한 상징적 기억을 선물로 준다.
하루 일과가 끝날 때쯤 창살문양은 석양의 붉은 색으로 변한다. 휴식을 준비하는 마감과 차분함을 상징한다. 흐린 날의 분위기는 또 다르다. 창호지에 드리우는 중후한 회색은 마음을 침착하게 한곳에 모을 수 있게 해준다. 창의 풍경작용은 이런 다양한 것들을 해준다. 다양성은 창호지가 반투명 재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며 창이 스스로 풍경이 되는 데 빠져서는 안 되는 요소다.
관가정 사랑채
‘풍경 속 풍경’과 ‘액자 속 액자’
‘창 스스로 풍경이 되다’를 이중 풍경작용, 즉 ‘풍경 속 풍경’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자경중첩보다는 차경중첩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바깥 풍경요소가 자연물이면서 창이 양쪽에서 밀고 들어오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먼저 창틀 속에 나무나 꽃이 한 그루 자리 잡아 한 폭의 풍경화가 만들어진다. 이것과 별도로 창살문양이 또 하나의 풍경을 형성한다. 바깥 풍경화 하나에 창살문양의 풍경화가 하나 더 생겨 중첩되는 상황이다. 창살문양의 풍경 속에 바깥 풍경화가 들어 있는 형국으로 읽힌다. 풍경 속에 또 하나의 풍경이 들어 있는 이중 풍경작용, 즉 ‘풍경 속 풍경’이다.
창이 두 겹 겹치는 중첩은 ‘풍경 속 풍경’을 만들기에 좋은 조건이 될 수 있다. 방 밖에서 방 속을 관통해 반대편 창 너머 풍경을 보는 경우와 대청 뒷마당에서 뒤창을 통해 대청을 가로질러 앞마당을 보는 경우다. 액자가 두 겹이 되기 때문에 풍경 속에 풍경이 담기는 중첩성이 배가된다. 세 겹 중첩, 심지어 네 겹 중첩으로까지 발전하는 수도 있다. ‘바깥 풍경-바깥 창-방-내 쪽 창’으로 구성요소의 켜와 겹 수가 늘어난다.
‘액자 속 액자’에서 겹 수가 많아지면 중첩을 넘어 콜라주와 바로크로 넘어간다. 중첩이 지나쳐 분산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경우가 분기점이다. 한옥의 구조로 볼 때 이런 현상이 잘 발생하는 지점이 따로 있다. 공간 켜가 여러 개 겹쳐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 창을 통해 본 바깥 풍경에 문이 있어 그 문이 액자 겹 수를 하나 더 늘리는 경우가 좋은 예다. 대청 뒷마당에서 뒤창을 통해 앞을 볼 때 안대문이나 솟을대문이 있고 그 문 속에 풍경이 하나 더 들어 있는 경우가 좋은 예다. 안채의 ‘ㅁ’자형 구도에서 부엌이 같은 축 위에 있을 때 한쪽 부엌 밖에서 문을 통해 반대편 부엌을 보면 네 개의 문이 겹쳐 보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옥에서 발견한 선조들의 지혜_ 借景 족자 (2)
액자가 독립적 조형세계를 이루다
액자가 별도로 독립적 조형형식을 갖는 경우가 있는데 족자가 그것이다. 스스로 풍경이 된 창살문양을 풍경요소로 보지 않고 액자로 볼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족자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한국화의 족자에서는 그림 옆에 여백을 두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에 별도로 문양을 넣거나 연하게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액자의 틀을 면적을 갖는 여백으로 키운 뒤 그림과 별도의 예술세계를 하나 더 만든 셈이다. 한옥의 풍경작용에서 족자 개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액자가 일정한 크기와 면적을 가져야 되는 것과 독립적 조형형식을 가져야 되는 것이다.
창살문양만으로는 족자가 된다고 해도 약할 수 있다. 문양의 종류가 한 가지로 단순할 뿐 아니라 창호지의 반투명성은 감성적 힘은 강하지만 조형적 독립성은 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 이상의 건물 골격이 가세하면 확실히 족자가 된다.
관가정 사랑채를 보자. 건물 골격은 풍경요소와 완전히 분리되기 때문에 풍경이 아닌 별도의 조형세계로 읽힌다. 이때 건물 골격은 액자가 커지면서 특별한 인공형식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족자에 해당되는 상황이다. 창은 건물 골격의 일부로 편입되어 하나의 큰 족자를 짜기도 하고 독자적으로 남아 별도의 족자를 형성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족자가 이중이 되는 셈이다. 혹은 풍경요소로 남아 하나의 족자 속에 이중 풍경을 담은 형국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관가정 사랑채
풍경과 조화롭게 어울리다
그렇다면 한옥은 왜 족자작용이 일어나도록 만들어졌을까. 족자작용은 건축에서는 당연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실내에서 창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바깥 경치를 내다보면 족자작용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기초적 조건은 갖춘 셈이다. 이렇게만 하면 모든 집에서 족자작용이 일어난다. 그러나 한옥에서의 족자작용은 당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훨씬 의도적이다. 풍경작용이라는 큰 의도의 일환으로 움직이는 것이 그렇고 족자에 해당되는 부분을 대부분 노출시켜 바깥 풍경과 어울리게 했기 때문이다.
족자에 해당되는 면적만 확보된다고 족자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이 독립적 조형세계를 이루어야 하며 바깥의 풍경요소와 일정한 어울림을 이루어야 한다. 한옥에서는 이런 의도가 명확히 읽힌다. 실제로 대부분의 한옥 한 채에서도 수많은 지점에서 족자작용이 수없이 일어난다. 특별한 의도가 없었으면 이렇게 되기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특별한 의도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바깥 풍경과의 조화로운 어울림’을 위해서다. 집과 풍경, 사람과 자연, 안과 밖 등 흔히 이항대립으로 인식되고 있는 관계들 사이에 조화로운 어울림을 얻어내기 위한 목적에서 앞과 같은 족자작용이 일어나게 했다는 뜻이다.
이런 어울림은 족자와 바깥 풍경 사이의 조화를 바탕으로 한다. 한국화에서도 족자의 역할이 단순히 그림을 물리적 틀로 보조하는 데 있지 않고 그림과 일정한 심미적, 예술적 어울림을 얻어내는 데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풍경요소가 수목과 꽃일 경우 족자의 인공 구조와 어울릴 수 있는 근거는 동양정신을 대표하는 자연성 혹은 자연 친화성이다. 자연과 인공을 대립 개념이 아닌 조화 개념으로 본 동양정신의 발로다. 이 경우도 족자의 종류에 따라 문과 문 외의 건물 골조,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문일 경우 창살문양을 통해 자연과의 조화를 꾀한다. 창살문양은 주역의 궤를 상징하는데 주역의 궤란 것이 본래 자연현상을 인공요소로 법칙화한 것이다. 따라서 창살문양은 강한 규칙성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해석하고 자연과 소통하려는 입장을 기본 배경으로 갖는다. 소통은 곧 어울리고 싶어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런 해석 차원 이외에 시각적으로도 자연풍경과 잘 어울린다. 활짝 열어젖힌 문 한 장, 혹은 반쯤 열어둔 문 위에 창살문양을 걸쳐놓은 모습은 수목과 꽃 같은 자연풍경과 잘 어울린다. 이런 장면은 족자에 수묵 풍경화 한 장 걸어놓은 장면과 동의어다. 한국의 전통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도상이다.
문서화(文書畵)를 이루다
족자작용을 통해 문서화를 이룰 수 있다. 문서화는 한국 전통문화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기본 매개체다. ‘문(文)’이란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인간의 생각으로 정리해서 질서로 형식화한 체계다. 족자작용에서는 창살문양, 기둥, 보, 서까래 등 액자의 인공형식이 갖는 정리 기능이 여기에 해당된다. ‘화(畵)’란 감성을 풍요롭게 해주는 서정적, 정서적 감상행위다. 족자작용에 나타난 풍경작용 자체가 여기에 해당된다. ‘서(書)’란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표현하고 소통하는 수단이다. 족자작용에서는 풍경과 하나 되는 쌍방향 교류방식이 여기에 해당된다. 글씨와 같은 도구적, 기능적 형식보다는 주변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려는 심리적 형식에 해당된다. 이처럼 족자작용을 통해 한옥은 문서화에 해당되는 건축적 형식을 갖추게 된다. 문서화 기능이 모두 집에 들어 있게 되는 것이다.
정여창 고택 사랑채
문서화는 기본적으로 한옥에서 수행되는 활동 전반을 담당한 기능적 도구였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용자의 마음에 부합되고 감성을 어루만져주는 심리적 작용이었다는 점이다. 한옥의 사랑채는 생활공간인 동시에 집무실도 겸했기 때문에 요구되는 기능도 다양했다. 그뿐 아니라 이에 수반되는 심리적 작용도 다양해야 했다. 족자작용이 갖는 문서화의 기능은 이것을 상당 부분 만족시켜주었다. 그 비밀은 다양한 풍경작용을 통해 마음과 감성의 변화에 합당한 다양한 장면을 제시하는 데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조형 환경이 자신의 마음과 감성 상태와 합치될 때 행복을 느끼며 집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는다.
이때 ‘합치’란 일차적으로는 ‘동일화’를 뜻하지만 확장하면 ‘반대적 중화작용을 포함한 가변 능력’을 뜻한다. 예를 들어 심리상태가 감상적이 될 때 집이 할 수 있는 작용은 두 방향이다. 하나는 같이 동조하며 감상적이 되어 사람의 심리상태를 보강하는 것이다. 향단이 좋은 예다. 워낙 신비롭고 은밀한 공간의 대명사이기도 하려니와 침잠하고 싶을 때 분위기를 맞추기에 제격이다. 이 경우는 문서화 가운데 ‘화’에 해당되는 예술적 감성상태를 즐기면서 난이라도 치고 시조라도 한 수 짓고 싶을 때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그 반대로 밝고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 사람을 감상적 상태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문서화 가운데 ‘문’에 해당되는 이성적 활동을 할 때 필요하다. 마음이 지나치게 늘어져 하는 일에 방해가 될 때 기분전환의 반전이 필요한데 집이 이것을 해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한옥의 족자작용은 집을 통해 심리적 위안과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족자작용은 분명 집의 분위기를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 창 조작에 따라 분위기를 다양하게 바꿀 수 있다. 한 지점에서 움직이지 않고 같은 장면을 본 것인데 창만 다르게 조작함으로써 다양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좋은 예에 해당된다. 문짝의 위치와 문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좌우 양쪽에서 같은 짝의 문을 닫아서 같은 문양을 보이게 할 경우 단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때 문이 열리는 정도 역시 좌우가 같으면 가장 단정하고 반듯한 분위기를 준다. 열리는 정도가 다르면 좀 흐트러진 분위기가 된다. 좌우가 다른 문일 경우, 즉 다른 문양이 보일 경우 분위기는 분명히 더 흐트러진다. 가장 흐트러진 경우는 좌우가 다른 창이면서 열린 정도도 다른 경우이다.
바깥 자연은 하루 중 시각 따라, 일 년 중에는 계절 따라 또 철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변화하고 순환한다. 이 모든 것이 족자 속 그림이 된다. 마치 화가 여럿을 집 안에 두고 수시로 그림을 그려 바꿔 단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던가.
출처 : Korea Cultural Heritage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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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